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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68

앎의 낭비

by 노용헌

모든 지식은 쓰레기다. 물질대사로 발생하는 노폐물이다. 어쨌든 이는 교육기관, 기업, 공공기관 등 위로부터 도입된 지식 생산 모델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지식 생산 모델에서는 대량의 데이터가 수집되어 공정에 ‘입력’되면 기계의 이해와 처리를 거쳐 지식이라는 결괏값이 ‘출력’된다. 이 배출물 [저자는 여기에서 ‘배설물’이라는 뜻의 영단어 excrement를 씀으로써 지식 생산 모델에서 생산되는 지식을 비판하고 있다.]은 지식경제에서 상품성이 높은 통화다. 그 공정에서 인간은 기계가 원활히 돌아가도록 유지, 보수하는 오퍼레이터 또는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적으로 인간의 존재와 행위는 기계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범위를 넘어 결괏값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입력과 출력 중간에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결괏값이 쌓일 때마다 배출된 지식 더미는 가차 없이 부풀어 오르고, 정작 삶 자체는 주변부로 내몰려 산업적 규모의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누적된 쓰레기를 헤집는 운명에 처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계적 공정이 아닌 사람이 앎을 생산하는 대안 세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물론 그 세계의 사람들도 계속 ‘데이터’라는 말을 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데이터를 문자 그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데이터data는 ‘주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dare에서 파생된 단어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으로 받아들여서, 살면서 알아간다. 세계가 제공하지 않는 것을 애써 추출하려고 물리력이나 꼼수를 쓰기보다는 세계가 내준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음식에서 영양을 얻듯이 세계가 제공한 것을 자양분으로 삼고 이를 꾸준히 소화한다. 소화는 무엇보다도 생명과 성장의 과정이다. 그들에게 앎을 생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앎을 지닌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과정이 어느 정도의 마찰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성장에 보탬이 되지는 않으며 일부는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빠져나간다. 원재료를 다듬는 와중에 먼저, 톱밥, 부스러기, 자투리 등의 형태로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는 공예는 당연히 없다. 지성을 연마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대안 세계에서, 이렇게 배출된 쓰레기 자체는 앎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과정으로 다시 들어갈 때 비로소 앎이 된다.

어떤 생명체도 영원할 수 없으며 홀로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다. 생명의 연속성(그리고 그에 따른 앎의 연속성)은 모든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낳고, 그 생명체가 세대를 이어 더 많은 생명체를 낳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길러내는 역할을 해야만 실현 가능하다. 숲을 이루는 나무든, 무리 짓는 짐승이든, 공동체를 만드는 인간이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앎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사회 생활은 하나의 기나긴 조응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이는 여러 조응이 동시에 서로를 엮고 복잡하게 뒤얽힌 그물망이다. 조응 들은 개울의 소용돌이처럼 여기저기서 굽이치며 여러 주제로 나아가고 있으며,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모든 조응은 계속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둘째, 조응은 열려 있다. 정해진 목적지나 결론을 향하지 않으며 모든 말과 행위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셋째, 조응은 대화적이다. 조응은 한 개체가 아니라 여러 참여자 사이에서, 그 와중에 이뤄진다. 이러한 대화적 참여로부터 앎이 끊임없이 샘솟는다. 조응한다는 것은 사유하기(thinking)가 사고(thought)의 형태로 자리잡으려는 바로 그 지점에 계속 있는(ever-present) 것이다. 아이디어가 흐름에 휩쓸려 영영 사라지지 않도록, 막 부글부글 발효되는 순간에 포착하는 것이다.


-팀 잉골드, 조응, P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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