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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영화 <스모크> 1995년, <블루 인 더 페이스> 2000년

by 노용헌

오기 렌은 13년이 지나도록 특별한 사진을 찍고 있다. 매일 아침 8시 상점 앞에서 같은 배경으로 네거리 사진을 찍는다. 4,000장이 넘는다. 그 사진들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날씨에 따라, 행인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다. 웨인 왕(Wayne Wang) 감독의 영화 〈스모크〉는 두 인물 폴과 오기를 중심으로 잔잔하고 느리게 전개된다.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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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를 오기 렌으로부터 들었다. 오기는 이 이야기에서 자신이 한 일이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고의로 그런 일을 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본명을 쓰지 말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익명을 쓴 것 말고는, 잃어버린 지갑이든가 눈먼 할머니, 크리스마스 날의 저녁 식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가 나에게 이야기해 준 그대로이다.

오기와 내가 서로 잘 알고 지낸 지 벌써 11년째다. 그가 일하는 곳은 브루클린의 다운타운에 있는 코트 거리의 시가 가게 카운터 뒤다. 내가 좋아하는 네덜란드 제 시가를 파는 곳이 거기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꽤 자주 드나든다. 오랫동안, 나는 오기 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후드가 달린 푸른색 스웨터 셔츠를 입고 시가나 잡지를 파는 좀 수상쩍게 생긴 작은 남자였다. 개구쟁이처럼 생겼고 재치 있는 말을 제법 잘해서 날씨라든가 뉴욕 메츠 아니면 워싱턴의 정치인들 같은 이야기거리를 언제라도 풀어 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어느 날, 그는 가게에 있는 잡지를 훑어보다가 그 잡지에 실린 내 책에 대한 서평을 발견했다. 그는 그 책의 저자가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서평에는 내 사진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우리 사이의 관계가 바뀌었다. 오기에게 있어서 나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뭔가 다른 손님이 돼버렸다. 보통 사람들은 책이라든가 작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오기는 달랐다. 내가 누구라는 비밀을 그가 알아 버린 이상, 나는 그에게 동지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요, 전우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가 자신의 사진을 봐달라고 한 것이다. 그의 열정과 선의(善意)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나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오기가 보여 준 것은 예상 밖이었다. 가게 뒤에 달린 창문도 없는 작은 방으로 나를 데려간 오기는 두꺼운 종이로 된 상자를 열고 똑같이 생긴 열두 권의 검은 사진 앨범을 꺼냈다. 그는 자신이 일생 동안 이것을 만들었지만 하루에 5분 이상 투자한 적이 없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2년 동안 매일 아침 정각 7시에 애틀랜틱 애브뉴와 클린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에 서서 정확하게 같은 앵글로 딱 한 장씩 컬러 사진을 찍어 왔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이 이제는 4천 장이 넘는다. 앨범 한 권이 한 해 분량이었고, 사진들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순서대로 붙어 있었다. 사진들 밑에는 꼼꼼하게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P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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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옳았다. 당연했다. 차분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다른 앨범을 집어 들고 좀 더 차분히 보려고 애썼다. 작은 변화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날씨의 변화들을 주목했고 계절이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각도를 주시했다. 마침내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거리의 흐름에서 미묘한 변화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활기찬 주 중의 날들 아침, 비교적 한산한 주말, 일요일과 토요일의 차이, 같은 요일에 따른 변화도 예측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나자 조금씩조금씩 배경에 있는 사람들, 즉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같은 사람이 같은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오기의 카메라에 잡힌 공간 안에서 그들 삶의 한 순간을 살고 있었다. (P15-16)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기 옆 벽에 기대자 카메라 6~7대가 쌓여 있는 게 보이더군. 최신형 35밀리 카메라였어. 상자도 뜯지 않은 채였고, 최상품들이었어. 난 이게 진짜 로버트의 짓이고 그가 최근에 훔쳐 온 물건들을 쌓아 놓은 거라는 걸 알아차렸지. 난 평생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었어. 그리고 물건을 훔친 적도 전혀 없었지. 하지만 화장실에 앉아서 그 카메라들을 보는 순간, 카메라를 한 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냥 그랬어.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딴 생각할 틈도 없이 상자 중에 하나를 내 팔 밑에 쑤셔 넣고 거실로 돌아왔어.

내가 자리를 비운 게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에슬 할머니는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어. 와인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 나는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는데, 할머니는 시끄러운 설거지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기처럼 가늘게 코를 골며 계속 자고 있었어. 그녀를 깨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떠나기로 했지. 작별 인사를 메모로 남길 수도 없었어. 그녀는 장님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나왔어. 손자의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두고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든 다음, 아파트에서 걸어 나왔지. 그게 이 이야기의 끝이야.

