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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2022년

by 노용헌

<가재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rawdads Sing)은 미국에서 제작된 올리비아 뉴먼 감독의 2022년 드라마 영화이다. 데이지 에드가 존스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리즈 위더스푼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 영화의 원작은 델리아 오언스가 지은 소설 'Where the Crawdads S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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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 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습지 속 여기저기서 진짜 늪이 끈적끈적한 숲으로 위장하고 낮게 포복한 수렁으로 꾸불꾸불 기어든다. 늪이 진흙 목구멍으로 빛을 다 삼켜버려 물은 잔잔하고 시커멓다. 늪의 소굴에서는 야행성 지렁이도 대낮에 나와 돌아다닌다. 소리가 없진 않으나 습지보다는 늪이 더 고요하다. 부패는 세포 단위의 작업인 탓이다. 삶이 부패하고 악취를 풍기며 썩은 분토로 변한다. 죽음이 쓰라리게 뒹구는 자리에 또 삶의 씨앗이 싹튼다.

1969년 10월 30일 아침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가 늪에 누워 있었다. 자칫하면 소리 없는 늪이 삼켜버려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으리라. 죽음을 속속들이 아는 늪으로서는 비극도 죄도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날 아침 마을 소년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낡은 망루를 찾았고 세 번째 스위치백 선로에서 체이스의 청재킷을 발견했다.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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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이 되자 토지소유권은 사백 년에 걸쳐 듬성듬성 땅문서도 없이 자리 잡은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 대부분은 남북전쟁 이전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었다. 최근에 무단거주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신창이나 빈털터리로 돌아온 남자들이 많았다. 습지는 사람을 가두지 않았으나 낙인이 찍힌 성스러운 땅답게 인간의 비밀을 지켜주었다. 원하는 사람이 없는 땅이니 누가 차지하든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봤자 황무지의 수렁일 뿐이었다.

습지 사람들은 법(法)도 위스키처럼 밀수해서 썼다. 법은 석판에 불로 새겨지거나 문서로 명시되진 않았지만 훨씬 깊은 곳, 그들의 유전자에 새겨졌다. 매와 비둘기가 부화시킨 생명처럼 오래고 자연스러운 법이었다. 목숨이 걸린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무조건 생존본능에 의존한다. 생존본능은 빠르고 공정하다. 온유한 유전자보다 훨씬 강력하게 후세대로 물려 내려가는 생존본능은 언제나 필승의 패다. 윤리가 아니라 단순한 수학이다. 비둘기들도 자기네들끼리 싸울 때는 매와 다를 바 없다. (P19)


“소방망루 아래 늪에 체이스 앤드루스가 대자로 뻗어 있어요. 죽은 거 같아요. 꼼짝도 안 해요.”

1751년 바클리코브가 정착한 이래 억새밭 너머까지 관할구역을 확장한 보안관은 한 명도 없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보안관 몇 사람이 습지로 도망친 본토의 죄수들을 찾아 사냥개를 풀었던 적이 있다. 그 후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여전히 사냥개들을 관리하고 있긴 하지만 잭슨은 습지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대체로 묵인하는 편이었다. 시궁쥐들을 잡자고 시궁쥐 싸움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체이스다. 보안관은 일어나서 걸려 있던 모자를 썼다. “어디 보자.”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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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P49)


다시 15분쯤 지난 후 보안관이 말했다. “저 작은 만까지 걸어가보자고. 트럭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트를 타고 왔을 수도 있으니까.” 두 사람은 코를 찌르는 도금양이 얼굴에 닿지 않게 치워가면서 협소한 어귀로 갔다. 게, 왜가리, 기어 다니는 어류인 성대의 자취가 젖은 모래 위에 찍혀 있었지만 인간의 흔적은 없었다.

“뭐, 하지만 이거 좀 보세요.” 조가 커다랗게 휘저이진 모래가 거의 완벽한 반원형을 그린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뱃머리가 둥근 보트를 끌고 올라온 자국일 수도 있어요.”

“아니야. 여기 부러진 잡풀 줄기가 바람에 날려 모래밭에서 이리저리 휘날린 자국이야. 그러면 이렇게 반원이 그려지지. 그저 바람에 나부낀 풀잎일 뿐이라고.”

두 사람은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반달 모양 해변에 부서진 조개껍데기, 갑각류 조각들과 게의 집게발이 온통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조개껍데기들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비밀을 잘 지켜주는 법이다.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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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우리가 왔다. 마시 걸(Marsh Girl)!"

