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용의자 X의 헌신> 2008년
<용의자 X>(2012), <용의자 X적 헌신>(2017)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가 주인공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가운데 탐정 갈릴레오, 예지몽에 이은 3번째 작품이다. 2008년에는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 개봉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2012년 <용의자 X>라는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중국에서도 2017년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아침 7시 35분. 이시가미는 평소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연립주택을 나섰다. 3월로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바람은 차가웠다. 머플러에 턱을 묻고 걸었다. 큰길로 나서기 전에 힐끗 자전거 거치장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몇 대의 자전거 가운데 녹색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남쪽으로 20미터 정도 걸어간 곳부터 이어지는 넓은 도로로 나섰다. 신오하시 로(路), 왼쪽, 즉 동쪽으로 나아가면 에도가와 구이고, 서쪽으로 가면 니혼바시가 나온다. 니혼바시 바로 앞에는 스미다가와 강이 흐르고, 그 강을 건너면 신오하시다.
이시가미가 직장으로 가려면 이대로 곧장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최단거리가 된다. 몇 백 미터만 걸어가면 기요스미 정원이라는 공원이 나온다. 그 앞에 있는 사립학교가 바로 그의 직장이다. 그는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P5-6)
“다시는 오지 마!”
“글쎄, 그게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
“당신......”
“내 말해두겠는데, 너 말이야, 절대로 내 손에서 못 벗어나. 체념할 사람은 그쪽이라는 걸 알아둬.”
도미가시는 낫게 웃었다. 그리고 구두를 신으려고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였다. 야스코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교복 차림의 미사토가 다가와 서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힘껏 휘둘렀다. 야스코가 말릴 틈도,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미사토는 도미가시의 뒤통수를 향해 뭔가를 내리쳤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미가시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P28)
그때였다. 미사토가 코드를 벗기려는 도미가시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발버둥치는 남자를 제지하려고 등에 올라타버렸다.
“엄마, 빨리, 빨리!”
미사토가 외쳤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야스코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에 젖먹던 힘까지 쏟았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쿵. 쿵.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면서 코드를 잡아당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 엄마, 하고 미사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스코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도 손은 코드를 단단히 거머쥐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도미가시의 머리가 보였다. 튀어나올 듯이 부릅뜬 회색 동공이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피가 고여 검푸렀다. 목살을 파고 든 코드가 피부에 짙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도미가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술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코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악!”
야스코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코드를 풀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도미가시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P30-31)
눈앞이 캄캄해졌다. 야스코는 형사에게 아무리 위협을 당해도 미사토가 한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형사들이 사실을 밝혀내면 모든 게 끝장이다. 딸만은 봐달라고 애원한다고 들어줄 리 없다.
자기 혼자 죽인 것으로 위장할 수는 없을까 하고 야스코는 가능한 모든 지혜를 짜내보았지만, 금방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설프게 위장을 하다가 오히려 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미사토만은 지켜야 한다. 부모를 잘못 만나 어릴 때부터 평온한 가정의 행복도 모르고 자란 딸이 아닌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 이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p38~39)
“이야기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립니다. 이 연립주택, 생각보다는 방음이 잘 되지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 여기에 방을 얻었지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이런 사태를 알아차렸느냐는 말입니까?”
예, 하는 뜻으로 야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가미는 손가락으로 방구석을 가리켰다. 빈 캔이 바닥에 구르고 있고, 그 입구에는 재가 묻어 있다.
“아까 찾아왔을 때 담배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손님이 있는가 했는데, 신발이 안 보이더군요. 그런데 고다츠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코드도 꼽지 않고 말이죠. 숨으려면 안쪽에 방이 있으니까 그쪽이 좋을 겁니다. 즉, 고다츠 속의 인물은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숨겨진 것이죠. 그 전에 들렸던 뭔가 부딪치는 소리와 아주머니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같은 것들을 조합해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그냥 드러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연립주택에는 바퀴벌레가 없어요. 오래 살아서 누구보다 잘 알아요.” (P43)
자전거에서는 핸들을 비롯해 프레임과 새들 등에서 여러개의 지문이 채취되었다.
자전거 이외의 유류품으로는 현장에서 약 1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의류가 한 말들이 석유통에서 일부가 탄 채로 발견되었다. 점퍼, 스웨터, 양말, 그리고 바지였다. 불을 지른 후 범인은 사라졌지만, 생각대로 타지 않고 자연히 불이 꺼진 것 같았다.
