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셔터 아일랜드> 2010년
데니스 루헤인이 쓴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되어 2010년에 개봉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IMDb Top 250에 선정되었으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 테디 역으로 열연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랫동안 나는 그 섬을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외항까지 아간 친구의 배에서였는데, 고리처럼 둥글게 늘어선 바위들 너머로 여름 안개에 둘러싸여 누가 하늘에 아무렇게나 발라 놓은 페인트 자국처럼 보이던 그 섬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섬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내가 정말로 그 섬을 떠난 건지 의심스럽다고 한다(농담일 때도 있고, 진담일 때도 있다). 언젠가 에밀리는 나한테 시간이란 책갈피 같은 것이어서 내가 내 인생이라는 책 속을 이리저리 훌쩍훌쩍 뛰어다니면서 내게 흔적을 남긴 사건들이 있는 페이지로 자꾸만 되돌아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주 기민한 내 동료 의사들 눈에는 내가 고전적인 우울증 환자의 모든 특징을 다 갖고 있는 걸로 보인다는 것이다. (P11)
병원에 처음으로 직원들이 도착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서 있던 요새는 남쪽 절벽 면에서 툭 튀어나온 모습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남북전쟁 전부터 이미 사용되지 않던 그 너머의 등대는 보스턴 등대 때문에 낡은 폐물이 되었다.
바다에서 보면 그 섬은 별것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1954년 9월 어느 고요한 아침에 테디 대니얼스가 보았던 것처럼, 외항 한 가운데에 있는 그 섬이 덤불들로 가득 찬 평원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 섬을 본 사람들은 별로 섬 같지도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섬 모습이 아니니까. 저 섬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테디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해 봤는지도 모른다. 목적이 무엇일까? (P14)
[첫째 날]
그 모든 것들 뒤에 사람들이 셔터라고 부르는 섬이 커다란 스페인 돛단배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모양처럼 누워 있었다. 그 당시. 그러니까 1928년 봄에 그 섬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식물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섬의 가장 높은 지역에 길게 자리 잡은 요새는 덩굴에 목을 졸리고 커다란 구름 같은 이끼에 뒤덮여 있었다.
“왜 이름이 셔터예요?”
테디가 물었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녀석, 궁금한 게 그렇게도 많아? 항상 뭘 묻기만 하니.”
“그러니까 왜 셔터예요?”
“그냥 생겨난 이름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는 경우가 있지. 십중팔구 해적들이 붙인 이름일 거다.”
“해적이요?” (P20)
테디가 처크에세 말했다.
“여기에 대해서 얘기 좀 들었어?”
“내가 아는 거라고는 정신 병원이라는 것밖에 없어요.”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이 있는 곳이지.”
“뭐, 그런 곳이 아니라면 우리가 여기 있지도 않겠죠.”
테디는 처크가 또다시 그 건조한 미소를 짓는 걸 보았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처크, 내가 보기에는 자네도 100퍼센트 안정된 사람 같지 않으니까.”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내가 병상에 예약금을 걸어 놓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장래를 위해서 내 자리를 비워 두라고.”
“나쁜 생각은 아니군.”
테디가 말하는 순간 엔진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뱃머리가 물결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서 엔진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연락선이 선착장을 향해 뒷걸음질치기 시작하자 테디와 처크 앞에 곧 널찍한 바다가 펼쳐졌다.
“내가 아는 한, 여기 사람들은 과격한 놈들 전문이야.”
“빨갱이요?”
“빨갱이가 아니라, 그냥 과격한 놈들. 그 둘은 달라.”
“요즘은 다른지 어떤지 모르겠던데.”
“가끔 그럴 때가 있기는 하지.”
테디가 맞장구쳤다.
“그럼 도망쳤다는 그 여자는요?”
“나도 잘 몰라. 어젯밤에 살짝 빠져나갔다는데, 내 수첩에 이름을 적어 놨어. 저기 사람들이 나머지 얘기를 다 해 주겠지.”
테디가 말했다.
처크가 사방의 물을 둘러보았다.
“그 여자가 어디로 갔을까요? 집까지 헤엄이라도 칠 생각인가.”
