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워 오브 도그> 2021년
토머스 새비지가 쓴 1967년작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토머스 새비지는 실제로 서부 목장 출신의 동성애자인데, 오랫동안 성적 취향을 숨기고 살았다.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 <피아노>로 유명한 제인 캠피온인데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탔다.
영화의 마지막에 영화의 제목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피터가 성경구절의 한 부분을 읽었는데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이다. 이 개의 세력은 필을 의미하고 내 유일한 것은 피터의 엄마인 로즈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에는 버뱅크 형제도 침묵을 지켰다. 어둠 속에서 서로 알아볼 단서는 단 하나, 한쪽은 홀쭉하고 한쪽은 퉁퉁한 저마다의 윤곽뿐이었다. 그 어렴풋한 윤곽과 오래 들어 귀에 익은 안장 삐걱거리는 소리뿐, 그래서 필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소몰이 여행의 첫머리는 늘 이처럼 고즈넉했다고, 생각이 내면으로 향하여 과거를 더듬어 갔다고. 그리고 지금 이 정적은 필에게 과거가 변하지 않았다고. 그리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고 알려 주었다. 그랬다. 필은 자동차를 혐오했다. 요즘 들어 막무가내로 소 떼를 뚫고 지나가려 하는 암녹색 스턴스나이트 세단 같은 것들을. 필이 보기에 자동차라는 물건은 쓸데없이 빠르기만 했다. 한번은 운전사가 겁도 없이 울린 경적 소리에 소 떼가 어찌나 겁을 먹었던지, 필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자동차 옆으로 달려가 적갈색 말의 안장 이로 쑥 일어서서는 운전사에게 속이 후련하도록 욕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흠칫 놀라 옹송그리는 꼴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얼어 죽을 벼락부자 놈들.” 필은 그렇게 구시렁거렸다. “조지, 저 개놈의 자식이 빵빵거리는 거 들었냐? 하느님 맙소사. 소들은 저 소리를 들으면 살이 쭉쭉 빠지는데 그딴 건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자동차라는 자동차는 몽땅 다 터져서 박살 나는 꼴을 봐야 속이 풀리겠어.”
그러나 조지는 자신의 (다른 모든 소유물과 마찬가지로) 리오 트럭을 애지중지했기에 소 떼의 등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휴, 젠장. 작작 좀 해, 필. 사람은 시대에 맞춰서 살아야지.”
“시대 좋아하네!” 필은 그렇게 말하고 침을 뱉었다. (P25-26)
"가르쳐주마, 피터. 남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남들은 너의 깊은 속을 절대로 모르니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게요.”
“하지만 피터,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단다. 남의 말을 아예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보통 모질게 자라서 모진 사람이 되게 마련이거든. 넌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 해. 상냥한 사람이. 넌 어쩌면 남들한테 큰 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 왜냐면 넌 강하니까. 너 상냥함이 뭔지 아니, 피터?”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래, 그럼 가르쳐 주마. 상냥함이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앞길에 놓인 걸림돌을 치우려고 애쓰는 거란다.”
“그건 뭔지 알겠어요.”
조니는 다시 입술을 물었다. “피터, 난 이때껏 걸림돌 같은 거였단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편하구나.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맙다. 자,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그렇게 말해 놓고서 조니는 잠시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P68-69)
식당의 주인 여자가 테이블 세 개를 붙여 놓은 덕분에 패거리가 다 함께 앉아도 자리가 좁지 않았다. 주인 여자가 조지와 필을 더없이 친절하게 맞이한 것을 보면 자살한 남편이 필한테 멱살을 잡혔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털어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세상의 어떤 남자가 그렇게 창피한 사연을 아내에게 털어놓겠는가. 젠장. 그 여자는 테이블의 좌석마다 새하얀 냅킨을 준비해 두었다. 멋진 경험이 되겠군. 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핑거볼만큼이나 냅킨을 쓸 일이 없는 이 소몰이꾼들한테는. 자, 기대하시라. 카우보이들이 그 냅킨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구경시켜 주는 대신 돈을 받아도 될 판이었다. 그 가게에서는 왠지 도로변의 싸구려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가 났는데, 필은 주인 여자가 빈 와인 병에 꽂아 놓은 양초를 보고 아마 그것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종이꽃도. 빌어먹을 종이꽃. (P84)
필은 조지를 보았다.
