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208. 경계에 선 사진가

by 노용헌

사진가는 경계에 서 있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주변에서 28년간 진행되어 왔던 정의연의 수요시위는 극우단체의 자리 선점(집회장소 신고)으로 지난 6월24일부터 자리를 옮겨 연합뉴스 빌딩 앞에서 진행되었다. 맞불집회 현장에서 사진가는 어느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에 서 있다. 당신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나와 타자, 그리고 참과 거짓,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는 상대적인 세계속에서 경계에 서 있고,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란 책은 사진가에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진을 찍어야 할 것인지, 타자의 불행을 소비하듯, 그리고 더욱 더 극적인 장면을 잡으려는 사진가들에 물음을 던진다. 윤리적인 기준 사이의 경계는 그에게 선택을 하게 한다. 목격자로서 아니 방관자로서. 이미지를 수용하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 사이에서. 충격적인 사진들은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추억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미지는 뜨겁게 타올랐다가 어느새 식어버릴 것이다. “아 끔찍한 일이군. 그리고는 채널을 돌렸습니다...‘아 끔찍한 일이군’이라고 한 마디 하고는 딴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늘 그런 식이죠. 사람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타인의 고통, 151p) 인간은 그토록 이기적이다. 타인의 고통은 대상화된 이미지일뿐이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디어는 잔혹한 사진을 담을수록 판매부수가 증가했다. 사진가는 여전히 피사체를 ‘쏘는’ 행위를 할 것이고, 여전히 공감하지 않는 대상체(편집의 대상)로만 머무를 뿐이다.


타인의고통.jpg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자신이 믿고 싶은 것 이외에는 모두 부인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건지.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마이클 린치, 메디치미디어)란 책에서 우리는 어떻게 잘못된 가치를 좇게 되는가하고 다시 질문하게 된다. 진정한 문제는 진실이 무엇인지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올바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 거짓과 음모로 부정적인 태도, 이런 것들이 문제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타인의 고통, 125p) 사진은 어쩌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겠다. 단지 표면을 찍기 때문이다. 과연 현실을 정말 진실되게(reality) 보여주는 것일까? 실상 특정장면을 부각하거나 렌즈를 통해서 본 프레임은 다른 대상으로 보여주거나 작가는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는 이후의 일이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jpg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어 주며,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길이를 갖게 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대게 하며 음과 성은 서로 어울려 울리게 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게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서로 서로에게 기대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무책임한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을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윤리적인가. 누군가의 불편함이 나에게는 편안함으로 다가오고, 나에게 느닷없이 깊은 상처를 주었던 푼크툼(punctum)으로서의 이미지는 사실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타인의 고통, 154p)


고(故) 문중원 경마기수는 2019년 11월 29일 부산경남경마공원 기숙사에서 죽은 채 발견이 되었다. 그는 마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고, 유가족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시신을 김해 한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했다가 2019년 12월 27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소공원 앞으로 옮겨 시민분향소를 설치하였다. 문중원 기수의 진상규명과 ‘죽음의 경주’를 멈추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청와대에 면담을 요청했고, 오체투지와 기자회견도 하였지만, 마사회와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었다. 2020년 3월 6일, 문중원 기수가 사망한지 99일, 정부종합청사 옆에 문중원기수의 시신을 모신지 71일만에 합의를 할 수 있었고,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20200307ROH_8762.JPG

3월7일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 분향소의 영정사진을 옮기고 있다. 분향소에서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는 것은 참 힘이 든다. 누군가의 아빠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을텐데.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낸 남은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곁을 지키고, 그런 모습들을 촬영하는 사진가들에겐 고역이 아닐수가 없다. 매일 열리는 추모문화제, 서명전, 과천에서 광화문까지의 오체투지, 헛상여 행진, 청와대 앞에서의 108배, 그리고 단식까지, 기록자로서의 경계도 죽음이란 슬픔과 애도의 경계에서 조심스러워진다. 광화문광장은 2014년 7월14일 유민아빠의 단식장이 들어서고, 세월호 분향소가 차렸졌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고(故) 백남기 농민, 2018년 산재노동자 고(故) 김용균.


최순실의 국정논란 사태로 2016년 광장은 촛불로 뜨거웠었다. 그 다음해에 박근혜정권은 탄핵되어 내려왔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산재사고와 대형안전사고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광장은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호소하는 장(場)이었고, 누군가의 외침이 있는 곳이었다. 보수와 진보, 정치적 대립도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박근혜퇴진 행동 촛불집회가 열렸던 광화문광장은 2017년 여름이후 태극기집회로 상황은 바뀌어갔고, 2019년 조국수호와 조국구속집회로 극에 달했다. 2020년 2월 21 코로나19 확산방지를 명목으로 도심내 집회가 금지되었다.

20200628ROH_8030.JPG

사진은 단순히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을 넘어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어려운 지점이 있다. 경계에선 사진가와 그가 만든 이미지를 해석하는 이 사이에서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것에 공감하는 인지는 고통을 바라보는 자세에 있다고 본다. 한 노동자의 죽음, 죽음에 대한 연민만으로 공감만으로 부족할 것이다. 무력함에 분노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숙제인 셈이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슬퍼하되,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아야"(타인의 고통, 223p)한다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