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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09. 2024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

영화 <에단 프롬>  1993년

<이선 프롬>(Ethan Frome)은 미국인 저자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1911년에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매사추세츠주 스타크필드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1993년에 <에단 프롬> 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무명의 남자 나레이터가 어느 겨울에 스타크필드에 머물면서 에단 프롬이라는 남성의 삶을 묘사한다.     

하먼은 주머니에서 씹는 담배 한 덩이를 꺼내 쐐기 모양으로 배어 내어 가죽 주머니처럼 늘어진 한쪽 뺨 안에 밀어 넣었습니다. “저 사람은 스탁필드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난 것 같아. 똑똑한 친구들은 대부분 다 떠나 버리는 데 말이지.” 

“왜 저 사람은 떠나지 않았나요?”

“누군가 남아서 집안 식구들을 돌봐 주어야 했지. 이선 말고는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었거든. 맨 처음에는 아버지를.... 그 다음에는 어머니를.... 또 그 다음에는 자기 아내를 말이야.”

“그러고 나서 저 충돌 사고가 일어났나요?”

하먼은 비웃듯이 킥킥 웃었습니다.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그가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지.”

“그렇군요, 그리고 그 뒤로는 집안 식구들이 그를 돌봐 줘야 했단 말이군요?”

하먼은 생각에 잠겨 담배를 다른 편 뺨으로 옮겨 물었습니다. “아, 그거에 관해서라면 보살핀 쪽은 늘 이선이었을걸.”

하먼 가우는 그의 정신과 도의가 허용하는 범위까지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그가 말해 준 사실들 사이에는 상당한 구멍이 있었고, 나는 이 이야기의 좀 더 깊은 뜻은 오히려 이 빠진 부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런데 한마디 말이 내 기억 속에 계속 맴돌아 이후 나의 추론을 갈무리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 구실을 했습니다. 바로 “저이는 스탁필드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난 것 같아.”라는 말이었지요.         (P10-11)     


그는 말없는 우울한 풍경의 한 부분인 것만 같았고, 그 안의 온기와 마음은 표면 아래에 꽁꽁 묶인, 말하자면 얼어붙은 슬픔의 화신과도 같았습니다. 나는 단지 쉽게 다가가기에는 그가 너무나 깊은 정신적 고립 속에 살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에요. 또한 그의 외로움이 단순히 비극적이라고 생각되는 개인적인 곤경의 결과가 아니라 그 속에 하먼 가우가 넌지시 말한 것처럼 스탁필드의 허다한 겨울 추위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P18)    

 

매티 실버는 그의 집에서 일 년을 지냈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 식사 시간에 만날 때까지 프롬은 매티를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매티와 함께 있는 어떤 시간도 서로 팔짱을 끼고 그의 큰 걸음걸이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녀가 날 듯이 가볍게 발을 옮기며 농장으로 함께 밤길을 걸어올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프롬은 플래츠까지 마차를 몰고 마중 나간 첫날부터 이 아가씨를 좋아했다. 그때 그녀는 기차 안에서부터 그에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고, 짐을 들고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 “이선 아저씨죠!”하고 소리쳤다. 그러는 동안 프롬은 그 가냘픈 몸매를 보며 생각했다. ’집안일을 그다지 잘할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애를 태우진 않겠군.‘ 그런데 그의 집 안에 살짝 희망에 넘치는 한 젊은 생명이 나타난 것이 그저 식은 난로에 다시 불을 지피는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이 아가씨는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활기 넘치고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관찰력이 뛰어났고 말귀를 잘 알아들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보여 주거나 일러 줄 수 있었고, 그가 나눠 준 모든 것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불러올 수 있는 긴 반향과 메아리를 남겼다는 느낌이 들어 프롬은 행복감을 맛보았다.

이런 달콤한 정신적 교감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때는 바로 두 사람이 농가를 향해 함께 밤길을 걷는 동안이었다. 그는 언제나 주위 사람들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흥에 예민했다. 도중에 그만둔 학업이 이런 감수성에 형체를 부여했다. 심지어 가장 불행한 순간에도 하늘과 벌판은 그에게 깊고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말했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 감정이 그것을 불러일으킨 아름다움을 슬픔으로 가린 채 마음속에 소리 없는 아픔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는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자기 말고 또 있는지, 아니면 자신이 이 애처로운 특권의 유일한 희생자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P34-35)  

   

부엌은 따뜻하고 밝았다. 남쪽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움직이는 매티의 몸 위에, 의자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위에, 문간에서 들여다 놓은 제라늄 위에 비스듬히 쏟아졌다. 그 제라늄은 지난 여름 이선이 매티를 위해 ’꽃밭을 만들어‘ 준다며 문간 옆에 심은 것이다. 그는 잠깐 늑장부리면서 매티가 설거지를 끝내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날이 어둡기 전에 목재 운반을 끝마치고 농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마을로 내려가는 내내 그는 매티에게 돌아올 일만 생각했다. 부엌은 보잘것없었다. 그가 어릴 적 어머니가 돌보던 것처럼 그렇게 ’깨끗하고‘ 반질반질 윤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가 집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놀랍게 부엌이 정답게 보였다. 이선은 자기와 매티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그날 저녁 어떤 모습일까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생전 처음 두 사람은 집 안에 둘이서만 있게 될 것이다. 마치 결혼한 부부처럼 난로 양쪽에 마주 앉아 있을 것이다. 그는 발에 긴 양말을 신고서 담배를 피오고, 매티는 그녀 특유의 재미있는 방식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말은 마치 전에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처럼 늘 새로웠다.            (P64-65)     