필의 눈은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무심해 보였을까? 어떤 이는 순수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의 눈은 예리했다. 몹시도 예리해서 홍채가 각막만큼이나 민감했다. 그래서 빛이나 그림자가 살짝만 변해도 필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맨손이 나무 속 깊숙이 도사린 썩은 부분을, 그 쪼개지기 쉬운 약점을 감지하듯이 그의 눈은 주변과 너머와 속을 꿰뚫었다. 그는 이른바 보호색이라는 대자연의 한심한 실수를 간파할 줄 알아서, 바싹 마른 굵은 가지와 이파리와 흙으로 위장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암사슴의 윤곽을 쉽게 알아보았다. 빙그레 웃으며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한쪽 발을 저는 회색 늑대가 있으면 그는 늑대의 멀쩡한 발이 흙이나 눈에 남긴 희미한 발자국을 알아보고 그 존재를 눈치 챘고, 키 작은 풀이 살짝 흔들이는 기척이 느껴지면 눈을 돌려 풀뱀이 주둥이를 벌린 채 조그마한 새끼 쥐를 덮치는 광경을, 그러는 동안 어미 쥐가 찍찍 소리를 지르며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은 주검을 찾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까치 떼를 좇아 움직이곤 했다. 통통 부은 짐승 주검이나 장작 헛간 뒤에 버려진 썩은 소 다리를 찾아다니는 새들이었다. 길이 막힌 개울물이 제자리 돌기를 하는 우묵한 물굽이에서 그는 바위 그늘에 ‘엄폐’한 송어를 찾아냈다. 그러나 필이 보는 것은 대자연의 피조물만이 아니었다. 자연 자체 -자연이 스스로를 늘어놓고 정리하는, 어지럽고 천진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보았다. 목장 저택 앞의 언덕에 점점이 드러난 바위에서, 언덕 자락을 여드름처럼 흉하게 뒤덮은 세이지브러시 덤불에서, 그는 질주하는 개의 놀라운 형상을 보았다. 개의 날씬한 두 뒷다리는 튼튼한 양어깨를 앞쪽으로 떠밀었다. 더운 김을 뿜으며 아래로 수그린 주둥이는 북쪽 산의 골짜기와 능선과 산그늘로 도망 다니는 겁에 질린 어떤 것 -어떤 생각-을 쫓고 있었다. 그 추적이 어떻게 끝날지 필은 머릿속으로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개는 먹잇감을 붙잡을 운명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산을 보기만 해도 그 개의 숨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개가 그토록 또렷이 보이는데도 그 형상을 알아본 이는 필 말고는 딱 한 사람뿐이었고, 조지는 결코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P94-95)
로즈가 피아노를 칠 때면 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떠났다. 그는 로즈가 음을 틀린 순간을 더없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어섰기 때문에, 로즈는 그가 집을 나섰거나 아니면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다시 피아노를 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로즈는 필의 취향이 조지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필이 자신을 속으로 비웃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로즈가 주지사에게 잘 보이려고 연습하는 것을 알고서.
