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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윈체스터의 <교수와 광인>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 2019년

by 노용헌

<프로페서 앤 매드맨>(The Professor and the Madman)은 2019년 공개된 영화이다. 사이먼 윈체스터의 책 <교수와 광인>을 바탕으로 하며, 옥스포드 영어사전을 편찬한 두 인물 제임스 머리 교수와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 박사의 일화를 다룬다. P. B. 솀란 감독이 연출하고 멜 깁슨, 숀 펜, 내털리 도머, 에디 마산 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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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1896년 차갑고 안개 낀 어느 가을 오후, 영국 버크셔 주 크로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현대 문학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기이한 만남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은 나중에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이라 불리게 된 위대한 사전의 편집인인 닥터 제임스 머리였다. 그날 그는 옥스퍼드에서 기차를 타고 90킬로미터나 달려온 참이었다. 그가 이 마을에 온 목적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 중에서도 가장 크게 기여한 닥터 W.C. 마이너라는 비밀에 싸인 인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거의 2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닥터 머리와 닥터 마이너는 사전을 좀더 잘 만들기 위해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마이너는 크로손의 집을 떠나 옥스퍼드에 오고 싶어하지 않았고, 또 올수도 없는 상황인 듯했다. 그는 그저 유감을 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았다.

닥터 머리는 옥스퍼드의 기록실에 틀어박혀 사전을 편찬하는 고역에서 좀처럼 놓여나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훌륭히 자원봉사를 해준 이 신비롭고 흥미로운 사람을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1890년대에 접어들어 이제 사전이 반쯤 완성되자, 머리는 사전의 탄생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영광을 돌리고 싶어했다. 특히 마이너처럼 수줍음을 타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래서 그는 마이너를 찾아가보기로 마음먹었다. (P11-12)


머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말을 건넸다. 오랫동안 연습해온 인사말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 저는 런던 언어학회 소속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집인인 닥터 제임스 머리입니다. 서로 알게 된 지 오래되었는데 마침내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가장 많이 도와주셨던 닥터 W.C. 마이너시지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피차 어색한 분위기였다. 시계 바늘 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복도에서는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멀리서 열쇠 꾸러미의 열쇠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도 났다.

바로 그때 책상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친절하신 선생님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마이너가 아닙니다. 선생께서 생각하신 것과는 상황이 다르답니다. 사실 저는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를 수용하는 ‘브로드무어 수용소’의 원장입니다. 닥터 마이너는 분명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만 그는 이곳의 수용자랍니다. 그가 여기 수용된 지 벌써 20년도 넘었습니다. 이곳에 가장 오래 수용된 사람이 바로 닥터 마이너입니다.” (P13-14)


정부 당국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서류를 비밀 문건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1세기 이상 개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 나는 그 서류를 열람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제 여러분이 읽게 될 이 글은 점차 그에 관한 비밀들이 한 꺼풀씩 벗겨짐에 따라 기묘하고 비극적이며 영혼을 울릴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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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의 람베스는 상당히 음습한 곳이었다. 지대가 낮아 늪 같았으며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 또 골목길은 나선형을 이루었는데, 이곳에는 ‘넥킹거’라는 아주 작은 물줄기가 템스 강으로 흘러들었다. 이 지역은 캔터베리 대주교와 콘월 공작의 소유지였다. 한데 다른 런던의 대지주들, 예를 들면 그로브너, 베드퍼드, 데본셔 같은 지역의 대지주들이 템스 강 끝에 광장과 저택과 테라스를 만든 것과는 달리, 람베스의 지주들은 그런 식으로 람베스를 개발하지 않았다. 그건 람베스 없이도 그들은 이미 대단한 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P20)


타란트는 피의자가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경찰서로 가는 길에 그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끔찍한 사고라고 했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에게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완전히 딴 사람을 쫓고 있었노라고. 누군가 자기 방에 침입했었다고. 그래서 그를 쫓아 나왔던 거라고. 자기는 자기 방어를 한 것뿐이라고.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럴 거라고 말이다.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타란트 경관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사내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부드럽게 덧붙였다.

