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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07. 2024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

영화 <태양의 저편>  2001년

알바니아 출신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깨어진 4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 20세기 초, 브라질 북부의 사탕수수 농장이 배경이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가족 단위로 농장을 꾸려가게 된 사탕수수 농가에는 땅이 곧 재산이 된다. 그래서 이웃끼리 땅을 놓고 서로 죽이는 유혈전이 꼬리를 문다. 영화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이 비극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그려낸다.

큰아들을 잃은 브레베스 집안은 아들의 피가 묻은 셔츠를 걸어 놓고 그 색이 바래자 둘째 아들을 원수의 집안에 보내 복수를 하게 한다.

두 집안은 평화협정을 맺지만, 이 협정도 죽은 이의 셔츠 핏빛이 변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감독 월터 살레스. 주연 로드리고 산토로. 원제 <Abril Despedacado>(2001년).  

   

그자는 이제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부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총알이 빗나가는 게 낫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난번에는 지나치게 골똘히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는 회한과 수치심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다가 마지만 순간에, 자신이 저지르려는 일을 정당화하기라고 하듯 ‘쏘는 것은 너지만 살인을 하는 것은 총이다....’라는 옛 말씀에 의지하여 마음을 다잡았었다.

미뤄봐야 소용없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어서 해치우라구, 라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P7-8) 

    

장례식은 이튿날 대낮에 치러졌다.

관습에 따라 곡하는 여인네들이 먼 고장에서 당도해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고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교회의 고색창연한 묘지는 장례식에 온 남자들로 검은 상복의 물결을 이루다시피 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장례 행렬은 크리키예르 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조르그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 그는 장례식에 가라는 말에 펄쩍 뛰었고, 그 문제로 아버지와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논쟁을 벌이는 마지막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산악 지방에서 수천 번도 더 거듭되어온 일임이 분명했다. 너는 그곳에 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장례식에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장례 식사(食事)에도 참석해야 해... 그렇지만 저는 그자크스란 말이에요. 바로 제가 그를 죽였단 말이에요. 제가 왜 그곳에 가야 해요? 네가 그곳에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네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이나 혹은 장례 직후의 식사에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바로 너다. 왜냐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너를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제가 그런 일을 해야 하죠? 그조르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서슬 퍼런 눈길에 부딪히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P15-16)     

그조르그는 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의 한 자락을 흘끗 쳐다보았다. 창 밖에는 오직 그만이 느낄, 알프스 산맥의 불안한 빛과 절반은 미소를 띠고 절반은 여전히 얼어붙은 삼월이 펼쳐져 있었다. 곧 사월이 오리라. 아니, 오직 사월의 첫 보름만이 찾아오리라. 그조르그는 가슴의 왼쪽 한켠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월은 이미 그에게 시퍼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그에게 사월은 늘 그런 느낌을 안겨주었다. 사월은 뭔가 마무리 되지 않는 달이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사월의 사랑은...... 그의 마무리 되지 못한 사월은.... 어쨌든 더 잘됐지 뭐. 그는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형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 잘됐다는 것인지, 일 년 중 이 시기에 피를 회수한 것이 그렇다는 것인지.

그에게 삼십 일간의 휴전이 주어진 것은 불과 삼십 분 전이었는데, 그는 벌써 그의 삶이 두 동강 났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삶이 원래부터 그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지루할 만큼 더디게 흘러간 스물여섯 번의 삼월과 스물여섯 번의 사월, 또 그만큼의 겨울과 여름으로 이루어진 스물여섯 해라는 한 토막과, 절반의 삼월과 절반의 사월을 지닌, 서리 반짝이는 두 개의 부러진 가지 같은, 눈사태만큼이나 격정적이고 맹렬한 넉 주간의 짧디짧은 한 토막.             (P21)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 그는 살인의 의식은 관습법의 일부분일 뿐이며, 피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부분들에 비한다면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이 놀랐다. 그러나 관습법의 각 부분들은 아주 가느다란 실의 타래처럼 서로 깊이 얽혀 있어서, 이편이 어디서 끝나며 저편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각 부분들은, 말끔히 세탁된 것이 피로 얼룩진 것을 낳고, 피로 얼룩진 것이 말끔히 세탁된 것을 낳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자자손손 영원히 이어가는 것 같았다.          (P29-30)  

    