테디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환자들은 여러 가지 망상에 시달리는 모양이야.”
“정신 분열이에요?” (P40-41)
“이곳의 A병동은 제 뒤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남자 병동입니다. 여자 병동은 B병동은 제 왼쪽에 있습니다. C병동은 이 단지 바로 뒤의 저 절벽 너머에 있으며 직원 숙소는 예전의 월튼 요새에 있습니다. 서면 동의서와 교도소장 및 콜리 박사의 동행 없이 C병동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맥퍼슨이 마치 태양을 향해 탄원을 하는 것처럼 두툼한 손바닥 하나를 내밀었다.
“이제 무기를 저희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처크가 테디를 바라보았다. 테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맥퍼슨 씨, 우리는 정식으로 임명된 연방 보안관입니다. 정부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언제나 무기를 소지해야 합니다.”
맥퍼슨의 목소리가 강철 케이블처럼 허공을 갈랐다.
“연방 교도소 및 정신 이상 범죄자 수용소 규칙, 실행 명령 391조에는 예외 규정으로 치안 유지 요원들의 무기 소지 규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은 직속 상관의 직접적인 명령, 혹은 교도소나 정신병 관련 시설의 보호를 맡은 사람의 직접 명령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분은 지금 그 예외 규정에 해당됩니다. 무기를 가지고는 이 문을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P47-48)
“여자 죄수 하나가 실종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테디는 무릎에 수첩을 놓고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름이 레이첼 솔란도군요.”
“환자입니다.”
콜 리가 두 사람을 향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예, 환자죠, 죄송합니다. 그 여자가 도망친 지 아직 24시간이 안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테디가 말했다.
콜리가 턱과 손을 살짝 한쪽으로 기울여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동작을 했다.
“어젯밤입니다. 10시에서 12시 사이”
“그리고 아직 그 여자가 발견되지 않았고요.” (P58-59)
“지금보다 덜 계몽된 시대에 그라이스 같은 환자는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그를 연구해서 병을 규명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를 그토록 반사회적으로 만든 뇌의 이상 부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럴 수 있다면, 언젠가 그런 비정상적인 문제들을 사회 전체에서 뿌리뽑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P72)
4의 법칙
나는 47
그들은 80이었다.
+당신은3
우리는 4
하지만
누가 67? (P73-74)
레이첼 솔란도는 전쟁 미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 셋을 집 뒤에 있는 호수에 빠뜨려 죽였죠. 애들을 하나씩 데리고 나가서 아이가 죽을 때까지 머리를 물 속에 처박은 겁니다. 그러고는 아이들 시체를 다시 집으로 가져와서 식탁에 앉혀 놓고 식사를 하다가 이웃 사람에게 발각됐습니다. (P83)
“아, 이제 완전한 정신 분열증 환자의 편집증 구조가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지 그 얘기를 할 차례가 됐군요. 만약 두 분이 세상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들밖에 없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면.......”
“그럼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다 거짓말이 되죠.” (P105)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만나는 여자들 중 절반을 침대로 끌어들이는데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아내가 도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렇게 이해 못할 일은 아닐 거예요. (P237)
“레이첼 솔란도가 맨발로 그곳을 탈출한 건 누군가 도와줬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도와줬지. 이 병원 전체가 도왔다고. 내 경험을 얘기해 줄까? 어떤 집단 전체가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을 때, 그 집단의 뜻을 꺾을 방법은 없어. 우리 두 사람만 갖고는 안 돼. 일이 아주 잘 된다면, 아까 내 협박이 먹혀서 콜 리가 지금 자기 저택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모든 걸 다 다시 생각해 보고 있겠지. 어쩌면 아침에......”
“그러니까 아까 그냥 허세를 부린 거군요.” (P123-124)
[둘째 날]
4의 법칙
나는 47
그들은 80이었다.
+당신은3
우리는 4
하지만
누가 67?
1분이 지난 후 콜리가 말했다.
“내가 너무 피곤한 모양입니다. 보안관. 지금은 그냥 횡설수설로밖에 안 보여요. 미안합니다.”
테디는 처크를 바라보고 그는 고개를 저였다.
