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씨 인사이드> 2004년
《씨 인사이드》(Mar adentro)는 2004년 개봉한 스페인의 드라마 영화이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감독과 공동각본을 맡았다. 2004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골든 글로브상 외국어 영화상·고야상 작품상·베네치아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영화 <바다 속으로>(The Sea Inside)의 원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에세이인 동시에 시집이다. 또한 내가 영화를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와 의미를 제공한 철학적 근간이다. 주인공 라몬은 20년이 넘게 독서와 대화, 그리고 편지를 통해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으며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하겠다는 매우 확고한 목적하에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라몬은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우리를 죽음의 심연에 맞서게 하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사후 세계와 이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에 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한다.
“저 선을 넘을 수 있게 해 줘, 뛰어넘게 해 줘.”
나는 개인적으로 그 심연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은 없다. 아마 열두살 때였던가, 작은 폭포에서 뛰어내려 라몬처럼 목을 부러뜨릴 뻔 한 적은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모두는 평소에는 무의식적으로 망각하고 있던 죽음에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것이다. 라몬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죽음을 성찰하게끔 도와주고 일깨워 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P6-7)
1968년 8월 23일, 나는 어느 바닷가에서 물 속으로 다이빙을 하다가 모랫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은 몸뚱이에 머리만 붙어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말하는 영혼을 지닌 시체’가 된 것이다.
내가 동물이었더라면 주인의 판단에 따라 보다 고상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은 아마 애완동물이 전신이 마비된 채로 남은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판단해 내가 그만 삶을 마감할 수 있게 도와주었을 것이다. 퇴행 원숭이가 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른다.
의사들이 사지마비 장애인에게 ‘만성 환자’라고 판정을 내리면 정치인, 재판관, 법학자 등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그저 이 사회를 법치국가, 복지사회로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인준해 준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나라는 오히려 불행한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지마비 장애인을 만성 환자라고 하는 것보다 ‘만성적인 죽음을 앓고 있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덜 가식적이다. 나는 결코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만성적인 죽음을 앓는 자의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다. (P8-9)
1993년 4월. 나는 인간의 권리로서 안락사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토록 심한 두려움과 맹목적인 미신들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는 길을 포기하게 하려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똘똘 뭉친 것 같았다. 그들에 의하면 나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국가의 편협함과 종교가 하나의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도가 없었다. 그들은 내 삶의 천적이며 그들에게는 한 인간의 인생을 파괴한 책임이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네에게 삶의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P11)
삶이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바다로 떨어졌고 두 손으로 모랫바닥을 짚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떨어지는 관성을 저지할 수 없었다. 모랫바닥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머리가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다이빙을 할 때의 각도로는 얼굴이 먼저 닿는 게 정상이지만, 본능적인 반사 작용에 의해 머리를 앞쪽으로 숙이면서 모랫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몸을 옆으로 눕이려 했지만 물의 압력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나뭇가지를 밟았을 때 ‘뿌직’하는 소리가 났다. 기분 나쁜 작은 경련이 등골을 스쳐 온몸을 훑어 내렸다. 그게 다였다. 내 머리와 몸통의 교신은 그렇게 영원히 끊겨 버렸다. 척추 경골의 일곱 번째 뼈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
나는 헝겊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팔과 다리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몸이 아주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팔과 다리는 마치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전혀 속수무책이었다. (P18-19)
육체는 그것을 다스리는 정신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정신도 마찬가지고요. 사지마비 장애인은 육체 없는 두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장애인으로서의 삶에는 균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만 그 지옥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지요. 그렇다면 육체를 잃은 사람이 삶을 포기하려고 할까 봐 주변 사람들이 그토록 불안에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 삶에 대한 권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를테면 삶이 정치나 종교, 법률처럼 지배 계층이 그들의 생각대로 통치하면서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추상적인 행복이라고 여기는 거지요.
