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브로큰> 2014년
19세 최연소 올림픽 국가대표
47일간의 태평양 표류
850일간의 전쟁 포로
영화 <언브로큰>은 1940년대 미국의 영웅이었던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다룬다. 다큐멘터리 <어 플레이스 인 타임>(2007)으로 연출을 시작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2011년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 <피와 꿀의 땅에서>로 장편 극영화 <언브로큰>의 메가폰을 잡았다. 안젤리나 졸리는 <언브로큰>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943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중 전투, 고립무원인 망망대해에서의 표류, 거대한 폐허와 같은 일본 나오에츠 포로수용소까지 모두 완벽하게 재현하며 자신의 능력을 당당히 입증했다. 주인공 루이스의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 또는 “꺾이지 않은 희망”이다.
[1]
8월 1일, 루이스와 다른 선수들은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베를린을 가로질렀다. 눈에 보이는 풍경마다 혼란스러운 정세를 드러냈다. 나치 현수막이 사방에 도배되어 있었다. 남자들 중 3분의 1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군부대의 훈련이 드러내놓고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항공모함 전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독일 공군의 역량을 과시하는 전시가 비행기 이착륙장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게 펼쳐졌다. 이착륙장에서 글라이더들은 감동에 젖어 있는 관광객들과 히틀러 유겐트(1933년에 히틀러가 청소년들에게 나치스의 신조를 가르치고 훈련하기 위해 만든 조직) 소속 소년들의 머리 위로 급강하하는 묘기를 펼쳐댔다. 버스에는 지붕에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고 전차형 트랙으로 전환되는 착륙장치도 갖춰져 있었다. 베를린 시내는 아주 깔끔했다. 방긋 미소 짓는 ‘아리아인들’만 있을 뿐 집시들과 유대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집시들은 수용소에 넣어놓았고 유대인 학생들은 베를린 대학교 캠퍼스에 가둬놓은 상태였다. 불화를 보여주는 단서라곤 유대인들이 운영하던 사업체 건물의 깨진 유리창뿐이었다. (P72-73)
루이스는 샤워를 하고 나서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가까이에 아돌프 히틀러가 수행단과 함께 전용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히틀러 근처에 앉아 있는 창백한 남자를 가리키며 히틀러 정권의 선전 장관인 요제프 괴벨스라고 루이스에게 말해주었다. 루이스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카메라를 꺼내 괴벨스에게 주며 총통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괴벨스는 루이스의 이름과 경기 종목을 묻더니, 카메라를 받아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히틀러와 몇 마디를 나눈 뒤 돌아와 총통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루이스는 총통의 지정 관람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히틀러는 관람석 밖으로 몸을 내밀고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아래에 선 루이스는 팔을 쭉 뻗어야 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간신히 닿았다. 히틀러는 독일어로 뭐라고 말했다. 통역사가 영어로 말해주었다.
“아, 자네가 마지막 바퀴를 빠르게 뛰었던 청년이군.” (P79)
올림픽 선수촌은 그리 오래 비어 있지 않았다. 선수촌의 숙소는 군부대의 막사로 바뀌었다. 선수촌을 설계한 독일군 장교 퍼스트너는 올림픽 폐막과 더불어 선전에 필요한 그의 이용 가치가 끝나자 자신을 면직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순전히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채 32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오라니엔부르크라는 도시에서는 첫 번째 죄수들이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끌려가고 있었다. (P82-83)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유럽대륙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지도자들이 히틀러의 계획과 맞먹는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일본은 높은 관세와 낮은 수요로 무역이 제 기능을 잃었고, 인구는 증가하는데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었다. 부유한 이웃국가들의 천연자원을 유심히 주시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천연자원에서 경제적 독립 및 그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인들이 지닌 정체성의 중심은 본질적으로 열등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지배하는 것이 일본이 신에게 위임받은 권리라는 믿음이었다. “세상에는 우월한 종족과 열등한 종족이 있다. 선도적인 종족의 신성한 의무는 열등한 종족을 이끌고 계몽하는 것이다.” 1940년에 일본의 정치인 나카지마 지쿠헤이가 한 말이다. 이어서 그는 “일본인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월한 종족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필요와 운명의 부름을 받아 이웃국가의 땅에 ‘야마토 [일본] 종족의 혈통을 심어주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극동 지역을 모두 일본의 지배하에 둘 작정이었다. (P91-92)
1940년 4월의 어느 암울한 날, 루이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학생들이 교정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히틀러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소련의 동맹국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유럽 대륙에서 전면전이 벌어졌다.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한 핀란드도 타격을 받고 있었다. 헬싱키의 올림픽 경기장은 소련의 폭격을 받아 일부분이 무너졌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5,000미터 경기에서 루이스를 완전히 따돌리고 핀란드에 금메달을 안겨준 군나르 회케르트는 조국을 지키다가 살해되었다. 헬싱키 올림픽은 취소되었다. (P93)
일본은 전 세계로 빠르게 진군했다. 12월 10일,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했고 괌을 점유했다. 이튿날에는 버마를 침략했다. 며칠 뒤, 영국령 보르네오를 침략했다. 크리스마스에는 홍콩을 공격했다. 북보르네오, 라바울, 마닐라, 필리핀에 있는 미군 기지는 1월에 함락되었다. 영국은 말레이 반도에서 퇴각했으며 70일 만에 싱가포르에서 항복했다.