“.... 한길에는 또다시 그조르그만 덩그러니 남았다.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는 어떤 때는 경계가 분명하다가 또 어떤 때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지반이 침하하고 물이 고여 도로 곳곳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도로는 깃대의 길이만큼 넓어야 한다.’ 그는 아직도 암송하는 카눈의 도로에 관한 정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전부터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에는 사람들이 통행하며, 또한 짐승들이 통행하고, 산 자들과 더불어 죽은 자들도 통행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그는 이 정의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카눈은 보기보다 훨씬 강력했다. 카눈은 대지 위로, 들판의 경계 표지들 위로, 도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각각의 집 초석 위에, 무덤, 교회, 한길, 시장, 결혼식에 배어 있고, 고지의 목장에도 아로 새겨져 있으며, 심지어 그보다 높은 하늘에까지 잇닿아 있었다. 그리고 카눈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무수한 살인의 동기가 되는 관개용 운하들을 채우곤 했다.        (P31)      


그렇다면 대체 그토록 세세한 규범들과 그 막중한 무게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것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기원한 걸까? 그러한 의문들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옛 시절의 왕들을 들먹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규범들이 왕들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의 할머니가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었다. 네가 산에게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은 너에게 대답을 해준다, 라고.            (P32)       

그러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형의 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 그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니! 오직 사람을 죽인 연후에야,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라야 그의 삶이 이어질 거라니!

아, 아아! 그는 폭발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무언가 그릇된 일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반항적인 태도에 대해 스스로 벌을 주려는 듯 죽음의 의식(儀式)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산악 지방 주민들은 반드시 소총으로 피를 회수했다. 결코 다른 방식은 사용하지 않았다. 칼, 돌, 노끈, 등 불을 뿜지 않고 거리를 둘 수 없는 다른 수단들에 대해서는 카눈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조르그는 그 점에 대해 사전에 깊이 숙지하고 있었다. 한편 그 세계도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피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부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피의 법칙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부분이었다.                 (P32-33)  

       

그러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의 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니! 

오직 사람을 죽인 연후에야,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야 삶이 이어질 거라니!                  (P35)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 할지라도, 한편으로는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복수와 상관없이 사는 몇몇 가족을 애써 떠올렸으나, 그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행복의 징후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위험과 관계없는 그런 삶으로는 생명의 값어치를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덜 행복하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P40)     

 

... 그랬다. 만일 마법으로 일의 흐름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아아, 길손이 조금만 더 가서 멈춰 섰더라면, 조금만 더 가서.....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에 멈춰 섰으며, 누구도 피해자가 쓰러진 방향을 변경할 수 없듯, 또 옛 카눈의 법칙들이 결코 수정될 수 없듯, 그 일에 대해 터럭만큼이라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드림이 없었더라면 모든 게 너무도 달라졌을 것이기에, 때로 그조르그는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일이 그렇게 되어야만 했으며,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 할지라도, 한편으로는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복수와 상관없이 사는 몇몇 가족을 애써 떠올렸으나, 그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행복의 징후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위험과 관계없는 그런 삶으로는 생명의 값어치를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덜 행복하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대로 복수가 들어선 가정에서는 하루하루와 계절들이 그 속에 전율이 동반되어 있기라도 한 듯 다른 가정들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으며, 그러한 가족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았고, 그러한 가정의 소년들은 소녀들로부터 더 인기를 끌었다. 그가 방금 전에 마주쳤던 두 수녀도 ’그가 죽음을 요구한다, 혹은 죽음이 그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검은 천이 그의 소매에 꿰매여 있는 것을 보자, 그를 야륵한 눈길로 쳐다봤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두렵고도 위엄 있는 것이 생각났다. 스스로도 그것을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심장이 그렇게 밖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상처받기 쉽고 공격에 극도로 민감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사물들 — 나비, 나뭇잎,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벌판, 혹은 오늘 내리는 비만큼이나 처량한 비 — 에 대해서도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그의 심장위로 쏟아져내린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의 심장은 다 견뎌낼 것이며, 그 이상도 받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P40-41)   

  

“그건 실로 죽음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해놓은, 죽음의 헌장이라 해야 되겠지.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가혹한 것이든 간에, 나는 한 가지는 확신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헌법 체계 중의 하나이며, 우리 알바니아인들은 그것을 창조한 것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한다는 거야.” ...... “그래, 내가 제대로 말한 거야. 우리는 그것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할 거야. 라프쉬는 근대 국가에 속하면서도 — 그러니까 내 말은 유럽 근대 국가라는 뜻이지. 원시 부족들의 거주지가 아니라는 뜻이야 — 법-사법체계 — 경찰 — 법정, 요컨대 국가의 모든 속성을 내동댕이친 유일한 지역이야. 이렇게 이 지역은 그런 속성들을 내동댕이쳤다구, 내 말 이해하겠어? 한때는 이곳도 그런 국가들의 속성들을 따랐지만 곧 그것들을 부정했어. 잇따른 외부 침략자들이 세운 정부나 그 훨씬 뒤, 독립 알바니아의 정부로 하여금 고원 지대를 그렇게, 즉 절반은 왕국과 가까운 모습으로, 절반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도록 완전한 다른 법칙들로 대체한 거지.”             (P84-85)      