테디가 말했다.
“내가 이 암호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건 이 덧셈 부호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80이었다’ 밑에 줄이 쳐진 걸 보세요. 그러니까 여기 두 줄을 더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얼마가 되죠?”
“127”
“1,2,7. 맞습니다. 이제 거기다 3을 더해 보세요. 하지만 그 숫자들을 전부 따로 떼어서 봐야 합니다. 그 여자는 이 숫자들을 따로 떼어놓고 싶어해요. 그러니까, 1 더하기 2 더하기 7 더하기 3이 되는 겁니다. 그럼 얼마가 나옵니까?”
“13.”
콜리는 침대에 앉은 채 아까보다 약간 허리를 똑바로 펴고 있었다.
테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13이라는 숫자와 레이첼 솔란도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까? 그 여자 생일이 13일인가요? 아니면 결혼기념일? 아이들을 죽인 게 13일이었습니까?”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하지만 13은 대개 정신 분열증 환자들에게 의미 있는 숫잡니다.”
콜리가 말했다.
“왜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불길한 징조라는 거죠. 대부분의 정신 분열증 환자들은 공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게 그 환자들을 묶어주는 흔한 요소예요. 따라서 대부분의 정신 분열증 환자들은 미신적인 성향이 아주 강합니다. 13이 그래서 의미를 갖는 거고요.” (P140-141)
“그날 밤 집단 치료 시간에 평소 때하고 다른 점은 없었습니까? 레이첼 솔란도가 평소 때하고 다른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생쥐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죠. 그 여자가 자기 애들을 죽인 거 아시오? 셋이나, 그게 말이 돼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정상이 아닌 인간들이 있어요.”
“사람들한테는 각자 문제가 있어요. 그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문제가 깊은 사람도 있죠. 당신 말처럼 정상이 아닌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해요.”
처크가 말했다.
“그런 놈들한테 필요한 건 독가스예요.”
피터가 그를 불렀다.
“뭐라고요?”
“독가스.”
피터가 테디를 향해 말을 계속했다.
“덜 떨어진 놈들도 가스로 죽이고, 살인자들도 가스로 죽여야 돼요. 그 여자가 자기 자식을 죽였다고요? 그 나쁜 년도 가스로 죽여야 돼요.”
세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P159)
“앤드루 레이디스는.......”
그가 처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바싹 마른 목에 단어가 걸려버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켜서 입 안을 촉촉하게 만든 다음 다시 시도해 보았다......
“앤드루 레이디스는 내가 아내랑 같이 살던 아파트의 관린인이었어.”
“그래요?”
“아파트에 불을 지른 것도 그 사람이지.”
처크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테디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앤드루 레이디스가 성냥불로 아파트에 불을 냈다는......”
“이런 세상에.”“..... 그리고 그 불로 내 아내가 죽었어.” (P173-174)
두 사람이 땅이 평평한 작은 공터를 발견했을 때 테디가 말했다. 공터를 둥글게 둘러싼 키 큰 나무들이 빗줄기를 조금 막아주고 있었다.
“난 지금도 내 임무를 먼저 생각해. 레이첼 솔란도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야. 그러다가 우연히 레이디스를 만나면? 그럼 좋지. 그럼 그놈한테 네가 내 아내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해 줄 거야. 그놈이 여기서 풀려날 때까지 내가 육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네 놈은 절대 자유롭게 숨쉴 수 없을 거라고 말해 줄 거야.”
“그게 다예요?”
“그게 다야.” (P191)
“여긴 실험적인 시설로 알려져 있어. 내가 전에 말했지? 급진적인 치료법을 쓰고 있다고. 여기 운영자금 일부는 주정부하고 연방 교정국이 대고 있지만, 가장 많이 자금을 대는 건 1951년에 HUAC미 하원 비미국적 행동 조사위. 1947년과 1951년에 할리우드 연예인들 중 공산주의자를 색출했다가 만든 재단이지.”
“아, 끝내주는군요. 보스턴 항에 있는 섬에서 공산당 놈들하고 싸운다니. 그런데 공산당이랑 어떻게 싸운다는 거예요?”
