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 54> 1989년
영화 <겨울 54>는 1954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영하 15도를 밑도는 혹독한 추위가 연일 계속되고 부랑자들은 거리에서 잠을 자다 얼어죽거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다. 베드로 신부의 옛 국회의원 친구인 레옹 아몽은 국회에서 철거사업을 중단하고 갈곳 없는 사람들에게 임시구호시설을 마련해줄 것을 긴급요청 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가톨릭 사제 신분으로 레지스탕스와 국회의원이 되고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설립해 평생 빈민 운동에 힘쓴 피에르 신부[Abbé Pierre]의 이야기이다. 노숙자를 위한 '엠마우스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헌신해 최근 몇 년 동안 프랑스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꼽힌 피에르 신부는 '단순한 기쁨' 등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1993년 10월 서울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열린 국제 엠마우스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적도 있다.
작년 여름, 나는 낯선 이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는 자살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영적 지식도 없습니다. 제가 이 충동에 굴복하기 전에 신부님께서 저를 좀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신부님께서 느끼시는 삶의 기쁨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나도 살면서 단순한 기쁨들을 맛보았다. 수도원에 은거하며 보낸 수도사 생활 6년 동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되면 나는 주저 없이 ‘기쁨 형제’라고 서명했었다. 한번은 내가 몸이 아팠을 때 한 동료가 탁자 위에다 내가 그린 세밀화 한 장을 갖다놓았는데, 그 그림에는 ‘눈물의 기쁨 형제’라는 서명이 씌어 있었다. (P21)
오늘날 엠마우스는 38개국에 자리잡은 350개의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현재는 44개국에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에만도 4천 명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110개나 있다.
우리는 세 가지 규칙을 준수한다. 먼저,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을 해서 번다(노약자와 장애인들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부나 시청, 도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나눠가진다. 공동체에 크게 기여하는 가장 튼실한 사람도 생산성 없는 노인보다 더 많은 걸 갖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멸시받고 소외된 주변인들인 우리는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생활하는 데 충분한 정도 이사의 노동을 한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궁핍을 뛰어넘고 베푸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도 마음을 담아 나누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부족한 것이라곤 없는 여러분이 그런 일을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이것이 엠마우스 운동이다. (P30-31)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후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다. 절망한 자에서 구원자가 된 것이다. 엠마우스는 그렇게 생겨났다.
내가 집을 세워준 첫 번째 가정은 어떠했던가? 어느 날 나는 한 부인이 세 아이와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두 명의 남편과 함께 오는 걸 보았다. 그들은 불법으로 살고 있던 빈 집에서 막 쫓겨났노라고 내게 설명했다. 임시로 나는 유스 호스텔로 개조한 뇌이-플레장스의 나의 집에 그들을 머물게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때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숙소는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인들로 만원이었다. 그 가족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었다. 달리 도리가 없기에 나는 예배실의 예수님상을 들어내 다락 한쪽으로 치우고, 그곳에 그 기이한 가족의 거처를 마련했다.
때때로 나는 노숙자들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 이처럼 널리 발전하게 된 것이 우리 집에 계시던 예수께서 맨 먼저 당신의 자리를 집 없는 가족에게 내놓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P35)
엠마우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자살 미수범 한 사람과, 아내 하나에 남편이 둘인 가족,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외인부대에 지원한, 기업가 집안의 엔지니어와 더불어! 요컨대 온갖 범주의 상처 입은 독수리들과 더불어 말이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상처입은 독수리와 같다고 여긴다. 그림자와 빛으로 짜여져, 영웅적인 행동과 지독히도 비겁한 행동 둘 다를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마음이요, 광대한 지평을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온갖 장애물에, 대개의 경우 내면적인 장애물에 부딪히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P38)
오직 복음을 따르는 엠마우스 운동의 공동체들은 종파와는 절대적으로 무관하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신자세요, 교회에 다니십니까? 우파세요 좌파세요? 투쟁가이십니까 협력자이십니까?” 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절대로 하는 법이 없다. 처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저 이렇게 물을 뿐이다. “배고프세요? 졸리십니까? 샤워를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미사에 가건 아니면 다른 모임에 가건 그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자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들 가운데 아주 적은 수만이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좋아한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그들은 예수께서 건강한 자들과 관례를 잘 따르는 자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길 잃은 자들, 죄인들,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P44)
그렇게 길을 가던 그들은 저녁 무렵에 한 여행객을 만났다. 그 여행객이 그들에게 물었다. “왜 그리 침통한 표정이오?” 그들이 대답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최근에 일어난 슬픈 사건에 대해 그에게 얘기해준다. 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그 여행객은 다름아닌 부활하신 예수였다. 예수께서는 수난을 통한 구원을 알리는 구약성서의 내용들을 일러준다. 메시아는 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받는 초라한 모습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P49)
‘엠마우스(엠마오)의 순례자들’이라 일컬어지는 이 복음서 구절을 읽던 중 문득 내게 한 가지 인생 철학이 떠올랐다. 그것을 나는 ‘열광적인 환멸’이라 이름붙였다.
