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인 하프 위크> 1986년
처음 같이 잤을 때 그는 내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못 움직이게 했다. 그게 좋았다. 그가 시무룩한 것도 어떤 면으로는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그는 재미있고 똑똑하고, 흥미로운 대화 상대였다. 또 내게 희열을 주었다.
두 번째 때는 내가 옷을 벗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스카프를 집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의 눈을 가려도 되겠어요?”
그전에는 잠자리를 하면서 아무도 내 눈을 가린 적이 없었는데, 그것도 좋았다. 첫날밤보다 그가 훨씬 더 맘에 들었고 나중에는 양치질을 하면서도 미소를 멈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기술 좋은 애인을 찾았구나 싶었다.
세 번째에는 그는 나를 반복해서 절정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내가 다시 완전히 넋이 나가려는 순간, 그는 또다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때 나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침대 위 내 몸에서 빠져나간 소리는 그에게 계속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는 그렇게 해주었다. 나는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네 번째에는 내가 거의 만사를 잊을 만큼 흥분했을 때, 그는 예전 그 스카프로 내 양쪽 팔목을 묶었다. 그날 아침, 나는 사무실에서 그가 보낸 장미 열세 송이를 받았다. (P5-6)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넌 이 모든 것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지? 네가 기웃거리는 사람이라는 것 말고 그의 옷장이 뭘 말해주지? 그가 깔끔하다는 점이라고 중얼댄다. 테니스를 치고 스키를 타고 수영을 한다는 점. 그가 ‘자동 세탁 건조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 흰 셔츠 열장, 분홍색 셔츠 여덟 장, 파란색 셔츠 열한 장이 그의 나이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평범한 일일까? 난 모르겠다. 나도 또래라는 점을 되새긴다. 그런데 뭔가 그렇게 많이 가져본 적이 있나? 한 가지는 안다. 그렇게 범위가 한정된 사람과 사귀어본 적이 없다는 것. 보라색, 자주색, 옥색, 오렌지색 옷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갈색이 없는 것은? 초록색도 없고, 노란색도 없고, 빨간색도 없다는 것은? 넥타이의 밤색 무늬는 치지 않기로 하고. 옷이 죄다 파란색 아니면 회색, 흰색, 검은색이다. 물론 분홍색 셔츠를 빼면. (P28)
나는 그게 ‘병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기간을 산 내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 같았다. 이제야 과거가 된 그 몇 주일을 독립된 현상으로 돌아볼 뿐이다. 그것은 모든 함축적 의미가 결여된, 꿈처럼 비현실적인 내 삶의 단편이었다.
(P28)
그렇게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갔다. 매일 밤 둘이 만났기에, 변화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기에, 그가 사랑을 아주 잘 나누었기에, 내가 곧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에게 미쳤기에 -- 겨우 2주일 지났을뿐인데 -- 내가 아는 사람들이 병적이라고 할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게 ‘병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기간을 산 내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 같았다. 이제야 과거가 된 그 몇 주일을 독립된 현상으로 돌아볼 뿐이다. 그것은 모든 함축적 의미가 결여된, 꿈처럼 비현실적인 내 삶의 단편이었다. (P32)
그는 손에 말채찍을 들고 있다. 그가 말한다.
“테스트해보고 싶은데요.”
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한순간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외계에 와 있다. 이국적인 시대에. 그가 몇 발자국 걸어서 내가 반쯤 걸터앉은 책상으로 다가온다. 나는 한 발은 바닥에, 한 발은 공중에 있다. 그가 책상에 걸친 내 왼쪽 다리 위로 치마를 걷고 물러서더니, 허벅지를 채찍으로 때린다. 솟구치는 통증 사이로 설명할 수 없는 흥분감이 밀려든다. 숨을 쉴 수도,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온몸의 모든 세포가 욕정에 휩쓸린다.
(P49)
그가 내게 해준 일들.
