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인의 초상> 1996년
제인 캠피온 감독, 니콜 키드먼, 존 말코비치, 바바라 허쉬 주연의 1996년작 영화.
“당신과 결혼하면 제 운명을 피해야 해요. 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해요. 전 이런 예외적인 생활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요. 외면하거나 나 자신을 분리하는 방식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틀에 박힌 영국 귀족 삶보다는 불행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위해 선택하는 이사벨의 초상은 확고하다. 쉽고 곧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사벨이 마침내 자신의 잘못된 선택(최악의 남자를 선택) 앞에서도 탈출과 회피를 시도하기보다는 고난과 정면 대결해 나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인생은 한 곳을 가득 채웠다 싶으면 반대편의
모든 것을 비워야 하는 모래시계를 보는 것 같아”
[1]
러들로 부인은 세 자매 가운데 맏이였고, 통상 가장 분별력 있다고 여겨졌다. 대체로 분류하자면 맏이 릴리언은 현실에 밝았고, 이디스는 미인이었고, 이사벨은 ‘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세 자매 가운데 둘째인 이디스, 즉 키스 부인은 미국 공병대 장교의 아내인데, 우리가 얘기하는 내용이 그녀와는 더 이상 관련 없으므로, 단지 그녀가 정말로 뛰어난 미인이고 여러 군사 주둔지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지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계속해서 좌천되는 바람에 주로 서부 촌구석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것에 매우 억울해했다. 릴리언은 목소리가 큰 데다 자신의 직업에 열정을 쏟는 뉴욕의 젊은 변호사와 결혼했다. 그 결합은 이디스의 결합보다 나을 바가 조금도 없었지만, 릴리언은 어쨌든 결혼했다는 데 감사하는 젊은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매들보다 훨씬 더 평범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행복했으며, 이제는 응석받이 두 아들의 어머니이자 53번가에 있는 쏙 들어간 쐐기 형태 갈색 석조 건물의 여주인으로 과감히 도피한 자신의 처지에 의기양양해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체격이 작고 단단했으며 자신의 용모를 미심쩍어 했지만, 뛰어나게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그런대로 인정했다. 더욱이 그녀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결혼 후 형편이 나아졌고, 인생에서 가장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자기 남편의 언변과 동생 이사벨의 독창성 두 가지였다. “난 절대로 이사벨을 따라가지 못해. 그러려면 내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을 것야.” 그녀는 이따금 말했다. (P48-49)
랠프가 슬픈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네게 보여 줄 수도 있지만 넌 절대로 보지 못할 거야. 특권이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아. 부러워할 만한 일도 아니야. 유령은 너처럼 젊고 행복하고 순진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아. 넌 먼저 큰 고통을 겪고 뭔가 쓰라린 지식을 얻어야만 해. 그렇게 해야 눈이 뜨일 테니까. 난 그걸 오래전에 보았지만.”
“난 방금 오빠에게 내가 지식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했어.”
“그래, 행복한 지식, 기분 좋은 지식을 말하겠지. 그런데 넌 고통을 겪지는 않았어. 그러도록 되어 있지 않았거든. 난 네가 절대로 유령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에는 무거운 빛을 띠며 그에게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우아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그런 그녀가 다소 주제넘어 보였다. 사실 그것이 그녀 매력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그러자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알다시피 난 두렵지 않아.”라는 그녀의 말 역시 지나칠 만큼 주제넘어 보였다.
“넌 고통이 두렵지 않아?”
“물론 두려워. 하지만 유령을 두려워하진 않아. 게다가 사람들이 너무 쉽게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해.” 그녀가 덧붙였다. (P78-79)
그녀는 영리했고 너그러웠으며, 고상하고 자유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할 셈인가? 이런 질문은 잘못되었다. 여성 대부분이 이런 질문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아한 모습으로, 다소간 수동적인 자세로, 남자가 들어와 어떤 운명을 제시해 주길 기다리기 마련이다. 이사벨의 독창성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나름의 의도를 가졌다는 인상을 주는 데 있었다. 랠프는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신이 의도한 것을 실행할 때마다 내가 가서 볼 수만 있다면!” (P104)
“.....그들은 지금으로선 시대 흐름을 앞서 가는 사람들이란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혁명을 일으키려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아무튼 내가 죽을 때까지 혁명은 연기해 주면 좋으련만. 너도 알 듯이 그 사람들은 모든 걸 폐지하려 해. 하지만 나는 여기에 상당히 토지를 많이 소유한 지주란다. 난 그걸 잃고 싶지 않아. 그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난 영국에 오지 않았을 거야.” 터쳇 씨는 점점 더 쾌활해지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영국이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 사람들이 뭔가 중요한 변혁을 일으키려 하다면 그건 분명 속임수야, 그렇게 되면 실망할 사람도 많을 테고.”
