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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1999년

by 노용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1999년에 개봉했다. 주연은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영화 감독 시드니 폴락이 비중있는 조연인 빅터 지글러 역으로 나왔다.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의사로, 심리학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 작가이다. 그의 <카사노바의 귀향, 꿈의 노벨레>는 인간 본성과 욕망에 대한 탐구를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개인의 내면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섹스와 사랑, 사회적 규범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복잡한 주제를 다루며, 당시 오스트리아의 빈테케 베르트(Belle Epoque)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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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남편은 이른 새벽에 벌써 환자의 침상으로 가야 했다. 가정주부이자 엄마로서 해야 할 일들 때문에 알베르티네도 좀처럼 더 오래 쉬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간들은 일상의 의무와 노동 속에서 예정된 대로 무미건조하게 지나갔다. 지난밤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도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아이가 잠자리에 들고,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을 지금에야, 멜랑콜리한 미지의 남자와 빨간색 수도복을 입은 사람들 등 가장무도회의 환영들이 다시 현실로 떠올랐다. 그리고 전날 밤의 보잘것없는 체험들은 일탈의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킨 때문인지 돌연 매혹적이고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었다. 악의는 없지만 음흉한 질문들이, 약삭빠르고 모호한 대답들이 오갔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완전히 솔직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둘 다 약간 복수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가장무도회에서 누군지 모르는 파트너가 풍겼을 매력의 정도를 과장했고, 상대방이 질투 어린 흥분을 드러내면 놀리며 자신은 흥분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들은 그렇게 지난밤의 아무것도 아닌 모험에 대해 가볍게 잡담을 하다가, 짐작조차 못했던 숨겨진 욕망에 관해 더 진지한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 욕망은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속으로 음울하고 위험한 회오리바람을 몰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P15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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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체험들 대부분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신혼 초 몇 년 동안 그는 그녀의 질투 어린 호기심을 채워주느라 너무 고분고분 많은 것을 털어놓았고, 차라리 비밀로 간직하는 게 더 나았으리라 생각되는 것까지 누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순간 많은 기억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마음속을 파고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그가 젊었을 때 사귀었던 애인들 가운데 반쯤 잊고 지내던 한 여자의 이름을 마치 꿈꾸듯 입 밖에 냈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름은 그에게 비난처럼, 아니 가벼운 협박처럼 들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각각의 존재 속에서 -- 진부하게 들리더라도 내 말을 믿어요 --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한 각각의 존재 속에서, 난 항상 당신만 찾았어. 알베르티네, 당신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난 잘 알아.”

그녀가 침울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나 좋을 대로, 우선 남자를 찾으러 다녔다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차갑고 속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녀의 손이 자기 손에서 미끄러져나가게 두었다. 마치 그녀가 거짓말하고 배신하는 현장을 덮친 것처럼. “아, 당신들이 안다며.....”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안다면이라니? 당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녀는 이상하게도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여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대충 비슷해요.”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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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야기해봐, 벌써 시작했잖아..... 비밀 행사? 비공개 모임? 초대받은 손님들?”

“난 몰라. 요전에는 서른 명이었어. 처음에는 열여섯 명뿐이었는데.”

“무도회야?”

“물론 무도회지.” 그는 말해버린 것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는 거기에 맞춰 음악을 연주하고?”

“거기 맞춘다고? 나는 무엇에 맞추는지 몰라. 정말이야. 난 몰라. 나는 연주해. 연주한다고. 두 눈을 가리고서 말이야.”

“나흐티갈, 나흐티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흐티갈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완전히 가리지는 않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냐. 이를테면 눈을 가린 검은색 비단천을 통해 거울이 보여......” 그리고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로.” 프리돌린은 얕보는 표정으로 초조하게 말했지만 이상하게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알몸의 계집들.”

“프리돌린, 계집이라는 말은 하지 마.” 나흐티갈이 기분이 상한 듯 대꾸했다. “넌 그런 여자들을 결코 보지 못했을 거야.”

프리돌린은 살짝 헛기침을 했다. “입장료가 얼마나 비싼데?” 그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물었다.

“입장권을 말하는 거야? 그래? 하, 당치도 않은 생각 좀 작작해.”

“그럼 어떻게 들어가는데?” 프리돌린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북을 치듯 탁자를 두드렸다.

“암호를 알아야 해. 그런데 암호가 매번 달라.”

“그럼 오늘 암호는?”

“나도 아직은 몰라. 마부가 와야 알 수 있어.”

“나흐티갈, 나를 데려가줘.”

“안 돼, 너무 위험해.”

“1분 전까지만 해도 내게..... ‘허용할’ 의향이 있었잖아. 가능한 방법이 있을걸.”

나흐티갈은 그를 심사하듯 살펴보았다. “지금 네 복장 그대로는 절대 안 돼. 신사 숙녀 모두 가면을 쓰니까. 가면은 있어? 불가능해. 어쩌면 다음번에는 될지도, 뭔가 방도를 생각해볼게.” 나흐티갈은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커튼 틈새로 길거리를 바라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마차가 왔네, 잘 있어.”

