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Sep 10. 2023

카이 버드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영화 <오펜하이머>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는 퓰리처 상 수상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년 4월 22일~1967년 2월 18일)

1925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원자 구조를 연구했다. 1927년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와 스위스 취리히 과학 센터 방문 연구 후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물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1930년대에 버클리를 미국 양자 물리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지휘했으며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원자력 위원회 일반 자문 회의 의장을 지냈다. 공산당 동조 행위와 수소 폭탄 제조 반대 발언으로 인해 1954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보안 청문회에 회부되어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당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3년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해 복권시켰다. 1947년부터 1966년까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다 이듬해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핵무기, 과학, 전후 문화의 관계에 대한 강연을 모은 『열린 마음』이 있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에 태어나 1967년에 죽었다. 그는 63년의 일생 동안 핵무기의 개발과 세계사의 대전환을 낳은 과학 혁명에 주요 인물로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로스앨러모스 과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았다.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로스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소에서는 원자 폭탄의 설계와 첫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와 과학 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의 물리학 교수였던 1930년대에 그는 공산당 활동에 깊이 관여했던 자유주의 성향의 공산당 동조자(fellow traveler)이기는 했지만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다. 전쟁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자문 위원회의 의장직을 비롯한 여러 정부 자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결코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도권 과학자로서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 시기의 활동으로 보아 그는 “군축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1953년 무렵이 되자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된다. 미국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의회, 군부를 비롯해 막 임기를 시작하던 아이젠하워 행정부 내에서 미국의 핵 능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세력이 동맹을 결성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들은 눈엣가시 같은 오펜하이머를 모든 정부 자문 위원회로부터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핵 증강 동맹은 1930년대 당시 오펜하이머의 사회 활동들과 전쟁 직후 군비 축소를 옹호했던 그의 주장들을 증거로 그가 친소파인 것이 분명하며 정부 자문 활동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FBI는 오펜하이머를 정치적으로 공박하기 위해 8,000쪽이 넘는 증거 자료를 수집했다. 그 증거들 중에는 불법 도청 기록과 뻔뻔한 거짓말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증거를 살펴보면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라 미국의 애국자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P7-8)     

그는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고전인 3,000쪽짜리 <로마 제국 쇠망사>를 통독했다. 그는 또한 불문학 작품을 폭넓게 읽었고, 자작시를 쓰기 시작해 몇편은 학생 잡지 <하운드와 혼>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스미스에게 “나는 영감이 떠오를 때면 시구를 끄적입니다. 선생님께서 제대로 보셨듯이, 이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의도를 가지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러기에 적절한 것도 아닙니다. 이런 자위행위의 결과들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은 범죄일 테지요. 나는 이것들을 서랍에 넣어 둘 생각이지만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해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출간되었고, 오펜하이머는 그것을 읽고 엘리엇의 빈약한 실존주의에 즉시 공감했다. 오펜하이머의 시 역시 슬픔과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하버드 생활 초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먼동은 우리의 존재를 욕망으로 채운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빛은 우리와, 우리의 아쉬움을 배반한다.

하늘의 사프란이 

바래어 무색으로 변할 때,

그리고 태양이 

메마르고 커져 가는 불덩이가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

우리는 우리를 다시 찾는다.

각자 자신만의 감옥 속에서 

희망없이 준비된

다른 사람들과의

담판을 위해                              (P63-64)     

친구들과 가족들이 우려하는 가운데, 오펜하이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그는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고 뚱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그는 자신의 지도 교수 블래킷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펜하이머는 블래킷을 좋아했고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블래킷은 실험 물리학자였고, 실험실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며 오펜하이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블래킷은 별 생각 없이 그랬을지 모르지만, 불안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던 오펜하이머에게는 이것이 근심의 원천이 되었다. 

