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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88

고양이와 삶의 의미

by 노용헌

만약 고양이가 인간의 의미 추구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어리석은 짓에 대해 기꺼이 가르랑거릴 것이다. 어쩌다 주어진 고양이로서의 삶은 그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다. 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능가하는 의미를 찾지 않고는 못 견딘다.

의미 추구는 죽음의 인식에 따른 것으로, 그것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종교와 철학을 만들어냈고, 인간의 삶의 의미는 종교와 철학을 통해 인간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인간이 만드는 의미는 쉽게 부서지므로 인간은 전보다 더 큰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이야기는 계승되고,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그 자신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생각해낸 인물에 속한다.

이런 삶의 방식의 한 결과는 인간이 자기 이야기가 붕괴되는 경우에 집착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자기 삶이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또는 자기 집을 떠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삶을 비극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경험에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처 방식에는 대가가 따른다. 당신의 삶을 비극으로 생각하는 것이 삶에 의미를 부여해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당신을 슬픔 속에 가둔다.

고양이들은 끔찍한 고통을 견딜 수도 있고 그들의 삶은 갑자기 잔인하게 끝날 수도 있다. 메이오의 삶에는 다수의 참혹한 경험이 있었고, 충격적인 기억이 촉발되면 그 기억은 그에게 되돌아왔을 것이다. 가티노는 삶의 시작부터 고통스러웠고 아마 삶의 끝에도 그랬을 것이다. 두 고양이 모두 극심한 고통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둘 다 비극에 대해서는 몰랐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기쁜 삶을 살았다. 인간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인류는 그런 삶을 살기에는 너무 나약한 것일까?


-고양이 철학, 고양이와 삶의 의미, 존 그레이, 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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