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
그사이 앙리는 사진기자가 되었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 직업을 샤를람은 경멸조로 '쌈닭 사진가'라 부른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근동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싸움질을 어쩌겠다는 걸까? 동족상잔에 빠져 있는 그 먼 동방의 나라들과 그가 대체 뭐가 '가까워서'? 분규와 살상이라면 유럽도 넌더리가 날만큼 겪지 않았던가. 아무튼 샤를람은 살육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제일차세계대전이 그의 청소년기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십 년 후에 닥친 제이차세계대전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내며 더한층 암울한 그림자로 옥죄어왔고 그다음에는 식민지들의 독립전쟁이 확산되었다. 저마다 제 몫의 독립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리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편이 좋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나자빠져 죽는지 가까이 가서 볼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결과는 언제나 매한가지다. 도살장의 악취, 그런데 앙리가 감히 그것들을 증언하겠다니 얼마나 가소로운 노릇인가! 각자의 증언은 상충하거나 모순되며, 전쟁으로 전쟁을 몰아내다보면 결국 모든 전쟁은 매한가지가 되고 만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학살에 직접 연루된 이들을 대신해 증언할 수 없다. 희생자와 살인자의 위치가 왕왕 바뀌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 둘은 뒤바뀔 수 있다.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집단을 반으로 싹둑 잘라 울타리 양쪽에 세워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인간들이 존재할 따름이며, 이런저런 상황이 졸지에 그들을 꽁꽁 얼어붙게 하거나 미친 듯한 열광에 빠뜨릴 수도 있다. 오늘 고문당하는 사람이라도 상황이 바뀌기 무섭게 고문자가 될 수 있는 노릇이고, 어제 천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전능한 형리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불의에 항의한다. 사람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온전한 방종을 허용해보라. 순식간에 대다수가 권리를 후안무치하게 오용하고 남용할 것이다.
샤를람은 인류를 변변찮은 존재로 보며 종종 도스토예프스키가 상상해낸 대심문관을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와 인간들에게 드러내고 제시한 그 빌어먹을 자유를 통렬히 비난한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 늙은 대심문관은 냉소적이고 추악한 인간이지만, 따지고 보면 현실을 꿰뚫어보는 꽤 조리 있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는 인류가 선하지도 지적이지도 않으며,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며 자기중심적인 존재들의 집합체라는 걸 안다. 그는 침묵하는 그리스도를 꾸짖는다. "당신은 그들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하나같이 타락하고 배은망덕한 이 나약한 인류의 눈에 그 빵이 지상의 빵에 비견될 수 있을까?" 먹을 수 있고 손에 만져지는 아주 구체적인 빵을 얻기 위해 그들은 서로 질투하고 착취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빵과 재물, 영토, 섹스, 권력과 영광. 이것들이야말로 인류를 부채질하는 진정한 열정의 대상들이다. 자유란 한낱 기만이요 속임수에 불과하다. 고삐 풀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은 자가당착적인 존재다. 일단 자유를 얻고 나면 겁을 먹는다. 이 엄청난 걸 가지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 그건 지나친 노력을 요구하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다. 우선 숙고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노력으로 시작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걸머져야 하니까. "자유로운 인간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골칫거리이자 최대 관심사는 자신이 무릎 꿇을 대상을 한시바삐 찾아내는 일이다."라고 대심문관은 단언한다. 그런 다음 그는 "신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우상 앞에 엎드릴 것이다."라고 못박는다. 그렇다, 무한한 자유는 위험천만한 독이요 화약고다. 자유는 교묘한 통제와 제한이 가해졌을 때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조르주가 그토록 '속도'와 흡사해서, 조르주도 그걸 통제하지 못한 순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실비 제르맹, 숨겨진 삶, P199-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