1925년 늦가을에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머지 너무나 멍청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블래킷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불만이 쌓이자, 그것은 곧 강한 질투심으로 이어졌다. 오펜하이머는 실험실에서 구한 화학 약품을 이용해 만든 ‘독’을 사과에 발라 블래킷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와이먼은 나중에 “그것이 상상의 사과였든 진짜 사과였든, 그의 행동은 질투심의 발로였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블래킷은 사과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오펜하이머가 두 달 후 퍼거슨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자신이 지도 교수에게 독을 먹이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그는 실제로 청산가리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교수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오펜하이머가 발랐다는 ‘독’이 치명적인 것이었다면, 그의 행동은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사태 전개를 보면, 그 정도로 심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펜하이머는 아마도 구토를 나게 하는 정도의 물질을 사과에 발랐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는 퇴학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P84-85)    

 

1926년 초의 어느 날, 오펜하이머는 젊은 독일인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읽고 나서, 전자의 거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가 원자의 구조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다. 슈뢰딩거는 전자들이 원자핵 주변을 둘러싼 파동처럼 행동한다고 제안했다. 하이젠베르크처럼 그는 원자를 수학적으로 묘사하려 했고, 자신의 이론을 양자 역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두 논문을 읽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과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사이에 무언가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것들은 사실 똑같은 이론의 두 가지 표현 방식이었다. 마침내 또 한번의 울음을 넘어 알이 등장했던 것이었다. 

양자 역학은 이제 젊은 러시아 물리학자 페테르 카피차의 이름을 딴 비공식 물리학 토론회인 카피차 클럽의 중요한 화제로 떠올랐다. 오펜하이머는 “나는 (양자 역학에)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P95)     

오펜하이머의 학생 웬델 퍼리는 “라비는 위대한 실험가였지만 이론가로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난해한 물리학의 세계에서 라비는 깊은 사색으로, 오펜하이머는 다양한 측면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둘을 붙여 놓으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었다. 

그들의 우정은 물리학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라비와 오펜하이머는 모두 철학, 종교, 예술 등에 관심이 있었다. 라비는 “우리는 처음부터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관계는 어린 시절 형성되어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유지되는 그런 것이었다. 라비는 “오랜만에 다시 만나도 편안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P134)     


나는 앞으로 30년 동안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요동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세상을 거부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1931년 8월 10일                (P137)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가 오펜하이머를 교수로 임용한 것은 대학원생들에게 새로운 물리학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오펜하이머 자신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가 학부생들을 가르쳐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양자 역학에 대한 대학원 과정 수업 첫 시간에, 오펜하이머는 곧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 방정식, 디렉의 통합 이론, 장 이론, 그리고 파울리의 최근 업적인 양자 전기 역학 등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나중에 “나는 비상대성 양자 역학에 대해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양자적 존재들이 실험 환경에 따라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 수도 있다는 개념인 파동-입자 이원성에서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이 패러독스를 가능한 한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간다는 불평이 들어오자, 그는 마지못해 속도를 줄였지만 곧 학과장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진도가 너무 느려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P140-141)     

1939년 9월 1일에 오펜하이머는 또 다른 학생인 하틀랜드 스나이더와 <연속적 중력 수축에 관해>를 발표했다. 역사적으로 이 날은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날로 훨씬 더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논문이 발표된 것 역시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제러미 번스타인은 그것을 “20세기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물리학자들은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가 1939년에 20세기 물리학으로 진입할 수 있는 중요한 문 하나를 활짝 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의 논문은 거대한 별에서 연료가 다 타 버리면 어떻게 될지를 묻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이 별은 백색 왜성(어느 질량 이상의 중력을 가진 별)으로 붕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중력 때문에 수축을 계속할 것이었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용해, 별이 극도로 수축한 결과 생겨나는 무한한 중력 때문에 광파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멀리서 관측한다면 그와 같은 별은 말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는 “오직 중력장만이 남게 된다.”라고 썼다. 그들은 블랙홀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었다. 이것은 흥미롭지만 기묘한 개념이었다. 이 논문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무시당했고, 그들의 계산 결과는 오랫동안 수학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었다.        (P161-162)      

