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2021년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는 제7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공식초청작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에이리언>, <글래디에이터>, <마션> 등 다수의 명작을 탄생시킨 거장이다. SF 공포 영화의 초석을 다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에이리언>을 비롯해, 스케일, 액션, 영상미 등 3박자를 고루 갖춘 고전 명작 <글래디에이터>, 신선한 설정과 예측 불허의 스토리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 SF 블록버스터 <마션> 등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과 연출을 선보여 왔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에릭 재거의 원작 소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The Last Duel: A True Story of Crime, Scandal, and Trial by Combat in Medieval France)]를 기반으로, 프랑스 역사를 뒤흔든 마지막 결투 재판 실화를 소재로 한다. 절친이었던 장(멧 데이먼)과 쟈크(아담 드라이버) 그리고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사이에 발생한 사건을 세 사람의 시선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3장 구성(1장은 ‘장’의 관점, 2장은 ‘자크’의 관점, 3장은 ‘마르그리트’의 관점 및 결말)이다.
1339년에 잉글랜드군이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침공하면서 훗날 백년전쟁이라고 불린 길고 파멸적인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346년에 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중기병들을 격파하고 항구도시인 칼레를 점령했다. 그로부터 10년 훙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수많은 프랑스 기사들이 또다시 목숨을 잃었고, 국왕인 장 2세는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어 런던으로 압송되었다. 잉글랜드는 장 2세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광활한 프랑스 영토와 다수의 잉글랜드 귀족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금화로 3백만 에큐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몸값을 강요했다.
국왕을 포로로 잡힌데다가 엄청난 몸값을 요구당했다는 사실에 좌절한 프랑스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장 2세를 배신하고 침략자인 잉글랜드군 편으로 돌아섰고, 한층 더 무거워진 세금에 격분한 농민들은 무장봉기해서 영주를 살해했고, 불만이 극에 달한 파리 시민들은 도당을 짜고 반목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서로를 살육했다. 만성적인 가뭄과 흉작도 민중의 이런 비참한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게다가 1348년에서 1349년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P19)
평생 계속되는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는 주로 토지에 기반하고 있었다. 봉건법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는 영주가 아니며, 영주가 없는 토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곡물뿐만 아니라 현금이든 현물이든 간에 실익이 있는 소작료를 제공해 주었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중기병들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토지는 봉건귀족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과 권위의 주된 원천이었고, 가문의 이름과 함께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영속적인 것이었다. 이토록 큰 가치를 가진 토지는 갈망의 대상이었던 탓에, 이런저런 알력과 치명적인 반목의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P24)
1066년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기사단을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넜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왕의 군대를 무찌른 후 스스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후세의 역사서에 정복왕 윌리엄으로 기록된 바로 그 인물이다. 잉글랜드 왕이 된 노르망디 공작의 위세는 프랑스 왕의 그것에 맞먹었다. 향후 1세기 반에 걸쳐, 번창한 성읍들과 부유한 수도원들을 다수 보유한 노르망디의 반은 잉글랜드 왕가의 소유로 남게 된다.
1200년대 초에 프랑스 국왕은 길고 힘든 전쟁을 치른 끝에 노르망디 대부분을 잉글랜드 국왕으로부터 재탈환했다. 그러나 노르만인의 피를 물려받은 잉글랜드의 왕들은 여전히 노르망디 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노르망디의 대귀족 가문 다수는 프랑스화하기 전에는 노르만인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변화의 징조를 찾으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백년 전쟁이 발발하고 잉글랜드 군이 노르망디를 재정복하기 시작하자 노르만인 귀족들 다수는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P25)
자크 르그리는 귀족 계급인 종기사이긴 했지만, 원래 평민 계급에 뿌리를 둔 그의 가문은 카루주 가문만큼 유서 깊은 명가가 아니었다. 르그리라는 이름은 1325년 자크의 아버지인 기욤 르그리의 이름이 칙허장에서 언급되면서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향후 반세기 동안 이 명민하고 야심적인 가문은 계속 출세 가도를 달렸고, 영지와 그 밖의 재산을 늘리고 노르망디의 귀중한 봉지를 다수 획득함으로써 귀족 계급의 계단을 착실하게 올라갔다. 르그리가의 문장은 카루주가의 그것과 같은 색깔을 썼지만 색채 배분이 정반대여서, 은빛 바탕을 진홍색 사선(斜線)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P38)
자크 르그리와 장 드 카루주는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왔고, 피에르 백작의 봉신이 되었을 무렵에는 깊은 우정과 신뢰로 맺어진 사이였다. 카루주는 아내인 잔이 아들을 낳자 자크에게 아들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중세에서는, 특히 귀족 사회에서는 크나큰 명예로 간주되었다. (P39)
장 드 카루주는 아내인 잔이 병에 걸려 죽는 끔찍한 상실을 겪는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 다른 비극이 그를 엄습한다. 태어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그의 아들 -자크 르그리가 대부가 되어준- 마저 죽었던 것이다. 카루주는 거의 동시에 아내와 유일한 후계자를 잃었다.