수사본부에서는 의류의 제조원을 조사하자는 제안은 나오지 않았다.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시체의 체격과 의류 사이즈를 분석하여 피해자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만들었다. 일부 수사원은 그 일러스트를 들고 시노자키 역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딱히 눈에 띄는 복장이 아니기도 해서 그럴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P67)
가메이도에 있는 렌탈 룸 ‘오기야’에서 한 남자 손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확인된 것이 3월 11일이었다. 즉, 시체가 발견된 날이었다. 체크아웃 타임이 지나 종업원이 살피러 갔더니 간단한 짐 몇 개만 있고 손님은 없었다. 보고를 받은 주인은 선금을 받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보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 방의 문손잡이나 짐에서 모발, 지문 등이 채취되었다. 그 머리카락은 시체의 것과 일치했다. 또한 자전거에서 채취한 지문 하나가 방이나 짐에 남아 있던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사라진 손님의 숙박계에서는 도미가시 신지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소는 신주쿠 구 니시신주쿠였다. (P68)
걸으면서 형사들과 나눈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놈들이 사건과 자신의 관계를 눈치챌 만한 힌트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경찰은 시체를 처리하는 데는 남자의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하나오카 모녀의 곁에 있으면서 두 사람을 위해 손을 더렵혀줄 남자를 찾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이웃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시가미라는 수학교사에 주목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앞으로 그녀의 집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만나지도 말아야 한다고 이시가미는 다짐했다. 집에서 전화를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통화기록을 조회하면 하나오카 야스코와 자주 통화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게 뻔하다. (P82-83)
“정신 차려, 형사님. 그 용의자가 진범이라면 꽤 고생하게 될 거야.”
유가와의 말에 구사나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방금 말했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권의 보관 장소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아. 형사가 올 때를 대비해서 팸플릿 속에 끼워두었다면, 상당한 강적이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유가와의 눈가에는 벌써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p97)
“용의자의 옆방에 자네 선배가 살고 있던데.”
“선배?”
유가와는 멀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등학교 수학 선생인데 이시가미라고 하더군, 데이도 대학 출신이니까 아마도 이공계였을 테지.”
“이시가미......”
유가와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말고 안경 너머의 눈을 화들짝 떴다.
“달마 이시가미?”
“달마?”
잠깐 기다리라 하고 유가와는 옆방으로 갔다. 구사나기는 기시야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유가와는 곧 돌아왔다. 손에 검은 표지의 파일을 들고 있었다. 그는 구사나기 앞에서 파일을 펼쳤다.
“이 남자가 아닌가?”
펼쳐진 페이지에는 몇 사람의 얼굴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그 페이지 위에는 ‘제38기 석사과정 졸업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유가와의 손가락이 둥그런 얼굴의 대학원생 사진을 가리켰다. 표정 없는 얼굴. 실처럼 가느다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이름은 이시가미 데츠야.
“아, 이 사람 맞아요. 젊긴 하지만 분명히 이 사람이에요.”하고 기시야가 말했다.
구사나기는 사진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야. 지금은 이때보다 머리가 많이 빠져서 금방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분명 그 사람이 맞아. 아는 선배인가?”
“선배가 아니라 동기생이야. 당시 우리 대학에서 이공계생은 삼학년 때부터 전공이 갈리게 되어 있었어. 나는 물리학과로 가고, 이시가미는 수학과로 갔었지.” (P97-98)
그는 이시가미의 눈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4색 문제는 증명되었어. 모든 지도는 네 가지 색으로 칠해 구분할 수 있다.”
“모든 건 아냐.”
“그렇겠지. 평면 또는 구면 위라는 조건이 달렸지 아마.”
그것은 수학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제 중 하나였다. ‘평면 또는 구면상의 모든 지도는 네 가지 색으로 칠해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1879년 A. 케일리가 제출했었다. 칠해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던지, 그것이 불가능한 지도를 고안하면 되는데, 해결되기까지 백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증명한 사람은 일리노이 대학의 케네스 아펠과 볼프강 하켄인데, 두 사람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든 지도가 약 150종류밖에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모든 지도를 사색으로 칠해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6년의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완벽한 증명이라고 생각지 않아.” 하고 이시가미는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종이와 연필로 문제를 풀려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방식은 인간이 수작업으로 조사하기에는 너무 방대해. 그러니 컴퓨터를 수용했을 테지만, 그 덕분에 그 증명이 옳은지 그른지를 완벽하게 판단할 수단이 없어. 확인하는 데도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진정한 수학이 아냐.”