“저 아래, 티라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습법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 당신은 그런 오해가 카눈의 어원과 관련있다는 것, 즉 동양쪽인 터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믿는 것에서 비롯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은 오래된 그리스어 카눈(kanoun)일 뿐이며, 라틴 민족이 그것을 카논(canon)으로 바꾸었고, 이어 알바니아인들이 카누(kanu)로,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시 카눈(kanun)으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해주면,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야. 그래서 그 말을 ‘터키 풍(풍)’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걸 이해하고 나면, 그들은 아이들이 사물에 대해 묻는 식으로 질문을 해. ‘그럼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그러나 다른 모든 위대한 것들처럼 카눈은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 위에 존재하는 거야. 그럼, 그런 것을 뛰어 넘는 거지......”           (P87)      

    

“그러면 이제 문제는 알바니아인들이 왜 이런 것을 만들어냈느냐, 하는 거야.”

그는 그녀의 어깨 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 자신의 말이 그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거의 남겨두고 있지 않은데도, 그녀에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나 추측을 촉구하듯 말했다. 그는 알바니아인은 왜 혈연관계를 포함한 인간의 다른 모든 관계를 넘어서는 위치에 손님을 올려놓는 관습을 만들어냈느냐고 재차 질문했다(그러나 그의 질문이 향한 상대가 자신인지, 디안인지, 혹은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베시안에 따르면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 속에서 평범한 사람을 하루아침에 현기증 나는 높은 곳까지 끌어올리는 초유의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산악 지방 주민들은 이따금 그럴 필요성을 절감했음이 틀림없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손님이라는 지위는 이곳에서 군주와도 같은 존경을 받는 위치야. 그런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는 단도를 휘두를 필요도, 독약을 준비할 필요도 없어. 단지 대문을 똑똑 두드리기만 하면 돼.”

디안은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참 말도 잘하네!”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관자놀이를 덮고 있는 짧은 고수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일단 그런 지위를 누리게 되면, 알바니아인들의 위험하고 비참한 삶에서 손님이 됐다는 사실은, 불과 네 시간 동안이든 이십사 시간 동안이든 간에 일종의 휴식, 여분, 휴전, 유예의 시간이 되는 것이지. 또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신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된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P98-99)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길손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우리의 손님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며, 그 순간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물, 범할 수 없는 지배자, 입법자, 이 세상의 불꽃으로 변하는 거지. 이런 변신의 돌발성이야말로 신성의 특성이라 하겠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들은 가장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불쑥 나타나곤 하지 않았어?"

바로 그런 식으로 손님은 알바니아인들의 대문 앞에 출현하는 거지…. 몇 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전(全) 세대의 생존이나 소멸이 좌우될 수 있지. 산악 지방 알바니아인들에게 손님은 그런 존재라고.                (P117)     

“그가 그처럼 창백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 모양이네.”

“누구?”

“그 청년, 조금 전에 보았던 산악 지방 청년.”

“그럼! 그렇고말고.”

베시안은 디안이 ‘창백하다’는 말을 마치 ‘아름답다’는 말을 할 때처럼 발음했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그 생각은 곧 그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뭐지?”

“누구?”

“누구긴, 그 산악지방 청년 말야.”

“아,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베시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주막집 주인 말대로 나흘이나 닷새 전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리고 그가 대 베사, 다시 말해서 삼십 일간의 휴전을 얻어냈다면, 아직 이십오 일간은 평범한 일상의 삶을 누릴 수 있겠지.”

베시안은 입가에 쓴 미소를 지었으나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무표정했다. 