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체념한 채로 목숨을 연장하는 걸까요? 저는 부모의 뜻이나 교묘히 포장된 권리라는 속임수에 복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를 속이니까요. 죽고 싶지 않다고 고통을 참으면서 생명의 유한성을 부정하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는 사람들도 이해합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P27)
우리가 전체의 일부분이라면 전체와 무(無)는 같은 것입니다. 만물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하나로 엮여 있는 게 분명해요. 우주가 천체를 끌어안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천체는 별을, 태양은 지구를, 지구는 생물을, 생물은 각자의 원자를, 그리고 그 원자는 전자를 끌어안고 있지요. 결국 모든 것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중력이나 상대성 같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는 그렇게밖에 유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상당 부분이 이 사회의 지배자들에게 달려 있지요.
균형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전체가 하나예요. 심리적인 균형은 기쁨, 고통, 두려움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지배되고 이것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포옹이자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종의 중력과 같아요.
모든 생명은 고통스러울 때나 고통을 느낄 법한 상황이 발생하면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서로를 포옹해 줍니다. 물론 이것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요. 자녀와 부모가 서로를 껴안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안락사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아요. 아직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미성숙하고 사회가 부권 중심이다 보니 지배 계급이 법적, 도덕적으로 안락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딜레마입니다. 아니 솔직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P35)
난폭하고 비열한 자들이 공포심을 어떻게 이용하고 자행했는지는 인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테러 행위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죽음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공포심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통제권을 결코 잃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의사는 고통을 다스리고 싶어 하고 사제들은 죽음을 통제하고 싶어 해. 왕은 그들의 대표적인 우두머리지. 하지만 왕은 개인적인 이해 관계 때문에 법률을 따르는 거란다. 그럼 의사의 윤리관, 사제의 도덕관,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국가로부터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성인이 되었을 때 윤리관과 도덕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는 거란다. 안락사처럼 어떤 문제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의지가 학설과 법률보다 우선해야 하거든, 어느 정도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개인의 존엄성보다 여러 집단의 권력 분배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이 사회는 개인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집단의 편견과 지식에 의해 움직이니까. 죽는 방법도 마찬가지고. (P55)
“나는 죽고 싶어 하는 라몬 씨의 소망과 당신 머릿속에 가득한 삶의 방식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이 모순 때문에 슬픔에 잠기게 되는군요.”
그래요. 제 머릿속엔 삶이 있어요. 저는 삶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것은 이성적이든 비이성적이든 상관없이 삶 전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랍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나름대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이성적인 존재라 아무 쓸모없이 처참한 상태로 목숨만 부지하는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 추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저를 부끄럽게 하고 제게 커다란 굴욕만 느끼게 하니까요. 저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이성적인 개념은 여기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인색하고 욕심 많고 거만한 부류의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주장에는 뭔가 착오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의 이성적인 의지는 무시하면서 그 사람들의 삶은 보호하겠다는 모순과, 그것을 변호하려고 하는 고집 말입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삶의 모습은 매우 이성적이에요. 저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믿고 있고요. 자유는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존재가 가장 강렬하게 열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한다 해도 아직 자유롭다고 느낄 수는 있습니다.
물론 아무런 자유도 없이 그저 체념한 채로 사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전 단순히 숨을 쉬기 위해 제 몸이 최소한의 자유(움직임)도 못 느끼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최소한의 자유 없이는 어떠한 행복이니 기쁨도 느낄 수 없으니까요. (P57-58)
사람들이 왜 제가 안락사할 자유를 빼앗는지 아세요? 자유란 결국 삶 자체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몸짓이고 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뜻이잖아요. 답은 명확해요. 삶이나 인류, 또는 개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아닌, 권위의 원칙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이런 식이에요. 저를 절대로 존중해 주지 않을 겁니다. 제 이성과 의식은 다른 사람들의 의식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겠지요. 저는 단지 저를 지배하는 자들의 정치적 성향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가장 잔인하고 부도덕한 노예제의 희생양이 될 겁니다. 이들은 육체에 관한 노예제도는 폐지했을지 몰라도 노예가 자유를 누리는 것에는 훨씬 더 많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헌법의 개념이 국가 권력과 권위에 의해 개인이 고문이나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쾌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을 피하고 비참하게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P59)
제 생각은 이렇답니다.
첫째,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어야 한다(칸트).
둘째, 인간의 삶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신성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다.
셋째,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인 법규에 맞도록 행동하라(칸트).
넷째,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낫다(소크라테스).