“역시 엘데슈 신자로군.”
장발은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P110-111)
“P≠NP 문제를 알고 있을 테지.”
유가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이시가미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학의 문제에서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는 것과, 남에게 들은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는 것 중 어느 게 더 간단할까? 또는 그 어려움은 어느 정도일까,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상금을 걸고 낸 문제 중의 하나야.”
“과연, 대단해.”
유가와는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이시가미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수학은 보물찾기와 비슷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우선 어떤 포인트를 공략하면 좋은지를 결정하고, 해답에 이르기까지 발굴 루트를 고안해내야 한다. 그 계획대로 수식을 세워가면서 단서를 얻어야 한다. 아무 단서도 안 떠오르면 루트를 바꾸어야 한다. 차근차근 인내심을 가지고 대담하게 그런 작업을 계속하다보면 아무도 찾지 못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비유를 통해 본다면, 남이 만든 해법을 검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굴 루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잘못된 루트로 들어서서 가짜 보물을 찾고 말았을 경우, 그 보물이 가짜인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때로 진짜 보물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P≠NP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P121-122)
야스코는 이시가미가 왜 자신과 딸을 도와주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사요코가 말했듯이 야스코에게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도 지금처럼 힘이 되어줄까. 이웃집 모녀를 위해 지혜를 짜내 헌신적으로 봉사해줄까.
구도와 만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야스코는 생각했다. 설령 만난다 하더라도 이시가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알 수 없는 초조감이 몰려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할까. 언제까지 이시가미의 눈을 피해야 할까. 혹시 사건의 시효가 다 될 때까지 영원히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P143-144)
“구사나기 형사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협조해주지 못해서.”
“사과할 필요는 없네. 그러고, 또 만나러 와도 될까?”
“그건 상관 없지만......”
“술이나 마시면서 수학 이야기나 해.”
“수학과 살인사건 이야기, 아니던가?”
유가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코 위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그럴지도 몰라. 그런데 수학의 새로운 문제 하나가 생각났어. 시간 날 때 좀 생각해주지 않을래.”
“뭔데?”
“사람이 풀기 힘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푸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려운지, 단, 해답은 반드시 있어, 어때. 재미있지 않나?”
“흥미로운 문제야. 생각해보지.”
이시가미는 유가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P171-172)
“목을 졸라 죽이면 흉기의 흔적이 목에 남아요.”
이시가미는 설명했다. 완곡한 표현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과학수사가 발전되어 어떤 물건을 흉기로 사용했는지 그 흔적으로 알 수 있지요.”
“그래서 그 형사가 고다츠에 대해…….”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벌써 손을 써두었으니까요.”
경찰이 흉기를 밝혀내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시가미는 하나오카 방에 있던 전기 고다츠를 자신의 것과 바꾸어버렸다. 그녀의 전기 고다츠는 지금 그의 방 벽장에 들어가 있다. 게다가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전기 고다츠의 코드는 그녀가 쓰던 타입과는 다르다. 형사가 전기 코드에 주목했다면, 벌써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p187)
“그러나 그 사람들을 모두 조사한들 아무 소용없을 걸요. 그녀는 그런 짓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사주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런 악녀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에요.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부탁한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만큼 어리석은 바보는 아닙니다. 구사나기 씨라고 하셨나요? 일부러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아무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총알처럼 빠르게 말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가달라는 말일 것이다. (P200)
유가와는 검지를 세워 옆으로 흔들었다.
“나의 추리를 말해주지. 그 자전거는 신품이거나 신품에 가까운 것이었어, 아닌가?”
구사나기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자전거 주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건 그랬어. 지난달에 샀다고 했어.”
유가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체인을 걸어두었고, 없어지자 재빨리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를 한 거지. 범인은 그런 자전거를 일부러 노린 거야. 그래서 체인을 걸어두지 않은 자전거도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체인 커트를 준비해왔지.”
