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017년
‘왜곡된 기억’은 줄리언 반스가 논픽션인 『두려워할 것은 없다』에서 철학자인 자신의 형 조너선 반스와의 쉽지 않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루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역사학자인)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대답하는 지점에서 작가의 성찰은 시작된다. 우리가 인류의 진실한 도정이라 믿는 역사는 사실 역사학자 개인의 해석이 담긴 ‘허구’에 가깝다는 테마는 반스의 다른 여러 전작에서도 거듭되어왔다. 이는 대문자 역사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집성된 개인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을 왜곡하는 만큼, 우리의 운명은 기억에 의해 잔혹하게 농락당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 우리말로는 ‘결말의 느낌’ ‘결말의 예감’쯤 될 것이다. 기억에 관해 끝까지 ‘감을 잡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의 두 가지 제목은 사뭇 반어적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학창시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때가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제는 일화가 된 몇몇 사건과, 시간이 변모해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몇 기억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순 없어도, 최소한 그런 일들이 남긴 인상에 대해서만은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P12-13)
“핀,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이 시기에 대해 아는 게 좀 있는가?”
전학생은 내 앞줄 왼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셜의 천치 같은 대답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잘은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하나의 사유 방식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실직자가 되겠군, 안 그런가?” 선생에게 잘 보이려는 웃음이 잦아들자, 조 헌트 영감은 게으른 주말을 보낸 우리의 죄를 눈감아준 후, 우리의 머릿속에 아내를 여럿 거느렸던 도살자 왕족에 대한 정보를 채워넣었다.
쉬는 시간에 나는 핀을 찾았다. “난 토니 웹스터야.” 그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헌트 선생한테 한 말 꽤 근사하던데.” 그는 내가 뭘 언급하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뭔가 일어났다’는 말.” (P15)
“음, 한 가지 의미에서 보자면,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합니다.” 그는 전에 그랬듯 잠시 뜸을 들였고, 그 바람에 우리는 그가 은근히 조롱을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차원을 넘어서 고도로 진지한 상태인 건지 다시 한 번 궁금해졌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P26-27)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P33)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과연?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입니다. 파트리크 라그랑주. 프랑스인입니다.”
“그런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 설명해줄 수 있겠나?”
“롭슨의 자살이 그 예입니다.” (P34)
“그 일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소하달 순 있지만요. 그러나 최근 일이지요. 따라서 역사로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 단 한 장의 문서, ‘엄마, 미안해’라고 쓴 한 장의 유서가 있습니다. 최소한 브라운이 한 말은 그렇습니다. 그 유서가 아직도 존재하나요? 폐기되었나요? 누구나 아는 동기나 이유를 넘어서, 롭슨에게 다른 동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그의 마음 상태는 어땠을까요? 뱃속의 아이가 그의 자식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롭슨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여자친구도 사라져버리고, 어쨌거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에, 어느 누가 롭슨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까요? 문제점이 보이시나요, 선생님?” (P34-35)
그 여자, 베로니카가 더 큰 투자 끝에 내 가장 명민한 친구, 혹은 더 나아가 ‘잭 오라버니’와 같은 케임브리지 놈팡이를 손에 넣었음을 요지로 담고 있는 그 편지의 위선이 마음에 들었다. 또, 만약 내가 에이드리언을 만나려 한다면 베로니카와 맞닥뜨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는 것도. 그 덕분에 내가 에이드리언을 볼 계획을 아예 접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한낮, 혹은 하룻밤을 할애한 것치곤 꽤 큰 수확이라 할 법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P76)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이런 얘기가 설교조에, 자기변명조의 허섭스레기로 들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베로니카에게 한 행동이 치기어린 남자의 전형이며, 내가 내린 모든 ‘판단’의 화살이 내게로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령, ‘헤어진 후에야, 베로니카는 나와 잤다.’라는 말은 재고의 여지없이 ‘나는 베로니카와 잔 다음, 차버렸다.’로 바뀔 수 있다. (P81)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나는 이제껏 재미있게 살아온 편이다.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볼멘소리를 하거나 깜짝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면에서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뭘 하는지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 인생에서 뭔가 아쉬운 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100-101)