“내 추측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상대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자기들이 알아낸 걸 글로 적어서 CIA에 있는 콜리의 옛날 OSS 동료들한테 넘겨주는지도 모르지. 펜시클리딘이라는 약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처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LSD는? 메스칼린은?”
“둘 다 못 들어봤어요.”
“전부 다 환각제야. 사람한테 환각을 일으키는 약.” (P205)
“67이 누구냐는 것 말인가요? 그래요?”
네이링의 물음에 테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탁자 끝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모르시는군요.”
테디가 말했다.
“뭘 모른다는 겁니까, 보안관?”
콜리와 친한 그 의사였다. 테디는 그의 가운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 그의 이름이 밀러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는 66명의 환자가 있습니다.”
테디가 말했다. 사람들은 생일 파티에서 광대가 마술로 꽃을 만들어내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A병동과 B병동 환자들을 합쳐서 42명. 그리고 C병동에 24명. 그렇게 해서 66명이지요.” (P226)
그녀가 그에게 침을 뱉었다. 테디는 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술에 피가 묻어 있었다. 콜리는 일행을 향해 고개를 끄덕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테디는 걸으면서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첼이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어깨를 활처럼 구부리고 요동을 치면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고, 그를 향해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술에서는 피와 침이 번들거렸다. 그녀는 마치 100년 동안 죽은 사람들이 모두 무덤에서 일어나 창문을 넘어 자기에게 다가오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콜리의 사무실에는 미니바가 있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오른쪽으로 방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갔다. 그때 순간적으로 테디는 그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쳐버렸다. 그가 하얀 색의 얇은 막 뒤로 사라져버린 후 테디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안 된단 말이야. 제길.’
“그 여자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등대 근처의 해변입니다. 바다에 돌멩이를 던지면서 물수제비 놀이를 하고 있더군요.” (P241)
[셋째 날]
“만약 나한테 아들이 있어서 그 애가 전쟁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내가 그러라고 할지 잘 모르겠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가야 하는 경우라 해도 말이야. 어느 누구한테도 그런 짓을 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무슨 짓요?”
“사람을 죽이는 거.” (P297)
아치형 천장은 망치로 두드려서 편 구리로 만들어져 있었고, 검은색 바닥은 거울처럼 반짝반짝거렸다. 테디는 처크가 아까 던졌던 사과나 야구공 같은 것을 계단 입구에서 던져도 반대편 벽까지 닿지 않을 만큼 홀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홀은 텅 비어 있었고, 두 사람 앞의 철책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테디는 그 방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마치 쥐새끼들이 갈비뼈를 따라 기어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꿈에서 봤던 방, 레이디스가 그에게 마실 것을 권하고 레이첼이 아이들을 무참히 죽였던 그 방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꿈속의 방과 이 방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꿈속의 방에는 높은 창문에 두꺼운 커튼이 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바닥은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이 나무로 돼 있었고, 천장에는 무거운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방이 꿈속의 방을 연상시킬 만큼 비슷한 것은 사실이었다. (P299)
남자가 말했다.
“찜! 당신이 그것이야!”
그리고 남자는 문 앞에서 도망쳤다.
처크가 테디를 따라잡았다.
“선배님, 제발요.”
그가 여기 있었다. 레이디스가. 어딘가에. 테디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홀의 반대편 끝에 다다르자 돌로 만들어진 널찍한 층계참과 어둠 속으로 가파르게 휘어진 계단이 나왔다. 저 고함 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이어진 또 다른 계단이었다. 그 소리들이 이제 더 크게 들려왔고, 금속 사슬이 철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P301)
테디는 지난 2년 동안의 삶, 돌로레스를 잃고, 레이디스의 뒤를 추적하고, 이곳의 존재를 알아내고, 조지 노이스를 우연히 만나 약물 실험과 전두엽 절제술 실험에 대해 알게 되고, 헐리 상원의원과 접촉하게 되고, 마치 영국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에 상륙할 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곳으로 건너올 때를 기다리던 그동안의 삶이 이 어린 청년의 침묵 속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309)
그는 옆으로 누워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의 바다는 짙은 푸른색이었다. 주위에서는 오후의 햇살이 죽어가고 있는데 바다는 생기가 넘쳤다. 그는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그곳에 누워 있었다. 어두워지는 하늘 밑으로 바다가 계속 넓어지고 있었고, 자신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그는 하찮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느낌 때문에 기운이 빠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느낌은 묘한 자부심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이 이것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 작은 점 같은 존재지만 이것의 일부로서 이것과 하나가 되어 호흡하고 있다는 것.