오펜하이머는 20대에 이미 세속적인 것들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는 과학자로서 물질 세계를 다루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그가 순수한 영혼의 세계로 탈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종교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사와 감각적인 쾌락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지식인에게 딱 맞는 철학을 제공하는 듯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던 산스크리트 경전은 메가두타(Meghaduta)였는데, 이는 나체 여인의 무릎에서 히말라야 산맥의 드높은 산봉우리에 이르는 사랑의 지리학에 대해 논하는 시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프랭크에게 “나는 라이더와 함께 메가두타를 읽었어, 즐거웠고, 약간은 쉬운 편이었으며, 완전히 매료되었어.”라고 썼다. 그가 특히 좋아하던 바가바드기타의 또 다른 부분인 사타카트라얌(Satakatrayam)은 다음과 같은 운명적인 구절을 담고 있었다.

무력으로 적들을 쳐부숴라.......

과학을 통달하고

여러 가지 기술들도......

이 모든 준비를 해도, 숙명의 힘은

그것만으로 예정되지 않은 것을 막아내며 

운명의 방향으로 이끈다.                   (P169-170)  

    

오펜하이머가 1936년 봄 진 태트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22세였다.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집주인 워시번이 샤스타가 집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만났다. 진은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던 스탠퍼드 의과 대학의 1학년 과정을 막 마칠 무렵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그해 가을 자신이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라고 회고했다.      (P183)     

그러나 많은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진 역시 그리 좋은 이데올로그는 아니었다. 그녀는 로버트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열성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아.”라고 썼다. “그렇게 되려면 항상 공산주의자처럼 숨쉬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텐데.” 더군다나 그녀는 프로이트식 심리 분석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당시 공산당 내에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이와 같은 지적 분열이 진을 혼란에 빠지게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의 들쭉날쭉한 공산당 활동은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어린 시절 그녀는 성공회 교회에서 배운 종교 교리에 반발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자신이 매일 세례를 받은 앞이마를 닦아 내려 문질렀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든 형태의 종교적 ‘허튼소리(claptrap)'를 싫어했다). 진은 정치 행동을 혐오하는 심리학자들에게 분개하면서도 “신성함과 개별 영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정신 분석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거부감의 한 표현이다.” 그녀에게 심리학 이론은 “특정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외과 수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진은 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한 물리학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세련된 여인이었다. 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모든 면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어요.”           (P186)     


오펜하이머는 1954년 심문관들에게 “1936년 무렵에 나의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고모와 사촌들 몇 명)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P188)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동생의 공산주의 활동을 가벼운 일탈 정도로 표현했다. 프랭크는 당원이기는 했지만 다른 많은 일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음악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다른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여름에는 대개 목장에서 일하며 시간을 보냈지요.” 오펜하이머는 “그는 그 당시에 그다지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산당에 가입하고 나서 얼마 후 프랭크는 일부러 버클리로 찾아가 형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1954년에 “나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라고 증언했으나, 구체적으로 왜 못마땅하게 여겼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당적을 갖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1937년에 버클리의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그것은 큰 일이 아니었다. 오펜하이머는 “당시에는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 범죄 행위라든가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은 거의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대학교가 공산당과 연계가 있는 사람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했고, 프랭크는 막 학교에 자리를 잡으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프랭크는 오펜하이머와는 달리 아직 종신 재직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프랭크의 결정을 못마땅해 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동생이 현명하지 못하게 억지를 썼다거나, 급진적인 그의 아내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 자신도 정치적으로 각성하긴 했지만 공산당에 가입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반면 프랭크는 이를 공식화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형제는 유사한 정치적 감성을 지녔지만, 프랭크는 형에 비해 훨씬 충동적이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여전히 오펜하이머를 우러러보았지만, 서서히 오펜하이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려 하고 있었다. 결혼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공산당 가입 결정 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P218-219)    

 

1939년 8월 24일, 소련은 바로 하루 전날 나치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 발표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1주일 후, 독일과 소련이 동시에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동료 물리학자인 파울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들에 대해 논평했다. “찰리(로리첸)는 나치스와 소련이 그럴 줄 알았다면 풀이 죽겠지만, 나는 독일군이 이미 폴란드에 상당히 진군해 들어갔으리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내기를 걸지 않겠어. 고약한 일이야.”