베시안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최후의 이승 허가증 같은 것이지. 그러니 ‘살아 있는 자들이란 이승에서 살도록 허락받은 사자(死者)들’ 이라는 그 유명한 문구는 우리의 이 산악 지방에 딱 들어맞는 말인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는 마치 소매에 저승의 표시를 달고, 휴가차 저승에서 온 것 같았어.....”        (P136-137)  

   

고원지대의 수수께끼 앞에서 그의 두뇌가 그런 식으로 경직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고원지대는 그에게 합법적이고,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세계의 전부였다. 나머지 세상, ‘아래 세계’는 악취가 풍기고 퇴화만을 거듭하는 질퍽한 함몰의 세계일 뿐이었다. (P168)     

“당신도 아시겠지만, 카눈에 따르면 부상을 입힌 경우 벌금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부상 부위의 벌금은 각기 따로 지불되며, 값은 부상 부위가 신체의 어느 부분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머리에 부상을 입힌 경우에는 몸통에 입힌 경우보다 배상금이 두 배 많고, 몸통의 부상도 허리 위냐 아래냐에 따라 다시 두 군으로 나뉩니다. 다른 분류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배석자로서의 임무는 단지 그런 부상의 수와 부위를 결정하는 겁니다.” (P223)  

   

당신의 책, 당신의 예술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오. 불행한 산악 지방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구경하고, 재밌는 소재나 찾고 있소, 당신의 예술을 살찌우기 위해, 미(美)를 찾기 위해 당신은 이곳에 왔소.

한 민족 전체를 피비린내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석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            (P227)     

그는 눈길을 고정시킨 채 무덤을 응시했다. 나.... 남은.... 남은 것이라고는 저것뿐이라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삶에서 남은 것이 저것뿐이라니.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삶이 남길 것은 바로 저것뿐이로구나.

그 모든 고뇌들, 불면의 밤들, 아버지와 벌였던 무언의 언쟁들, 망설임, 심사숙고, 그리고 고통들이 결국 저런 헐벗은, 의미 없는 돌무더기 하나를 만드는 데 소용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와 돌무덤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그의 주위에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지워졌다. 그조르그 자신과 무덤만이 지구상에 남아 있다. 그런데 왜지? 그 모든 것들이 어디에 소용된 거지? 그의 의문은 저기 땅바닥에 쌓여 있는 돌멩이들처럼 벌거숭이였다. 그 의문은 그의 온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하느님, 이토록 고통스럽다니요! 그는 설사 지옥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머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침내 몸을 움직여 가능한 한 그곳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고 했다.         (P236)     


때는 삼월 말이었다. 곧 사월이 닥칠 것이다. 절반은 밝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어둡게. 죽음의 사월. 만일 죽지 않는다면, 그는 유폐탑에서 시들리라. 어둠 속에서 시력은 약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할지라도 그는 이 세상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P238)     


그는 늘 거리를 두고 약간 떨어져 앉았으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것에 만족해하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이따금 그의 정신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야기의 단편들을 움켜잡고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에 덧붙이거나, 반대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자신의 삶의 파편들을 삽입시키곤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늘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P242)     


그는 살아오는 동안 많은 여인의 눈을 보았다. 강렬한 눈, 수줍어하는 눈, 뇌색적인 눈, 섬세한 눈, 간사한 눈, 오만한 눈 등 많은 눈들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눈길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신비로운 것 같기도 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동정어린 것 같은 눈. 그녀의 눈길에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과 함께 사람을 옭아매 먼 곳으로, 삶 너머로, 저 세상으로,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곳으로 실어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밤(너무도 적은 별들이 검은 가을 하늘을 채우려 애쓰듯 그가 잠으로 그럭저럭 채우려 애쓰고 있는)이 되어 잠으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빛이 소모되었던 천지창조 때에 잃어버렸던 다이아몬드가 되어 그의 내부에 박혀 있었다.           (P243)  

   

동강 난 사월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몽유병자인 그에게 남겨진 한 줌의 나날들이 다할 때까지 그는 자신이 영원히 그릇된 방향으로만 걸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P249)  

   

베사가 끝나면, 그는 카눈의 시간을 벗어날 것이었다. 시간을 벗어난다.... 그는 되뇌었다. 사람이 그처럼 자신의 시간으로부터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은 조금 남았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서 그는 다시 되뇌었다. 구름층의 으깨어진 장미들은 이제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그조르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했다. 어쩔 것인가, 하는 수 없지!                 (P312)  

   

올 게 왔구나, 하지만 실은 모든 게 지나치게 길었어.....

다시금 발소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의아해졌다. 저 발소리는 누구의 것이지? 그는 그 소리가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랬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려놓는 손만큼이나 그 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발소리로군! 3월 17일, 브레즈프토호트 근처 길에서..... 그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 다시 그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여전히 그것이 자신의 발소리이며, 도로 위에 막 쓰러뜨린 그의 몸뚱이를 놓아두고 그렇게 달아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인 것만 같았다.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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