그는 평평한 검은색 바위에 한쪽 뺨을 대고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처크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크의 시체는 절벽 아래에 누워 있었다. 물이 그의 몸을 덮었다.
테디는 곶 가장자리 너머로 다리를 먼저 내린 다음 검은 바위들이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거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신발 밑창으로 바위를 조사했다.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팔꿈치를 곶 아래로 내려놓았다. 자신의 발이 바위를 향해 꺼지듯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고, 바위가 기우뚱하며 오른쪽 발목이 함께 구부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절벽표면을 꼭 붙들고 상체의 체중을 거기에 실었다. 그제야 발 밑의 바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P350-351)
수백 년 동안 뇌를 연구해 왔는데도 편두통이 왜 생기는지 단서조차 없습니다. 굉장하죠? 편두통이 대개 두정엽을 공격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편두통 때문에 피가 엉기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사실 그건 아주 보잘 것 없는 현상이지만, 뇌처럼 섬세하고 작은 기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마치 머리가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흔한 감기를 막는 법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그동안 그렇게 많은 연구를 했는데도 편두통의 원인이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P363)
“등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그녀는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모닥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수술을 하죠.”
“수술이요? 수술은 병원에서도 할 수 있잖습니까.”
“뇌수술이에요.”
“뇌수술도 병원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불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실험적인 수술이에요. 머리를 열어서 문제를 고치자는 수술이 아니라고요. 머리를 열어서 이걸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자는 식의 수술이죠. 불법 수술이에요. 보안관, 나치한테서 배운, 그런 수술.”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이 유령을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는 장소가 바로 거기예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입니까? 이 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등대에 대해서 아는 사람 말이에요?”
“예, 등대에 대해서.”
“다 알아요.” (P370)
돌로레스는 자면서 몸을 많이 뒤척였습니다. 열 번 중에 일곱 번은 그녀의 손이 내 얼굴 위에 그냥 툭 떨어지곤 했죠. 농담이 아닙니다. 입하고 코를 덮어버렸어요. 철썩 소리가 나서 보면 손이 얼굴에 와 있는 겁니다. 난 그 손을 치웠죠. 아주 거칠게 홱 밀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잘 자고 있는데 뭔가 쿵 하고 떨어져서 잠이 깨버렸으니. 하지만 가끔은 그 손을 그냥 놔둔 적도 있습니다. 입도 맞추고, 냄새도 맡아보고 그랬어요. 그녀의 체취를 빨아들인 거죠. 내 얼굴 위에서 그 손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박사, 난 이 세상 전부를 팔라고 해도 팔 겁니다. (P393)
그는 진실을 찾으려고 이곳에 왔지만 찾지 못했다. 레이디스를 찾으려고 왔지만 그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처크를 잃었다.
보스턴에 돌아가면 후회할 시간쯤이야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죄책감과 수치심에 잠기는 것은 그때까지 미뤄두어야 했다. 자신에게 무슨 대안이 있는지 살펴보고 헐리 상원의원과 의논한 후 공격 계획을 짜는 것도 그때 할 일이었다. 그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주 빨리,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 소환장과 연방 정부의 수색 영장을 가지고 올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연락선도, 그때가 되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의 분노가 정당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서 담장을 넘어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일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너무나 무서웠다. (P402)
[넷째 날]
연방 보안관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사라지게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힘이 있어야 하는 걸까?
엄청난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테디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라면, 처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었다. 연방 보안관 두 명이 나흘 만에 같은 곳에서 미쳐버렸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처크는 사고를 당한 것처럼 꾸며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허리케인을 핑계로 삼았을 가능성이 컸다. 사실 저들이 정말로 똑똑하다면(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테디가 처크의 죽음 때문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버린 것처럼 일을 꾸밀지도 몰랐다.
