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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10. 2023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영화 <맨스필드 파크> 2007년

영화 <맨스필드 파크>(1999)     

1.노리스부인

2.레이디 버트럼 –폴, 에드먼드, 마리아, 줄리아

3.프라이스 부부-윌리엄, 페니, 수잔, 벳시...

4.그랜트 목사 부부-헨리, 메리     

웅장한 저택 역시 아이한테 놀라울지언정 위안은 되지 못했다. 방들은 마음 편히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손 닿는 것마다 깨뜨릴까 봐 겁이 난 아이는 이런저런 끊임없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조심조심 걸어 다니다가, 수시로 제 방으로 물러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식구들은 이 어린애가 자신의 유별난 행운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라고들 했지만, 정작 아이는 밤에 거실에서 물러나면 흐느끼다 잠드는 것으로 나날의 슬픔을 마감했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이 지났으나, 아이의 조용하고 삼가는 태도 탓에 아무도 아이의 슬픔을 짐작하지 못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둘째 아들인 에드먼드가 다락방 계단에 앉아 우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아니 우리 사촌, 무슨 일이야?” 그는 빼어난 품성답게 더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곁에 앉아 울다가 들켜 부끄러워하는 페니의 마음을 달래 주고 무슨 일인지 털어놓으라고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어디 아픈가? 아니면 누구한테 야단을 맞았나? 아니면 마리아나 줄리아와 싸웠나? 수업하다 모르는 거라도 있나? 그건 내가 설명해 줄 수 있다. 요컨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다주거나 대신해 줄 수도 있다.’ 한참이 지나도 “아녜요, 아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녜요, 고맙습니다.”라는 답변밖에 듣지 못했으나, 그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패니의 본가 쪽으로 화제를 돌리자 더 심하게 흐느끼는 패니를 보고 슬퍼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이를 달래려고 애썼다. 

“우리 패니가 엄마와 떨어져서 슬픈 거구나.” 그는 말했다. “아주 착하네, 그렇지만 네 곁에는 너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친척과 친구들이 있잖니. 우리 같이 파크에 산책하러 갈래? 거기서 네 형제자매들 이야기를 해 주렴.”           (P25-26)     

“예, 불쌍한 숙모님은 기혼 상태를 좋아할 이유가 별로 없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직접 관찰한 바로도 결혼은 책략이에요. 어느 집안과 혼사를 맺으며 특정한 이득을 기대하거나 아니면 사람 자체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하다고 굳게 믿고 결혼했지만, 결국은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봤는데요! 이게 속은 게 아니고 뭐예요?”

“세상에, 우리 철없는 동생, 여기에는 상상도 좀 끼어 있지 싶군. 미안하지만,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네. 자네는 반쪽만 본 거야. 나쁜 면만 보고 결혼이 주는 위안은 못 본 거야. 어떤 결혼이든 사소한 갈등이나 실망이야 물론 있겠지. 결혼하면서 상대방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기도 쉽고, 그렇지만 사람은 행복해지려는 계획 하나가 실패로 돌아가면 또 다른 계획을 도모하는 법이야. 첫 번째 계산을 잘못했다면 두 번째 계산은 더 잘하게 되고, 결국 우리는 어딘가에서 위안을 찾아내는 거야. 그러니 공연히 못된 심보로 남의 일을 두고 침소봉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메리, 당사자들보다 오히려 더 속아 넘어가는 셈이지.”

“멋져요, 언니! 언니가 기혼자로서 보여주는 ‘에스프리 뒤코르’가 참 존경스럽네요. 나도 아내가 되면 꼭 언니처럼 충성을 다할 생각이에요. 내 지인들도 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도 골치 아플 일이 줄겠죠.”

“너도 네 오빠 못지않게 상태가 심각하구나, 메리. 그렇지만 둘 다 우리가 고쳐 줄게. 맨스필드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히 고쳐질 거야. 그러면서도 걸려드는 일 따윈 없을 거고. 우리하고 함께 지내자. 그러면 우리가 고쳐 줄게.”             (P69-70)    

 

“가엾은 윌리엄 오빠! 앤트워프 함의 군목께서는 오빠한테 아주 잘해 주셨다던데요.” 이렇게 패니는 다정하게 자기 오빠를 불러들였는데, 지금 대화에는 뜬금없을지 몰라도 패니의 감정을 잘 담아낸 한마디였다. 