“할머니를 만나러 다시 간 적 있나?” 내가 물었다.

“한 번.” 그가 말했다. “서너 달 후에. 카메라를 훔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어. 그때까지는 쓰지도 않았었지. 결국은 돌려주기로 마음을 정하고 갔었지만, 에슬 할머니는 이미 거기 살지 않았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아파트에 새로 이사 왔고, 이사 온 사람도 할머니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고 했어,”

“아마 돌아 가셨겠지.”

“그래, 아마도.”

“그건 할머니가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자네와 함께 보냈다는 뜻이고.”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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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제작과정]

아네트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아니기를 바란다. <오기 렌> 이야기 안에서는 모든 것이 뒤집혀져 보인다. 훔친가는 것이 무엇인가? 준다는 것이 무엇인가? 거짓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모든 질문들이 이상야릇하게 뒤섞여 버린다.

아네트 웨인 왕이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보인 건 언제였나?

그 이야기가 발표되고 나서 몇 주 후에 웨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화를 했다. (P30-31)


<스모크>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인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시가 가게를 가리킨다. 하지만 연기smoke는 사물을 흐릿하게 하고 잘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는 뜻도 있다. 연기는 고정시킬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항상 모양이 변한다. 같은 맥락으로 볼 때 이 영화의 인물들은 그들의 삶처럼 끊임없이 서로 엇갈리면서 변한다. 연기는 신호를 보낸다........ 연기는 뭔가를 가린다...... 연기는 공중을 떠다닌다. 이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많든 적든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인물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된다.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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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맞아, 그 남자야. 그래. 롤리가 담배를 영국에 소개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는 여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 여왕을 베스 여왕Queen Bess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 흡연이 영국 왕실의 유행이 돼버렸어. 늙은 베스는 아마 엽궐련을 한두 개 월터 경과 나눠 피우곤 했겠지. 한번은 그가 여왕에게 내기를 걸었어. 자신이 연기의 무게를 잴 수 있다고 말이야.

데니스 연기 무게를 잰다고?

그래, 연기 무게를 재는 거야.

토미 말도 안 돼. 공기 무게를 잰다는 거하고 똑같잖아.

황당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어. 누군가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거하고 거의 같은 거지. 하지만 월터 경은 영리한 사람이었어. 우선, 피우지 않은 시가를 저울에 올려서 무게를 쟀지. 그 다음, 불을 붙인 후 시가를 피우면서 조심스럽게 재를 저울 위에 떨었지. 다 피우고 나서 남은 꽁초도 저울 위에 재와 같이 놓고 무게를 달았어. 그 다음 그 무게를 원래의 피우지 않은 시가의 무게에서 뺀 거야. 그 남은 값이 연기의 무게지. (P69)


누가 카메라를 놓고 갔군.

오기 (돌아서며) 응, 내가 놓고 갔어.

자네 건가?

오기 그래, 내 거야. 오래 가지고 있던 물건이지.

자네가 사진을 찍는 줄은 몰랐어.

오기 (시가를 폴에게 건네준다) 자넨 취미 생활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거네만, 난 매일 사진을 찍어. 하루에 5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흐린 날이나 맑은 날이나, 우편 배달부처럼 말이야. (사이) 어떨 때는 내 취미 생활이 내 직업이고 내 직업은 그 취미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카운터에서 잔돈이나 바꿔 주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오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게 진짜 나는 아니야.

(오기를 새롭다는 듯 쳐다본다) 어떻게 시작했나?

오기 사진 찍는 거? (웃는다) 얘기가 길어. 두세 잔 마셔야 그 얘길 할 수 있지.

(끄덕이며) 사진가라.......

오기 과대 평가는 하지 말라고, 난 사진을 찍어. 찍고 싶은 걸 뷰파인더 안에 담은 다음, 셔터를 누르지. 예술가입네 하고 똥 같은 짓을 하는 친구들하고는 달라.

그 사진들, 보고 싶구먼.

오기 당연히 그래야지. 자네 책을 내가 읽었으니까 내 사진도 자네와 같이 나눠 봐야지. (사이, 갑자기 무안한 듯) 그래 주면 영광이겠네. (P84-85)


(놀랍다) 똑같은 사진들이군.

오기 (자랑스레 미소 지으며) 맞았어. 같은 장소에서 찍었어. 4천 장이 넘지. 3번가하고 7번 애브뉴 모퉁이, 아침 8시. 4천 일 동안 계속 찍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이) 그래서 난 휴가도 못 갔어. 매일 아침에 거기엘 가야 했으니까.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낭패본 듯, 페이지를 계속 넘긴다) 이런 건 처음 봐.