제가 가진 장애는 저에게 자유롭지 않다는 고통을 줍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존엄성의 의미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줍니다. 누가 제게 이런 굴욕을 주는 건가요? 삶과 제가 처한 상황입니다. 신이 아니에요. 저는 제가 불구가 된 게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사회복지부의 담당 대변인이 소위 ‘안락사’에 대한 고문(顧問), 또는 권력자라는 사람들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인간은 언제 고통을 참을 수 있고 언제 참을 수 없는지 알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걸 어떻게 판단하나요?
모든 현상은 아주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라는 이성적 동물은 다른 존재를 지배하는 방법을 찾게 되자 그 지배의 범주에 자신의 자녀들도 포함시켜 그들을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로 만들었어요. 카인처럼 필요 없는 존재다 싶으면 내쫓았고요. 결국 쫓겨난 이들은 인간의 천국에서 추방된 겁니다. 그들이 바로 값싼 노동력에 희생되는 아이들이지요. 그들은 누구의 아들도 아닌 것 같아요. 심지어 신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것 같지요. 하지만 종교는 그들이 죽은 뒤에 그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을 거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지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신은 자기 뜻대로 자식들을 움직이기 위해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교활하고 권위적인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P72-73)
삶이 불공평하다고 했지요. 하지만 삶에는 도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절대 살아 있는 존재에게 불공평하지 않아요. 삶이 불공평한 진짜 이유는 누군가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에요. 끔찍한 것은 그런 방법으로 행복해진 사람들이 희생자들에게 그 고통은 받을 만한 것이라고 설득한다는 겁니다. 건강한 삶을 살면서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패배자예요.
윌마, 이제 본인이 어떤 모순에 빠져 있는지 알겠지요? 만약 당신이 당신의 부모와 사람들, 가족들, 신, 자신의 불행한 삶을 원망하여 자살한다면 당신이 원망하는 바로 그것들이 결국 당신을 죽이는 셈이 될 겁니다. 삶이 당신을 패배시킨 것이 아니라 그 잔인하고 비열한 바보들이 당신을 파괴하는 거지요. (P84)
흔히 인간은 고통을 겪으면서 참회한다고 말합니다. 위대한 독재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통해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또는 사랑하는 존재나 그 외 다른 살아 있는 존재를 통해 고통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사회가 고통에 너무 무감각해져서 사랑을 할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이 사회는 잘못에 의해서든 교활한 의도에 의해서든,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힘없는 서민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생명의 창조자가 고통을 거부하기 위해 삶을 저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그를 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순수이성에 근거한 윤리 의식만이 불합리한 현실로부터 인간과 삶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힘 있는 자의 위협에 위축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두 가지만큼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지배자의 강력한 권위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P91)
저는 라몬 삼페드로라는 사지마비 장애인입니다. 저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스페인 정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스페인의 수장이신 각하께 이렇게 공개서한을 쓰게 되었습니다.
각하, 지금 제 앞에는 헌법재판소, 제2법정, 제3지정재판부의 루이스 로페스 게라, 에우헤니오 디아스 에이밀, 훌리오 곤살레스 캄포스 재판관님이 보내신 공문이 있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안락사를 할 수 있는 물건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제 의지대로 인간답게 삶을 마감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바르셀로나 지방법원에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재판관님들이 제게 보내신 편지에는 제 청원을 각하하는 판결문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제가 제기한 소원(訴願)이 왜 거절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함께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끝낼 자유가 있기 때문에 평등의 원칙이 이런 식으로 이행(移行)될 수도 있겠지요. (P115)
개인의 의식을 권력으로 짓밟는 사람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정화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발적 행위로서의 죽음은 생명의 법칙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법칙을 파괴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옹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며 가장 윤리적이고 죄를 적게 짓는 방법은 굶어 죽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거부하는 것이 사랑이 담긴 자비와 동정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지요.
악이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의도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P128)
저는 제 선임 변호사인 호르헤 아로요 마르티네스 씨가 정식으로 청구권을 제출해 1993년 4월, 법원으로 출두했습니다. 그 자리는 제 안락사를 도와준 사람이 법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 부탁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가치를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정말 죽기를 원하는지 물어보고 서로 논의도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폐렴에서부터 카테터(동맥이나 정맥에 삽입하는 관, 혈관을 통해 심장가지 전달되며 주로 심장 질환을 진단하는 데 사용된다)를 틀어막는 것, 감염된 요도를 치료하지 않는 것,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것, 굶겨 죽이는 것도 할 수 있을뿐더러 누군가에 의해 은밀히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지껄이지요.