“숙부님 말씀에 따라 제 의견을 정하는 습관 같은 건 별로 없는 저로서는 동의하기가 힘드네요.” 크로퍼드 양이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몰아세우니 드리는 말씀인데, 저도 목사들의 실상을 목격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만 해도 형부인 그랜트 박사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잖아요. 그랜트 박사님은 물론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시고, 진짜 신사고, 굳이 말하자면 훌륭한 학자에 머리도 좋고 멋진 설교를 할 때도 많고 대단히 점잖은 분이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나태하고 자기 중심적인 미식가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모든 음식을 당신 입맛에 맞추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게다가 요리사가 실수라도 하는 날엔 그 훌륭한 아내를 들볶는답니다. 실은 오늘 저녁만 해도 새끼 거위 요리가 신통치 않다고 끝없이 불평을 늘어 놓는 바람에 헨리 오빠하고 저는 바로 쫓겨나오다시피 한걸요. 가엾은 언니는 남아서 그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요.”

“이런, 목사라면 질색하실 만도 하네요. 그런 건 커다란 성격적 결함이지요. 게다가 제 몸만 챙기는 매우 그릇된 습관 때문에 더 악화된 모양입니다. 이런 일로 고생하는 언니를 봐야 하니 크로퍼드 양처럼 다감한 분의 입장에선 심히 괴로울 겁니다. 패니, 이건 우리가 불리한데, 그랜트 박사님을 변호해 드릴 수는 없겠는걸.”            (P164-165)   

  

“쯧쯧! 지나친 겸손은 그만둬. 아주 잘 해낼 거라니까. 다 감안하고 볼 텐데 뭐. 완벽한 연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너는 긴 갈색 겉옷과 흰색 앞치마에 모브 캡만 준비하고, 우리가 네 얼굴에 주름 몇 개와 눈끝 주름살만 좀 그려 넣으면, 영락없이 자그마한 늙은 아낙네가 될 거야.”

“전 빼 주세요.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면서 패니는 난감한 시선으로 에드먼드를 쳐다봤는데, 에드먼드는 다정하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공연히 끼어들었다간 형이 화를 낼까 봐 격려의 미소만 보냈다. 패니가 아무리 간청해도 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톰만이 아니었다. 이제 마리아와 크로퍼드 씨 예이츠 씨도 톰을 지원하고 나섰는데, 톰과는 달리 한결 부드럽거나 예의 바르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노리스 부인이 다들 들리도록 노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여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이 무슨 소란이냐? 너 때문에 내가 다 창피해지는구나, 패니. 별일도 아닌데 사촌들이 하자는 대로 해 주면 어때서 그렇게 애를 먹이니, 사촌들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데! 그저 수굿하게 받아들여, 더는 이런 말이 안 나오게 해 주렴, 제발 부탁이다.”

“강요는 하지 마세요, 이모.” 에드먼드가 말했다. “이렇게 강요하는 건 부당한 처사입니다. 연극을 하고 싶지 않다잖아요. 우리처럼 패니도 스스로 선택하게 해 줘야지요. 패니도 누구 못지않은 판단력이 있잖아요. 더 이상 강요는 하지 마세요.”

“그래, 강요하지 않으마.” 노리스 부인이 날카롭게 맞받았다. “하지만 제 이모와 사촌들이 그렇게 원하는데도 끝내 못 하겠다면, 고집불통에 배은망덕한 아이라고 여길 수밖에.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제 처지를 생각해야지.”             (P215-216)     

헨리 크로퍼드는 떠났다. 맨스필드를 떠났고, 두 시간 후면 이 교구를 떠날 것이었다. 그의 이기적인 허영심이 마리아 버트럼과 줄리아 버트럼에게 불러일으켰던 모든 희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줄리아는 그가 떠난 것을 기뻐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있는 것이 불쾌해지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도 그를 차지하지 못했으니 이제 다른 복수를 꿈꾸지는 않을 만큼은 냉정을 되찾았다. 언니가 버림받았으면 됐지. 나서서 폭로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헨리 크로퍼드가 떠났으니 이제 언니를 동정해 줄 수도 있었다. 