‘내일 이 시간쯤이면 아내가 저 의자에 앉아 흔들흔들하고 있겠지.’ 이선은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꿈속을 헤매고 있었던 거야. 오늘이 우리가 단둘이 앉아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구나.’ 이렇게 꿈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마치 마취제를 투여받은 뒤 다시 의식을 되찾을 때처럼 고통스러웠다. 그의 몸과 머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미칠 듯이 달아나 버리는 순간순간을 붙잡아 둘 어떠한 말도,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P89-90)   

  

이선은 증오에 차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녀는 의기소침해 제 일에만 몰두하며 남편 곁에서 살아온 힘없는 인간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 여러 해 동안 말없는 사색에서 창조된 악의 세력이었다. 반감을 더욱 돋운 것은 바로 그의 절망감이었다. 여태껏 지나에게는 사람의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시하고 명령할 수 있는 한 적어도 무심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남편을 지배했고, 그래서 그는 그녀가 미웠다. 매티는 아내의 친척이지 그의 친척은 아니다. 아내에게 매티를 이 집에 두도록 강요할 방법이 없었다. 좌절된 과거에서 비롯한 오랜 고통, 젊은 시절의 실패와 쓰라림과 헛된 노력이 하나같이 그의 영혼 속에서 비통하게 고개를 쳐들고 가는 길마다 앞을 가로막던 여인의 모습으로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그에게서 빼앗아 갔다. 그리고 지금 모든 손실을 보상해 주는 그 하나마저 빼앗으려 들지 않는가. 한순간 마음 속에 증오의 불길이 일어나 그의 팔을 타고 흘러내려 그녀를 향해 주먹을 쥐게 만들었다. 그는 난폭하게 앞으로 발을 내딛다가 걸음을 멈췄다.         (P108-109)   

  

“맷,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아저씨는 제가 잘 지낼 거라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필요없다는 말이야? 결혼할 생각인 거지!”

“참, 이선 아저씨도!” 그녀가 소리쳤다. 

“맷 어째서 네게 그런 느낌을 받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네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P143)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깐!” 그가 매티를 재촉했다. 하지만 매티는 계속해서 “왜 앞에 앉으려는 거예요?” 하고 되풀이 해 말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걸 느끼고 싶으니까.”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매티를 끌어 일으켰다. 

매티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거나, 아니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굴복한 듯했다. 이선은 몸을 숙이고 손을 더듬어 어둠 속에서 자신보다 앞에 탔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길을 찾아 그 가장자리 사이에 조심스럽게 썰매를 놓았다. 매티는 이선이 썰매 앞쪽에 다리를 꼬고 자리를 잡는 동안 기다렸다. 그런 다음 재빨리 그의 등뒤에 웅크려 앉아 두 팔로 그를 꼭 잡았다. 목에 닿은 그녀의 숨결에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고 뛰어오르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뇌리를 스쳤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 길이 서로 헤어지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그녀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끌어 당겼다.....

막 두 사람이 출발하는 순간 밤색 말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귀에 익은 간절한 부름, 그리고 이 소리가 불러오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그를 따라 첫 번째 코스까지 내려왔다. 반쯤 내려가자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가 오르막이었고, 그다음에는 또다시 현기증 나는 긴 내리막이었다. 이 길을 날개 돋은 듯 달릴 때 스탁필드가 공간의 한 점처럼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들은 멀리 구름 낀 밤하늘 속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이때 그 큰 느릅나무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 굽은 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우린 할 수 있어. 난 알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P152-153)     

헤일 부인은 잠깐 말을 멈췄습니다. 나는 부인의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환상에 빠져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 모두에게 다 끔찍한 일이군요.”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래요, 꽤 끔찍해요. 그이들은 모두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사고가 나기 전에 매티는 그랬었지만요. 매티보다 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은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너무 고생했어요...... 사람들이 매티더러 심술궂어졌다고 말할 때마다 난 늘 이렇게 말하지요. 그리고 지나 부인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시무룩했어요. 매티를 잘 참아 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고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가끔씩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해요. 그럴 때 이선 씨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 모습을 볼 때면 누구보다도 가장 괴로운 사람은 이선 씨가 아닌가 생각하지요..... 어쨌든 지나 부인은 아니에요, 괴로워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엾어요.” 헤일 부인은 한숨을 지으면서 말을 멈췄습니다. “세 사람이 저 부엌에 갇혀 있다는 게 말이에요. 여름철 날씨 좋은 날이면 매티를 객실로 옮기거나 뒤뜰에 옮겨 내놓아요. 이건 비교적 쉬운 일이지요.... 겨울이 오면 불피울 일을 생각해야 해요. 프롬 집안은 여윳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어요.”

헤일 부인은 오랜 짐을 벗었다는 듯,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하지만 불현 듯 이야기를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요.

헤일 부인 다시 안경을 벗고 구슬 장식을 한 식탁보를 가로질러 내 쪽으로 몸을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쯤 되던 어느 날인가 사람들은 모두 매티가 살아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글쎄요, 어쩌면 살아 있는 게 끔찍한 일이지요. 한번은 우리 목사님한테 대놓고 그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깜짝 놀라시던걸요. 목사님은 매티가 정신이 돌아오던 그날 아침에 나와 같이 계시지 않았거든요...... 난 또 이런 말도 해요. 만약 매티가 죽었더라면 이선 씨는 살았을 거라고요. 지금 모습을 봐서는 농장에서 사는 프롬네 사람들이나 무덤 아래 있는 프롬네 사람들이나 이렇다 할 차이를 모르겠어요. 저 땅 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말이지요. 그곳에서 여자들은 혀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테니까요.“       (P1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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