“어머나, 저는 혁명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이사벨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혁명을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럴까.” 터쳇 씨가 유머러스한 의도로 말했다. “네가 구파 진영인지 신파 진영인지 잊어버렸어. 서로 대립되는 의견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전 양쪽 다 가지고 있는걸요. 모든 면을 약간씩 가졌다고 생각해요. 혁명이 일어나면,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면 고상하고 도도한 왕당파가 되려고 해요. 그들은 누군가의 동정을 받을수록 너무나 빈틈없이 행동할 기회를 갖는 거예요. 유별나게 말이에요.” (P119)
“워버튼 경과 그 친구들이겠지. 상류 계층 급진파 말이야. 물론 내가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변화에 관해 얘기하지만 그 사람들이 변화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너와 나, 즉 우리는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알거든. 나는 언제나 민주주의가 살기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난 처음부터 그 제도에 익숙했어. 그렇다 해도 난 귀족은 아니지. 난 숙녀지만 나는 귀족이 아니야. 영국에서는 민주주의가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아. 민주주의는 일상의 문제야. 그런데 이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이 자기들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물론 해 보고 싶다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지나치게 하지는 않는 게 좋지.” (P120)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만난다면 너의 교제 범위는 아주 좁아질 거야.” 터쳇 부인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리고 내게는 남자든 여자든 너에게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어. 사람을 추천하는 일은 중요하지. 나는 스택폴 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든 면에서 나를 유쾌하지 않게 하니까. 그 애는 말소리가 너무 크고, 누가 자기를 쳐다보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사람을 쳐다보는 버릇이 있어. 난 그 애가 지금까지 하숙집에서만 지내 왔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런데 난 그런 곳의 행태와 자유분방함을 혐오하거든. 네가 좋지 않다고 생각할 나 자신의 행태를 내가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난 그런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하겠어. 그 애는 내가 하숙집 문화를 혐오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 자기는 이 세상에서 하숙집 문화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가든코트가 하숙집이라면 훨씬 더 그 애 마음에 들었을 거야. 이 집은 손님이 너무 많아 마치 하숙집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내가 그 애와 친해지기 힘든 거란다. 내가 시도해 봤자 소용없는 노릇이지.” (P155-156)
그녀는 이상이 결코 구체화될 수 없는 데는 본질적 이유가 있다고 자주 생각했다. 이상이란 믿는 것이지 보는 것은 아니었고, 신념에 관한 문제이지 경험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모조품을 제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이 모조품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사벨은 마담 멀 만큼 호감이 가고 흥미로운 여성을 만난 적이 없었으며, 우정에 주요 장애가 될 결점(자기 성격에서 지루하고 진부하고 너무나 잘 아는 것을 재현하는 태도)이 이렇게 까지 없는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사벨의 신뢰의 문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을 만큼 활짝 열려, 이토록 상냥하게 귀를 기울이는 여성에게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너무 솔직하다는 것에 놀랐다. 그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석함 열쇠를 맡기는 것과 같았다. 이런 보석 같은 고귀한 정신은 이사벨이 갖춘 것 가운데 유일하게 위대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소중히 간직해야 될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사람이란 큰 실수를 범하더라도 후회해서는 안 되며, 만일 마담 멀에게 자기가 생각했던 것만큼 장점이 없다면 그만큼 그녀가 딱한 노릇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마담 멀에게 상당한 장점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공감할 줄 알며, 이지적이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뿐만 아니라(대체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몇몇 여성을 만날 수 없을 만큼 이사벨이 불운하지는 않았으므로) 멀은 보기 드물게 뛰어난 여성이었다. (P307)
“정말 그래요. 흙으로 만든 그릇보다 쇠로 만든 그릇이 확실히 더 많아요. 그래도 어느 것이나 흠집은 있는 법이죠. 아주 단단한 쇠붙이 그릇이라도 어딘가 약간의 흠이나 구멍이 나있기 마련이니까. 난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자위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게도 남들이 놀랄 만한 균열이나 금이 있답니다. 잘 고쳐 놓았기 때문에 아직은 쓸 만하지만요.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찬장 속에 그대로 넣어 두려고 해요. 조용하고 어둠침침하고 퀴퀴한 향신료 냄새가 나는 찬장 속에 말이에요. 찬장에서 밖으로 나와 강렬한 햇볕을 쪼이면 난 공포 그 자체가 되죠!” (P316)