독-소 불가침 조약은 좌파 지식인 서클에서 활발한 토론을 촉발시켰다. 수많은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나치스와 손을 잡은 소련에 실망한 나머지 공산당을 탈당하기도 했다. 슈발리에의 상당히 절제된 표현에 따르면, 독-소 조약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슈발리에는 소련이 전략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며 계속해서 공산당을 변호했다.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 투데이> 1939년 9월호에 실린 공개서한에 다른 400여 명과 함께 서명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소련과 전체주의 국가들이 근본적으로 똑같다는 엄청난 거짓말”에 대해 반박했다. 오펜하이머는 여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P231)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가 본질적으로 당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좌파 지식인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가 오펜하이머와의 친분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서 슈발리에는 무언가 다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1948년에 그는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공산당의 “비공개 조직”의 실질적 지도자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의 대략적인 초안을 잡았다. 1950년에 슈발리에는 출판사를 잡지 못하고 작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하지만 1954년,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가 끝나고 나서 그는 작업을 재개했고, 1959년 퍼트남 출판사가 그 소설을 <신이 되려고 한 사나이>라는 무거운 제목으로 출판했다.      (P241)    

 

1939년 말 무렵이 되면 오펜하이머와 진의 관계는 거의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녀를 사랑했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는 두 번이나 결혼에 상당히 근접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물 공세를 퍼붓는 그의 습관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진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떠받드는 것을 불편해했던 것이다. 어느 날 진은 오펜하이머에게 “이제 꽃은 사오지 말아요, 오펜하이머, 제발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 번에 그는 또 꽃다발을 사 들고 왔다. 진은 꽃다발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같이 있던 친구에게 “가라고 그래. 내가 여기 없다고 그래.”라고 말했다.               (P247)     


로런스가 화를 낸 것은 단지 자신이 운영하는 연구소의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려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옛 친구가 소중한 시간을 좌익 정치 활동에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런스는 예전부터 계속해서 오펜하이머에게 “좌익 나부랭이 활동들”을 그만두라고 잔소리를 해 왔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다시 한번 특유의 능변으로 과학자들은 사회의 “약자들”을 도울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P281)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미국 곳곳의 수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르면 1939년 2월부터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문제에 아직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1939년 9월 1일), 레오 질라르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질라르드가 작성한) 편지에 서명하게 했다. 질라르드는 이 편지에서 대통령에게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폭탄 단 1개를 배로 실어 와 항구에서 폭발시키면 항구 전체는 물론이고 주변 지역까지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불길하게도 그는 독일이 이미 그와 같은 폭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후 그곳의 광산에서 채굴된 우라늄의 수출을 금지”했던 것이다.           (P287-288)     

베테는 “로스앨러모스에서의 오펜하이머는 내가 알던 오펜하이머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우선 전쟁 전의 오펜하이머는 어딘가 소심한 구석이 있었어요. 로스앨러모스에서의 오펜하이머는 결단력 있는 관리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베테는 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버클리에서 알던 “순수 과학자”는 “자연의 깊은 비밀”을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오펜하이머는 기업 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로스앨러모스에서 그는 대규모 기업과 같은 거대한 조직을 지휘하고 있었다. 베테는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다른 태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역할에 맞추어 자신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라고 말했다.   (P339)     

