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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12. 2024

나는 극히 일부분만 보았다.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41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도 10년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전시회와 영화상영을 하고 있다. 사실 나는 광화문광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된 것도 세월호를 시작으로 하게 되었다. 광장에서 내가 본 세월호는 극히 일부분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전체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정치 평론가들이나, 학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경험한 내용들 중에서 일부분만을 재해석하거나, 과대포장해서 진리인양 떠들지만 사실 그것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쓰잘데기 없는 언론의 이야기만큼이나 극히 일부분의 편집일 뿐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밀려드는 모래알 같은 정보 하나를 그러모아 광주리에 담은들, 그건 바닷가에 밀려든 한줌 모래들일 것이다. 부분들의 합이 꼭 전체일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록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기록일지라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다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다른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부분과 전체-     


한 사람의 얼굴, 표정, 눈빛, 그리고 옷차림, 말투, 몸짓 우리는 부분을 보고서야 전체 이미지를 그린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프레임에 담고 있고, 그것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람은 한 방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앞을 보게 되면 뒤는 볼 수 없다. 360 카메라로 찍었다 할지라도, 보는 시선은 한 방향의 외눈박이 시선일 뿐이다.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이 한 일면[一面]만 볼 수 있다. 진실은 어쩌면 한쪽 반[反]만의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카메라에 담겨진 진실 또한 반[反]만의 진실.    

  

우리의 경험 또한 극히 일부분만을 경험할 것이다. 수많은 책 중에서 읽은 책은 일부분이고, 수만 명의 달리는 마라톤 선수들 중에서 선두, 중간, 후미 각자 자기가 속한 곳에서의 경험일 것이다. 전제를 파악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神)만이 알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개별적인 부분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려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그 구조의 일부분으로서만이 이해될 뿐이다. 움직임을 카메라는 500분의 1초로 고정시킨다. 정지된 이미지 혹은 정지된 일련의 이미지로 촬영되고 우리의 시각은 스틸 이미지로 이해한다. 경험의 사고는 과연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조각난 삶을 살고 있고, 조각난 사진 이미지로 남겨져 있고, 조각난 채 세상을 이해한다.         


“Our experience should be understood not as a collection of individual events or phenomena we encounter, but as parts of the relative context or overall structure they belong to.”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겪는 개별적인 사건이나 현상의 집합이 아니라그것들이 속한 상대적인 맥락이나 전체적인 구조의 일부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부분과 전체-     


https://youtu.be/KBBa0-jZlJ4?si=L3CqfJ9u4Tfull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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