"그건 좀 모자라는 말이군요.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모든 인간에게 껍질이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돼요. 껍질이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부속품들의 집합체 같은 거죠. ‘자아’라는 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 걸까요? 자아는 우리에게 붙어 있는 모든 것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나와요. 나는 나 자신의 대부분이 내가 골라 입는 옷에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물건’을 아주 소중히 여긴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개인의 자아는 자신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거든요. 집이며 가구, 옷, 우리가 읽는 책, 사귀는 친구, 이 모든 것이 모두 자아를 표현하지요.“ (P330-331)
이탈리아에서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다른 것들을 결코 얻을 수 없을뿐더러, 그보다 더욱 나쁜 것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따금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성질의 것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망쳐 버려, 만일 자신이 이토록 오래 여기 살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도 이따금 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어 딜레탕트가 되게 하며, 이류로 만들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람의 성품을 단련하지 못한다는, 달리 표현하면 파리나 런던에서 유행하는 성공적인 사교와 그밖의 다른 ‘측면’을 함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좀 촌스러운 데가 있어요.” 오스먼드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자물쇠가 없어 소용없게 된 열쇠처럼 녹슬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요. 당신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 녹이 조금씩 벗겨지겠죠. 당신 지성은 정교한 자물쇠 같아서 감히 열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러나 당신은 세 차례도 만나지 못할 동안 가 버릴 테고, 아마 그 후에는 만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P423)
[2]
이사벨이 기억하는 옛날의 그는 집요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저항하고 논박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그가 다시 나타나자 처음에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지금은 안심해도 좋았다. 이사벨은 그가 그녀를 이미 용서했으며, 단지 좋은 관계로 지내기를 바랄 뿐 신랄한 언급 따위를 늘어놓는 악취미 같은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깨달았다. 물론 그것은 복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환멸감을 드러내며 그녀를 응징하려고 마음먹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좋은 감정을 품고, 그가 체념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거라는 생각이 워버튼 경에게 떠오른다면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감상적인 상처가 결코 스며들 수 없는 건강하고 남자다운 체념이었다. 영국 정치가 그를 치유한 셈인데, 그녀는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남자들은 행동이라는 물속에 자유롭게 뛰어들면 상처가 치유되므로 그들의 운명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물론 워버튼 경은 옛날 일을 언급했지만 암시적인 말은 없었고, 심지어 예전에 로마에서 만났던 일을 무척 즐거운 추억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이사벨의 결혼 소식에 대단히 관심 있었으며, 오스먼드와 가까워지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번에는 지금처럼 친하다고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이사벨이 결혼할 때 축하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가 한 유일한 말은 두 사람이 옛 친구이며 친한 사이라는 것뿐이었다. (P118-119)
사랑에 빠진 여성은 분명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없지만, 그녀가 저지른 오직 한 가지 과오의 원인은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다. 어떤 책략도 함정도 없었으며,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심사숙고한 끝에 선택한 것이다. 여성이 이런 실수를 범했을 때 그것을 만회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바로 실수를 제한없이(극도로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특히 그것이 계속 꼬리를 이을 경우 두 번째 실수가 첫 번째 것을 충분히 상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실수에 침묵을 지키겠다는 이런 맹세에는 뭔가 숭고한 데가 있어서 이사벨을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담 멀이 그녀에 관해 조심했던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P154-155)
이사벨은 그의 그런 마음을 얼마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워버튼 경에게는 어떤 희망이나 요구가 있는 것일까? 그런 마음이 어떤 식으로 팬지에 대한 분명하고 진실한 애정과 기묘하게 뒤섞이고 있는 것일까? 그는 길버트 오스먼드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위안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일 팬지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의붓어머니를 사랑하는 건 아닐 테고, 의붓어머니에게 마음이 있다면 팬지를 사랑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사벨은 그가 팬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팬지에게 구혼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녀 자신의 이점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이 그녀 남편이 한 부탁일까? 아무튼 이것은 워버튼 경이 아직도 자기와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고 스스로 인정한 순간부터 이사벨이 직면한 의무였다. 유쾌한 일이 아니라 정말 못 견딜 일이었다. 워버튼 경이 다른 만족감, 즉 자기와 다시 한번 친해질 기회를 엿보기 위해 팬지를 사랑하는 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역겨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으며 워버튼 경이 그렇게 교묘한 속임수를 쓸 리는 없다고 깊은 신념을 갖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팬지에 대한 그의 동경이 착각이라면, 가식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이사벨은 이런 달갑지 않은 가능성들을 생각하며 헤매다 마침내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P184-185)