소식을 들은 패니는 좀 더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정찬자리에서 소식을 듣고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하며 그의 장점을 기렸는데, 저마다 감정의 강도가 달랐으니, 에드먼드의 지나치게 편파적인 칭찬이 진심이었다면, 그의 어머니는 틀에 박힌 찬사를 무심히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노리스 부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줄리아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참 뜻밖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추진함에 있어 자신이 태만했던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잠시 할 뻔했다. 그러나 보살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리 활동적인 사람이라 해도 바라는 대로 모두 실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루 이틀 후 예이츠 씨도 떠났다. 그의 출발에 가장 관심을 보인 사람은 토머스 경이었다. 식구들끼리 단출하게 지내고 싶었던 만큼,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해도 낯선 이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하물며 경박하고 오만하며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예이츠 씨는 도저히 참아 주기가 힘들었다. 인물 자체도 피곤하지만, 톰의 친구이자 줄리아의 숭배자라니 영 눈에 거슬렸다. 토머스 경은 크로퍼드 씨의 경우에는 떠나든 말든 사실 관심이 없었지만, 예이츠 씨가 떠날 때 현관문까지 배웅하면서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 인사는 진심으로 흐뭇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예이츠 씨는 무대 장치를 모조리 철거하고 연극과 관련된 모든 것이 치워질 때까지 맨스필드에 남아 있다가, 맨스필드가 차분한 일상을 되찾았을 때 떠나갔다. 그리고 떠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토머스 경은 이제 연극과 관련된 최악의 존재이자 그런 일이 있었음을 상기시킬 수밖에 없는 최후의 존재가 깨끗이 사라졌기를 바랐다.       (P281-283)     

실제로 이 방면에서 토머스 경에게는 실망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러시워스 씨에게 느꼈던 모든 호감도, 러시워스 씨의 모든 극진한 대접도, 그가 곧 진실을 얼마간 알아차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러시워스 씨가 학식뿐만 아니라 사업에 있어서도 아는 바가 없고 확실한 주견도 대체로 결여된, 그러면서 그에 대한 자각도 별로 없는, 좀 모자란 청년이라는 진실 말이다. 

그가 기대했던 사윗감은 전혀 달랐고, 마리아가 걱정되기 시작한 그는 딸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했다. 잠깐만 지켜봐도 잘해야 무관심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러시워스 씨를 대한 딸의 태도는 무심하고 냉정했다. 좋아할 수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토머스 경은 딸과 진지한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런 집안과 연을 맺으면 도움이 되겠고, 혼인을 약속한 지도 꽤 되어 만인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딸의 행복을 희생할 수는 없었다. 딸은 러시워스 씨를 안 지 얼마 안돼 청혼을 받아들인 것뿐 좀 더 알게 되면서는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토머스 경은 딸에게 엄숙하지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털어놓고, 딸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 솔직하게 진심을 말해 달라고 하며, 불행한 결혼이 될 것 같다면 어떤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완전히 인연을 끊는 게 옳다고도 확실히 말했다. 약혼에서 벗어날 수 있게 알아서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며 마리아는 갈등을 느꼈으나 그것도 한순간뿐,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자상하게 살펴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약혼을 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그사이 생각이나 바람이 달라진 것도 없으니 달리 생각하셨다면 아버지가 완전히 잘못 보신 것이다. 자기는 러시워스 씨의 인품과 기질을 지극히 높게 평가하며 그와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한 점의 의심도 없다는 것이었다.           (P289-291)     

“아름답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어느 날 그렇게 앉아 있던 중 패니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숲에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새삼 놀라게 돼요. 삼 년 전만 해도 밭 위쪽으로 아무렇게나 한 줄 쳐 놓은 관목 울타리뿐이라, 영 볼품이 없었고 내내 그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실용적 가치와 장식적 가치 중 어느 쪽이 더 크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근사한 산책로가 되었네요. 다시 삼 년이 지나면 아마 이전 모습은 기억도, 거의 기억도 못 하게 되겠지요. 시간의 힘이, 사람 마음의 변화가 정말 놀라워요. 정말 너무나 놀랍네요!” 그리고 마지막 상념을 따라가다가 이렇게 바로 덧붙였다. “사람의 타고난 능력 가운데 가장 불가사의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기억력이지 싶어요. 좋았다 나빴다 기복이 심해서 어떤 지적 능력보다도 기억력이 가장 요령부득인 것 같아요. 확실하고 믿음직하고 말을 잘 들을 때도 있지만, 너무나 약하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고, 또 너무 제멋대로여서 통제가 안 될 때도 있잖아요!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든 면에서 경이롭지만 그중에서도 기억하고 망각하는 능력은 특히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아요.”             (P302)     