“당신, 날 몸수색하지 않았소.”

“서에 가면 할 거요.” (P27)


이름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 서른일곱 살로, 외관으로 미루어 전에 장교였던 듯했다. 또 그는 자격을 갖춘 의사였다. 런던에서 산 지는 1년이 채 못 되었고, 지금은 부근인 테니슨 가 41번지의 소박한 2층 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그렇게까지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었다. 사실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는 단순히 돈 때문에 이런 우범 지역에 사는 것은 아니라고 넌지시 밝혔다. 물론 초기 심문 과정에서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새벽이 밝을 즈음, 그는 살인죄로 홀스몽거 레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P28)


하지만 한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마이너는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 출신이었다. 또 미군의 장교였고 미국인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사건에 완전히 새로운 양상을 가져왔다. 우선 미국 공사관에 사건 내용을 알려야 했다. 그래서 그날이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나절, 외무성 직원은 런던 주재 미국 공사에게 미 군의관 중 한 명이 체포되었으며 살인죄로 수감된 상태임을 공식으로 통고했다. 총격 사건이 워낙 드문 사건이다 보니, 람베스의 벨베데르 거리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은 이미 국제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 (P29)


1850년대에 사전 편찬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들의 목표는 대담하고 칭찬받을 만했지만, 편찬 방식은 상업성면에서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차용한 방법으로 사전을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고, 또 언어의 발전 과정을 표기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들었다. 최종 결정된 작업량은 비상식적일 정도로 방대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수정해야 했으므로 처음 작업한 양과 똑같은 분량의 추가 작업이 요구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오늘날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들고 판매가가 가장 비싼 책이 되어 버렸다. (P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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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 이야기를 하다가 좀 다른 쪽으로 빠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의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는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닥터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로 정신병에 걸린 미국인 살인범이다. 또 한 사람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우연히도 평생 마이너와 이리저리 얽히게 되었으나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산 제임스 오거스터스 헨리 머리다. 두 남자의 일생은 오랜 세월에 걸쳐 표현하기 힘들 만치 묘하게 얽히게 된다.

제임스 머리는 죽기 직전까지 인생의 마지막 50년을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집인으로 살았고, 또 한 사람 닥터 마이너는 평생 고통 속에서 살며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으로 인해서 얽히게 되었다. (P49-50)


그래서 야전 병원에는 회저 증세가 넘쳐났고 팔 다리가 절단된 부상병들이 많았다. 그 더러움과 통증과 질병이라니..... 상처난 자리에 고름이 맺히면 의사들은 ‘치료되고 있는’ 징표이라고 말했다. 구급 치료 막사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는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끝날 줄 모르는 무시무시한 전장에서 잔인무도한 총탄을 맞은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와 끙끙 앓는 소리라니, 전쟁에서 북군 36만 명, 남군 25만 8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종 무기에 부상을 입고 이로 인해 죽은 병사가 하나라면, 피할 수 없는 감염과 질병, 위생 불량으로 죽은 병사가 둘이었다.

마이너로서는 이 모든 것이 난생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고국의 친구가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마이너는 남의 잘못도 정중히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학자다운 데가 있으며, 전쟁에 나가기에는 너무 점잖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독서를 즐겼고 수채화를 그리고 풀루트를 연주할 줄 알았다. 하지만 1864년의 버지니아는 이렇게 점잖고 유순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정신 이상이 된 이유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최소한 이 사건에 있어서 마이너가 미치게 된 원인은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1864년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사건, 우연히 일어난 그 사건들이 그 용서할 수 없는 시대에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P72)