두 사람의 이 참담한 죽음의 원인이 중세 유럽인들을 정기적으로 엄습했던 괴멸적인 역병들 중 어느 하나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페스트,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이질 따위의 전염병은 아직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잔의 경우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것은 중세 여성들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 중 하나였다. (P41)
1380년, 프랑스에서 새로운 왕이 대관했을 때, 장 드 카루주는 드디어 새로운 아내를 얻는 데 성공한다. 노르망디 북서부의 코탕탱반도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그리트라는 이름의 상속녀와 결혼함으로써 홀아비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오래된 노르만 귀족 가문의 외동딸이었던 마르그리트는 미혼이었고, 약혼 당시에는 여전히 1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젊고 부유한 귀족의 딸인데다가 지극히 아름답기까지 한 그녀는 가문의 이름과 영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귀족 사내의 눈에는 이상적인 신부로 비쳤다. 유일한 유산 상속인이기도 한 마르그리트는 상당한 액수의 지참금을 가져올 것이고, 장래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한층 더 많은 토지와 재산을 상속받을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P45)
강간을 둘러싼 정황은 증인이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강간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극히 힘들었다. 특히 중세 프랑스의 경우,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남편이나 아버지, 또는 남성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피해 여성은 범인을 고소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강간 피해자는 그 사실을 밝혀 보았자 얻는 것은 수치와 불명예밖에는 없다는 범인들의 협박에 굴복해서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간 사실을 공개하면 본인이나 가족의 평판이 땅에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P115)
마르그리트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당한 그 “더럽고 사악한 범죄”에 관해 고백하기 시작하자 장은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이 감정은 곧 격렬한 분노로 바뀌었다. 마르그리트는 고백을 마친 후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 복수를 해 달라고 간청했다. 마르그리트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남편의 명예와 명성이 유지되든 실추되든 간에, 앞으로는 자신도 남편과 무조건 같은 길을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두 사람은 결혼에 의해 이미 부부가 되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보다 훨씬 더 긴밀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 바깥세상에 대처해야 했다. 봉건법에서 이런 범죄를 고발할 경우, 남편의 지원과 변호가 없으면 아내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마르그리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20)
프랑스법에 의하면 국왕에게 친히 상고하는 귀족은 소송 상대방에게 사법 결투, 즉 결투 재판을 신청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모욕한 상대와의 다툼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쓰이는 명예 결투와는 달리, 사법 결투는 어느 쪽의 결투 당사자가 거짓 선서를 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정식 법 절차였다. 당시 이런 결투의 결과는 신의 의지와 부합하는 진실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연유에서 결투 재판은 judicium Dei, 즉 ‘신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결투에 의한 재판은 프랑스, 특히 노르망디에서는 유서 깊은 관습이었고, 장과 마르그리트의 조상들 중에는 보증인, 즉 선서를 한 입회인 자격으로 그런 결투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중세 초기에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결투 재판을 신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뿐만 아니라 농노나 도시민들 사이에서도 공개 결투가 종종 벌어졌다. 유럽 일부에서는 여성조차도 남성을 상대로 결투를 할 수 있었다. 결투는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사법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죄의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는 수단으로서도 쓰였다.