문. 문. 문. 또 문. 집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다섯 개 있었는데 로즈는 각각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모두 구별했다. 필이 애용하는 뒷문이 열리면 그칠 줄 모르는 북풍이 불어 들어와 바닥의 융단이 뱀처럼 펄럭거렸다. 어느 날 오후에 로즈는 필이 집에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필은 남자치고는 작은, 발등이 높은 발로 빠르게 사뿐사뿐 걷기 때문에 기척을 알아채기가 쉬웠다. 필이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닫힌 문이 필의 악의와 위압감을 차단해 준 덕분에 로즈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꼼꼼히 듣던 로즈는 이내 다른 소리, 즉 필이 치는 밴조 소리를 눈치챘고, 자신이 칠 때 필도 함께 치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즈는 손을 멈추고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뚱땅거리던 밴조 소리도 멈추었다. 조심스레, 로즈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밴조 소리가 다시 들렸다. 로즈가 멈추면 밴조도 멈췄다. 그 순간 서늘한 깨달음이 로즈의 뒷덜미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필은 로즈가 연습하는 바로 그 곳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더 훌륭하게. (P168-169)
그의 앞에는 로즈가 어디선가 주어온 넓적한 이판암이 놓여 있었고, 그가 보는 것은 그 돌 위에 놓인 사람 머리 두 배 크기의 회전초였다. 바깥쪽의 줄기들이 둥그렇게 휘어져 완벽한 구를 이루며 안쪽에 얽히고설킨 짧은 줄기들을 품고 있었다. 그 회전초 속에, 결코 무작위가 아닌 방식으로 그 여자가 고정해 놓은 새빨갛고 조그마한 날개들을 보고 필은 처음에는 그 날개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속임수 아래 감춰진 진짜 형태와 색을 간파했다. 그것은 넓적하고 끝이 뾰족한 잎이 달린 지저분한 핏빛 식물, 말 목초지의 울타리를 따라 무성하게 자라다가 건조한 겨울이 되면 색이 더욱 검붉어지는 그 풀이었다. 그 여자는 분명 그 풀의 검붉은 잎을 물에 담가 색을 엷게 뺐을 것이다. 인디언들이 그 잎으로 진홍색 염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필은 어디서 듣거나 읽은 적이 있었다. 빨간 풀잎은 물기가 마르는 사이에 뾰족한 잎끝이 맵시 있게 둥글려져 있었다. 손으로 잡아 찢은 그 잎들이 이제 회전초의 안쪽 가지 하나하나에 선홍색 벌새처럼 앙증맞게 앉아 있었다. 맙소사. 필은 생각했다. 이거 진짜 위험한 여자 아니야! 그는 뒤로 물러서서 더 자세히 보려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상상력은 기민했다. 하늘의 뭉실뭉실한 구름에서 그는 웃는 얼굴과 찌푸린 얼굴을 곧잘 보았고 가끔은 겁에 질린 얼굴도 보았으며, 바람은 그를 위해 노래하는 허밍 소리였다. 자연 현상을 배열하여 오감을 뒤흔드는 하나의 유형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필의 재능이었다. 그 재능 덕분에 그는 남몰래 ‘언덕 자락의 개’로 여기는 형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맙소사.” 그렇게 중얼거리며, 필은 그 여자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보나마나 스스로가 대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지.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허접한 것들로 이렇게 멋진 걸 만들었으니. 웬걸, 그 꽃꽂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시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뭐지? 새장 속의 새들? 혹은 둥실대는 연기일까, 불길을 둘러싼? 이렇게 허접한 것들로 이렇게 멋진 것을. 이내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변변찮은 재료’니 ‘대단한 작품’이니 하는 말을. (P186-187)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형제가 심은 버드나무 가지는 오두막을 타고 오르며 자라났다. 나무는 오두막을 온통 휘감고 뒤덮다 못해 안으로까지 파고들어 입구를 가로 막았고, 창을 가렸고, 끝내는 바닥을 똑바로 뚫고 올라와 지붕 곳곳으로 삐져나와서 이제는 어디가 버드나무이고 어디가 오두막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오두막의 목재가 서서히 썩어 가며 구불구불 굵다랗게 자라는 버드나무의 비료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오두막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필과 조지 -그리고 또 한 사람- 뿐이었고, 설령 오두막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고 해도 컴컴한 그늘 속에 남아 있는 지붕과 벽의 잔해를 알아보려면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필이 먼지 덩어리 속에서 찾은 구슬처럼, 그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어린 시절의 증거였다. 비밀스러운 성소였다.