물론 전투가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지만, 마이너의 병 상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전쟁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어떤 집단 즉, 아일랜드인들과 관계가 있었다. 나중에 마이너가 런던에서 하숙한 집주인이 그가 이상하게 겁냈다고 진술한 아일랜드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북군에 소속되어 싸운 아일랜드 출신 병사는 15만 명 정도였는데, 양키 부대에 징병당한 익명의 병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일랜드 부대는 자긍심이 높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하나의 연합체로 뭉쳐서 싸웠다. 이 2여단, 즉 아일랜드 여단의 병사들이 북군 전 부대를 통틀어 가장 용감하고 거칠었다. 영국 특파원이 쓴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거나 절망적이거나 필사적인 일이 생기면 아일랜드 여단이 차출된다”라는 기사를 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매사추세츠 28대대, 펜실베이니아 116대대가 뉴욕의 전설적인 연대인 63연대, 88연대, 69연대 -- 지금도 매년 5월 17일 성 패트릭 데이의 퍼레이드 때는 이들이 5번 가까지 도열해서 행진한다 -- 출신의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월더니스에서 싸웠다.

하지만 한두 해 전 전투에 참여했을 때와 비교할 때, 1864년 북군 연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한 아일랜드 연대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전쟁 초기 그러니까 노예 해방령이 발표되기 전, 아일랜드인들은 충실하게 북군을 지원하면서 남군에도 똑같이 연민을 보냈다. 비록 남부군이 아일랜드인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최소한 초기에는 남군에게 연민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이 싸움에 참여한 동기는 복잡했다. 하지만 이 복잡한 사연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기근이 심하게 들린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로, 자기들을 구해준 나라가 고마워서 전쟁에 참여한 게 아니었다. 언젠가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밉살스런 영국인들을 몰아낼 훈련을 받기 위해서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것이었다. 당시 아일랜드계 미국인 시인이 쓴 시를 보면 그 진의가 잘 드러난다. (P76-78)


그는 화를 내며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의사라는 소명을 배반한 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남의 얼굴에 치유할 수 없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른 작자에게 큰 복수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영원히 마이너를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작정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맹세했다. 일단 고국에 들어가면 퀸스타운이나 킹스타운의 항구에 닿자마자 아일랜드 애국자 전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리겠노라고. 미국인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는 선량한 피니어 회원 전원의 적이므로, 적당한 때가 오면 보복을 가해야 한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자기가 낙인 찍었던 병사가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각오했을 거라고 마이너는 짐작했다. 그는 나중에 전투에 나섰던 일이 너무도 무서웠노라고 고백했다.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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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엘리스 섬을 통과해서 쏟아져 들어온 아일랜드인들이 콜레라균을 들여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해 여름 콜레라가 창궐해서 1,200명이 목숨을 잃었고, 가버너즈 섬의 종합 병원과 개인 병원에는 콜레라 환자와 격리 수용해야 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마이너는 콜레라 전염병이 극성을 부린 몇 달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일에 매달렸다. 그해 말, 보통의 경우라면 아직 중위였지만 그는 열심히 복무한 대가로 대위로 명예 진급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바로 그 즈음 마이너의 행동에 편집증 초기 증상이 보였던 듯 싶다. 그는 제복 차림이 아닐 때도 총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콜트 38구경 리볼버를 갖고 다녔는데 그것은 엄연한 불법 행위였다. 그는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은 동료 장교가 맨해튼에서 돌아오다가 무장 강도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마이너는 악당들이 자기를 공격하려고 미행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P88-89)


연설자는 웨스터민스터의 학생감이자 무시무시한 성직자 리처드 체네빅스 트렌치였다. 닥터 트렌치는 살아있는 어떤 인물보다도 언어학회의 광범위하고도 숭고한 야망을 구체화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당시 전 지구에 끊임없이 확대 보급되고 있는 영어가 이제는 체계를 갖추고 정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언어학회의 회원 200명도 그와 똑같은 믿음을 가졌다.