민사소송의 경우, 결투 당사자는 ‘챔피언’이라고 불리는 대리인을 고용해서 대신 싸우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형사사건에서는 당사자들이 직접 결투에 나서야 했다. 왜냐하면 그런 결투에서 패한 사람은 보통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의 경우에도 결투에서 챔피언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이나 노약자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P132-133)
1386년 7월 9일의 파리 고등법원의 기록은 그날 결투 신청을 목도하기 위해 대법정에 모인 귀족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날, 고등법원에 당당히 행차하신 국왕 폐하를 수행했던 것은 폐하의 숙부이신 베리 공과 부르고뉴 공, 폐하의 동생이신 루이 드 발루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었다. 이날 제기된 탄원은 원고인 기사 장 드 카루주와 피고 자크 르그리 사이의 결투에 관한 것이었다.” (P160)
법정에서는 두 사내 모두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건 자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문제가 하나 있었고, 이 문제는 여름 내내 예비 심문이 계속되면서 점점 더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마르그리트가 임신했다는 사실이다.
마르그리트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카루주의 아이인지, 르그리의 아이인지, 아니면 다른 사내의 아이였는지는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한지 5,6년이 지나도록 자식 소식이 없다가, 1386년 1월 전후에 임신해서 같은 해 후반에 출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가 낳은 아이가 자크 르그리의 아이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파리 고등법원의 재판관들은 원고가 고발한 문제의 강간에 의해 마르그리트가 임신했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생식에 관한 주된 이론은 서기 200년경에 그리스인 의사였던 갈레노스가 주창한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갈레노스에 의하면 남성의 정자와 더불어 수태의 필수 요소인 여성의 “씨앗”은 해당 여성이 오르가슴을 경험했을 경우에만 방출된다. 바꿔 말해서, “여성은 성교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는 이상 수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믿음은 중세 사회에 완전히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법률조차도 “강간은 임신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것은 현대의 의학 지식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미신이지만, 가문의 혈통을 우발적인 사고나 범죄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지키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중세인들, 특히 영지를 가진 귀족 계급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P183-184)
결투는 생마르탱데샹(Saint-Martin-des-Champs) 수도원에서 행해질 예정이었다. 파리의 생마르탱에는 결투를 위한 특별한 시합장뿐만 아니라 몇천 명이나 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11세기에 베테딕도회에 의해 설립된 이 수도원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북쪽으로 1마일쯤 간 곳에 있는 생마르탱가(街)에 인접한 센강 우안(右岸)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종교 단체이기도 한 생마르탱 수도원은 프랑스에서 가장 고명한 성인인 성(聖) 마르티노의 이름을 딴 곳이었다. 원래는 로마 군인이었던 성 마르티노는 어느 추운 겨울날 검으로 자기 외투를 반으로 갈라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에게 주었고, 훗날 갈리아 지방으로 가서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투르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성 마르티노는 병기공(兵器工)과 기병과 병사들을 포함한 군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프랑스군의 성인인 그에게 봉헌된 생마르탱 수도원의 결투장은 ‘신의 심판’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결투 재판의 무대로서는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P201)
장 드 카루주는 면갑을 올린 상태에서 자기 아내에게 다가가서 그 앞에 섰고,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나의 처(妻)인 그대여, 그대가 내놓은 증거에 입각해서 나는 자크 르그리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게 될 것이오. 그대는 나의 대의가 정의롭고 진실함을 알고 있소.”
엄청난 수의 군중은 그녀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로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마르그리트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 대의는 정의로우므로, 자신 있게 나가 싸우십시오.”
이 말을 들은 카루주는 짧게 대답했다.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겠소.”
이것들은 결투 직전 장과 마르그리트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P250-252)
니콜폴리스에서 장 드 카루주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옛 상관인 장 드 비엔 제독 근처에서 튀르크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제독과 함께 집단 매장지에 묻혔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지만 말이다. 혹은 다음 날 오스만 제국군에게 집단 학살의 보복으로 처형당한 포로들 중 한 명이었을 수도 있다. 카루주의 용기와 용맹스러움, 전우들에 대한 충성심을 감안하면 전날 도망친 프랑스군들 사이에 끼어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 유럽사에서 가장 큰 군사적 패배 중 하나였던 니콜폴리스 전투는 유럽에 의한 3세기에 달하는 군사적 모험의 종언을 가져왔다. 이렇게 해서, 장 드 카루주는 훗날 ‘마지막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P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