1943년 7월 20일, 그로브스는 맨해튼 프로젝트 보안 부서에게 오펜하이머의 기밀 취급 인가를 발급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정보와 무관하게 추진될” 것이었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보안 장교는 패시만이 아니었다. 그로브스의 보좌관인 케네스 니콜스 중령은 오펜하이머에게 비밀 취급 인가가 승인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면서 “앞으로는 수상한 친구를 만나는 것을 피하고, 로스앨러모스 밖으로 나갈 때면 우리가 항상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라고 경고했다. 니콜스는 이미 오펜하이머를 강하게 불신하고 있었다. 이는 단지 그의 공산주의 과거 때문만이 아니라,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에 “수상한 사람들”을 고용함으로써 보안을 위협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P365)   

  

보어는 이 만남 이후에 독일이 원자 폭탄을 이용해 전쟁을 끝내려 한다는 커다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뉴멕시코에서 그는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에게 이 두려움을 전했다. 보어는 또한 하이젠베르크가 그렸다고 알려진 폭탄의 개념도를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는 그림이 폭탄이 아니라 우라늄 반응로를 나타낸 것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베테는 그림을 보고 “맙소사, 독일인들이 런던에 반응로를 떨어뜨리려 하고 있군.”이라고 말했다. 독일이 폭탄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스러웠지만, 그들이 대단히 비실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마친 후, 보어조차 이런 “폭탄”디자인은 실패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음 날,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에게 폭발하는 우라늄 반응로는 “군사 무기로서는 별 효용이 없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냈다.     (P418)     


바이스코프는 보어가 자신에게 “폭탄은 무서운 물건일지 모르나, 또한 ‘위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보어는 자신의 우려하는 바를 알리는 글을 오펜하이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2일 무렵에 그는 만족할 만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보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 역시 명징하고 예언적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

보어는 원자 폭탄이 언제고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인류 생존 위협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국제 관계에서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앞으로 다가올 핵의 시대에는 비밀주의를 추방하지 않으면 인류는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보어가 상상한 “열린 세계”는 유토피아적인 꿈만은 아니었다. 이 신세계는 이미 세계 과학 공동체에 존재하고 있었다.   (P419-420)     

바이스코프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측되자 “우리는 전쟁 후 세계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그들은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만나 “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세상에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것이 어떻게 응용될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가?”등과 같은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비공식 모임들은 서서히 공식 회의로 발전했다. 바이스코프는 “우리는 이런 모임을 강의실에서 열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곧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반대했죠. 그는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고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바이스코프는 40명의 과학자들이 ‘세계 정치에서의 원자 폭탄’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모였던 1945년 3월의 회의를 회고했다.         (P441)     


1965년 NBC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우리는 이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습니다. 대부분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나는 힌두교 경전이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기억했습니다. 비슈누 왕자에게 그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비슈누는 팔이 여러 개 달린 형태를 취하고서는 ‘이제 나는 죽음이,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라고 기억했다. 오펜하이머의 친구인 에이브러햄 페이스는 이 인용문이 오피의 “승려 같은 과장”처럼 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건, 그의 주변 인물들이 있는 그대로의 행복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로런스는 그의 기사에서 그의 감정을 묘사했다. “큰 폭발음이 거대한 섬광이 번쩍한 지 약 100초 후에야 울렸다. 새로 태어난 세상의 첫 울음이었다. 그것은 침묵에 잠긴 부동의 실루엣에 생명을 불어넣고 목소리를 주었다. 고함 소리가 공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껏 땅에 선인장처럼 뿌리 내린 듯 서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로런스는 그들이 ”서로 등을 두드리며 행복한 아이들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라고 보고했다. 폭발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키스티아콥스키는 오펜하이머를 끌어안고 10달러를 내놓으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지갑이 비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다음에 주겠다고 말했다.