하나님이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던 런던의 언어학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기본 장치로서 영어의 보급을 허락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영어를 전세계에 파급시킨 뜻은 전세계에 퍼진 기독교의 성장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영어와 기독교를 동일화한 것은 아주 간단한 일로 그것은 세상의 선을 독려하기 위한 공식이었다. 즉 세상에 영어가 퍼지면 퍼질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아진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이 신교 성직자 닥터 트렌치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결국 영어가 언어면에서 천주교의 영향력을 능가하게 되면 신교와 천주교가 하나의 세계 그리스도 교회로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닥터 트렌치의 생각이었다. (P100)


우선 언어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좋은 사전에 대한 욕구가 간과되었다. 난해하고 애매한 어휘뿐만 아니라 쉽고 친근한 어휘, 곧 지식층과 귀족, 세련된 학교 교육을 받은 계층뿐 아니라 평민층이 쓰는 어휘도 사전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사전에는 모든 게 포함되어야 했다. 대단히 길고 웅장한 어휘뿐 아니라 두 글자로 이루어진 전치사까지도 사전에서 다뤄야 했다.

17세기의 사전 제작자들이 간과한 두 번째 문제는 영국이 세계 여러 곳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영어가 전 지구의 언어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월터 롤리 경, 프로비셔 같은 대담한 해군이 바다로 나가고, 또 유럽 열강이 영국의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기 시작하고, 아메리카와 인도 대륙을 새로운 식민지로 삼으면서 영국의 언어와 영국다운 개념이 영국 밖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영어는 전세계 국가 간의 상업과 군사와 법률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되기 시작했다. 영어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기품 있는 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영어는 더 잘 알려져야 했다. (P110-111)


각 어휘의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지는 일생을 도표로 만들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어휘의 전기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휘가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부터 출생 기록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어휘가 언제 처음 말로 표현되었는지가 아니라 언제 처음 글자로 기록되었는가를 알아야 했다. 트렌치의 주장처럼 어휘의 역사에 기초한 사전이라면 어휘 하나 하나에 대해 처음 그 어휘가 쓰인 문장이 인용 어구로 실려야 했다.

그 다음에는 각 어휘가 다른 의미로 쓰이는 문장들이 실려야 했다. 왜냐하면 어휘는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미묘한 뉘앙스를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는 대중의 기분에 따라서 그 의미를 벗어 던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트렌치는 말했다. “사전이란 역사적인 기념물이다. 한 가지 관점에서 찬찬히 들여다 본 한 나라의 역사이므로. 언어가 잘못된 방식으로 표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역시 적합한 방식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큰 교훈을 줄 것이다.” (P132)


영국인들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비밀 단체가 일방통행식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사고 자체를 싫어했다. 특히 언어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11월의 밤안개 속으로 나서기 전, 언어학회 회원들은 모직 코트와 흰색 실크 스카프와 모자를 챙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원봉사자들을 소집하자는 닥터 트렌치의 주장은 가치있고 진실로 고결한 아이디어라고.

그리고 학구적이지만 정신병에 시달리는 미 예비역 대위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도 결국 닥터 트렌치의 이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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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4월: “닥터 마이너는 몸이 말랐고 빈혈증이 있으며, 낮에는 이성이 있는 듯이 보이고 흥분을 잘한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하지만 밤이면 방문에 가구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타인이 침실에 침입할 경우 깨어날 수 있도록 문고리와 가구를 줄로 연결한다.”

1875년 6월: “닥터 마이너는 침입자가 바닥 밑에서 혹은 창문을 넘어서 방으로 들어와서 깔대기로 자기 입에 독약을 넣는다고 확신한다. 이제 그는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서, 독약으로 인해 체중이 늘었는지 확인한다.”

1875년 8월: “밤에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것처럼 아침에 안색이 수척하면서도 거친 때가 종종 있다. 마이너는 밤에 치아가 차가운 쇠로 꽉 눌린 느낌이라고, 뭔가 자기 입 속에 집어넣어지는 것 같다고 불평한다. 그 외에 다른 변화는 없다.” (P153)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제임스 머리의 그 유명한 호소문이 마이너의 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때는 1880년대 초반이었다. 머리는 관심 있는 사람들은 새 사전 준비 작업으로 어떤 시기의 책을 읽고 싶은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머리가 처음으로 호호문을 발행한 때는 1879년 4월 이었고 2천부가 인쇄되어 서적상에 배포되었다. 그 직후 호소문 한두 장이 엘리자가 수용소로 갖다준 책 꾸러미에 끼여 들어간 듯싶다.