생이 저물어가는 무렵이 되면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안 그런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덕을 쌓은 만큼 상을 주는 게 인생의 소관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또, 젊었을 때는 노년에 겪을지 모를 고통과 황폐를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홀로인, 이혼을 한, 상처한 자신을 상상해본다. 자식들도 커서 품을 떠나고,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입지가 사라지고 욕망이, 이성을 끄는 매력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더 나아가 다가올 자신의 죽음, 세상 어떤 동반자를 구한다 해도 홀로 맞설 수밖에 없는 죽음까지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결국 앞을 내다보는 행위일 뿐이다. 앞을 내다보고, 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 -말로, 소리고, 사진으로-을 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엉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이 줄롣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P105-106)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과 똑같은 역설이거나,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P106-107)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P111-112)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P144)
5.4 축적의 문제. 만약 삶이 판돈이라면, 그런 내기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경마장을 예로 들면, 축적이란 한 마리의 말이 거둔 상금을 다음번 경마에 거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5.5 따라서 a) 인간관계를 수학공식이나 논리식으로 표현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b) 그렇게 할 때, 두 개의 정수 사이에는 어떤 부호가 놓일 수 있을까? 덧셈과 뺄셈 부호임은 확실하다. 때로는 곱셈, 그리고, 그렇다, 나눗셈 부호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호들은 한정적이다. 요컨대 전적으로 실패한 관계는 상실/뺄셈, 축소/나눗셈이라는 용어 양쪽에서 설명될 수 있고, 총계값은 0이다. 반면에 전적으로 성공적인 관계는 덧셈과 곱셈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어떤가? 논리적으로 생성불가능하고 수학적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주석으로 표현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지 않은가?
5.6 요컨대 b, a1, a2, s, v라는정수가 포함된 축적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b=s-v+a1
혹은 a2+v+a1 x s=b?
5.7 혹은 질문을 하고 축적을 공식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인간조건에 논리학을 적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멸을 초래하는 일인가? 그 연결고리들이 강도가 각기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할 때, 논의의 사슬은 어떻게 될 것인가?
5.8 혹여 그 ‘연결고리’라는 것이 잘못된 은유는 아닐까?
5.9 그러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연결고리가 끊길 거라고 할 때, 그와 같은 단절의 책임 소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연결고리의 양쪽 끝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체가 문제인가? 그런데 여기서 ‘전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임의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정할 수 있을까?
6.0 혹은 책임의 범위를 좀 더 협소하게 정한 후, 더 정확하게 배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등식과 정수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전통적인 화술로 제반 문제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P149-151)
그것은 단순히 순수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응용력을 갖춘 지성이었다. 어느새 나는 내 인생과 에이드리언의 인생을 비교하고 있었다.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에 대해, 자살을 감행한 정신적, 육체적 용기에 대해,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 -살아남은 우리- 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그것이 에이드리언의 글이 내 안에서 촉발시킨 의문이었다. 나의 삶에 더해진 것-과 뺀 것-은 있었지만 곱해진 것은? 그 생각에 이르자 나는 심란하고 불안해졌다. (P153-154)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달리 설명해볼까. 혹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모든 것이 붕괴할 때로, 이는 곧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할 때 과연 타당한 데가 있을까?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동안 죽는다는 것. 설사 그 새로운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해도. 모든 정치적, 역사적 변화가 얼마 안 가 반드시 실망을 안겨주는 것처럼, 성년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2-182)
그 이메일을 처음 봤을 땐, 실수로 옛날 메일을 다시 보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쓴 제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죄한다’ 그 아래엔 내가 쓴 내용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베로니카의 답장이었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
나는 그 메시지를 받은편지함에 그대로 두고 가끔씩 다시 읽어보았다. 죽어서 화장을 하고 산골을 하지 않는다면, 석재나 대리석 위에 묘비명으로 활용할 법한 말이었다. ‘토니 웹스터.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 그러나 너무 감상적이고, 자기연민마저 느껴졌다. ‘이제 그는 혼자다’는 어떤가? 이게 더 낫겠다.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혹은 굳세게, ‘모든 날이 일요일’을 고수할지도 모르겠다. (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