통제 센터를 떠나면서 오펜하이머는 베인브리지와 악수를 나눴다. 베인브리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제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본부로 돌아와서 오펜하이머는 동생 프랭크와 패럴 장군과 함께 브랜디를 나눠 마셨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그러고 나서 그는 로스앨러모스에 남아 있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키티에게 메시지를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에게 이제 침대보를 갈아도 좋다고 전해 주게.”           (P472-473)     

트리니티 시험 후 며칠 간, 그의 감정은 변하기 시작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원들은 더 이상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트리니티 시험이 성공한 이상 “장치”는 무기가 될 것이고, 무기들은 군대의 통제를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비서 앤 윌슨은 육군 항공대 장교들과 가졌던 수차례의 회의를 기억했다. “그들은 목표물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목표지 후보에 오른 일본 도시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앤은 “오펜하이머는 그 2주 동안 대단히 조용히 명상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는 그가 어떤 일이 있을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트리니티 시험 다음 날, 오펜하이머는 앤에게 슬프고 침울하기까지 한 말을 던져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아주 우울해졌습니다.”라고 윌슨은 말했다. “그만큼 우울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가 집에서 기술 구역으로 걸어오고, 내가 간호사 숙소에서 출발하면 중간 어디선가 만나고는 했지요. 그날 아침,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저 불쌍한 사람들, 저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일본인들을 걱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던 그는 자포자기한 듯했다.       (P478)     


모리슨은 에놀라 게이가 폭탄을 투하하고 나서 31일이 지났을 때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모리슨은 “반지름 약 2킬로미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폭탄의 열기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뜨거운 섬광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이상하게 타올랐습니다. 그들은(일본인들은) 우리에게 줄무늬 옷의 모양대로 화상을 입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경상을 입은 채로 기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이나 몇 주 후 폭발의 순간 방출된 라듐 같은 방사선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P488)     


오펜하이머는 1945년 말 상원 위원회에서 “우리는 잘 익은 과일이 많이 달린 나무를 세게 흔들어 레이더와 원자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전쟁 동안에) 우리는 이미 알려진 지식을 광적으로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이 “물리학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멈추게 했지요.” 그는 전쟁 중에 “학생을 길러내는 것을 포함해 물리학 분야의 전문 활동을 완전히 멈추었음을 볼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은 또한 과학에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바이스코프가 나중에 썼듯이 “전쟁은 과학이 모두에게 가장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물리학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P490)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P501)     


트루먼에게, 오펜하이머는 지나치게 불확실했고, 애매했으며,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이 자신의 메시지가 갖는 급박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감지한 오펜하이머는, 긴장한 듯 손을 비비며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통령 각하,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트루먼을 화나게 했다. 트루먼은 나중에 데이비드 릴리엔털에게 “(오펜하이머에게) 피는 내 손에 묻어 있다고 말해 주었어. 뒤처리는 나에게 맡기라고 해 주었지.”라고 말했다.   (P505-506)   

  

아인슈타인은 왜 오펜하이머가 그토록 워싱턴 정계의 눈치를 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정부에 비밀 취급 인가를 내 달라고 요청할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본능적으로 정치인, 고위 장성을 비롯한 권력자들과의 만남을 싫어했다. 오펜하이머가 논평했듯이, “그는 정치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능력이 없었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유명세와 권력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즐겼다면, 아인슈타인은 누군가에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자리를 불편해했다. 1950년 3월의 어느 날 저녁, 아인슈타인의 71세 생일에 오펜하이머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걸어갔다. 아인슈타인은 “누군가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진 다음의 인생은 조금 낯설게 마련이지.”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그 어느 누구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P577-578)     


트루먼은 1949년 10월까지 수소 폭탄의 가능성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 그것에 대해 듣게 되자 대통령은 큰 관심을 보였다. 오펜하이머는 항상 회의적이었다. 그는 코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 빌어먹을 것이 가능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설령 가능하더라도 목표 지점까지 그것을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소달구지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너무 커서 비행기에 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원자 폭탄보다 수천 배 더 파괴적인 무기가 갖는 윤리적 함의에 당황한 그는 수소 폭탄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를 바랐다. 원자(핵분열) 폭탄보다 더 끔찍한 수소(핵융합) 폭탄은 핵무기 경쟁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 분명했다. 핵융합의 물리학은 태양 내부의 반응을 본뜬 것이었고, 이는 핵융합 폭발에는 물리적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지 중수소를 더하기만 하면 더욱 큰 폭발을 얻을 수 있었다.      (P633)     