8쪽에 달하는 호소문에는 필요한 게 뭔지 매우 광범위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우선 머리가 추천하는 읽어야 할 책의 종류가 명시되어 있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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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사전 제작팀에서 그에게 우편물을 보냈다는 단순한 사실이 놀라웠다. 마이너의 관점에서 볼 때 제임스 머리가 보낸 편지는 용서와 이해의 상징이었다. 물론 엘리자 메리트가 면회를 와주는 것이 이미 용서와 이해를 보여주는 일이었지만, 머리의 편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몸짓이었다. 사전 제작으로의 초대는 그가 그렇게도 오랜 세월 멀리 떨어져서 지낸 사회가 그에게 보낸 ‘사회의 일원’이라는 뱃지였다. 사전 제작을 돕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적힌 편지를 받은 일이 마치 진짜 세상의 한쪽 구석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끈을 맺는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몸이 갇히고 지적인 면으로도 고립되어 어두운 구렁에 빠져서 10년을 지낸 후, 마침내 힛빛이 드는 학문의 고원으로 다시 나서게 된 느낌이었다. 마이너는 이번 일을 군에 재입대하는 것으로 보았다. 적게나마 자기 가치를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진료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만족감까지 느끼기 시작한 듯싶다. 머리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동안 마이너는 스스로 만족을 느꼈다. (P162-163)


지금까지는 단순히 멋진 장식품이요 우울하게 반복되는 브로드무어 생활에서 마음의 자유를 갖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했던 책들이 갑자기 대단히 귀중한 재산이 되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인격에 해를 가하려 한다는 상상을 한 켠으로 미뤄둘 수 있었다. 대신 이제는 수백 권이나 되는 책을 안전하게 지켜내야 했다. 그가 수용소로 몰려든다고 믿는 암살자들의 손에서 책을 지켜내야 했다. 책에서 어휘를 발견하는 작업과 책은 마이너가 새로 선택한 생활을 규정짓는 특징이 될 터였다. 앞으로 20년 동안 그는 브로드무어 수용소에서 책과 문장과 어휘의 세계에 푹 빠져서 머리를 쥐어짜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터였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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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지탱시켜주는 기쁜 일이 하나 있었다. 1884년 1월 29일, 마침내 사전 제1권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옥스퍼드는 수익을 얻기 위해 사전을 여러 권으로 나눠서 출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머리가 편집인으로 임명되고 거의 5년이 흘렀다. 리처드 체네빅스 트렌치가 새 영어 사전을 편찬하자는 내용의 유명한 연설을 한지 이미 27년이 흘렀다. 드디어 누르스름한 표지에 도련하지 않은 종이로 묶은 352쪽짜리 첫권이 출판되었다. a에서 시작해 ant(개미)에 이르기까지, 영어 어휘로 알려진 모든 어휘가 실린 이 사전은 옥스퍼드의 클래런던 프레스에서 출판되었고, 가격은 12실링 6펜스였다. (P179)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의 이력을 둘러싸고 현대 학계의 가장 묘한 일로 남아 있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왜 그는 위대한 사전 만찬식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마이너는 만찬 파티에 초대받았고, 파티는 1897년 10월 12일 화요일 저녁에 옥스퍼드에서 화려하게 열렸다.