자발적이고 합법적인 죽음은 제외하면서 비정상적인 죽음을 수락하고 제시하는 이 바보들 사이에서 재판관들은 그저 타락한 주인의 재산을 묵묵히 지키는 충실한 관리인 노릇만 할 뿐입니다. 그들은 대중에게 법 조항을 적용시키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백히 위선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법 앞에서 재판관이 침묵을 지킨다면 그 사회에는 가치 있는 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중들이 따를 수 있는 윤리적인 법을 요구하는 것이 정의라면 재판관은 감시자보다 스승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범죄행위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어떤 행동이 무책임한가 아닌가를 판단하려면 분명한 기준과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재판관들은 정의 실현을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는 밀봉된 채로 보관되는 통조림처럼 부당한 상황과 시대착오적이고 미개한 관습을 바로 잡기보다 그것을 영속시키는 데 악용될 것입니다. (P140-141)
여성이 낙태를 결심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관점으로 미래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지요. 태어날 아기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판단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분별력이 있는 일종의 자발적인 행위 아닙니까?
자발적인 죽음을 도와주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입니다. 고통만 가득한 미래를 맞이하지 않으려는 여성의 법적 권리와 책임감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지마비 장애인의 권리와 비교해 볼 때, 그 여성보다 사지마비 장애인의 의지에 대한 법적 보호와 포용이 훨씬 더 간단하고 윤리적으로도 당연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확히 알아 두세요.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전적으로 여성의 의지가 내포된 행위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어떤 자유는 정치적으로 보장되면서 왜 다른 자유는 처벌을 받는 겁니까? 저는 이중적인 장관뿐만 아니라 안락사와 자살을 같은 개념으로 보는 엉터리 법을 개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정치 단체들을 고발합니다. (P145-146)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사람의 의지를 빼앗는 것보다 더한 폭력은 없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현실보다 더한 지옥은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택할 권리를 인정해 줄 판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보다 더한 무방비 상태는 없습니다.
제 말은 개인의 모든 권리들을 자기 손으로 포기할 자유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주어져야 하는 자유입니다.
생명이 존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 의미와 가치를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우주가 탄생한 이후로 모든 기억의 분자에 지식을 각인시키지요. 모든 존재는 교활한 도덕론자와 똑같은 지성과 용기, 지혜, 이치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보호합니다. 욕망과 의지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중에서도 이성적으로 가장 진화한 인간에게 목숨을 포함한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사는 것이 지루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장관님의 소망이 과거로 돌아가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죽음으로 향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잘 아실 겁니다.
모든 소망과 의지는 모순을 피하고자 하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움직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위해 마련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으로 향하는 출발점입니다. 자발적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사실을 모르는 바보거나 교활한 사람입니다. (P152-153)
왜 죽냐고?
꿈이 악몽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야
인간의 이성에는 위선은 있지만 진실이 없기 때문이지
자유는 순진한 사람들이나 믿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일 뿐이야
죽는다는 것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 행위
마지막 승부에서 신을 이기는 것
삶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외면하는 것 (P163)
개인의 감정을 좌우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 그것은 몸과 마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의 평온함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그때가 우리의 심신이 가장 균형 잡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 때문에 삶을 지속할 수 없다면 죽음은 그 고통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이성적 선택이다. 더 이상 삶의 질에 대한 기대가 없으며 모든 것이 완전한 혼돈 상태라면 다시 태어나기 위한 물질 분해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P253)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안락사는 초월이지 자살이 아니다. 자살은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이다. 또한 그런 행위를 통해 자신과 모든 신권주의, 민주주의, 가부장주의의 모순적인 폭정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살은 또한 초월이다. 안락사를 주장할 만한 타당한 상황이 아닌데도 삶을 포기하려 한다면, 그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규정짓기 전에 그가 자살하려고 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사회에 물어보아야 한다. 개인의 판단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이성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미친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제도화하려는 사람들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그만큼 현실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지옥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초월적인 무언가를 깨닫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행동하면 벌을 받는다는 공포를 각인시키는 것은 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그들을 파괴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유일한 목적이 어떤 극한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라면 인간의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는 행위는 항상 살아남는다. 이것이 바로 신의 뜻대로 선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P259-260)
나사렛에 사는 예수라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자 사상과 생각의 자유를 죽이는 것이다. 압제자가 야기하는 불의와 고통, 그것에 대항하는 고귀하고 훌륭하며 정의로운 인간의 의식을 죽이는 것은 신의 아들을 죽이고 신을 죽이는 것이다. 사상을 죽이는 것, 그것이 죽음의 문화다.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고 계속 기도만 한다면 언젠가는 순한 새끼 양처럼 착취만 당할 것이다. 지식은 미신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킨다. 밤이 어두운 원인을 알게 되면 다음부터는 밤이 두려운 이유가 아니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를 묻게 될 것이다.
