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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시

by 그래

몸에 생긴 혹은 누구든 알아봐 줄 수 있다. 떼어낸 후 상처 또한 선명하게 남아 다시 똑같은 순간이 오면 상처를 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그런 거다. 반면 마음의 혹은 어떨까?


마음에 혹이 자라면 거대하게 자리를 잡은 후에나 알 수 있다. 아프지만, 아무도 모른다. 오직 혼자 감내해야 하는 아픔이고, 불편이다. 또 끈질긴 생명력은 쉽사리 떼어내기도 힘들다. 눈에 보이는 혹과 달리 수술도 못 한다. 오로지 나의 의지만이 떼어낼 수 있는 극한의 고통과 인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고도 뒤늦게 깨달을 때가 많다.


나는 늘 사랑과 관심이 고팠지도 모르겠다. 매번 상처만 남는 새 친구 사귀기는 또 이렇게 막을 내렸다. 큰 상처로 괴로워했으면서도 또 손을 내밀고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필요한 사람, 이용하려는 약탈자를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착함이 불러오는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요즘 '천국보다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며 지옥저울에 나는 과연 몇이나 나올지 생각해 보았다. 어중간한 착함은 선행으로 이어지는 결과만큼 악행으로 남아버리는 결과도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선한 사람이고 싶은 착한 아이 증후군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선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게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욕심을 낸다.


나는 어중간하게 착한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매번 깊은 인간관계로 마음에 수십 개에 혹을 만들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괴롭다. 그만 나를 놓아주고 싶어도 또 그러지 못하는 어중간한 자유로운 영혼인 듯하다. 한심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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