1897년은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 60년을 맞이하는 해여서, 옥스퍼드는 잔치 분위기가 넘쳐났다. 마침내 사전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에는 멈칫거리며 진행되었지만 이제는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1885년에 Anta(벽 끝의 기둥)-Battening(잔뜩 먹기)편이 출판되었고, 1888년에는 Bra(브래지어)-Byzen편이 출판되었다. 기록실은 이제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896년 빅토리아 여왕이 막 완성된 제3권을 여왕께 헌정한다는 데 자비롭게도 동의해주셨다.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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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서로 알았으며, 그날 이후 20년 동안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점심식사를 함께한 첫 만남은 오랜 세월에 걸쳐 굳건한 우정을 나누는 출발점이 되었ㄷ.k 서로 조심성 있게 존중하고, 특별히 언어를 향한 열정적이고 강한 애정을 나누는데 기초한 우정이 꽃폈다.

두 사람 다 상대에게 정말 특별함을 느꼈다. 섬뜩하리 만치 외모가 비슷했으니까. 두 사람 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대머리였다. 두 사람 다 쑥 들어간 푸른 눈을 가졌고, 안경을 쓰지 않았다(마이너는 근시가 심했지만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마이너는 약간 매부리코였고, 머리는 그에 비하면 콧등이 반듯했다. 마이너는 숙부같이 친절한 분위기를 풍겼고 머리도 똑같았지만 엄격한 분위기가 약간 났는데, 그것은 코네티컷 출신 양키와 스코틀랜드 저지대 지방 출신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턱수염과 콧수염은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싶을 만치 비슷했다. 두 사람 다 흰 수염이 길었고, 턱수염 끝은 제비꼬리처럼 날렵했으며 콧수염과 구렛나루는 숱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시간 할아버지(대머리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손에 큰 낫과 모래시계를 든 노인으로 나타남)’ 같은 모습이었다. 옥스퍼드의 아이들은 삼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머리를 보면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라고 외치곤 했다. (P214)


20세기에 접어들 즈음 마이너는 많이 변했다. 그는 방문객에게나 브로드무어 원장에게 공식적으로 이제 스스로 자연 신교 신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즉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특별한 종교에는 속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발걸음이었고, 한편으로는 비극으로 내닫는 발걸음이기도 했다.

새로운 믿음이 생기면서 마이너는 전능하고 널리 만물을 내다보고 영원히 벌을 내리는 신의 기준에서 자신을 심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는 슬픔으로 여겼지만, 갑자기 시각을 바꾸어서 병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정화하고 체벌받아야 하는 죄악의 상태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안스러운 피조물이 아니라, 끔찍한 습관과 기호를 가진 타락한 인간으로 치부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자위행위를 했었다. 수음 중독이었다. 만일 이런 ‘자기 폭행’을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벌을 내리실 터였다. (P230)


마이너는 거의 한 달 정도 병원동에서 지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자 예의 그 심술을 부리면서 인부들이 시끄럽게 일을 한다며 불평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가 투정을 부린 날은 일요일이어서, 인부들은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성기는 점차 나았고 뭉툭한 곳으로 소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짐작한 대로 성행위는 불가능해졌다. 그러니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 그로서는 이제 성과 관련된 유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담당 의사는 그렇게 중요한 부위를 스스로 자르는 겁 없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놀랍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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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4월 6일 수요일, 윈스턴 S. 처칠은 조건부 석방 허가서에 파란색 잉크로 서명했다. 그리고 “석방되면 대영제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다음날 제임스 머리 경은 오랜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해도 되느냐고 묻는 편지를 썼다. 그는 레이디 머리도 함께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조금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이너는 건강이 한결 좋아졌으니 귀하를 만나면 기뻐할 것입니다.” 브레인 원장은 순순히 허가했다. 38년 만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이너는 너무 기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P239-240)


마이너는 워싱턴 DC의 ‘정부 정신병 병원’에서 지낸 지 5년째 접어들었을 때, 큰 위로와 지적인 위안을 주었던 사람의 죽음을 들었다. 그러나 머리가 세상을 뜬 바로 그 즈음, 마이너는 점점 참기 힘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머리가 죽은 그날, 대서양 건너 5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옥스퍼드에서 슬픈 일이 일어난 줄 모르는 워싱턴의 마이너는 이유 모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P246)