예상 밖의 문제가 있었다. 분명히 쉽게 점령할 것으로 여겼던 웨이크 섬이 항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은 3일간 웨이크 섬에 폭탄을 퍼부었다. 12월 11일, 구축함 열한 척과 경순양함을 포함한 막대한 규모의 무장 병력이 침략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규모 방어군은 반격에 나서 구축함 두 척을 침몰시켰고 다른 배 아홉 척을 손상시켰으며 폭격기 두 대를 추락시키면서 일본의 야욕을 무산시켰다. 일본으로서는 그 전쟁에서 처음 당한 패배였다. 12월 23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일본은 웨이크 섬을 점유하고 섬에 있는 사람들을 억류했다. 미국인 사망자는 52명이었고 일본인 사망자는 1,153명으로 추산되었다. (P105)
필립스의 대원들이 복무한 태평양 지역의 전쟁터에서, 1943년에 사고로 잃은 비행기가 전투 중에 잃은 비행기보다 여섯 배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로 아주 큰 손실이 생겼지만, 전투 손실이 비전투 손실을 넘어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명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육군 항공대 소속 장병 3만 5,946명이 비전투 상황에서 사망했다. 그중 가장 많은 사망 요인은 사고에 의한 추락이었다. 전투에서조차 항공병들이 전투 자체보다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AAF 의무감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15항공단에서 1943년 11월 1일부터 1945년 5월 25일까지 작전 중 사망한 장병들 중 70퍼센트가 적군의 공격이 아니라 비행하다가 사고로 숨졌다. (P148)
모든 미국 항공병은 난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 뒤로 날이 갈수록 일본은 더욱 잔인해졌다. 루이스가 속한 대대의 대원들 사이에서는 일본 영토인 마셜 제도의 콰절런 환초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콰절런 환초에서 전쟁 포로들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대대원들은 콰절런 환초를 ‘처형 섬’이라고 불렀다. 치명적으로 파손되어 일본군 주둔 지역으로 추락하던 B-24의 대원들 중 단 한 명만 낙하산 탈출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일본군의 잔혹한 명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일본군에게 잡힐까 두려워 차라리 비행기와 함께 추락해 죽는 쪽을 선택했다. (P162)
바다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회전하는 하늘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앞에 있는 구명정을 끌어당겨 머리와 가슴으로 밀었다.
기체가 심하게 돌더니, 다시 돌고, 또다시 돌았다. 비행기가 바다로 추락하기 직전, 루이스의 마음속에서는 단 하나의 생각이 고동쳤다. 여기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루이스는 요동과 깊은 침묵만 느껴졌다. 몸이 앞으로 내던져졌다. 비행기가 터지고 뭔가에 몸이 묶였다. 차가운 물이 때려대면서 온몸을 짓눌렀다. 그린 호넷 호는 코 부분과 왼쪽 날개가 최고 속도로 바다와 충돌해 푹 꺼지다가 폭발했다. (P210)
그는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세 명이나 살아남았다는 게 놀라웠다. 셋 다 비행기의 오른쪽에 있었다. 비행기가 왼쪽으로 충돌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닷속의 비행기 잔해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압 때문에 기절했고 이후로 비행기가 계속 가라앉으면서 수압이 더 높아졌을텐데 어떻게 깨어난 것일까?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몸에 묶인 전선을 풀고 빠져나온 것일까?