오기 나의 작업이야. 내 평생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보고 있던 앨범을 덮고 다른 앨범을 집어 든다. 페이지를 넘겨 봐도 역시 모두 같은 사진들이다. 곤혹스러운 듯 고개를 흔든다) 놀랍군.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내가 이해를못하는 건지 모르겠네만,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생각을 했나...... 이 작업을?

오기 나도 몰라. 어쩌다 하게 됐어. 어쨌든, 그건 나의 모퉁이야. 거긴 이 세상의 작은 한 부분이지만, 다른 세상에서처럼 일들이 벌어지지. 이건 그 작은 내 모퉁이의 기록이야.

(계속 앨범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사람을 압도한달까....... 그런 느낌이야.

오기 (계속 미소 지으며)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알 수가 없을 걸세. 친구.

무슨 소리야?

오기 내 말은, 자네가 너무 빨리 보고 있단 얘기야. 자넨 사진들을 안 보고 있어.

다 똑같은 사진이잖아.

오기 다 똑같지. 하지만, 한 장 한 장은 다 달라. 밝은 아침도 있고 어두운 아침도 있어. 여름 햇빛이 다르고 가을 햇빛이 달라. 주 중의 날들, 주말의 날들, 코트를 입고 장화를 신은 사람도 있고,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있어. 어떨 때는 같은 사람들이 보이고 어떨 때는 다른 사람들이 보여. 계속 낯선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안 보이기도 하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에서 오는 빛은 매일 다른 각도로 땅에 부딪히지.

(앨범에서 고개를 들어 오기를 본다) 더 천천히 보라고? 응?

오기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자네고 알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시간은 하찮은 듯한 걸음걸이로 기어간다. (P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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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그녀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정상적인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렇게 안 됐어. 그 애는 지금 정말 엉망이야. 오기.

오기 연기를 아주 잘하는구먼. 당신을 돕고 싶어졌어. 이시겠지만, 옛정을 생각해서야. 그런데, 여유 돈을 전부 새 사업에 투자해서 묶여 있어. 아직 이익 배당을 받지 못했거든. 참 안됐네. 당신이 운 때가 없구먼.

루비 (아직 울고 있다)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어쩌면 그렇게 비열해질 수가 있어?

오기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아니야, 하느님한테 맹세해. 정말이라고. (P116)


사이러스 (갈고리 손을 치켜들고 잠시 바라본다) 꼴사나운 쇳덩이지? (사이) 내 팔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얘기해주지. (사이, 옛 생각난다는 듯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사이) 12년 전에 하느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어. <사이러스, 넌 나쁜 놈이고, 멍청하고 이기적인 놈이다. 우선 내가 네 몸에 술을 채워 주마, 그러고 나서 널 운전하게 하겠다. 그러고 나서 네 차를 다른 차와 부딪히게 해서 네가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겠다. 하지만 너, 사이러스. 너는 살려주겠다. 산다는 게 죽는 것보다 훨씬 못 한 것이니까. 그 대신 네가 그 불쌍한 여인에게 한 일을 잊지 않도록 네 팔을 없애고 그 자리에 갈고리를 달아 주겠다. 네 두 팔과 두 다리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어 네 왼쪽 팔만 없애겠다. 네 갈고리를 볼 때마다 너는 네가 얼마나 사악하고 바보같고 이기적인 놈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네게 주는 가르침이다. 사이러스, 네가 회개해야 한다는.> (P118)


좋아. 잘 들어라. (카메라는 천천히 폴의 얼굴로 다가가서 클로즈업까지 들어간다) 25년쯤 전에 한 젊은이가 혼자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어. 그런데 눈사태가 일어나서 눈이 그를 삼켜 버렸고,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

라시드 (소리) 끝이에요?

아니, 끝이 아니야. 시작이지. (사이) 그때 그의 아들은 어린 소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서 그 아들은 어른이 됐고 역시 스키를 타게 됐어. 지난 겨울 어느 날, 그는 혼자서 스키를 타고 산 밑을 향해 반쯤 내려오고 있었지. 그러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큰 바위 옆에서 멈췄어. 그가 치즈 샌드위치를 막 꺼내 먹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얼음에 묻힌 얼어붙은 시체를 발견했지. 바로 자기 발밑에서 말이야. 그는 자세히 보려고 허리를 굽혔지. 그런데 갑자기 그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았어.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단 말이야. 거기에는 자신이 있었어. 죽은 채로, 그리고 그 시체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어. 얼음에 갇혀서 그렇게 된 거지. 마치 누군가가 산 채로 저장돼 있는 것 같았어. 그는 엎드려서 죽은 사람의 얼구을 들여다보고 나서 자신이 아버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라시드의 얼굴. 그는 열심히 듣고 있다.