“하룻밤 아니냐, 패니, 설령 희생이라고 해도 하룻밤뿐이잖아........ 나는 믿어, 너도 좀 더 생각해 보면, 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해 준 사람한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희생을 감수할 거라고, 크로퍼드 양이 이제까지 너한테 보인 관심은, 물론 너한테 과분한 것은 아니지, 내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니. 하지만 어쨌든 한결같은 관심을 보였잖아. 그러니 그런 행동으로 답한다면, 아무래도 고마운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나야 물론 너한테 그런 의도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말이야. 네 천성상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지. 내일 밤에는 약속한 대로 그 목걸이를 해. 그리고 내가 준 줄은 굳이 무도회를 생각하며 주문한 것도 아니니까 잘 간직했다가 더 평범한 자리에서 하도록 하고, 이게 내 조언이야.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그늘이 드리우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그동안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데. 그리고 참으로 너그러운 마음씨와 타고난 섬세한 기질 등 두 사람의 성격에 전반적으로 닮은 점이 아주 많아서, 몇 가지 사소한 차이가 있다 해도 주로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 완전한 우정에 장애가 될 리 없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그늘이 생겨나는 것은 보고 싶지 않구나.”

그는 이렇게 말하며 방을 나가고, 뒤에 남은 패니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가 가장 아끼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자기라니, 그것만으로도 기운이 나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첫째가는 사람은! 그가 이렇게 내놓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챘던 것 이상도 아니었지만, 아픈 충격이었다. 그가 어떻게 믿고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 주는 말이었다. 크로퍼드 양과 결혼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무수히 예상해 온 일이지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아끼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자기라는 말마저 되뇌고 또 되뇌야 간신히 실감이 날 정도였다. 차라리 크로퍼드 양이 그를 맞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아 아! 그렇다면 느낌도 많이 달랐을 것이고, 훨씬 견디기도 쉬웠을 텐데! 그렇지만 그는 크로퍼드 양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장점을 갖다 붙이고 결점은 예나 다름없건만 더 이상 보지 못했다. 그의 착각을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쏟고 나서야 심란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어진 낙담은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열렬한 기도로만 달랠 수 있었다.            (P380-382)    

 

패니는 자신의 판단을 묻는 것 같아서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오빠한테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들어 드릴게요. 하지만 조언할 주제는 못 되니, 조언 같은 건 바라지 마세요. 그럴 능력은 안 되니까요.”

“네 입장에선 못 하겠다 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패니, 걱정할 필요 없어. 이런 일은 조언을 구할 문제가 아니니까. 이런 문제는 조언을 구하지 않는 편이 나아. 조언을 구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테고, 자기 양심에 위배되는 쪽으로 등을 떠밀어 주기를 원한다면 모를까. 난 그저 너한테 털어놓고 싶을 뿐이야.”

“한 가지만 더요. 버릇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잘 가려 가며 말씀하셔야 해요. 나중에 후회할 말은 하지 마시고요. 그런 때가 올 수도 있잖아요.......”             (P389)      

 

잠시 애써 마음을 추스른 후 패니가 말했다. “난 여자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요. 아무리 인기가 많은 남자라도 여자 쪽에서 마다하거나 적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요.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남자라도 어쩌다 마음만 주면 상대편에서는 무조건 좋다고 할 거라는 생각은 곤란하다고 봐요.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또 누이분들 생각대로 크로퍼드 씨가 모든 조건을 갖춘 분이라고 해도, 내 마음이 어떻게 그분의 마음과 같을 수 있었겠어요? 내 입장에서는 정말 뜻밖이었거든요. 이제껏 나를 대하는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사실 그분이 나한테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도 분명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할 텐데, 그런 이유만으로 억지로 관심을 갖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 처지에 크로퍼드 씨한테 기대를 품는다면 지극히 오만한 생각 아닌가요? 그분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누이분들로부터 그렇다고 볼 거예요. 그분은 별생각이 없는데 그런다고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사랑 고백을 받는 즉시 사랑에 빠질 수 있겠어요? 그분이 원하기만 하면 사랑으로 응답할 준비라도 되었어야 하나요?              (P509)  

   

“아! 나도 부인하지는 못하겠네요. 가끔 오빠는 한심한 바람둥이처럼 아가씨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는 모른 척할 때가 있어요. 나도 자주 뭐라고 하기는 했죠. 하지만 오빠의 단점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그리고 사실 오빠가 배려해 줘야 할 만큼 진실한 애정을 품은 아가씨가 대단히 드물다는 점도 있잖아요. 게다가 패니, 수많은 아가씨가 노리던 남자를 꽉 붙들어 매 같은 여자들의 빚을 되갚아 줄 수 있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그럼요, 여자라면 그런 승리는 절대 마다하지 못할걸요.”