세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루이스는 계속 필립스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 지혈했다. 그린 호넷 호의 마지막 흔적, 즉 추락 이후 구명정 주위에 둥둥 떠 있던 가스와 유압액과 기름이 점점 사라졌다. 그 대신 수중에서 검푸른 형체들이 둥그렇고 유연한 대형을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납작하고 날카로운 형체 하나가 수면을 가르고 쓱 나타나더니 구명정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또 다른 상어가 합류했다. 상어들이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흰색과 검은색 띠가 있는 동갈방어가 상어들 옆에 딱 붙어 파닥거리고 있었다.
루이스가 보기에 청상아리로 짐작되는 상어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가장 작은 상어의 길이가 1.8미터 정도였다. 작은 상어의 두 배, 그러니까 구명정 길이의 두 배나 되는 상어들도 보였다. (P223)
필립스는 강인한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뿌리가 있었다. 루이스조차 몰랐던 점이다. 필립스 가족에 따르면, 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앙심이 깊었다. 부모가 심어주고 길러준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해결 방법을 알면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예전에 앨런에게 몇 번 말했다.’ 필립스의 아버지가 쓴 글이다. ‘그리고 자신의 기술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면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필립스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지만 바다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자신을 보호해주는 하나님을 떠올리며 구조의 손길이 가까워지고 절망이 멀어지는 듯 느꼈을 것이다.
루이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닥친 모든 극한상황을 재치와 임기응변과 투지를 발휘할 도전으로 여겼다. 그 결과 반항적인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모님과 고향 마을 전체가 루이스 때문에 늘 골치를 썩고 화낼 정도로 장난질과 못된 짓이 악명을 떨쳤다. 그는 이런 자잘한 성공을 통해 어떤 한계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극한 상황에 내던져진 루이스에게 반항의 대상은 절망과 죽음이었다. 루이스가 토런스의 공포라는 말을 들은 어린 시절과 똑같은 속성이 이제 인생 최고의 역경에 처한 그를 살아남도록 하고 있었다.
셋 다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서로 다른 운명을 결정짓는 듯했다. 루이스와 필립스가 품은 희망은 공포심을 쫓아버렸고 살아남기 위해 온힘을 다하도록 북돋았다. 그로 인한 성과가 있을 때마다 몸과 마음에 새로운 힘이 솟았다. 맥의 체념은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살아남으려는 루이스와 필립스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을수록 그의 무력감이 더욱 심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맥은 드물게 동참했는데, 그러면서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가장 쇠약해진 사람은 바로 맥이었다. 루이스와 필립스는 낙천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맥은 절망했다. 그들의 앞날은 각자의 태도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P252-253)
1942년 8월, 미군이 마셜 제도이 마킨 환초에 있는 일본 기지를 습격했다가 실패한 뒤 실수로 해병대원 아홉 명을 남겨두고 철수했다. 일본군에게 잡힌 그들은 사라졌다. 루이스는 그들이 콰절런 환초로 잡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미국인이 자신일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필립스와 루이스 외에는 포로가 없었다. 루이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P295)
[2]