프리돌린은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이렇게 가버리지는 못할걸. 나를 데려가야 할 거야.”

“하지만 이 친구야.......”

“다른 것은 내게 맡겨. 그게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아. 나를 유혹하는 게 바로 그 점이겠지.”

“하지만 벌써 말했잖아. 의상과 가면이 없으면---”

“가면을 빌릴 수 있는 곳들은 있어.” (P188-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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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문가에 놓인 피아노에서 프리돌린은 서서히 희미해져가는 나흐티갈의 형체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맞은편 방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고, 여자들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모두들 거무스름한 베일로 머리와 이마와 목덜미를 감쌌고, 까만 레이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 밖에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프리돌린의 두 눈은 갈망하는 빛을 띤 채, 풍만한 형체에서 날씬한 형체로, 미숙한 몸매에서 눈에 띌 정도로 성숙한 몸매로 옮겨다니며 헤맸다. 알몸의 여자들은 모두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까만 가면 속의 커다란 눈들은 그를 향해 빛났다. 그것은 이제 이 여자들을 보고 싶은 형언키 어려운 욕구를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열망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처음에 황홀경에 빠진 듯했던 숨소리는 깊은 고통이 새어나오는 신음으로 바뀌었다. (P201)


“당신, 정신 나갔군요. 나는 당신과 함께 떠날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다른 어떤 남자와도 떠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잃게 할 거예요.”프리돌린은 꼭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녀, 향기가 나는 그녀의 몸, 빨갛게 타오르는 그녀의 입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방의 분위기, 이곳에서 그를 감싸고 욕정을 자극하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는 이 밤의 모든 체험에 도취된 동시에 갈증을 느꼈다. 그는 그 체험들 중 어떤 것의 끝도 보지 못했다. 또 자기 자신에도, 자신의 대담함에도, 자기의 내면에 느껴지는 변화에도 도취되었고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머리를 휘감은 베일을 끌어내릴 것처럼 매만졌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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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를 잊었소.” 프리돌린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침착하다고 느꼈다.

“그거 불행한 일이네요.” 노란 옷의 신사가 말했다. “당신이 암호를 잊었건 아예 몰랐건, 이곳에서는 마찬가지니까요.”

남자 가면을 쓴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양쪽으로 통하는 문들이 닫혔다. 프리돌린은 혼자 수도복 차림으로 여러 색깔의 기사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가면 벗겨!” 몇몇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프리돌린은 마치 방어라도 하려는 듯 팔을 앞으로 뻗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로 있다는 것이,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갑자기 벌거벗는 것보다 수천 배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가운데 저의 등장 때문에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관례에 따라 명예 회복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 가면만은 여러분 모두 함께 벗는 경우에만 벗겠습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명예 회복이 아니라,”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빨간색 기사 복장의 남자가 말했다. “속죄요.”

“가면 벗겨!” 낭랑하고 거만한 목소리의 또다른 사람이 명령조로 말했다. 프리돌린은 그 목소리가 장교의 명령투 같다고 느꼈다. “당신이 고대하는 말을 당신 가면이 아니라 얼굴에 대고 하겠소.”

“난 가면을 벗지 않겠소.” 프리돌린이 좀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감히 나를 건드리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소.”

갑자기 어떤 팔 하나가 가면을 벗겨내려는 듯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느닷없이 문 하나가 열렸고, 거기에 한 여자가 --프리돌린은 그녀가 누군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수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 뒤쪽의 지나치게 밝은 방에는 다른 여자들이 보였다. 얼굴을 가리고 벌거벗은 채 말없이 서로 꼭 달라붙어 있었다. 겁에 질린 무리의 모습이었다. 문은 곧바로 다시 닫혔다.

“그를 내버려둬요.” 수녀 복장의 그녀가 말했다. “저는 그의 몸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요.”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듯 잠깐 깊은 침묵이 흐른 뒤, 프리돌린에게 맨 처음 암호를 대라고 요구했던 검은색 기사가 수녀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그 일 때문에 무슨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알아요.”

방 안에 깊이 심호흡을 하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당신은 자유요.” 기사가 프리돌린에게 말했다. “즉시 이 저택을 떠나고, 여기 앞마당까지는 몰래 들어왔지만 더는 비밀을 캐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 누군가에게 우리의 흔적을 밟게 한다면, 그게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 당신은 끝장날 거요.”

프리돌린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어떻게 -- 이 여자가 내 몸값을 대신 치른단 말이오?” 그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몇몇 사람의 팔이 문을 가리켰다. 그에게 지체 없이 떠나라는 신호였다.