"어이, 그 안에 있냐? 미개한 유인원 계집!“

“이빨을 드러내! 늪지의 풀을 좀 보여달라고!” 까르르 터지는 폭소.

발소리가 점점 더 다가오자 카야는 포치의 반쪽짜리 벽 뒤에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췄다. 미친 듯 번득이던 불길이 한꺼번에 휙 꺼지더니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다섯이 마당을 질러 달려왔다. 말소리는 뚝 끊겼고 소년들은 전력으로 뛰어와서 차양문을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나도록 쳤다.

철썩철썩 소리가 날 때마다 야생 칠면조의 심장에 칼이 꽂혔다.

벽에 꼭 붙어 앉아 있던 카야는 껑껑 울고 싶었지만 억지로 숨을 참았다. 마음만 먹으면 차양문을 부수고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한 번만 세게 밀면 집 안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소년들은 계단을 내려가더니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마시 걸, 늑대의 아이, dog의 철자도 못 쓰는 소녀한테 덤비고도 탈 없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환호성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들의 말과 웃음소리가 숲을 지나 밤 속으로 사라지자 이제 안전해졌다. 카야는 털썩 주저앉아 돌처럼 고요한 암흑을 노려보았다. 수치스러웠다. (P117)


그렇게 누워서 엄마는 말했다.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 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면서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 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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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가르쳐주겠다던 테이트는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깃털 놀이 이전에 외로움은 당연히 몸에 항상 붙어 있는 팔다리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외로움이 카야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슴을 짓눌렀다.

어느 날 늦은 오후 카야는 보트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점핑의 가게에 배를 대면 사람들 눈에 띌 것 같아 살짝 남쪽으로 내려가 오목한 후미에 정박했다. 그리고 어망 한 자루를 들고 유색인 마을로 가는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낮에 내내 보슬비가 내렸고,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지자 숲 안개가 눅눅한 습지를 떠다녔다. 유색인 마을에 가본적은 없지만 어디인지는 알았다. 가보면 점핑과 메이블의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P127)


“점핑 아저씨가 그러는데 사회복지사들이 나를 찾고 있대. 송어처럼 끌려가서 어디 위탁되거나 그럴까봐 무서워.”

“그래, 저기 어디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 가서 꼭꼭 숨어야겠네. 누군지 몰라도 카야를 데리고 가서 키워야 되는 사람들 참 안됐다.” 테이트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무슨 말이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니?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어.”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어디서 만날지 생각해봤어?”

“전에 내가 찾아둔 데가 있어, 다 낡아서 쓰러져가는 통나무집이야. 분기점만 잘 기억하면 배로 갈 수 있어. 나는 여기서 걸어가면 되고.” (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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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록수는 몰라도 시카모어는 이미 눈치를 챘다. 암회색 하늘 가득 수천 장의 황금빛 잎사귀를 휘날렸다. 어느 날 오후 늦게 수업이 끝난 뒤 테이트는 가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테이트와 카야는 숲속 통나무집에 함께 앉아 있었다. 카야는 몇 달 동안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드디어 입 밖에 내어 물었다.

“테이트, 오빠가 읽기도 가르쳐주고 여러 가지 갖다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오빠는 여자 친구나 뭐 그런 거 없어?”

“에에, 없어. 아니다. 가끔 있을 때도 있었지. 한 사람 사귄 적도 있는데 지금은 아니야. 여기 한적한 데 나와 있는 것도 좋고, 네가 습지에 흥미를 갖는 것도 참 보기 좋아. 카야, 사람들은 낚시할 때 말고는 습지를 제대로 보지도 않거든. 매립해서 개발해야 할 황무지라고 생각하지. 바다 생물한테 습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몰라. 자기네들이 그것 때문에 먹고 살면서.”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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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를 찾아갈 때마다 테이트는 학교나 도서관의 책을 가지고 갔다. 특히 습지 생태와 생물학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 카야의 진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이제 뭐든지 읽을 수 있어, 라고 테이트는 말했다. 뭐든 읽을 수 있게 되면 모든 걸 배울 수 있어. 이제 카야에게 달린 거야. “우리 두뇌는 아무리 써도 도저히 꽉 채울 수 없거든. 우리 인간은 마치 기다란 목이 있으면서도 그걸 안 써서 높은 곳에 있는 잎사귀를 따먹지 못하는 기린 같은 존재야.”