그린 호넷 호의 추락으로 인해 루이스와 필립스는 식량이나 식수나 피신처 없이 표류하는, 육체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극한 상황에 빠졌다. 그런데 콰절란 환초의 경비병들은 루이스와 필립스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도 간직하고 있던 것을 빼앗았다. 그것은 존엄성이었다. 정신에서 가장 내밀한 무기인 자존심과 자부심은 인간성의 중심이다. 이것을 빼앗기면 인간성이 말살되며 사람들과 단절되고 배척받는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대우를 받은 사람은 엄청난 비참함과 외로움을 겪고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존엄성이 없으면 정체성이 사라진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스스로가 아니라 포획자 및 살도록 강요받은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일본군 포획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인간성이 말살되고 가치 없는 취급을 받았던 미국 항공병은 일본군 때문에 형성된 심리적인 상태를 “나는 말 그대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고 있었다”는 말로 설명했다. (P22-23)
이곳은 전쟁 포로수용소가 아니었다. ‘가치가 많은’ 포로를 독방에 가둬놓고 군사기밀을 털어놓을 때까지 굶기고 괴롭히고 고문하는 오푸나라는 이름의 비밀 심문 센터였다. 오푸나는 바깥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오푸나를 제멋대로 운영했다. 일본인들의 말에 따르면 오푸나에 억류된 사람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과 싸우는 전쟁에서 ‘무장하지 않은 전투원’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국제법이 전쟁 포로에게 부여한 권리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억류된 사람들이 ‘일본에 반하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면’, ‘규칙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좋은’ 대우를 받게 된다고 했다. 전쟁이 진행된 전 기간 동안, 억류된 연합군 소속 군인 1,000여명이 오푸나에 강제로 끌려왔고 그중 많은 이들이 수년간 갇혀 있었다. (P37)
루이스를 비롯한 억류자들은 사이판 섬에 대한 소식을 곰곰이 생각하던 때에, 연합군의 진격으로 생길 무시무시한 상황을 짐작도 못했다. 그달에 미국은 사이판 섬과 이웃한 티니안 섬을 공격했고, 티니안 섬에는 노역자로 강제 징용된 한국인 5,000명이 억류되어 있었다. 미군이 침입하면 한국인들이 미군에 합류할까 걱정된 일본인들은 전원 사살 방침을 실행했다. 그들은 한국인 5,000명을 모두 살해했다. (P86)
루이스가 다른 전쟁 포로들에게 들은 새(와타나베)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루이스가 밖에 나가기가 무섭게 새가 그를 발견하고는 하지도 않은 위반을 했다고 격노해서 덤벼들었다. 다음 날도 폭력을 휘둘렀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폭력이 이어졌다. 미친 상등병은 오모리에 있는 전쟁 포로 수백명 중에서 전 올림픽 출전 선수인 루이스에게 유독 집착했고, 그를 ‘제1의 죄소’라고 불렀다. 루이스는 사람들 틈에 끼여 몸을 숨겼지만 새는 항상 그를 찾아냈다. 루이스는 “오모리에서 며칠이 지난 뒤부터 나는 정글에 풀린 사자를 찾는 심정으로 그의 모습을 찾았다”고 말했다. (P112-113)
5분이 지나고, 다시 10분이 지났다. 루이스의 팔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감각이 사라졌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기둥이 기울어졌다. 경비병이 총으로 찌르자 루이스는 몸을 똑바로 폈다. 머리로 가는 피가 좀점 줄어들어 혼란스러웠고 생각이 흐릿해졌으며 수용소가 빙빙 돌았다. 의식이 사라지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만 제대로 생각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는 날 무너뜨리지 못해.’ 건너편 구내에 있던 새의 얼굴에서는 이미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힘이 다 빠진 지 한참 지났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멀쩡하게 서 있었다. 훗날 루이스는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났어요.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눈앞의 모습에 새는 동요했다.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루이스를 향해 달려갔다. 새의 주먹이 루이스의 배에 힘껏 꽂혔다. 고통스러움에 루이스의 몸이 절로 굽어졌다. 기둥이 떨어지면서 루이스의 머리를 쳤다. 루이스는 땅으로 털썩 무너졌다.
루이스는 깨어났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웨이드를 비롯한 전쟁 포로들과 경비병들이 그의 주위에 쭈그리고 있었다. 새는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마지막 몇 분 동안의 기억이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웨이드는 루이스가 쓰러졌을 때 시계를 보았다.