지금까지 영문 모를 질병으로만 알려졌던 마이너의 병에 처음으로 현대적인 설명이 붙은 것은 바로 이 성 엘리자베스 병원에서였다. 1918년 11월 8일, 마이너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 닥터 데이비디언은 연방 환자번호 18487번 윌리엄 마이너가 ‘편집증 형태의 조발성 치매증’이라 부를 수 있는 질환을 앓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외곬수’란 애매한 용어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으며, 단순한 ‘망상증’이란 용어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이너는 정신병자를 ‘도덕 치료’라는 황당하고 의심스런 빅토리아식 치료 방법으로 치료하는 데서 벗어나 현대적인 정신병 치료의 세계로 들어갔다.

‘조발성 치매증’이라는 새 용어야말로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 용어는 닥터 데이비디언이 마이너에게 조발성 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20년 전부터 통용되었다. 말 그대로 ‘일짝 발생하는 정신력의 쇠퇴’를 의미했고, 사람이 현실감을 잃기 시작하는 상황을 설명할 때 쓰였다. 마이너는 일찍부터 --10대, 20대, 30대에-- 그런 증상을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질환은 노년에 수반되는 노망 증세를 묘사하는 ‘노인성 치매’와는 확연히 달랐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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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마이너에게 사전 편찬을 위한 인용문은 약이었고, 인용문 작성 작업은 치료 과정이었다. 조용한 방에 갇혀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지적인 자극을 받은 것은 최소한 편집증에서 벗어날 수단이 되었던 듯싶다. 그러나 이런 자극이 없어지자 마이너가 처한 슬픈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그 위대한 책이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기능을 하지 않게 되자, 즉 뛰어나지만 시달림당하는 머리가 집중하던 그 일이 저만치 멀어지자, 그의 인생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그가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사전 편찬에 그토록 집착하게 된 데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밤마다 겪었던 끔찍한 고통이 우리에겐 커다란 이득이 되었다. 그는 정신 이상자였는데, 그것이 우리에겐 다행스러웠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잔인한 아이러니다. 그 생각을 하면 인생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느껴진다. (P253~254)


어휘의 강한 역류와 맞서 싸우며 사전 편찬에 매달려 외롭게 매진한 결과 마침내 크나큰 보상을 받게 되엇다. 엄청난 책 12권, 41만 4천 825개의 어휘에 대한 정의, 182만 7천 306개의 인용문이 사용되었으며, 마이너 혼자만도 수만 개 이상의 인용문을 제공했다.

전체 활자의 길이는 285킬로미터에 달했는데, 이것은 런던에서 맨체스터 외곽에 이르는 거리이다. 이 책은 활판 인쇄여서 종이에 잉크가 눌려진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전에 나오는 글자의 수와 숫자의 개수는 구두점과 여백 전부를 빼고 계산해도 --인쇄공이라면 구두점과 띄어쓰기 하나가 한 글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안다-- 2억 2777만 9천 589개에 이른다.

다른 언어 사전 중 옥스퍼드 영어 사전보다 제작 기간이 긴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전도 이보다 더 훌륭하고 웅장하고 권위적인 것은 없었다. 인쇄 기술의 발명 이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이 바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었다. 그리고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지금까지 나온 기록물 가운데 가장 긴 연속 출판물이기도 했다. (P259)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엘리트주의와 남성 우월주의, 영국적이고 빅토리아 시대적인 색깔이 지나치게 드러난다는 비난이 가끔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업적들이 그렇듯이 옥스퍼드 사전에 드러나는 일련의 태도가 20세기 말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그 어떤 사전도 옥스퍼드 영어 사전처럼 큰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다양한 세대 가람들의 관심과 열정을 한데 모아 만들어낸 영웅적인 창작품이었다. 그리고 영어의 초상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P260)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여 놀랄만한 대단한 일을 해냈으면서도, 동시에 처참할 정도로 슬픈 인생을 산 한 미국 군인의 이야기이다.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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