(계속, 소리) 그런데 이상한 건, 아버지가 자기보다 훨씬 젊다는 거야. 그 소년은 어른이 된 거지, 그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던 거야.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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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계속) 그래, 요즘 일은 어떻게 돼 가나, 대가(大家) 선생?

(아직 미소 짓고 있다. 정신이 없다) 잘 돼. (사이. 정신을 차린다) 이틀 전까지는 괜찮았지. ‘뉴욕 타임스’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써달라고 하더군. 크리스마스 날 싣고 싶대.

오기 그거 아주 좋은 기회 잡았구먼, 친구. 전통 있는 신문이잖아.

그래, 좋지. 문제는 나흘 안에 뭔가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하나도 없어. (사이) 크리스마스 이야기 아는 거 없어?

오기 (호기를 부린다) 크리스마스 이야기? 물론 알지, 엄청 많이.

좋은 거 있어?

오기 좋은 거? 물론. 난 농담 안 해. (사이) 조건이 있어. 점심을 사게, 친구, 그럼 내가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해주지. 어때? 그리고 이건 몽땅 실화라는 거를 보장하지.

(웃으며) 실화일 필요는 없어. 재미있기만 하면 돼.

오기 (지미 로즈에게) 나 없는 동안 가게 좀 봐줘. 지미, 괜찮지? (카운터 뒤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지미 나더러 가게를 보라고, 오기? 정말 내가 가게를 봐?

오기 그래, 정말. 내가 가르쳐 준 거만 잊지 마. 그리고 이 훈수꾼들만 조심해. 말썽쟁이들이니까. (도박꾼들을 가리킨다)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와. 난 저 아래 잭 네 식당에 있을 거야. (폴에게) 거기 괜찮지?

괜찮지. (P177-178)


결국, 할머니는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자네와 함께 지냈군.

오기 그 말 듣고 보니까 그렇구먼.

착한 일을 했군, 오기. 할머니한테는 정말 좋은 일을 했어.

오기 난 할머니한테 거짓말을 했고, 도둑질을 했어. 그게 무슨 좋은 일이야?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줬잖아. 그리고 카메라는 어차피 훔친 물건이야. 자네가 진짜 주인한테서 훔친 것도 아니잖아.

오기 예술을 위해서라는 거야, 폴?

그런 뜻은 아니고, 하여튼 자네는 그 카메라를 좋은 데 쓰고 있어.

오기 그리고 이제 자넨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나 건졌어. 그렇지?

(사이, 생각한다) 그래. 그런 거 같아.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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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브루클린이야. 숫자대로 되는 건 아니야]

<블루 인 더 페이스>는 <스모크>의 속편이 아니다. 배경과 인물들을 가져다 쓰기는 했지만,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정신은 코미디이며, 원동력은 말이고, 기본 정신은 자발성이다. 제작자 피터 뉴먼(Peter Mewman)은 이 아이디어를 처음 듣더니 <원생(院生)들끼리 수용소를 점령해 보겠다는 계획>이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이건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아주 단순했지만 결국 <블루 인 더 페이스>는 이 사람 저 사람 다 끼어든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전제는 <스모크>의 시작과 끝이었던 시가 가게로 되돌아 가서 오기 렌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내 보자는 것이었다. <스모크>에서의 작은 역할들은 이 영화의 중심 역할이 되었다. 오기를 제외한다면 <스모크>의 중심 인물 중에서 이 영화에 다시 나오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고, 그나마도 아주 작은 역할일 뿐이다. (P213-214)


<여기는 브루클린이야. 숫자대로 되는 건 아니야.> 사람들은 굴뚝처럼 연기를 뿜어 대고, 논쟁을 벌이며, 서로의 얼굴을 익힌다. 그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모욕하고, 비위를 거슬리는 말들을 한다. “블루 인 더 페이스”의 거의 모든 신은 갈등에 관한 것이다. 등장 인물들은 전투 준비를 하고 있고 목청 높여 자기 주장을 하고, 가차없이 화를 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정말 즐겁고, 위대한 인간적 온정을 느끼면서 극장을 나서게 된다. 나는 그 점이 흥미롭다. 아마도 적당한 갈등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려 드는 고매한 경건함에서 적당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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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을 위한 비망록]

8.달콤한 이별

등장인물 밥, 오기, 지미 로즈

밥이 가게로 들어온다. 오기는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 몇 달 동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었다고 밥이 말한다. 도쿄에서 그의 사진전이 열렸다. 오기는 밥에게 럭키 스트라이크 (밥이 즐기는 담배다) 한 갑 줄까 하고 묻는다. 몇 년 동안 피웠으면서 다른 담배로 바꾼 거야? 아니, 밥이 말한다. 담배를 끊으려고 해. 실제로 그는 마지막 담배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가 이 가게에 온 이유다. 마지막 담배를 오기와 같이 피우려는 것이다.