1945년 9월에 이미 오펜하이머는 콤프턴, 로런스, 페르미와 함께 참여했던 과학 자문 특별 위원단에서 비밀 보고서를 쓴 바 있었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현재 상황에서 (수소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이는 권고일 뿐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윤리적 우려도 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콤프턴은 모두를 대표해 헨리 윌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수소 폭탄을) 개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하느니 차라리 전쟁에서 패배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P634)    

 

케넌은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생각나는 것은 그가 투명성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라고 회고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케넌에 따르면 오펜하이머의 주장은 “그들(소련인들)과 미래의 문제와 폭탄 사용에 대한 최대한 솔직하게 의논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케넌은 핵무기가 본질적으로 사악한 학살용 무기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어느 누구도 득볼 것이 없는 무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이런 무기를 개발함으로써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P653)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1953년                (P697)     


히로시마 이후로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자신의 “정글 속의 야수”가 나타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추적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정글 속의 야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트라우스였다.            (P698)     


'솔직함‘을 강조하는 오펜하이머의 연설은 백악관의 허가를 받은 직후인 1953년 6월 19일자 <포린 어페어스>에 출판되었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오펜하이머를 인용하며, ’솔직함‘이 없으면 미국인들은 “합리적인 국방 정책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오펜하이머는 오직 대통령만이 “핵문제를 둘러싼 전략적 상황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수많은 거짓말들을 넘어설 수 있는 권위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P706-707)     


스트라우스는 안도했다. 하지만 그는 후버에게 “원자력 에너지 프로그램에 오펜하이머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매우 걱정스럽다. 그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오펜하이머를 완벽하게 축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P715)      

 

수많은 루스벨트 뉴딜주의자들처럼 오펜하이머는 한때 넓은 의미에서 좌파였고, 인민 전선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수많은 공산당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점차 소련 체제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났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진보주의적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 그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당시 그는 조지 마셜, 딘 애치슨, 그리고 맥조지 번디와 같은 저명한 외교계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두 팔 벌려 받아들였다. 그의 몰락은 결국 진보주의의 몰락이었고, 진보주의 정치인들은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음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꼭 첩보 활동이 아니더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더라도, 미국의 핵무기 의존이라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954년 오펜하이머에 대한 보안 청문회는 냉전 초기에 미국의 공공 영역이 급속히 좁아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P831)     


많은 미국인들이 오펜하이머를 극단적인 메카시즘에 걸려든 과학자이자 순교자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1954년 말 컬럼비아 대학교는 그에게 대학 설립 200주년 기념 강연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연은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의 메시지는 암담했고 비관적이었다. 이전에 그는 리스 강연을 통해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노력이라는 과학의 미덕을 칭송했지만, 이제 그는 대중의 감정이라는 사나운 바람과 싸우는 지식인들의 외로운 조건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피상성의 악함을 알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들, 즉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의 친구들, 전통, 그리고 사랑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와 생각을 달리한다면, 또는 우리 눈에는 추악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피곤함과 문제들로부터 달아나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P841-842)     


그가 40년 전 코르시카에서 프루스트를 읽으며 배운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한 것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는 것이다. 무관심하기는커녕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타인들에게 끼친 고통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죄책감에 빠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책임감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임감을 한번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안 청문회 이후로 그는 무관심이라는 ‘잔인함’에 대항해 싸울 능력이나 동기를 잃은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라비가 옳았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죽였어요.”             (P885-886)        

 


이전 10화 제시카 브루더의 <노마드랜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