몇 시간 동안 등잔불을 벗 삼아 카야는 혼자서 식물과 동물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지구에 적응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떻게 진화했는지 책을 읽고 배웠다. 어떤 세포는 분열해 폐나 심장으로 특화되고 줄기 세포처럼 나중에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목적을 특정하지 않은 채 남겨지기도 한다. 새들이 주로 새벽에 노래하는 이유는 서늘하고 촉촉한 아침 공기가 자신들의 노래와 의미를 가장 널리 퍼뜨리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평생 이런 기적 같은 현상들을 눈높이에서 보아왔기에 자연의 섭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카야는 생물학의 세계를 샅샅이 뒤지며 어미가 새끼를 떠나는 이유에 답이 될 만한 설명을 찾아 헤맸다. (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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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는 문든 벌떡 일어나 앉아 주의를 집중했다. 암컷 한 마리가 암호를 변경했다. 처음에는 올바른 줄과 점의 조합을 반짝거리며 자기 종의 수컷을 끌어들여 짝짓기했다. 그러다가 언젠부턴가 다른 신호를 반짝거렸고, 그러자 다른 종의 수컷이 날아왔다. 그 암컷의 메시지를 읽은 두 번째 수컷은 짝짓기 의사가 있는 자기 종의 암컷을 찾았다고 확신하고 암컷의 머리 위에서 체공(滯空)했다. 하지만 별안간 그 암컷 반딧불이 다리를 뻗더니 입으로 수컷을 물어 잡아먹었다. 여섯 다리와 날개 두 쌍을 모조리.

카야는 다른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암컷들은 원하는 걸 얻어낸다. 처음에는 짝짓기 상대를, 다음에는 끼니를, 그저 신호를 바꾸기만 하면 됐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카야는 한 시간 더 테이트를 기다리다가 결국 판잣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P179)


카야는 힘없이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기에 모두가 떠나버리는 걸까 생각했다. 친엄마, 언니들, 온 가족, 조디 그리고 이제 테이트까지. 카야에게 가장 아린 기억은 오솔길을 따라 하나씩 사라지는 가족들이었다. 하얀 스카프 끝자락이 잎사귀 사이로 날리고, 바닥 매트리스에 남아 있던 양말 더미.

테이트와 삶과 사랑은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테이트가 없다.

“왜, 테이트, 어째서?” 카야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과는 다를 거라고 했잖아. 곁에 있어줄 거라고 했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사랑 같은 건 없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딘가 마음속 아주 깊은 데서, 앞으로는 아무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겠다는 결심이 단단하게 뭉쳤다.

카야는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근육과 심장을 끝내 찾아내곤 했다. 아무리 위태롭더라도 다음 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지독한 깡으로 얻은 건 무엇인가? 얕은 선잠이 들었다 깼다 하며 카야는 표류했다. (P181-182)


카야의 눈길이 제일 훤칠한 남자에게로 이끌렸다. 카키색 반바지를 입고 웃통을 드러낸 청년이 축구공을 던졌다. 카야는 그 등짝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을 바라보았다. 그을린 어깨, 카야는 그 청년이 체이스 앤드루스라는 걸 알았다. 자전거로 카야를 칠 뻔한 후로 지난 수년 동안, 카야는 체이스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밀크셰이크를 먹으러 식당에 가거나 점핑에게서 연료를 사는 모습을 봐왔다. (P188)


카야에게도 여자 친구들이 필요해요. 영원히 지속되거든. 서약도 필요 없고. 여자들끼리 꼭꼭 뭉쳐 다니면 거기가 이 땅에서 제일 따뜻하고 제일 터프한 곳이지요.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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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는 우듬지 위로 솟아오른 버려진 소방망루의 닳아빠진 목재 망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몇 분 후에 두 사람은 거칠게 자른 말뚝으로 세운 망루 다리 밑에 다다랐다. 검은 진흙이 망루 다리를 휘감고 탑 아래로 질척이며 스몄고, 축축한 부패물이 다리를 갉아 먹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계단이 꼭대기까지 엇갈려가며 놓여 있었고, 망루는 한 층씩 올라갈수록 좁아졌다.