루이스는 37분 동안이나 기둥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P196-197)
그동안 일본은 동부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극악무도한 전후 행위를 일삼았고 충격적일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중심에 전쟁 포로들이 있었다. 일본은 미국인과 영국인과 캐나다인과 뉴질랜드인과 네덜란드인과 오스트레일리아인 13만 2,000여 명을 억류했다. 그중에서 4분의 1이상인 약 3만 6,000명이 사망했다. 특히 미국인 사망자가 많았다. 일본이 억류한 미국인 3만 4,648명 중에서 37퍼센트 이상인 1만 2,935명이 사망했다. 한편 나치와 이탈리아가 억류한 미국인 중 사망자는 단 1퍼센트였다. 일본은 죽음의 행진에서 전쟁 포로 수천 명을 살해했고, 또 다른 수천 명을 죽을 때까지 강제 노역에 동원했으며, 그중에서도 1만 6,000명이 강제 동원된 아시아인 10만 명과 함께 버마-샴 철도 건설 현장에서 죽었다. 일본은 또 다른 전쟁 포로 수천 명을 때리고 불에 태우고 찌르고 몽둥이를 휘둘러 죽이거나, 식인 의식을 행하면서 산 채로 잡아먹었다. 또한 극도로 부족한 배급량과 부패한 음식 및 물 때문에 전쟁 포로 수천 명이 굶어 죽었고 쉽게 예방할 수 있었던 병에 걸려 죽었다. 보르네오 섬 산다칸 수용소에서 억류된 전쟁 포로 2,500명 중에서 1945년 9월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수용소에서 도망친 단 여섯 명이었다. 이마저도 망연자실한 통계인데, 심지어 여기에는 현장에서 잡혀 살해당하거나 콰절런 환초 같은 비밀 장소로 끌려가 아무도 모르게 살해당한 전쟁 포로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P224-225)
신체 손상은 영구적이었고 쇠약하게 만들었으며 때로 치명적이었다. 1954년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전쟁 후 2년간 태평양전쟁 포로들의 사망률은 지속되었다.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한 추적 조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고 22년 후에 질병이 있는 태평양전쟁 포로들의 입원율이 유럽 전쟁 포로들의 입원율보다 두 배에서 여덟배 높았다. (P273)
신시아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설득하자 마지못해 루이스는 재향군인병원의 상담사를 찾아갔다. 그는 전쟁과 악몽에 대해 이야기했고, 집을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사납게 날뛰는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두세 번 상담을 받다가 그만두었다.
어느 날, 루이스는 신문을 펼쳤다가 관심을 확 끄는 기사를 발견했다. 태평양전쟁 포로였던 사람이 가게에 갔다가 전시에 자신을 억류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을 보았다. 그는 경찰서에 신고했고, 그 사람은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루이스가 그 기사를 읽는 동안 내면의 모든 분노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새를 찾아내어 제압하고 유혈이 낭자한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 다음 양손으로 목을 꽉 움켜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환상 속에서 루이스는 새에게 주는 고통을 음미하며, 자신이 느꼈던 모든 고통과 공포와 무력함을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이 느끼게 하며, 천천히 죽였다. 열의에 한 절박감에 맥박이 마구 뛰었다.
루이스는 새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일본에 가면 새를 추적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추적은 그의 인간성을 소멸시키려는 새의 끊임없는 노력에 대한 단호한 대답이 될 터였다. ‘나는 여전히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구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루이스는 올림픽 우승이라는 꿈을 대신할 목표를 찾아냈다. 그것은 새를 죽이는 것이었다. (P283)
전쟁이 끝난 뒤 몇 년 동안 루이스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여행, 즉 자신을 망쳐놓은 사람을 살해하러 가는 계획에 집착했다. 그러나 그에게 살해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에 답하기 위해 왔다.
루이스는 자신을 고문했던 모든 일본인이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이곳 수가모 감옥에 갇혀 있다고 들었다. 이제 그는 고통 없이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새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계속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과연 그들을 다시 봐도, 그가 찾아낸 마음의 평화가 무너지지 않고 지속될까? 그는 마음 한편에 두려움을 느끼며, 수가모 감옥에 가서 그들 앞에 서기로 결심했다.
전날 저녁 루이스는 신시아에게 편지로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P318-319)
1948년 12월 24일. 점령 기간이 서서히 종료되어가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은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했던 사람들에 해당되는 A급 전쟁범죄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 열일곱 명에 대해 ‘크리스마스 사면’을 발표했다. 피고들이 석방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엄청난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한때 피고였고 수많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징집해 강제 노역에 동원한 노부스케 기시는 1957년에 일본 총리가 되었다. 미국 관리들은 피고들이 유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낮다는 말로 석방을 정당화했지만 그 해명은 미심쩍었다. A급 전쟁범죄 피고 20명 이상이 이미 재판을 받아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터였다. 일본에서조차 많은 피고들이 유죄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P336)
1958년에 이르자 그때까지 처형되지 않은 모든 전쟁범죄자가 석방되었고, 그해 12월 30일에 모두 사면되었다. 수가모 감옥은 허물어졌고, 일본에서 전쟁 포로들이 겪었던 기나긴 시련은 세상의 기억에서 점차 지워졌다. (P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