- 먹여준다. 모든 먹을거리 장보기와 식사준비와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 그는 아침에 옷을 입혀주고 밤에는 옷을 벗겨주었다. 내 세탁물을 그의 것과 함께 세탁소에 가져갔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내 구두를 벗겨주다가 뒤축을 갈아야 한다며 다음 날 구두 수선소에 가져갔다.
- 그는 끝없이 읽어주었다. 신문, 잡지, 살인 사건, 추리소설,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소설들, 집에서 작업하려고 가져온 내 서류 파일들까지.
- 사흘에 한 번씩 내 머리를 감겨주었다. 내 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는데, 처음 두어 번은 솜씨가 형편없었다. 어느 날 그는 눈이 돌아가게 비싼 ‘켄트 오브 런던’ 머리 브러시를 사왔고, 그날 저녁 그 빗으로 날 때렸다. 멍이 다른 것보다 훨씬 오래갔다. 매일 밤 그 브러시로 내 머리를 빗질했다. 그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머리를 한 번에 오랫동안, 완전히, 정성을 담아서 빗질한 적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반들거렸다. (P58-59)
낮과 밤, 그와 함께와 따로. 그 둘을 뒤섞은 것은 실수였고 위험할 수도 있었다. 며칠, 몇 주일이 흐르면서 내 삶의 두 부분은 점점 완전한 균형을 이루어갔다. 우리의 밤이 더 분명하고, 집중력 있고, ‘환상적’일수록, 내 직장 생활도 더욱 환상적이 되었다. (P66)
난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다. 몇 년 전 <오(O)의 이야기>(20대 여자 사진작가의 성적 판타지와 경험을 다룬 프랑스 작가 폴린 레아주의 소설.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를 읽은 적은 있었다. 첫 부분은 흥미로웠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가 경악해서 중간에 내던졌다. 실생활에서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자들은 검은 가죽옷을 입고 괴상한 차림을 즐기면서 멍청하게 굴었다. 또래인 친구가 종일 직장에서 일하다가 퇴근해서 식탁 다리에 묶인다고 말했다면 --그런 적은 없었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P92)
그 기간 내내 내 낮 생활의 규칙은 이전과 똑같이 지속되었다. 나는 독립적이었고, 생활비를 댔고(아무튼 점심 식사는 혼자 감당했다. 그리고 빈 아파트 유지비와 소액이지만 가스비와 전화비도 감당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선택했다. 밤 시간이 되면 나는 무기력하고 의존적이고 완전히 보살핌을 받았다. 어떤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었고,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선택권도 없었다. 그게 좋았다. 그게 좋았다. 그게 좋았다. 그게 좋았다. 그게 좋았다.
그의 아파트에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부터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나는 거기서 수동적인 존재였다. 다른 사람이 내 삶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했다. 통제권이 내 손에서 벗어났다면, 대가로 나는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허락받았다. 몇 주간 계속 어린 노릇이라는 짐을 내려놓은 안도감에 휩싸였다. 내가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중요한 질문은 “당신 눈을 가려도 되겠어요?”였다. 그때부터 내 동의나 반대에 대한 문제는 다시 생기지 않았다(그 과정에서 한두 차례 일시적인 불안이 있긴 했다. 내 탐닉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현실, 지성, 윤리적인 면에서 내 우선권이나 대안에 대한 문제는, 결과를 생각해야 되는 문제는 다시 생기지 않았다. 자기 삶의 방관자가 되는 쾌락적인 호사만 있었다. 개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호사, 자아를 버리는 방탕한 환락의 호사만 있었다. (P121~122)