진창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체이스가 앞장섰다. 다섯 번째 스위치백에서 내려다보니 서쪽으로 둥근 참나무 숲이 눈길 닿는 곳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방향을 보나 후류, 호소, 개천과 강어귀의 생태계가 화려한 녹색 풀밭을 가르며 바다까지 치닫고 있었다. 카야는 습지 위로 이렇게 높이 올라온 적이 없었다. 발밑에서는 모든 조각이 맞춰져 있었고 카야는 오랜 친구의 얼굴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보았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서 체이스가 계단 입구를 덮은 철문을 밀어서 열었다. 망대에 올라서서는 다시 덮었다. 카야는 손으로 톡톡 두드려본 다음 철문을 밟고 섰다. 체이스가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 걱정 마.” 둘은 난간으로 가서 함께 습지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꼬리말똥가리 두 마리가 눈높이에서 솟구쳐 날아올랐다. 날개 밑으로 바람이 바스락거렸다. 새들은 자신의 활공 영역에 우뚝 선 젊은 남녀를 보고 놀라서 고개를 외꼬았다. (P207-208)


“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에드가 말했다. “뭐로 엮은 목걸이죠? 추락할 때 벗겨진 게 아닐까요?”

“생가죽 끈으로 조개껍데기 하나를 꿰어 만든 목걸이인데 길이는 체이스의 머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어요. 느슨하지도 않았고 단단히 매듭이 지어져 있었죠. 도저히 저절로 벗겨졌을 리 없어요.”

“그렇군요. 생가죽은 질기고 한 번 매듭 지으면 왠만해서는 안 풀리죠.” 에드가 말했다. “왜 그 목걸이를 항상 하고 다녔죠? 누구 특별한 사람이 만들어준 건가요? 선물받은 겁니까?”

패티 러브는 말없이 앉아서 눈길을 돌린 채 보안관 책상 옆을 바라보았다. 차마 말하기가 두려웠다. 예전에는 아들이 늪지 쓰레기와 엮였다는 사실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체이스와 마시 걸이 결혼 전에 1년 이상 사귀었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기는 했다.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아들이 그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물어봐도 패티 러브는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이제는 솔직히 터놓고 다 말해야 한다. 패티 러브는 아들의 죽음에 틀림없이 그 계집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요, 체이스에게 그 목걸이를 만들어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낡아빠진 쥐덫 같은 보트를 몰고 돌아다니는 그 여자예요. 예전에 둘이 사귈 때 그 여자가 만들어줬죠.”

“마시 걸 말입니까?” 보안관이 물었다. (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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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사생활을 왈가왈부해?” 카야는 바짝 다가가서 단어를 하나씩 짓씹으며 뱉어내듯 말했다.

테이트는 결연히 말했다. “자격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어쨌든 할 생각이야.”

이 말에 카야는 가차 없이 돌아섰지만 테이트는 그녀 등에 대고 언성을 높였다. “너는 마을에 살지 않잖아. 체이스가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하는 것도 모르잖아. 얼마 전에도 밤에 파티가 끝난 후에 그 녀석이 픽업트럭에 금발 머리 여자애를 태우고 가는 걸 봤어. 그 자식한테는 네가 아깝단 말이야.”

카야가 빙글 돌아섰다. “아, 그러셔! 나를 두고 떠난 건 너잖아. 약속해 놓고 돌아오지 않았잖아. 영영 돌아오지 않았잖아. 하다못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언반구 연락도 없었잖아. 나랑 헤어질 배짱도 없었던 주제에. 남자답게 내 얼굴 보고 말할 용기도 없었지. 그래서 그냥 사라졌잖아. 닭똥만도 못한 겁쟁이 새끼. 그 많은 세월 다 흘려보내고 이제 슬렁슬렁 여기에 얼굴을 디밀고...... 너는 그놈보다 더 나빠. 체이스가 완벽한 남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너는 비교도 안 되게 나쁜 놈이야.” 카야는 갑자기 말을 뚝 끊고 테이트를 노려보았다. (P245)


테이트는 깃털 그림을 집어들었다. 수백 회의 얇디얇은 붓질로 풍부한 색채들이 화려하게 어우러지다 심도 깊은 검정으로 절정을 이루고, 햇빛이 캔버스를 어루만지듯 빛을 반사했다. 줄기가 살짝 찢어진 디테일은 너무나 독특했기에 테이트와 카야는 동시에 깨달아버렸다. 이건 테이트가 숲속에서 처음으로 카야에게 선물했던 그 깃털 그림이라는 걸. 둘은 깃털을 바라보다 서로의 눈을 보았다. 카야가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감정을 눌렀다. 믿지 못할 남자에게 또 끌려갈 수는 없었다.