그것은 정말 앞뒤가 잘 들어맞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만약 테디가 이 섬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현장 사무소는 아무리 논리적인 설명이 제시되더라도 그것을 믿지 않고 다른 보안관들을 이리로 보내 직접 살펴보게 할 터였다.
그럼 새로 오는 보안관들은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P412)
하지만 그는 그녀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아이들도 지켜주지 못했다. 그가 돌로레스를 보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참모습을 보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제정신을 잃은 것은 그녀의 잘못도 아니고 그녀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녀가 도덕적으로 약하다거나 용기가 부족하다는 증거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같이 함께 만들어온 삶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P425)
애드워드 대니얼스(EDWARD DANIELS) -- 앤드루 레이디스(ANDREW LAEDDIS)
레이첼 솔란도(RACHEL SOLANDO) -- 돌로레스 샤날(DOLORES CHANAL) (P436)
콜리가 손등으로 다음 줄을 철썩 쳤다.
“그럼 이걸 해봐. 돌로레스 샤날과 레이첼 솔란도. 둘 다 글자가 13개지. 이 이름들의 공통점이 뭔지 말해 봐.”
테디는 자기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냐? 이것도 이해를 못하겠나?”
“그럴 리가 없어.”
“있어. 이번에도 글자들이 똑같아. 이것도 서로 철자를 바꾼 거라고. 진실을 찾으러 여기 왔다고 했나? 자네가 찾던 진실이 바로 이거야. 앤드루.”
“테디야.”
콜리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거짓 동정심이 또다시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네 이름은 앤드루 레이디스야. 애시클리프 병원의 67번째 환자를 찾는다고? 그건 바로 자네야, 앤드루.”
콜리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테디가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고함 소리 때문에 머릿속에서 로켓이 터진 것 같았다.
“자네 이름은 앤드루 레이디스야. 자네는 22개월 전에 법원의 명령으로 여기에 입원했어.”
콜리가 말했다. (P440)
“내 이름은 에드워드 대니얼스야.”
“아냐.”
콜리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네 이름은 앤드루 레이디스야. 자네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얘기를 꾸며낸 거야. 자네 자신이 주인공인 치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거라고. 앤드루. 자네는 자네가 아직 미국 연방 보안관이고, 지금 사건을 쫓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지. 사건을 수사하다가 음모를 발견했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자네 환상 속에서는 우리가 자네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게 되는 거야.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겠지. 자네가 그 환상 속에서 살도록, 나도 그러고 싶어. 자네가 남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정말로 그러고 싶어. 하지만 자네는 폭력적이야. 아주 폭력적이지. 게다가 군사 훈련에 수사관 훈련까지 받았기 때문에 솜씨가 너무 좋아. 자네는 여기 환자들 중 제일 위험한 존재야. 우린 자네를 제압할 수가 없어서 결정을...... 날 봐.” (P441-442)
"앤드루. 내 이름은 앤드루 레이디스요.“
시헨이 작은 불을 켜자 창살 뒤로 콜리와 간수 한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간수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콜리는 손으로 창살을 잡고 방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네가 왜 이리로 오게 됐지?”
그는 시헨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훔쳤다.
“자네가 왜 이리로 오개 됐지?”
콜리가 다시 물었다.
“내 아내를 죽였기 때문에.”
“왜 아내를 죽였는데?”
“아내가 우리 아이들을 죽였고, 그녀에게 평화가 필요했으니까.”
“당신은 연방 보안관입니까?”
시헨이 물었다.
“아니, 옛날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언제부터 여기 있었죠.”
“1952년 5월 3일부터.”
“레이첼 레이디스가 누굽니까?”
“내 딸이오. 그때 네 살이었지.”
“레이첼 솔란도는 누굽니까?”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오. 내가 만들어낸 사람이야.”
“왜?”
콜리가 물었다.
테디는 고개를 저었다.
“왜?”
콜리가 다시 물었다.
“모르오, 몰라......”
“아니, 자네는 알고 있어. 앤드루, 왜 그랬는지 말해 봐.”
“말할 수 없어.” (P485-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