실은 그 공터 자체가 신성한 수풀이 되었고, 헤엄을 치던 물구덩이는 목욕재계를 하는 장소가 되었다. 오로지 그곳에서만 필은 옷을 다 벗고 몸을 씻었다. 그곳은 소중한 장소였기에 결코 다른 인간이 발을 드려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되었다. 다행히도 그곳의 통행로는 버드나무 수풀 속으로 난 외길뿐이었는데, 수풀이 하도 무성해서 허리를 숙이고 기어가야 했다. 세상천지에서 오로지 이곳만이 필의 자리였다. (P228)
그러나 상상해 보라. 그해 여름 개울가에서 알몸이 되어 물에 들어가 목욕할 준비를 하던 필이, 까치도 아니고 산토끼도 아닌 어떤 것이 바스락대는 소리를 듣고 돌아섰는데 눈앞에 ‘낸시 아가씨’가 서 있었을 때 느꼈을 격분을, 그 소년은 사슴처럼 우아하게 서서, 눈 또한 사슴처럼 커다랗게 뜨고 있다가, 필이 자신을 향해 돌아서자 사슴처럼 날렵하게 달아나 무성한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필은 냉큼 허리를 굽히고 셔츠를 집어서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년이 서 있던 자리를, 이 성스러운 공간에 뚫린 너덜너덜한 구멍을, 그 추한 공백을. 필이 받은 충격은 분노로 변했고, 그의 목소리는 개울물 소리르 뚫고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꺼져.” 그가 외쳤다. “여기서 당장 꺼져, 이 개 같은 새끼야.” (P229)
관리관은 못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무부 관리들이 방문할 경우에 대비하여 가끔은 보호 구역의 규칙을 깐깐하게 적용하는 것도 업무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술은 파는 것도 마시는 것도 금지였다. 인디언이 백인만큼 술이 세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허가 없이 보호 구역을 떠나는 것은 금지였다. 백인들이 떠돌이 인디언 때문에 폐를 입게 할 수는 없었다. 허가증은 급박한 사유가 있어야만 발급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어차피 갈 곳도 없고 재워 줄 친구도 없었기에 그 규칙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총기 소유는 금지였다. 그곳에서는 총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인디언들이 보호 구역에 살기 시작하면서 고기는 모두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조금씩 배급해 주었으므로.
그러나 에드워드 나포에게는 총이 있었다. 원래 아버지의 것이었던 그 22구경 장총은 장례식 때 망자의 물건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관습을 유일하게 피한 유품이었다. 그 작은 장총은 암소를 키우는 움막의 한구석에 기대어져 있었다. 대단한 총은 아니었지만 명중률이 높았고,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추장이었던 아버지의 유품.
부족이 보호 구역으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에드워드 역시 추장이 되었을 것이다. (P231-232)
오래전, 루이스 부인이 버뱅크 집안의 요리사가 되려면 아직 긴 세월이 남은 과거에, 루이스 씨는 숲에서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한창나이’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루이스 부인은 자신이 ‘하늘의 영원한 집’이라 부르는 곳에서 남편과 재회하기를 꿈꾸었으나 홑몸으로 그날을 기다리는 사이에 어느새 독설과 비판과 섬뜩한 격언의 보따리로 변하고 말았다.
“맛 좋은 과일도 먹고 나면 금세 잊어버리지요.” 루이스 부인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일거리에서, 두 손으로 치대다가 흠집투성이인 테이블의 은행나무 상판에 사정없이 내리치는 빵 반죽에서 눈을 들면서, 가끔은 이런 말도 했다. “우리가 앞날을 내다 볼 수만 있다면, 아무리 깊은 강도 그렇게 깊지는 않겠지요.”
로즈는 영문을 몰라 가볍게 웃었다. “앞날이 그렇게 어둡기만 하겠어요, 루이스 부인.” (P266)
때는 저녁, 사색의 시간이었다. 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재주를 전하는 방식에 관하여, 가죽띠를 기다랗게 땋아 만든 밧줄처럼 이런 성질과 저런 성질이 엮여서 인간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하여 생각했다.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웠고, 때로는 조잡했다. 필이 지금 땋고 있는 것은 조와 브롱코 헨리에게, 밧줄 땋기의 명수인 그 둘에게 바치는 소박한 경의였다. 그 둘은 저마다 필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필의 곁에 놓인 양철 대야에는 그가 물에 담가 놓은 기다란 생가죽 띠가 두 손으로 다 쥐지도 못할 만큼 잔뜩 들어 있었다. 햇빛에 하얗게 탈색되고 물에 퉁퉁 불은 생가죽은 통통한 애벌레와 닮아 보였다.
