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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시댁과 친정

여러분들의 명절은 어떠신가요/엽편소설

by 그래

“여보? 몇 시쯤 출발할 거야?”

“글쎄. 새벽에는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른 저녁부터 여행 가방을 꺼내 옷과 써야 할 용품들을 정리한다고 부산하다. 매년 명절 연휴가 되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짐을 정리해 트렁크에 싣고, 주차장이나 다름없는 고속도로를 타고 평소 같으면 5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10시간에 걸쳐 시댁으로 향한다.

어디 여자가 가기만 하면 끝나는 건가? 가족들 먹일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고작 이틀 있는 시간도 며칠 노동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아파져 온다. 명절 당일 제사를 지내고 나서 늦은 저녁, 겨우 친정으로 가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으면 왜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벌써 고개가 숙여진다.


‘요번에는 꼭 일찍 친정에 갈 거야.’


매년 나만 손해 보듯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꼭 일찍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보, 이번엔 좀 일찍 엄마 집에 가면 안 돼?”

“응?”


내 마음은 조금도 모르고, 마치 뚱딴지같은 소리를 듣는다는 한마디에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화를 누르고 다시 말했다.

“맨날 저녁 늦게나 명절 다음날 갔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점심 때쯤에 가자고. 그래야 엄마와 얘기도 하고 그러지. 당신은 우리 집 가면 잠만 겨우 자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출발하잖아.”

말하는 동안 아무 반응이 없는 그로 인해 결국 언성이 올라가고 말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눈을 떴지만, 자기들도 이제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알았어.”

“대답만 하지 말고…. 이번엔 약속 지켜. 안 그럼, 나도 TV에서 나온 며느라기처럼 중간에 일어나서 애들 데리고 그냥 나온다.”

“알았다니까.”


정말 알아들은 것일까? 시댁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었다. 왜 이리 늦었냐며 타박하는 시어머니는 결혼한 지 16년 동안 변함이 없다.

“이번에도 차가 막혔어?”

“죄송해요. 어머니. 화장실도 안 가고 왔는데, 서울을 빠져나오는 것만 해도 힘들었거든요.”

“뭐라고? 운전하는 남편 생각해서 중간중간 쉬어줘야지. 너도 생각이 왜 그렇게 짧니?”

작년엔 집에서 기다리는 자신을 생각에 빨리빨리 오라 성화를 부르더니 이번에는 생각 없이 자기 아들 고생 시키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몰려드는 친척들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어서 앉아서 새우껍질부터 까. 그거 다하고, 파 다듬고…, 너도 결혼한 지 그 정도면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니니?”


나 혼자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무슨 타박인지 모르겠다.

시어머니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들을 낳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싫어하셨고, 남편 부려 먹으면서 집에서 살림만 한다고 싫어했다. 반면 동서는 예뻐한다. 아들만 셋을 낳았고, 맞벌이하고 있었다. 현재 어머니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면서 어머니가 동서의 아이들을 봐주고 있었다.

“동서는 언제 온대요?”

“일하는 사람이 바쁘지. 오늘도 회사에 일 있다고 하더라.”

‘거짓말.’


동서의 거짓말은 매번 명절 때마다 이어졌다. 동서는 일하고 왔다고 하면서 저녁 늦게 왔었다. 그때마다 은은하게 퍼지는 술 냄새. 직원들과 한잔했다는 거짓말은 시어머니에게 매년 통하는 거짓말이었다.

요즘 세상에 맏이라고 꼭 아들을 낳아야 하는 법이 어디 있냐 말인가? 한 회사의 대표로 승승장구하는 남편 급여면 두 아이 키우면서 사는 데, 아무 지장도 없다. 게다가 남편이 원해서 쉬고 있는 것이지 내 의지 따위 없는 휴직상태였다.


‘저도 일하고 싶다고요.’

남편은 내가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돈은 자기가 벌 테니 나한텐 집에서 쉬길 권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이면서 매번 시어머니의 이런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뭐 하니?”

