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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08. 2024

존재와 부재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43

사진은 존재와 부재 사이에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진이 존재의 증명으로서 또는 기억의 증명으로서 받아들인다. 이러한 믿음은 사진이 존재했던 것, 마치 실재했던 사실을 찍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진은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영정 사진은 존재했던 부모의 모습과 현재의 부재한 상황에서 부재를 동시에 이야기해준다. 사진은 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시간의 부패(corruption)를 지연시킴으로써 과거의 시간의 강에서부터 느리게 흘러서 현재에 이르고, 다시 미래로 가게 될 것이다.   

   

사진의 가치는 시간이 지남으로 변화되어간다. 과거의 존재는 현재의 시간에서 볼 때 언제든지 그 가치는 변하게 될 것이다. 사진의 이미지가 부재와 존재의 매력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생각은 사르트르의 상상계(L'Imaginaire)에 강하게 반향을 일으킨다. 상상계(L'Imaginaire)의 근거를 이루는 가정 중 하나는 정확히 이미지가 무엇보다도, 부재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은 만족시키지 않고 오히려 존재에 대한 욕망을 유발시킨다. 이것은 이미지가 그 대상을 "존재하지 않는 것(nothing)"으로 제공하는 한 사실이다: 

...사랑했던 죽은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내게 나타난다면, 내 마음의 아픈 곳을 느낄 수 있는 '환원(reduction)'은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지의 일부이며, 그것은 대상을 존재의 공(空, nothingness)으로 제공한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사르트르의 시선은 타자 또는 대상을 볼 때 인간은 의식의 지향성을 통해서 무엇인가(대자존재)와 존재를 맺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의식은 자기 아닌 사물을 의식하거나 자기 자신을 의식하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이다. 또한 그 자체로 ‘결여(magque)’로 여겨지는 의식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결여의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바꿔 말해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를 가지고 자신의 지향성의 구조를 채워야만 한다. 여기서 자신의 지향성의 구조를 무엇인가로 채우기 위해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겨냥하고 잘라내는 작용을 ‘무화작용(neantisation)’으로 규정한다.      


사르트르는 이 무화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가령 피에르(Pierre)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와 약속한 카페에 들어서는 장면을 예로 들고 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카페에 들어서면서 나는 피에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본다. 그러면서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 예컨대 탁자, 의자, 다른 사람들 하나하나 등을 겨냥하고 잘라낸다. 이런 식으로 나는 그 존재 또는 특히 그 사람이 피에르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해나가게 된다. 다시말해 이들 존재 하나하나를 나의 의식의 지향성의 구성하는 한 항목으로 출두시켰다가 이내 그것이 피에르가 아닐 경우 다른 존재로 옮겨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무화작용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피에르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즉 그를 나의 의식의 지향성의 구조를 채우는 무엇인가로 사로잡고서야 비로소 나는 무화작용을 일시적으로나마 멈추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무화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을 채우는 한 항목인 무엇인가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사르트르는 결국 "이미지는 순수하고 단순히 부정된(deny) 세계가 아니라, 항상 특정 관점에서 부정된 세계이며, 이는 정확히 '이미지화된 대로' 제시된 대상의 부재 또는 무(無, nonexistence)를 가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사르트르는 이미지의 존재와 부재에 관련해서 생각할 여지를 준다. 사진가는 어떤 공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 공간의 앞에 서 있고,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또는 갑자기 등장한 낯선 존재에 의해서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사진가의 의식의 지향성은 무엇인가를 상상속의 공간에서 사진에 담기 위해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사진가는 한 곳을 지향하다보면 나머지는 어떻게 보면 의식에 의해 무화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아마 찍고자 하는 곳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나머지 부분은 포커스가 흐릿하게 되고, 모든 의식은 자기가 지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미지는 의식이다(L'image est con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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