테이트가 다가와 카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돌려세우려 했다. “카야, 널 두고 떠나서 정말로 미안해. 부탁이야, 용서해줄 수는 없겠어?”

마침내 카야가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용서하는 법을 모르겠어, 테이트. 다시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테이트, 이제 그만 가줘, 제발.”

“알았어. 내 말 들어줘서 고마워. 사과할 기회를 줘서.” 테이트는 한 박자 기다렸지만 카야는 이미 입을 다물어버렸다. 적어도 빈손으로 떠나는 건 아니었다. 출판사를 찾겠다는 희망은 카야와 다시 연락할 끈이 생겼다는 뜻이었으니까.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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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서 나온 카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도둑질한 족제비처럼 종종걸음 치며 부두로 향했다. 간신히 집에 돌아온 카야는 부엌 식탁에 앉아 새 연구소 기사를 읽으려 신문을 펼쳤다. 과연 멋진 현대식 시설이 바클리코브에서 시오크스 쪽으로 30여 킬로미터쯤 내려간 지점에 건설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무려 전체 해양 생물 전반의 생존과 직결된 습지의 생태를 연구하게 된다고......

기사를 계속 읽으려고 페이지를 넘기자 체이스와 아까 그 여자의 사진이 커다랗게 나왔다. 약혼발표였다. 앤드루스-스톤. 말이 뭉쳐 쏟아지는가 싶더니 흐느낌으로 변하고, 극심한 과호흡이 잇달았다. 카야는 벌떡 일어나 멀찍이 물러서서 신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가서 신문을 주워 들고 읽었다. 머릿속 상상이 틀림없다. 현실일 리가 없다. 하지만 거기 떡하니, 얼굴을 꼭 붙이고 미소 짓고 있는 그들이 있었다. 젊은 여자, 펄 스톤, 아름답고 부티 나는 얼굴에 진주목걸이와 레이스 블라우스. 체이스가 팔을 두르고 끌어안고 있던 여자. 항상진주목걸이. (P259)


바닷가에 댄 보트로 달려가 스로틀을 최고로 올리고 굉음을 내며 바다로 나간 카야는 곧장 이안류로 직진했다. 머리를 한껏 젖히고 절규했다. “비열한 새끼...... 인간 쓰레기!” 질척하고 혼란스러운 물살이 뱃머리를 좌우로 비틀며 조종간에 압박을 가했다. 바다는 늘 습지보다 크게 분노한다. 깊은 만큼 할 말도 많다.

오래전, 카야는 정상적인 조류와 이안류를 읽는 법을 배웠다. 이안류를 끝까지 타거나 이안류가 몰아치는 방향에서 직각으로 꺾어 질러 탈출하는 법도, 그러나 깊은 조류를 향해 똑바로 치달은 적은 없었다. 이안류 중에는 1분에 1억 리터의 물을 뿜어내는 멕시코 만류의 여파도 있었다. 지구의 강을 모두 합쳐도 노스캐롤라이나의 돌출부 너머에서 흐르는 만류의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파랑이 잔인한 후류를 자아내고 소용돌이가 주먹처럼 뭉쳐지면 물이 역류해 연안의 급류를 가로지르며 휘몰아쳐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덫이 만들어진다. 카야는 살면서 이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늘은 이안류의 목구멍으로 똑바로 들어가볼 생각이었다. 아픔을, 분노를 삭일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P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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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는 체이스를 잃었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거절로 점철된 삶이 슬펐다. 머리 위에서 씨름하는 하늘과 구름에 대고 카야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인생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거라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사람들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체이스가 교묘하게 결혼 얘기를 꺼내 미끼를 던지고, 지체 없이 카야를 침대로 끌어들인 다음 헌신짝처럼 버리고 딴 여자를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카야는 수컷들이 여러 암컷을 전전한다는 연구 결과를 읽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한테 빠졌을까? (P264)


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뿐이었다.