신뢰감의 상실은 천천히 찾아왔다. 처음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친밀한 결혼이었지만, 일 년도 되지 않았을 무렵 그녀는 사태의 흐름에 놀라고 말았다. 그 후부터 그늘은 점점 짙어졌다. 마치 오스먼드가 의도적으로, 거의 악의를 품고 등불을 하나씩 꺼 버린 것 같았다. 그 어둠은 처음엔 흐릿하고 몽롱해서 그녀는 아직 제 갈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깊어져서 이따금 어둠이 잠시 걷힐 때에도 그녀 앞에 놓인 길은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을 만큼 캄캄했다. 이 그늘이 자신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님을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P187)
“당신은 정말 친구 복이 없군. 아무래도 새 친구들을 사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이런 말을 했는데, 당장 뭔가를 염두에 두고 내뱉은 말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나온 말이었다. “나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일부러 선택한 것 같아. 특히 당신 사촌 오빠는 콧대 센 어리석은 남자라고 줄곧 생각했소. 그렇게 못생긴 남자를 본 적도 없고. 그를 만나 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할 정도요. 그의 건강이 좋지 못한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해 득을 본 셈이고 다른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가졌단 말이오. 그가 그 정도로 중태라면 그걸 입증하는 방법은 단 하나 있지만, 그럴 의향은 없는 것 같소. 의젓한 워버튼 경의 경우는 마땅히 할 말은 없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의 태연하고 뻔뻔스러운 수법은 과연 대답했소! 마치 아파트를 보러 오듯이 남의 딸을 보러 왔으니 말이오. 문손잡이를 돌려 보기도 하고, 창밖 경치를 보며 벽을 두드려 본 후에야 겨우 방을 빌리려고 했지. ‘실례합니다만 계약서를 써 주겠습니까?’라고 말이오. 그러고 나서는 방이 너무 좁아 3층에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래층에 있는 방으로 눈을 돌리지. 그렇게 좁은 아파트에서 한 달가량 무료로 지낸 뒤 그냥 가버린 셈이지. 그러나 헨리에타는 그야말로 당신 친구들 중 가장 압권이야. 내게는 괴물 같은 사람이지. 그녀만 보면 온몸의 신경이 요동친단 말이오. 그 사람을 여자로 인정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는지 아오? 새로 나온 강철 펜 생각이 나지. 세상에서 가장 흉측한 것 말이오. 그녀의 말버릇은 마치 강철 펜으로 글을 쓰는 듯하오. 그런데 그녀 자신은 줄친 종이에 글을 쓸 정도로 융통성이 없지 않소? 생각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얘기할 때와 똑같은 모습이지. 당신은 내가 그녀를 보지 않으면 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보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리는 거요. 하루 종일 쟁쟁대니까, 그 목소리가 내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거요.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말할 때 억양 하나하나까지도 알고 있소. 그녀가 나에 대해 퍽 좋은 말을 해서 당신에게 큰 위안이 되겠지. 그녀가 나에 대해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오. 하인이 내 모자를 쓰고 있을 때 드는 그런 기분이란 말이오.” (P299-300)
“오스먼드 오빠가 전에 결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말해 줬다면 당신도 알 거예요. 나는 첫 새언니에 대해 한 번도 당신에게 언급하지 않았죠. 별로 점잖지도 훌륭하지도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 줬어야 하는 일이죠. 불쌍한 새언니는 거의 삼 년밖에 살지 못했고 자식도 없이 죽었답니다. 그녀가 죽은 후 팬지가 태어났고요.”
이사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막연하고 희미한 놀라움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는 시누이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지만, 그 말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면 팬지는 남편의 아이가 아닌가요?” (P385-386)
백작부인이 계속 말했다. “멀 씨 부부는 아이를 갖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요. 멀 씨가 먼 나라로 가 버렸죠. 남아메리카였을 거예요. 만일 마담 멀에게 아이가 있었다 해도(확신할 수는 없지만) 잃어버렸을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중압감을 받아(어설픈 위기였다는 뜻이죠) 오빠가 그 아이를 딸로 인정해야 했던 거랍니다. 첫 아내가 죽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날짜 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일찍 죽은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의심이 생기지 않았아요. 마담 멀과 오빠가 신경을 써 왔다는 얘기죠. 세상과 떨어져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았던 불쌍한 오스먼드 부인이 그 가엾은 아이, 즉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간 짧았던 행복의 약속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있겠어요? 주거지를 바꿈으로써(새언니와 둘이서 알프스에 머물 무렵, 오빠는 나폴리에서 그녀와 함께 살고 있었죠. 그리고 적당한 때에 영원히 그곳을 떠났어요) 모든 과거가 성공적으로 정리되었죠. 죽은 아내는 무덤에서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진짜 엄마는 위기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 아이에 대한 표면상의 권리를 모두 포기했답니다.” (P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