“일부러 신품을 노렸다고?”
“그렇지.”
“무엇 때문에?”
“바로 그게 문제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범인의 목적은 하나뿐이지. 범인은 자전거 주인을 경찰서로 달려가게 만들고 싶었던 거야. 그것으로 뭔가 범인에게 유리한 일이 있어야 해.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찰의 수사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효과가 있는 무엇.”
“자전거가 도둑맞은 것은 오전 열한시에서 오후 열시 사이로 판명되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건가? 그러나 범인은 자전거 주인이 어떻게 증언할지는 알 리 없잖아.” (P220)
구사나기의 머릿속에서 오늘 낮에 유가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 물리학자는 만일 사건에 이시가미가 관련되었다면 살해가 계획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계획했다면, 알리바이 공작에 영화관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야.”
유가와는 우선 그 점을 들었다.
“자네도 말했듯이, 영화관에 갔다는 진술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지. 이시가미가 그것을 생각 못했을 리가 없어. 또한, 더 큰 의문이 있어. 이시가미에게는 하나오카 야스코에게 협력하여 도미가시를 죽일 이유가 없어. 만일, 그녀가 도미가시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을 거야. 살인이라는 방법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아.”
이시가미는 그 정도로 잔혹한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로 구사나기는 받아들였다. 유가와는 냉정한 눈길로 고개를 저었다.
“감정의 문제가 아냐. 살인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살인을 범함으로써 또 다른 고통을 끌어안게 될 테니까. 이시가미는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 오히려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어떤 잔혹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인물이야.” (p263~264)
그렇다면 유가와는 이시가미가 어떤 형태로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랬다.
“만일 그가 관련되었다면 살인, 그 자체에는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보아야 해. 즉, 그가 사태를 파악한 시점에서 살인은 이미 완료되어 있었던 거지.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사건을 은폐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했을 거야. 불가능하다면 수사진의 추궁을 피하기 위한 모든 대책을 강구했을 테고, 하나오카 야스코 모녀에게도 지시를 내렸겠지. 형사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하고, 어떤 타이밍에 어떤 증거를 내미는 게 좋은지에 대해서도.”
요컨대 지금까지 하나오카 야스코나 미사토가 구사나기에게 한 진술 모두가 그녀들의 의사가 아니라 이시가미가 뒤에서 조종한 결과하는 것이 유가와의 추리였다. (P264)
이시가미는 숨을 후, 하고 내쉰 다음 친구의 뒤를 따랐다.
“지난번에도 자네랑 여기를 걸은 적이 있었지.” 하고 유가와가 말했다.
“그랬었지.”
“그때, 자네가 말했잖아. 노숙자들을 보고는, 그들은 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생활한다고, 기억해?”
“기억하지. 인간은 시계에서 해방되면 오히려 그렇게 돼. 라는 게 자네의 대사였어.”
유가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자네가 시계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사회라는 시계의 톱니바퀴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톱니바퀴가 없어지면 시계는 제멋대로 움직여. 아무리 자기 멋대로 돌고 싶어도 주변에서 그걸 허락하질 않아. 그래서 안정이란 것을 얻게 되지만 자유가 없지. 노숙자 가운데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꽤 있는 모양이야.”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삼 분은 금방 갈 텐데.”
이시가미는 시계를 보았다.
“봐, 벌써 일 분이 지났잖아.”
“이 세상에 쓸모없는 톱니바퀴는 없지 않을까. 모든 톱니바퀴들은 제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고 살아간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야.”
유가와는 이시가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학교를 그만둘 생각인가?”
이시가미는 놀라서 눈을 화들짝 떴다.
“왜 그런 말을?”
“아니,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 자네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수학선생이라는 이름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을 테니까.”
유가와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지.” (P295-296)
구도에게 이상한 글을 보낸 것도 분명히 이시가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요구하고 나올까? 야스코는 불안했다. 그 사건을 빌미로 앞으로 그녀의 생활을 지배할 생각일까.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생각일까.
이시가미 덕분에 도미가시를 살해한 것에 대해 야스코는 경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평생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은폐공작이었단 말인가. 이래서는 도미가시가 살아 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상대가 도미가시에서 이시가미로 바뀌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배신도 할 수 없는 상대이다. (P311-312)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것 말인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전화가 마지막이 될 겁니다. 앞으로는 연락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당신도 내게 연락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이나 따님은 방관자로 남아야 합니다. 그것이 야스코 씨와 따님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야스코의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P313)
구사나기는 송화구를 손을 막고, 기시야의 어깨를 툭 쳤다.