프리돌린은 머리를 흔들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대로 나를 처벌하시오. 나는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대가를 치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겠소.” (P207-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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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돌린은 날이 밝자마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진기한 사건을 밝히는 일에 착수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구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이해할 수 없는 그 여자를 다시 찾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이제 전혀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대가일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걸까? 희생한다고? 그녀는 정말 목전에 닥친 일, 그러니까 이제 자기에게 벌어질 일을 희생으로 여기는 그런 여자였을까? 그녀가 이런 모임에 참여해왔다면 -- 그녀가 그 모임의 관례를 대단히 소상히 아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이 오늘 처음일 리는 없었다 -- 기사들 중 한 명이나 그들 모두의 뜻에 따르는 게 그녀에게 뭐 대단한 일이겠는가? 그래, 그녀야말로 창녀가 아닐까? 그 여자들 모두 창녀가 아닐까? 창녀들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어. 설령 그녀들 모두 창녀의 삶인 바로 이런 생활 외에 그 어떤 제2의 삶, 말하자면 시민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해도 말이야. 그리고 어쩌면 그가 이제 막 경험한 모든 것이 그저 그를 데리고 한 비열한 장난은 아니었을까? 초대받지 않은 자가 그곳에 몰래 숨어드는 경우를 예견해 미리 준비하고, 어쩌면 사전 연습까지 한 장난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처음부터 그에게 경고했고 지금은 그를 대신해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이 여자를 다시 생각하자니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태도,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서 풍기는 당당한 기품에는 거짓일 리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아니면 그저 그의 , 프리돌린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기적처럼 작용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일까? 이 밤에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비추어 -- 그는 이런 생각이 전혀 엉터리 같지 않았다 -- 그는 이런 기적 역시 불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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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네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프리돌린은 그녀의 입과 이마와 얼굴 전체가 기쁘고 행복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알베르티네에게 몸을 숙여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 키스하고 싶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억눌렀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들을 겪은 뒤 몰려드는 지독히 당연한 피로감이, 부부 침실의 미혹시키는 분위기에서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갈망으로 탈바꿈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상황이 어떻든 -- 몇 시간 후에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그의 급선무는 적어도 잠시 동안 잠과 망각 속으로 서둘러 피신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날 밤에도 그는 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고 깊에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밤에는 그러면 안 된단 말인가? 그는 이미 잠든 듯한 알베르티네 곁에 드러누웠다. 우리 사이를 가르는 칼 한 자루, 하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에 나란히 누워 있군,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말 한마디일 뿐이었다. (P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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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한테서 사라졌다가 그 어딘가 낯선 곳에 다시 나타나,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특이한 환자들의 사례가 기억났다. 정신병리학 서적들을 통해 알게 된 사례들이었는데, 소위 이중적 실존에 관한 것이었다. 상태가 멀쩡한 어떤 사람이 아주 말짱한 상태로 갑자기 실종되었다 몇 달 또는 몇 년 뒤 다시 돌아왔는데,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훗날, 그 어딘가 먼 나라에서 그와 만난 적이 있는 어떤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그것에 관해 전혀 몰랐다. 이런 일들은 물론 드물게 일어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겠지만 그런 일들을 경험한 사람도 상당수 있을지 모른다. 예컨대 꿈에서 깨어날 때? 물론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잊어버리는 꿈도 있는 게 확실하다. 그 꿈은 어떤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와 불가사의한 혼미함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다. 아니면 나중에야, 아주 나중에야 비로소 기억이 나서, 뭔가를 경험한 것인지 아니면 다만 꿈을 꾼 것인지 더는 모른다. 다만 -- 다만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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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시체실에 누워 있는 여자가 스물네 시간 전에 나흐티갈이 연주한 격렬한 피아노 소리에 맞춰 그의 팔에 안겼던 바로 그 알몸의 여자인지, 이 죽은 여자가 그 어떤 다른 여자, 모르는 여자, 그가 이전에 결코 만난 적 없는 전혀 생소한 여자인지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설령 그가 찾아다녔고 열망했으며 어쩌면 한 시간 동안 사랑했던 그 여자가 아직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여자가 그런 삶을 계속 살고 있다 하더라도 -- 저기 뒤쪽의 아치형 시체실에 가물가물 타는 가스램프 불빛을 받으며 누워 있는 것은, 다른 허망한 그림자들 속에 있는 하나의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들처럼 어둡고 의미도 비밀도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이 썩어 없어지도록 정해진 지난밤의 창백한 시체였다. 그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할 수 없었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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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의심스럽게, 동시에 희망에 가득 차서 물었다. “알베르티네, 우리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깐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운명에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가 온갖 모험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현실에서의 모험과 꿈속에서의 모험에서 말이에요.”

“당신도 그걸 정말 확신하오?” 그가 물었다.

“확신해요. 하룻밤의 현실은 물론이고, 어떤 한 인생 전체의 현실조차 바로 그 인간의 가장 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요.”

“그리고 어떤 꿈도.” 그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꿈은 아니야.”

그녀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깊은 애정으로 자기의 가슴에 갖다 댔다. “우리 이제 정말 깨어나 있는 거죠.”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오래도록.”

영원히, 그는 이 말을 덧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미처 내뱉기도 전에, 그녀가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녀는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결코 미래를 놓고 묻는 게 아닌데.”

두 사람은 이렇게 말없이, 둘 다 설핏 잠이 들긴 했지만 꿈은 꾸지 않고 가까이 누워 있었다. 마침내 여느 아침처럼 일곱시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음, 커튼의 틈새를 통해 스며드는 무적의 강한 햇빛, 옆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P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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