예측 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가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P267)


카야는 이 땅이 그녀 가족 소유인지, 아니면 4세기에 걸쳐 대다수 습지 사람들이 그랬듯 불법점거 하고 있을 뿐이지 여부를 알지 못했다. 엄마의 행방을 말해줄 실마리를 찾아 집 안에 있는 종잇조각이란 종잇조각은 죄다 뒤졌지만 땅문서 같은 건 본 적도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카야는 예의 가족 성경을 천에 싸서 바클리코브 법원으로 가지고 갔다. 엄청나게 넓은 이마와 왜소한 어깨를 지닌 백발의 직원이 커다란 가죽으로 제본한 기록들과 지도, 항공사진 몇 장을 꺼내와서 책상에 죽 펼쳤다. 카야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어 그녀가 사는 호소를 가리키고 대충 자기 땅이라 생각하는 지역의 경계를 그려 보였다. 직원은 참고번호를 확인하고 낡은 목제 서류 캐비닛에서 땅문서를 찾았다.

“아, 여기 있네요. 1897년에 네이피어 클라크 씨가 제대로 측량 절차를 거쳐서 매입했습니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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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말로는 출판사에서, 어, 그 여자가 조개껍데기와 조류에 대한 책을 쓴 건 아시죠, 아무튼 출판사에서 경비를 대줘서 편집자를 만나러 갔대요.”

“고매하신 출판사 분들께서 그 여자를 만나려 하다니 상상이 잘 안 가는데, 그걸 확인하는 건 아주 쉬울 것 같고, 읽기를 가르쳤다민, 테이트는 뭐라고 하던가?”

“어떻게 그 여자를 아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옛날에 그 여자 집 근처로 낚시를 나갔었는데, 그 여자가 까막눈이라는 걸 알고 글을 가르쳐줬답니다.”

“흠, 그렇다 이거지?”

조가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판이 완전히 뒤집히는데요. 알리바이가 있잖아요. 썩 훌륭한 알리바이가, 그린빌에 있었다는 건 아주 훌륭한 알리바이라고요.” (P278)


“조디, 괜찮아. 오빠도 그때는 그냥 어린애였잖아. 오빠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더 커서 돌아올 수도 있었지. 처음에는 애틀랜타 뒷골목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었지만.” 조디는 코웃음을 쳤다. “떠날 때 주머니에 75센트가 있었어. 아버지가 부엌에 두고 간 돈에서 훔쳤지. 네가 쪼들릴 걸 알면서도 가져갔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면서 살다가 군대가 받아줘서 들어갔어. 훈련이 끝나자 곧바로 전쟁이었고, 집에 돌아와보니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네가 오래전에 떠났을 거라고, 당연히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편지도 쓰지 않았던 거야. 베트남에서 재차 파병을 지원한 건 나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었던 거 같아. 너를 두고 떠난 내가 용서가 안 돼서, 그러다 두세 달 전 조지아 공대를 졸업했는데, 서점에서 네 책을 봤어.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 가슴이 미어지게 슬프기도 하고, 날아갈 듯 기쁘기도 하더라. 너를 찾아내야만 했어, 여기서부터 시작해 행적을 짚어보려 했지.”

“이제, 이렇게 만났네.” 카야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조디의 눈은 예전과 똑같았다. 사람의 얼굴은 풍상을 겪으며 달라지지만 눈은 본성의 창으로 남아 있나보다. 카야는 그 눈에서 조디의 참모습을 보았다. “조디, 날 두고 간 일로 그렇게 마음고생 해서 어떡해. 난 오빠를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어,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잖아.” (P288-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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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는 조그맣게 목을 긁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제발 격리 같은 소리는 내 앞에서 하지 마.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렇게 살아봐서 알아. 격리가 내 인생이었어.” 카야는 살짝 날을 세우며 속삭였다.

“엄마가 떠난 건 용서해. 하지만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왜 나를 버렸는지. 오빠는 기억 못 할지 모르지만, 엄마가 떠나고 나서 나한테 암여우는 배를 곯거나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새끼들을 버리고 간다고 했잖아.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까 그 새끼들은 죽지만 암여우는 살아서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번식한다고. 성체가 될 때까지 새끼를 키울 수 있게 됐을 때 말이야.

그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와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 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P295-296)

"카야, 7년이나 됐잖아. 테이트도 덜 자란 남자애였을 뿐이야. 처음 집을 떠나서 수백 명의 예쁜 여자애들과 어울리게 된 거잖아. 그런데 돌아와서 사과하고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너도 좀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수컷은 암컷들을 전전해. 무가치한 수컷들이 뻐기며 걸어다니고 거짓으로 암컷을 유혹하지. 그래서 아마 엄마가 아버지 같은 남자한테 빠졌을 거야. 나를 떠난 남자는 테이트 말고도 또 있어. 체이스 앤드루스는 심지어 결혼 얘기까지 들먹였는데 다른 여자와 결혼했거든. 나한테는 말도 안 했어. 신문에서 읽고 알았어.”