패니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는 남자는 좋게 볼 수가 없어요. 사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큰 고통을 받은 경우도 많을 거예요.”      (P523)     


패니는 소리 없이 신문을 읽었다. “윔폴가의 R씨 집안에 일어난 부부간의 불미스러운 일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은 본지로서도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 전 결혼식을 올리고 사교계를 이끌 눈부신 인재로 각광받던 아름다운 R부인이 R씨의 절친이자 동료로 명성과 매력을 겸비한 C시와 함께 남편의 지붕 밑을 떠났다고 한다. 두 사람의 행방은 본지 편집진에서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P634)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일종의 체념과도 같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전부 털어놓고, 이 이야기는 다시 하지 말자. 그 사람한테 이번 일은 그저 어리석은 짓일 뿐이야. 들키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다는 거지. 조금만 자중하고 조심하면 될 것을. 마리아가 트위크넘에 있는 동안 리치먼드로 내려가 내내 머문 자기 오빠나 하녀 따위한테 꼬리를 밟힌 그 애나 다 한심하다는 거야. 간단히 말해, 들킨 게 문제라는 거지. 아아! 패니, 그 사람이 문제로 삼는 것은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들켰다는 점이야. 그 사람이 문제로 삼는 것은 왜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해서 사태를 극단으로 몰고 가 결국은 오빠가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획마저 다 포기하고 마리아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렸냐는 거야.”        (P656-657)    

 

“잔인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좀 생각이 다른데, 아니, 잔인한 성품은 아니야. 내 마음에 상처를 주려고 그런 것은 아닐 거야. 문제는 그보다 깊은 곳에 있지. 그런 말이 상처가 되는 그런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한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울 만큼 마음이 아주 뒤틀린 것. 그게 문제야. 그 사람은 여태껏 남들 입에서 들은 말을 한 것뿐이야. 남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문제는 성격적 결함이 아니야. 남한테 일부러 불필요한 고통이나 주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일지 몰라도 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나를 위해서라면, 내 감정을 위해서라면 그 사람도 기필코........ 그릇된 삶의 원칙이 문제야, 패니. 섬세함이 무뎌지고 정신이 썩고 타락한 게 문제야. 어쩌면 나한테는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더 이상 속을 태울 일도 없을 테니...... 하지만 아니야, 그 사람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느니, 그 사람을 잃는 고통이 더욱 커진다 해도 기꺼이 그 편을 택할 거야. 그 사람한테도 그렇게 말했지.”        (P658-659)       

그와 함께 사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가 패니와 누렸을 행복을 전부 망쳐 버린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와 헤어질 때 그녀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은 고작해야 자기가 두 사람을 갈라  놓기는 했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이런 심성을 가진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으니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러시워스 씨는 어렵지 않게 이혼 허가를 얻어 내고 그렇게 결혼 생활을 끝냈는데, 대단한 운이 따른다면 모를까 애당초 맺어질 때부터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든 결혼이었다. 여자 쪽에서는 남자를 경멸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실을 남자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모욕이나 이기적 열정으로 자초한 실망이나 둘 다 동정을 얻기는 힘들다. 남편은 어리석은 처신으로 벌을 받았고, 그 아내는 더 큰 죄로 더 큰 벌을 받았다. 남자 쪽은 혼인 관계가 해소되었으니 당장은 굴욕적이고 불행하겠지만, 혹시라도 또 다른 아리따운 아가씨한테 반해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제2의 인생을 도모해 볼 수도 있고, 좀 더 나은 인생이기를, 즉 또다시 속는다고 해도 좀 더 기분 좋고 운 좋은 기만이기를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여자 쪽은 훨씬 심각한 심적 타격 속에서 비난과 은둔의 생활로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 경우에는 새로운 삶의 희망이든 망가진 평판의 복구든 제2의 봄이 찾아올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P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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