원래 필은 가죽 밧줄을 반 미터 넘게 땋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밧줄을 땋는 솜씨가 아직 녹슬지 않은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 주고 싶을 뿐이었다. 가죽 밧줄은 그늘에 잘 말려서 쇠기름을 먹이면 삼줄만큼이나 튼튼했고, 목장 일에는 삼줄보다 더욱 잘 어울렸다. 그런 밧줄은 꾀 많은 뱀처럼 움직였다. 이름이 조인 그 남자는 자기가 판지 여행 가방에 넣고 다니는 약 10미터 길이의 가죽 밧줄 한 묶음을 50달러에도 팔지 않을 거라고 으스댔고, 필도 그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 필은 자신의 재주 있는 손으로 만든 작품을 돈 때문에 팔아넘기지는 않겠다는 그의 결기를 높이 샀다. 돈을 깔보고 시간을 귀히 여기는 태도는 그가 교도소에서 얻은 또 다른 교훈이었다. 브롱코 헨리도 그런 식으로 죽음을 깔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를 통하여 범상한 인간들의 무리로부터 스스로를 갈라놓았다. (P296)
저쪽을 한번 봐, 저기, 뭐 보이는 거 있냐? 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눈에야 언덕 비탈밖에 안 보이겠지. 하지만 브롱코 헨리는, 그 사람이 저 언덕을 볼 땐 말이야, 네 생각에는 그 사람이 뭘 봤을 것 같아?”
“개요, 달려가는 개를 봤을 것 같아요.”
필은 멍하니 피터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런 젠장. 너 그걸 지금 바로 알아본 거야?”
“목장에 처음 왔을 때 봤어요.”
“음, 아까 얘기로 돌아가자. 내 생각에 사람한테 필요한 건 살면서 이겨 내야 할 역경이야.”
피터는 무릎을 당겨 팔로 끌어안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제 아버지는 그걸 걸림돌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걸림돌을 치워야 한다고 하셨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피트, 너한테는 걸림돌이 있어. 이건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피터 도련님아.” 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일랜드 억양으로 말하곤 했다. 그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용기를, 그들의 무식함을.
“걸림돌이라뇨?” 피터의 눈빛은 평온했다.
“예를 들면, 네 엄마.”
“제 어머니요?”
“맨날 푹 절어 있잖아.” 필은 ‘아차’ 싶어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너무 많이 떠들어 버렸나? 너무 일찍? 계획을 다 펼치기도 전에 꼬맹이하고 서먹한 사이가 돼 버린 걸까? 다 이해한다는 듯이 친근하게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필은 자신이 방금 왜 그렇게 말했는지 생각했다. 혹시 스스로도 다 알지는 못하는 어떤 동기 때문에 그런 말을 내뱉은 걸까? 이런 개 같은! (P342-343)
부디 바라건대(사람은 무언가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그 일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소년이 그 비밀의 장소에서 필의 알몸을 보았던 것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필과 조지만 아는…… 그리고 브롱코 헨리만 아는 그곳에서? 똑같이 운명처럼, 필도 소년의 적나라한 본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원 같은 시간 동안 야유와 조롱을 견디며 열린 천막들 앞을 당당하게, 숨김없이 걸어가던 소년을……. 세상에서 추방된 자를. 그러나 필은 알았다, 뼛속 깊이 잘 알았다. 추방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그래서 그는 세상을 혐오했다, 세상이 먼저 그를 혐오했으므로. (P347~348)
개들은 그늘 속에 머물며 힘없이 낑낑대다가, 이내 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눈앞의 광경에 감동한 피터는 몇 시간 전에 읽고서 마음 깊이 감동했던 시편 구절을 나직이 읊조렸다.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 주시고
저의 하나뿐인 소중한 것, 개의 아가리에서 빼내 주소서.
피터는 그 기도서가 자주 쓰이는지, 혹시 그 구절만 잘라 내어 자기 스트랩북에 붙이면 안 될지 궁금했다. 아직 붉은색은 띠고 있으나 향기를 잃은 장미 꽃잎보다는 그 시편 구절이 스크랩북의 마지막 항목으로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이제 로즈는 구원받았으므로. 이는 피터 아버지의 희생 덕분이었고, 피터 스스로가 아버지의 묵직한 검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저지른 어떤 희생 덕분이었다. 이제 그 개는 죽었다. (P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