그를 만난 후로 매일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서너 문장 쓰다가 곧 몇 페이지씩 써내려갔다. 어느 저녁 그가 커피 테이블 옆에 놓인 내 서류가방에 든 일기장을 집어서 넘기기 시작하자, 묘한 뒤섞인 감각이 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처음에는 낙심되더니 안도감, 매혹, 환희가 밀려들었다. 어떻게 이걸 참을 수 있었을까? 그가 일기장을 보지 않은 시간 동안..... 그 기간은 얼마나 길었던가..... 아무도 내 일기를 읽지 않았다. 사춘기의 암호, 라틴어를 섞어서 휘갈겨 쓴 글은 나 외에는 해독이 불가능했고, 때로 몇 주일만 지나면 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초인종이 울리면 서랍장으로 달려가서 일기장을 속치마와 손수건 밑에 감추었다. 또 보여주기 싫은 물건이,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은 물건이 잘 감추어졌는지 확인하려고 마지막에 꼭 방을 둘러보았다. 남이 펼쳐 보지 못하도록 항상 후미진 곳에 두어야 했다. 침울한 소외, 황량한 프라이버시랄까. 이제 그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났어, 그는 나를 완전히 알아, 감출 게 없어.’ 나는 소파의 발치에 앉아서 그가 일기장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162-163)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포기한 것들의 표지판들. 수십 년간 축적된 ‘어떻게 사느냐’라는 --부차적이지만-- 포괄적인 관례의 눈금이 타고 있다. 무아지경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지만, 뭘 보고 있는지 모른다. 불안해할 만도 하지만, 매일 호루라기를 불면서 지내는 것은 비정상적일 것이다. 일어나는 반응들은 적합하다. 기름칠이 잘된 뇌와 꼼꼼히 점검된 감정의 기계가 어우러져 똑딱거리며 잘 돌아간다. 새로운 사건들은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새로운 일련의 일들은 별개의 사건들보다 불안하다. 새로운 과정이 더 불안감을 주지만.... (P165)
오르가슴에 대한 예측이 머릿속에 박힐 즈음, 물론 그게 익숙해진 지 오래됐다. 이 사람이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팽팽하게 감은 태엽 장난감처럼 그가 나를 움직이게 하면 나는 절정에 올랐다. 사랑을 하고 싶거나 하기 싫은 기분은 책에서나 본 기분이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했고, 나는 늘 결국은 절정에 달했다. 전주곡만 다양할 뿐이었다. (P170)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내 피부 색깔이 정상으로 돌아갔을 무렵, 나는 다른 남자랑 잠을 잤고, 누워서 양옆에 내려놓은 손을 어떻게 해야 될지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책임감을 되찾았고, 밤이나 낮이나 다시 어른으로 살았다. 남은 문제는 내 감각의 온도 조절기가 망가졌다는 점이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내 몸이 다시 미지근한 정도를 넘어서게 될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P197)
사반세기가 지난 후 우리는 무력한 이에게 힘 있는 자가 가하는 공포를 서술하는 회고록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감정과 성적 관심이 자신의 원칙과 윤리관에 따라 빠르고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빠진 이야기가 성적인 지하세계에서 나와 고급 패션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맥닐의 책은 쓰레기라는 더러운 이미지를 견디고,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가 출연하는 영화로 태어났다. 영화와 책은 제목과 간단한 플롯만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분명히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러면 왜 이 두 성인 간의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를 난감하고 마음 무겁게 할까?
소설의 집필 기법과 회고록의 권위가 더해져서 묘하게 술술 써내려간 솜씨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레이먼드 카버의 <조용히 해줄래요>가 새로운 목소리 -- ‘미니멀리즘’이라 불리게 된 짧고 뚝뚝 끊어지고 직설적인 현재형 문장의 특징 --를 문학에 소개하고 겨우 2년 후에 출간되었다. 맥닐의 회고록은 그런 문체와 목소리로 서술된다. 이 책이 발표되고 9년 후 제이 매킨너니의 <밝은 불빛, 대도시>가 출간되었다. 무심한 도시 환경의 리듬을 포착한 이 책은 맥닐이 서술하는 사회계층을 똑같이 다루고 있다. 간결하고 단순화한 <나인 하프 위크>는 최초의 미니멀리즘 회고록으로 간주할 수 있다. 부담 없는 낭만적인 갈망의 우울함을 글에 담은 그 시기 작가들과는 달리 맥닐은 에로스가 더 호소력 있으며 우리의 관심을 오래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P20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