밥은 앉는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리고 손에 쥔다. 나머지 신에서 그는 오기와 지미 그리고 담배에게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한다.

독백이 이어진다. 담배에 대한 추억, 어린 나이에 경험한 첫 담배부터 어른이 돼서 피우는 마지막 한 모금, 흡연과 섹스. 흡연과 음식. 흡연과 일. 언젠가 쇤베르크는 왜 일하는 동안 책상 위에 담배를 그냥 타도록 놔두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작곡은 외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동무를 삼기 위해서 그걸 거기에 둔다.> 흡연과 긴장, 흡연과 이완, 담배를 피우기에 나쁜 때는 없다. 축하하기 위해서 피우고, 한탄하면서 피운다. 사고로서의. 명상으로서의. 행동으로서의 담배. 위험한 흡연: 침대에서 여자와 한 개비의 담배를 나눠 피우기. 마지막 행동으로서의 흡연: 총살행을 앞둔 죄수의 눈을 가리기 전 소총수들 앞에서 피우는 마지막 한 모금, 한 모금 한 모금은 인간의 호흡이다. 한 모금 한 모금은 사고(思考)이다. 한 모금 한 모금은 삶이 죽음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 준다.

밥은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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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인 더 페이스>를 준비하는 데 우리의 전략 중의 하나는 각각의 배우에게 다른 배우들이 모르는 숨겨진 정보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연기에 자연스러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그리고 연기를 최대한 <진짜>처럼 보이게 할 수 있겠다는 기대에서 비롯됐었다. 이것이 잘목 먹혀들어 가서 배우들로 하여금 동문서답을 하게 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신의 성공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경우도 있었다. <카우보이와 인디언>은 이 전략이 가장 잘 먹혀든 경우일 것이다. 데니스(스티브 지비돈)는 수(페기 곰리)가 자신의 따귀를 때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었다. 데니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불쾌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으므로 스티브는 가차없이 페기에게 모욕을 주라는, 그렇게 해서 브루클린 남자들의 부도덕함을 최대한 드러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게 그가 받은 지시의 전부였다. 따귀를 맞았을 때, 그는 정말로 놀랐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생생했다. 스티브는 가까스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역할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얼굴은 충격 그 자체였다. (P251-252)


9.벨기에 와플 포스터

와플맨은 아주 멋있어 보이는 벨기에 와플이 담긴 메뉴를 들고 다닌다. 자신의 절실한 욕망을 컬러 사진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7월에 릴리 톰린이 나오는 장면을 찍을 때, 그 사진의 인서트 쇼트(insert shot)를 찍을 시간이 없었다. 관객들에게 그녀의 욕망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 주기 위해서는 그 쇼트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10월에 벨기에 와플 포스터를 찍기로 하고 준비를 했다.

시가 가게 안의 벽에 포스터를 테이프로 붙였다. 그 쇼트를 몇 초 정도 찍을 계획을 하고 (정확히 몇 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카메라를 돌렸다. 2~3초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테이프가 떨어지며 포스터가 벽에서 떨어져 내렸다. 전형적인 <성질이 나서 얼굴이 파래지는(blue in the face)> 순간이었다. 다 끝났는가 하는 순간에 접착제의 신(神)이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다. 그래서 포스터를 다시 붙이고 그 쇼트를 다시 찍었다.

이번에는 잘 됐다. 이번에는 정말 영화가 끝난 것이다.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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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인 더 페이스]

셰프 베이 내가 브루클린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브루클린에는 이 세상의 온갖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다 있다는 거죠. (점프컷) 제일 안 좋아하는 거? 그건 이 온갖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살면서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죠. (P321)


담배는 죽을 운명을 일깨워 주는 그런 것 중의 하나지. 알아? 한 모금 빨 때마다 한 순간이 지나가고, 한 생각이 지나가. 담배를 피우면 연기로 사라지지, 알아? 그건 사는 건 죽는 거다라는 걸 일깨워 주는 거야. 어쩌면 모르겠어. 담배가 피우고 싶어질 거야. 하지만 어쨌든, 마지막이야. 자네와 함께하는 거지, 오기.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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