“에도가와 경찰서로 오라고 해.”
“자신이 죽였대.”
마미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 뭐라고요?”
“도미가시를 죽인 건 자신이래, 이시가미가 자수를 한 거라구.”
“설마!”
구사나기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P315)
“요컨대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흐름에 따라 이시가미를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결론짓겠다는 거 아닌가.”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말게. 애당초 감정보다 사실을 중시하는 것이 자네의 신조가 아닌가. 논리적으로 그렇다면 기분 상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과학자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닌가. 늘 자네가 하는 말이잖아.”
유가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구사나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이시가미를 만났을 때, 그 친구 내게 수학문제를 하나 제시했지. P≠NP 문제라는 건데. 자신이 생각해서 답을 내는 것과, 남에게 들은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는 것 중 어느 게 더 간단한가라는 유명한 문제이지.”
구사나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 수학인가? 철학적인 문제 같은데.”
“이시가미는 하나의 답을 자네들에게 제시했어, 그것이 이번의 자수이고. 진술내용이야. 그 좋은 두뇌를 최대한으로 굴려 허점 없는 답을 고안해낸 거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네들의 패배를 뜻해. 자네들은 전력을 기울여 그가 제시한 답이 옳은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 자네들은 지금 도전받고 있고, 시험당하고 있어.”
“그러니까 여러 가지 보강수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네들이 지금 취하는 방식은 그가 제시한 증명방법을 그냥 따라가고 있을 따름이야.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은 다른 해답이 있는지 없는지를 찾아내는 건데 말이야. 그가 제시한 해답 말고는 절대로 다른 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해답이 유일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
강한 어투에서 유가와의 초조감이 전해져왔다. 늘 냉정하고 침착한 이 물리학자가 이렇게 초조한 표정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네는 이시가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 범인은 이시가미가 아니라고.” (P339-340)
“그는 당신을 지켜주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고 있어요. 나나 당신과 같은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생을. 그는 아마도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최악의 경우에는 당신을 대신할 각오를 굳혔을 겁니다. 모든 계획은 그런 상황을 전제로 만들어졌어요. 뒤집어 말하면, 그 전제만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었지요. 그러나 그 전제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전제지요. 이시가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만일의 경우에도 절대 돌이킬 수 없도록, 자신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린 겁니다. 그것이 이번 사건의 놀라운 트릭으로 나타난 겁니다.”
유가와의 말에 야스코는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큰 충격에 휩싸여들고 있었다.
분명히 이 남자의 말대로다. 이시가미가 어떤 장치를 만들어두었는지, 야스코는 알지 못한다. (P366)
“그 시체는 도미가시 신지가 아니에요. 당신의 전남편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였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야스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유가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슬픔에 젖은 채 깜빡거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피가 술렁대더니 갑자기 그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내 말을 이제야 이해하신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이시가미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또 하나의 살인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그것이 삼월 십일입니다. 진짜 도미가시를 죽인 다음 날이지요.”
야스코는 현기증을 느꼈다. 앉아 있기조차 고통스러웠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P368)
그 모녀와 어떤 관계를 가져보자는 욕망은 아예 없었다. 자신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수학도 똑같다는 것을, 이 세상에는 거기에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숭고한 것이 존재한다. 명성 따위는 그 숭고함에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다.
그 모녀를 돕는 것은 이시가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 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녀는 생뚱맞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 (P392-393)
“우리만 행복해진다는 건 무리예요. 저도 대가를 받겠어요. 벌을 받을래요. 이시가미 씨와 같이 벌을 받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입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야스코는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시가미는 고개를 저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몸을 휙 돌리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우우우우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절망과 혼란이 마구 뒤섞인 비명이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드는 울림이었다.
경찰관이 달려와 그를 잡으려 했다.
“그를 잡지 마!”
유가와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울게라도 해주게........”
유가와는 이시가미의 뒤에서 그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시가미의 비명은 계속됐다. 구사나기의 귀에는 혼을 토해내는 소리로 들렸다. (P4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