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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65

기억이란

by 노용헌

“이 시간 보다 더 강하고, 더 중요한 실체적 실질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속되는 시간이란 단지 한 순간을 대신하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순간 일뿐이라면 현재밖에 없을 것이고, 현재에 이르는 과거의 연장도, 진화도, 구체적인 지속도 없을 것이다.

지속이란 과거가 미래를 갉아먹고 부풀어 나가면서 전진하는 연속적인 진전이다. 과거가 끊임없이 부풀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과거는 또한 한없이 보존된다.


기억이란, 우리가 이미 증명하려고 노력한 바 있지만, 추억을 서랍 속에 정리해 넣거나 장부에 기록해 두는 기능은 아니다. 장부도 없고, 서랍도 없으며, 엄격히 말해서 이 경우 기능이란 것조차도 없다.

왜냐하면 기능이란 자기가 원할 때나 가능할 때, 간헐적으로 발휘되는데, 그에 비하여 과거가 과거 위에 쌓이는 일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는 자동적으로 자력에 의해 보존된다. 모든 과거가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따르고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던 것이 그 과거에 모여 있고, 그 과거에 합류할 현재 위에 그 과거의 일들이 기대어 있으며, 그 현재는 과거를 의식 속에 받아들이지 않고 밖에 두려고 의식의 문을 꽉 누르고 있다. 뇌기관은 아주 정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과거의 대 부분을 무의식으로 밀어 넣고, 현재 상황을 밝혀주는 성질의 과거만을 의식에 끌어들인다. 그렇게 해서 준비 중인 행동을 도울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유효한 작업을 제공할 수 있는 과거만 의식에 받아들인다. 가장 호사스런 추억들은 기껏해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들어온다. 이런 추억들은 무의식이 보낸 사자로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따라 다니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러나 설령 우리가 그것들을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과거가 현재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막연하게나마 느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후의 역사, 심지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까지의 역사까지의 축적이다. 물론 우리가 사고하는 데에는 우리 과거의 일부밖에 개입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욕구하고 위지하고 활동하는 데에는 우리의 모든 과거와 함께 타고난 영혼의 성향조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교적 적은 부분만이 겉으로 드러날지 모르지만, 우 리의 과거는 그 추진력으로 인하여 경향이라는 모습을 띄고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과거는 이렇게 살아남기 때문에 의식이 같은 상태를 두 번 반복할 수는 없다. (...) 이리하여 우리의 인격은 끊임없이 성장하며 완숙해진다.”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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