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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Feb 26. 2024

다카야마 마코토의 <에고이스트>

영화 <에고이스트>  2022년

소설 <에고이스트>는 사랑하는 이와 소중한 가족을 이뤄 살고픈 바람을 내세에서나 겨우 기약해야 하는 성 소수자의 현실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2012년 일본에서 '아사다 마코토'라는 필명으로 처음 발표돼 한동안 절판된 채 완전히 잊혔다가 2020년 작가가 세상을 뜬 뒤 본명으로 다시 출간됐다. 영화 <에고이스트>는 35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고, 2023년 2월 일본에서 개봉하며 큰 화제를 모은 마쓰나가 다이시 연출, 스즈키 료헤이와 미야자와 히오 주연을 했다.     

어린이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오카마’ 혹은 ‘오토코온나’로 불렸다.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4학년 여름방학 때 서클 활동 시합에서 옆 동네 학교의 6학년 남자 학생을 넋 놓고 쳐다본 뒤로 ‘무슨 말을 들어도 수긍하면 안 돼. 녀석들이 이상한 게 아니고, 내가 이상한 거야.’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나조차 깨닫지 못했던 비밀을 녀석들은 훨씬 전부터 알아챈 것이다.           (P10)  

   

아버지에게는 괴롭힘당한 일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계속 같은 동네에서 살아왔고, 일도 친구도 걱정할 것 없고, 반주를 들면 반드시 “이 동네는 좋은 데야.”, “도쿄 같은 곳에서 사는 애들은 이해가 안 된다.”라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아버지에게, 당신 아이가 그 ‘좋은 데’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알리는 일은 가혹할 터다. 서른두 살 때 어머니가 쓰러졌고, 마흔 살에 아내를 잃은 사람에게 또 새로이 무거운 짐을 안겨 줄 수는 없다. 내게 아버지란 같이 살지 않기에 관계가 좋은 사람이었다.           (P18)   

  

새삼 게이인 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차갑게 웃으면서 한 방 먹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미안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한다. 

내가 결혼할 때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어머니는 말씀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병을 고쳐 주고 싶다고 대답을 살며시 바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는다는 등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짓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에겐 가족이 없다. 어머니가 품었던 바람, 아마 아버지는 여전히 가지고 있을 바람,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등을 돌렸다.             (P19)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만나지 않았다면 일할 때 괴롭지도 않았을 텐데! 이렇게 비밀을 숨기려고 고통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류타는 말쑥이 다듬어진 자기 머리칼을 오른손으로 쥐어 뜯으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이런 일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내 안에서 맴돌던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은 썰물처럼 쓸려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에 불이 붙은 느낌이었다. 지금이 순간밖에 없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잡았다. 나는 한 마디 한 마디 똑바로 전해지도록 말했다.            (P57)   

  

집으로 달려가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걱정했어.”

“죄송해요.”하고 카네이션을 든 한쪽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다른 손으로 채소를 내민다. 

“저기, 과자는 안 샀어.”

“응? 그럼, 심부름값은 어떻게 했어?”

나는 카네이션을 어머니의 눈앞에 내밀었다. 

“아니.....”

“이제 조금 있으면 ‘어머니의 날’이잖아.”

“아니.....”

어머니는 한 차례 더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으면서 채소를 무릎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꽃을 받았다. 

고마워, 라고 웃으면서 화답해 주실까, 그러면 나도 웃으면서 “천만에요!”라고 말해야지, 나는 채소 가게에서 집까지 달려오는 동안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꽃을 받은 어머니가 나의 바람대로 환하게 반기리라 예상하면서, 급기야 으쓱해져서 어머니를 보고 “천만에요!”라고 대꾸할 준비를 했다. 

어머니는 웃지 않았고,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쥐어짜듯이 “참......”하고 한마디 토하더니 꽃을 든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나의 “천만에요.”는 공중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우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엄마, 울지 마, 나는 엄마가 기뻐할 거라 생각해서......”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전혀 슬프지 않았음에도 어머니보다 더 격하게 울었다. 

어머니는 흐느끼면서 “미안해, 아니야, 엄마는 기뻐, 정말, 정말 기뻐.” 하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둘이서 몇십 분을 울었을까. 어머니의 잠옷은 내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P72-73)    

 

밤이 되자 류타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가 비파도 버찌도 연신 맛있다고 얘기하면서 많이 드셨어. 최근엔 음식을 좀체 드시지 않으셨는데, 잘 드셔서 나도 기뻤어. 엄마가 감사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는데, 정말 고마워.” 그때 나는, 장마가 걷힌 뒤 초등학교 참관 수업을 마치고 어촌 냄새가 자욱한 길을 쉬엄쉬엄 걷던 어머니와 보조를 맞춰 집으로 돌아오던 날을 떠올리며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내가 이 이상으로 과하게 류타 흉내를 낸다면 지금도 돈을 건네받을 때마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류타와의 관계가 크게 훼손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대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류타를 돈으로 샀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행위인지 안다. 하지만 류타 어머니는 내 어머니와 달리 살아 계시다. 아직 살아 있는 그의 어머니를 위해 타인인 내가 뭔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은 역시 오만일까.             (P100-101)     

“어머니 생일선물, 정했어. 이걸로 하자.”하면서 나는 가스오븐레인지를 가리켰다. 예상대로 류타는 허둥거리며 필사적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이젠 아니, 안 돼, 그런 말 못 하게 할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 

“내 생일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의 생일에 후하게 대접받았으니 가만있을 수 없지, 그런 건 내 스타일이 아냐. 그리고 이건 어차피 20만 원도 안 하잖아. 류타가 그렇게까지 마다할 가격이 아니라고, 또 집에 레인지 정도는 있는 편이 어머니에게도 여러모로 좋잖아. 게다가 오븐도 달려 있다고, 케이크를 직접 구울 만큼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오븐이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어. 예전에는 있었지?”