“속상하지, 당연해. 하지만 카야, 신의를 지키지 않는 건 남자만이 아니야. 나도 속고 차이고 여러 번 상처받았어, 사실, 사랑이라는 게 잘 안 될 때가 더 많아. 하지만 실패한 사랑도 타인과 이어주지. 결국은 우리한테 남는 건 그것뿐이야. 타인과의 연결 말이야. 우리를 봐, 지금은 이렇게 서로가 있잖아. 내가 아이를 낳고 너도 아이들을 갖게 되면, 그건 또 전혀 다른 인연의 끈이야. 그렇게 죽 이어지는 거지. 카야, 테이트를 사랑하면 다시 한번 모험해봐.”

카야는 어린 테이트와 자신을 그린 엄마의 그림을 생각했다. 서로 머리를 꼭 맞대고 파스텔 빛깔 꽃과 나비에 에워싸여 있는 아이들, 어쩌면 엄마가 보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3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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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두 달 동안, 카야는 보트를 타고 보안관을 따돌리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보석도 못 받고 감방에 구금되었다. 카야는 ‘우리Cage'가 아니라 ’감방Cell'이라는 말을 누가 처음 쓰기 시작했을까 궁금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언어적 전환이 필요해진 어느 순간이 있었을텐데, 제 손으로 긁어 만든 붉은 갈퀴 같은 상처 자국이 팔에 죽죽 나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몇 분 동안 카야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제 머리카락을 깃털처럼 뽑아 가닥가닥 살펴보았다. 갈매기들이 그러듯이.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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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밀턴은 아주 훌륭한 변호사야. 카야, 아마 이 지방에서는 단연 최고일 거야. 그 사람이 여기서 빼내줄 거야.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버티고 있어야 해.”

카야가 또 아무 말이 없자 테이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면 다시 옛날처럼 같이 호소 탐험을 하자.”

“테이트, 부탁이야, 나를 잊어야 해.”

“한 번도 너를 잊은 적 없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거야. 카야.”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잖아. 난 남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그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단 말이야. 부탁이야, 이해가 안 돼? 무서워서 아무하고도 가까워질 수가 없어. 못 하겠어.”

“그럴 만도 해, 카야, 하지만.......”

“테이트, 내 말 들어.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갈망했어. 정말로 누군가 내 곁에 머물러줄 거라고, 실제로 친구와 가족을 갖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어, 집단 어딘가에 소속될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도 내 곁에 머물러주지 않았어. 그쪽도 떠나버렸고, 우리 가족도 내 곁에 남지 않았지. 이제서야 그런 상황에 대처하고 나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았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이런 얘기 못 하겠어. 여기로 나보러 와준 건 고마운데, 정말 고마워. 언젠가 우리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런 생각은 지금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여기서는 못 해.” (P361-362)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근거 없는 추론입니다. 검토가 필요합니다. 피고는 타인의 추론에 반박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의 인정합니다. 배심원들께서는 마지막 질문과 응답을 무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오리처럼 목을 빼고 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논리 전개에 주의를 기하시오, 에릭. 정말 이렇게까지 마구잡이로 밀어붙일 정도로 무분별한 스타일은 아니지 않소.”

에릭은 전혀 풀죽은 기색 없이 말했다. “좋습니다. 우리는 피고가 손수 그린 그림을 통해 피고 캐서린 클라크가 적어도 한 번 이상 체이스와 함께 소방망루에 올랐으며 조개 목걸이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체이스는 사망하던 날 밤까지 꾸준히 그 목걸이를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사망 전후로 목걸이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두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인 측으로 질문할 기회를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없습니다.” 톰이 말했다.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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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잠시 배심원석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저는 여러분 대다수를 아주 잘 압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캐서린 클라크에 대한 과거의 편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 때문에 평생 단 하루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캐서린 클라크는 독학으로 유명한 자연과학자이자 작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습지 소녀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과학연구소들은 습지 전문가라고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뜬소문과 황당한 이야기들을 모두 내려놓으실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수년간 들어온 거짓된 풍문이 아니라 이 법정에서 들은 사실에 근거해 평결을 내리실 거라 믿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마시 걸을 공정하게 대우할 때가 온 것입니다.” (P422)


“웬만한 사람들은 살인죄 사면을 받지 않아도 잘만 사회의 일원이 되더라.”