악은 행위가 아니라 의도에 있다. “사랑하라, 그 후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에 난 이 말을 덧붙이고 싶다.
“너는 항상 올바른 선을 행할 것이다. 세상에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좋은 의도인가 나쁜 의도인가가 있을 뿐이다.”(칸트)
예수는 일종의 신비로운 존재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고통을 끝내기 위한 것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의 신비가 권력자에 의해 파괴되면서 종교계에서도 여러 종파가 형성되었다. 순수이성이 타락한 것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자가 지식을 위협적이고 잔인한 무기로 사용하려는 권력자에 의해 움직일 때 과학은 타락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종교와 국가가 결탁할 때 생기는 것은 범세계적 조직의 범죄뿐이다. 통치자들이 부패하는 원인은 누군가가 대중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게 하려는 것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애써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P267-268)
진정으로 개인의 삶을 생각하는 사회라면 개인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은 의무와 권리가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에서는 한쪽은 일방적으로 권리만 강요하고 다른 쪽에는 복종과 의무만 요구된다. 의사를 표시할 유일한 방법은 항의할 수 있는 권리뿐이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존중이 아니라 가부장주의에 의한 강요다.
누군가로부터 정당한 권리를 거부당할 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받고자 할 때 당사자에게 남는 것은 굴욕적인 체념뿐이다. 의식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의 문화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은 완전한 권리도 누릴 수 없다.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데 어떻게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아무도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 (P274-275)
소위 민중의 이름으로 싸운다고 하지만 항상 이기는 것은 가장 잔인한 자다. 그러나 그는 메달과 훈장, 총을 받고 주인의 양떼를 지키는, 길들여진 감시견에 불과한 존재다.
그는 자신이 민중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이자 국가의 수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민중의 바보일 뿐이다.
가련한 민중이야!
자신과 자신의 주인만이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잔인한 개에게 감시 당하는 슬픈 운명이여! (P295)
모든 종교나 철학이 인간이 윤리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포기와 희생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다.
삶은 우월한 선이다. 그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삶의 수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다. 삶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희생이다. 삶은 피상이 아니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은 겪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윤리와 연관시키면서까지 옹호하는 사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분명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권리를 요구하는데도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면서 정의를 비호하는 것은 이미 이성이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의가 패배했다는 것은 그곳이 지옥임을 뜻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P296-297)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인을 보다 자유롭게 해 줄 때 자유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위기를 맞게 된다. 우주와 삶에 대한 해석, 또 그것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해석은 이미 많은 모순과 의구심을 야기했다. 이것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또 인류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얼마나 부패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추구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광신적인 독단론자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다. 그들은 인간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이성을 옹호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할 것이다.
아무도 인간을 문명화시킬 수 없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인간은 살고 사랑하고 자유를 생각할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우주에 대한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있고 모두 한 뿌리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윤리적, 도덕적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다. (P313)
난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가지 못했다. 시간은 나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이었고, 그들의 아픔 때문에 나 역시 고통스러웠다.
오늘 나는 27년 전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무슨 일이냐며 물 속에서 내 머리를 들어올렸던 마누엘이 그순간 정해져 있었던 운명(목이 부러져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내 몸의 자유를 위해 수정한 것이다.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 어리석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1995년 1월 11일 시에이라에서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 (P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