“........응, 망가진 뒤로 다시 사지 않았어.”                (P113)    

 

벌써 일주일 동안 제임스 볼드윈의 소설책 <조반니의 방>을 찾고 있는데 당최 나오지 않는다. 195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 나는 피곤할 때면 마치 마약에 물든 듯 나도 모르게 손을 뻗치게 된다, 자기 육욕을 도도하게 이론으로 침묵시키는 주인공의 쓸쓸한 나르시시즘에 말이다. 삼십 대 중반이 돼서도 이 소설을 변함없이 좋아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P117)     


다음 날 화요일, 회사 업무를 대략 일단락 짓고 근처 중국 음식점에서 동료와 함께 식사할 때였다. 가방 속 휴대폰을 보니 낯선 번호와 류타의 번호로 각각 몇 차례나 전화가 와 있었다. 진동으로 해 놓아서 몰랐나 보다. 전혀 모르는 번호로 음성 메시지 하나가 남아 있어서 들어 보니 “전화해 주세요.”하고 류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음식점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다시 건다. 잠시 신호음이 울린 끝에, 류타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아,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송구스럽습니다. 먼저 전화 주시다니.”

“아니에요, 미안해요, 몇 번이나 자꾸 걸어서.....”

여태껏 들어 본 적 없는 아주 지친 목소리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걸까?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저기...... 저기......”

그렇게 몇 차례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말씀했다. 

“류타, 죽었어요.”

그 말을 들은 뒤로는 희미하고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연거푸 “뭐라고요?” 라고 말했던 것 같다. 류타 어머니에게 “왜!” 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기도 하다. 류타 어머니는 “아침에 계속 일어나지 않아서 깨우러 갔더니 이불 속에서 그만......” 이라고 말씀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장례식장 주소를 말해 줄 테니 받아 적으라고 했다. 다만 주소를 듣던 도중에 “기다리세요! 적을 수가 없어요! 못 하겠어요! 못 하겠어요!”하고 울부짖으며 “내일 전화할게요. 전화할게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던 일만이 또렷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무엇을 저지하고 싶었던 것일까.                (P121-122)   

  

솔직히 되도록 경야건 장례식이건 가고 싶지 않았다. “류타하고 나는 똑같구나.”하고 류타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류타는 내가 아니었다. 애인이었지만 타인이었다. 나는 멋대로 타인의 어머니에게 그가 헌신하도록 강요했고, 타인의 생활을 멋대로 짓밟았으며 타인의 잠조차 멋대로 앗아 갔다. 결국 내가 한 일이란 병든 어머니를 남기고 죽은 스물일곱 살의 남자와,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던 자식을 앞세운 위독한 여성을 만들어 낸 것뿐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류타 어머니는 아마 내가 자기 아들의 애인이리라고 생각조차 못 했으리라. 단지 일로 만난 사람처럼 가장하고 아들 뒤에서 애인 행세를 하며 자신들의 삶을 파괴해 버렸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할 터다.                     (P131-132)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여태 다물고 있던 입이 열리자 마치 모기 울음소리 같은 작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병이 거꾸러져 쏟아진 물은 그저 병을 돌린다고 다시 담을 수 없다. 이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음에도 멈출 수가 없다. 

“왜 사과하니? 왜 네가 사과를 하는 거야?”

류타 어머니가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 물음에 답할 말이 내게 있을 리 없었다. ‘무엇부터 설명해야 좋을까?’가 아니라, 류타와 나 사이에는 아예 설명하면 안되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그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사과하지 마, 부탁이야. 사과하지 마, 왜냐하면 나 알고 있어. 네가 류타를 사랑했음을, 나 알고 있으니까.”

환청인가 싶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서 얼굴을 든다. 다시 뒤돌아보니 류타 어머니가 울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있잖아, 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사과하면 류타가 무척 슬퍼할 거야.”         (P136-137)    

 

류타 어머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어머니는 아까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씀하셨는데, 심지어 저는 앞으로 부모가 될 일조차 없을 테니 더더욱 모를 거예요. 좀 과장하자면 저는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이런 경우에 돈으로 떼우는 방법밖에 몰라요. 하지만 저는 류타를 대신할 수 있어서 조금 기뻐요. 어머니도 친구분과 버스 여행을 다니시고, 조금이나마 뭐든 맛있게 드시고 돌아오시면 잘된 일이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말이 좀 그렇지만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 같은 ‘조금’을 더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류타 어머니가 마침내 봉투를 양손으로 정중히 받았다. 그러고는 “미안해, 미안해.”라고 또 말씀했다. 나는 바로 “류타도, 저도 어머니한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가 정말 괴로웠다고 말씀드렸죠?”라고 가능한 한 농담처럼 대꾸했다. 류타 어머니는 “그러네, 이제 그런 말 하지 않을게. 고마워, 정말 고마워.”라고 얘기하며 눈물 속에서 미소 지었다.          (P151-152)   

  

문득 살펴보니 어머니의 두겹진 이불이 발치에서 젖혀져 있었고, 그 사이로 발가락 끝이 나와 있었다.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이불 위로 손을 뻗었다. 

“아직 돌아가지 마.....”

희미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어머니가 엷게 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 여전히 곁에 있어. 왜냐하면 나와 어머니의 새로운 관계는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니까. 이렇게 끝난다면 너무 섭섭하잖아.’

머리맡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감쌌더니 그제야 어머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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