“네? 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기대를 저버리고 못 들은 척 아버님과 바둑을 두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 앞치마를 둘렀다. 저녁 늦게까지 전을 뒤집었다. 고기를 볶고, 국을 끓이고, 밥도 몇 번을 했는지 또 상은 차리고 치우기를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밤 12시, 드디어 동서가 왔다.


“형님, 죄송해요. 회식이 늦게 끝나서.”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는 동서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그건 나뿐이다. 아무도 동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일하고 온다고 고생했다며 들어가 쉬길 권했다.


“하아.”

나도 모르고 흘러나오는 한숨. 내일은 일찍 갈 수 있을 테니…. 그 희망으로 하루를 억지로 버텼다. 드디어 다음 날 점심.


“여보!”


남편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나 그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혼 16년이었다. 부엌데기 같은 며느리 생활 지긋지긋했다. 내 엄마 집에 가는 것인데, 그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분명히 말했다. 당신 이번에도 약속 안 지키면….”


그의 옆에서 소곤소곤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이야기가 끝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우리 먼저 출발할게요.”

“어디 가는데?”

“장모님 기다리시니까 가봐야죠.”

“점심이라도 먹고 가지.”

“상 차리고 기다리고 있으실 테니 갈게요. 여보, 준비해.”


16년 만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 저리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은 말이다. 행여 어머니가 막고 나설까 서둘러 아이들을 재촉하고 현관 앞에 섰다.


“엄마, 다음부터는 우리 점심 때쯤 갈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가자. 여보.”


어안이 벙벙한 시어머니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그가 처음으로 내 손을 먼저 잡았다.

“당신 변했다.”

“뭐가?”

“오늘 당신 멋있었다고.”

“그래?”


친정에 도착했을 때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이미 식어버린 상 앞에서 엄마는 느릿한 동작으로 상을 치우고 있었다.


“장모님, 저희 왔어요.”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왔던 그때처럼 씩씩한 남편의 목소리에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년 와서 잠만 자고 가버리는 딸을 보면서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나도 엄마처럼 엄마가 된 후에야 알게 된 엄마의 서운함과 쓸쓸함과 말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었다.


“자네, 무슨 일 있는가? 오늘 올라가야 해?”


괜히 좋으면서 기대하지 않으려 덧붙인 말에 가슴이 찌르르 아파져 왔다. 그 말이 남편의 마음도 움직였을까? 대답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뇨. 올해부터는 아버님 제사도 지내셔야 하는데, 힘드실까, 봐 일찍 왔습니다. 오늘 안 가요! 모레 갑니다. 이번엔 휴가를 좀 길게 잡았거든요.”


그랬다. 지난해 겨울,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것도 명절 당일의 말이다. 엄마 힘들지 말라고 그러신 건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날 다른 별로 가시고 말았다.

“고맙네.”


첫 번째 제사를 위해 남편은 상복을 준비했고, 나는 아버지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하루를 온종일 보내는지 좋기만 했다.

명절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말없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 아버지 제사도 지낼 수 있었고 혼자 외로웠을 우리 엄마,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남편은 쑥스러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전달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남편은 명절에 한 약속을 지켰다. 처음엔 노발대발하던 시어머니도 남편의 단호한 행동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네 남편 꼬드겼지?”

몇 번의 모진 말이 나에게 닿았지만, 예전과 달리 남편은 나의 손을 잡고 말해주었다.

“아니에요. 제가 그러자고 했으니 그런 말 그만 해요. 아버님 제사도 있어서 그냥 일찍 가는 거예요. 이제껏 이 사람 열심히 했잖아요.”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 알고 있었다. 순간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조용히 나를 안아주었고, 머쓱해진 시어머님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굳이 챙겨주지도 않았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아들 내외를 막지도 않았다.

남편의 한마디에 그동안 명절때마다 받은 서러움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작성일 : 2023년 12월 어느 날(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판사 : 포레스트웨일
구매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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