“알아, 네가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도 당연해.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다만.......”

“이래서 아무도 나를 모른다고 하는 거야.” 카야가 언성을 높였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조디는 카야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가 몸을 홱 빼고 그를 물리쳤다.

“조디 오빠, 내가 지금은 좀 지쳤나봐. 아니, 완전히 진이 빠졌어. 부탁이야. 난 혼자서 이겨내야 해. 재판이랑, 감방이랑,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랑..... 나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고, 내가 알고 살아온 건 그 뿐이란 말이야. 위로받는 법도 몰라. 이런 대화조차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어, 나는......” 카야는 말꼬리를 흐렸다.

카야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판잣집에서 걸어 나와 참나무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P434)


혼자 지낸 건 그녀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거의 다 야생에서 배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자연이 그녀를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다. 그 결과 그녀의 행동이 달라졌다면, 그 역시 삶의 근본적인 핵심이 기능한 탓이리라.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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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서 뭐가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목화솜 위에 조심스럽게 놓아둔 그것, 체이스가 죽던 날 밤에 걸고 있던 조개 목걸이였다.

테이트는 한참을 부엌 식탁에 앉아 야간 버스를 타고 이안류를 붙잡아 달을 계산해 계획을 짜는 카야를 상상했다.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체이스를 부르는 목소리, 뒤로 밀쳐 떨어뜨리고, 그리고 바닥의 진창에 앉아 죽음으로 무거워졌을 체이스의 머리를 들어올려 목걸이를 되찾았겠지. 발자국을 지우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테이트는 불쏘시개를 잘게 부러뜨려서 오래된 나무 화덕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씩, 하나씩 불길에 던져 넣어 시들을 태웠다. 전부다 태우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 시 한 편만 없애버리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종이들이 30센티미터도 넘게 휙, 불길을 일으켰다 사그라졌다. 테이트는 생가죽 끈에서 조개를 떼어 가죽끈은 불길에 던져버리고 널빤지를 다시 바닥에 덮었다.

어스름이 거의 다 내릴 무렵 테이트는 바닷가로 걸어가 부서진 연체동물과 갑각류의 사체가 날카롭게 발을 찌르는 모래밭에 섰다. 1초쯤 펼쳐진 손바닥 위에 놓인 체이스의 조개껍데기를 바라보다 모래에 툭 떨어뜨렸다. 다른 조개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 조개껍데기는 곧 사라졌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고, 파도가 발 위로 솟아올랐다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를 끌고 바다로 돌아갔다. 카야는 이 땅과 이 물의 생명체였다. 이제 그 땅과 물이 카야를 다시 받아줄 것이다. 그녀의 비밀을 깊이 묻어줄 것이다.

그리고 갈매기들이 왔다. 거기 선 테이트를 보고는 머리 위에서 어지럽게 선회했다. 울부짖어 부르며, 부르며.

밤이 내리자 테이트는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소에 다다랐을 때는 높은 캐노피 밑에서 발길을 멈추고 습지의 어두운 비원으로 손짓해 부르는 수백 마리의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깊은 곳,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으로. (P454-455)


이 소설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남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야생동물을 벗 삼아 평생을 떠돌며 살아온 작가의 특이한 경험. 가볍지 않게 인간성을 바라보는 융합 학문적 시각, 성장소설+오해와 엇갈림으로 점철된 러브스토리+살인 미스터리+법정 스릴러라는 대중소설 형식들의 유려한 황금배합,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흡입력, 신비로운 배경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물........ 하나하나 짚어보면 깜짝 히트작이라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장점이 많은 책이다.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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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단언했고 처음부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카야가 느끼는 쓰라린 외로움의 정서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갖는다. 습지의 판잣집에서 혼자 살아남으려 분투하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우리는 각자 빌딩 숲이란 정글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하루하루 ‘외롭다’. 타인을 믿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기란 어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카야는 사람에게 기대를 걸었다 버림받고 또 사랑을 주었다 배반당하며 대자연의 동물처럼 혼자 서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비로소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깨우친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카야의 ‘외로움’을 다루는 작가의 시선이다. (P457-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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