나는 나무판자 하나와 페인트를 가지고 와서 굵은 흰색 글씨로 ‘엠마우스’라고 썼다. 그리고는 그 푯말을 정원 입구 철책문에다 걸어두었다.
사람들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내게 물어왔다. 질문을 한 젊은이들에게 나는 삶이란 그것이 시작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환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는 예쁜 것을 보면 그것이 불일지라도 다가가서 만지고 싶어한다. 그러다 손을 데면 다시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아이는 환상을 품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점차 우리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에 다가가도록 인도한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열광(enthousiasme)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en'은 ’하나‘라는 의미이며, ’theos'는 ‘하느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열광하는 자(enthousiaste)’란 하느님과 하나가 된 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결합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환상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에게 이와 같이 설명하곤 했다. “여러분은 환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삶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여러분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P50-51)
희망을 소망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수천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은 단 하나뿐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제 시간에 오기를 바라고,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며, 르완다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이것들은 개개인의 소망들이다.
희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약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 없어질 보잘것없는 육신을 땅 속으로 인도할 뿐이라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희망은 우리 스스로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생겨난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곤경에 처했다는 의식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두 가지 국면에서 생겨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P53-54)
명석하게 보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자신조차도 속이고, 만족스럽다는 환상이나 또는 잘못된 방식으로도 만족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프거나 공통을 겪거나 빈곤 속에서도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느낀다. 삶이 시험과 온갖 시련의 연속일 때 그렇다.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것이 희망인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나를 구속하던 모든 한계들과 모든 시련들이 기쁨과 사랑의 충만함에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진다. (P55)
나는 카뮈도 생각한다. 해방 후에 한때 우리는 <콩바(Combat)>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성실했다. 그것이 그와의 만남에서 가장 돋보이던 점이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저렇게 고통받도록 내버려두는 하느님에게 나의 믿음을 바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카뮈는 부정적의미의 ‘환멸을 느낀 자’였다. 그것은 그에게 통찰력과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을 열광적인 환멸로 인도할 유일한 길인 희망을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르트르와는 분명히 다른 방식이긴 하면서도 사르트르만큼이나 부조리를 일깨우는 자로 남고 말았다. 그는 세상 곳곳, 인간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악을 볼 줄 알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빈자리로 각인해놓으신 사랑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희망은 감춰진 그 신비한 사랑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P64)
베드로와 유다가 보였던 그처럼 돌변한 태도를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두 사람 모두가 환상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사실로 인해 애통하게 울 만큼 희망을 버리지 않은 반면, 유다는 그 같은 부조리하고 처참한 광경 앞에서 아연실색하여 일시적인 승리자들과 동조하게 된다. 그는 부정적인 환멸에 머물렀으며, 그것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친구를 배반하게 한 이 절망은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 간다.
인간의 삶은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샤를 보들레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비극적 외침이 생각난다. ‘나는 한밤중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여행자와 같다. 그런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산지기가 잠자리에 들려고 집으로 돌아가 촛불을 켠 것이리라. 이젠 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자 모든게 간단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산지기가 불을 꺼버린다. 나는 다시 길을 잃고 만다. 희망이라곤 없다.’ 이 편지는 내가 자주 떠올리곤 하는 다음의 시 구절과 더불어 끝이 난다. ‘악마가 여인숙 창문의 불을 모두 꺼버렸네.’ (P67)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어린 몸짓으로 그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것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 (P71)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사랑ㅇ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며, 그것이 그분의 본질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우리가 또는 그들 스스로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하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P92-93)
몇 년 전에 친구들이 1954년 겨울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었다. 그 영화의 제작자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된 젊은이였는데, 그가 날 찾아와서 말했다. “칸느 영화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고는 싶은데 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공동제작자를 찾아야만 합니다. 신부님께서 영화제에 같이 가주신다면 저희로서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곳엔 전 세계의 제작자들이 아이디어를 건져볼까 하고 몰려듭니다. 이브 무루지(Yves Mourousi)가 TV 뉴스용으로 잠깐이라도 신부님과 인터뷰를 한다면 모든 제작자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선택하기 곤란할 정도가 될 겁니다.”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8시 뉴스> 카메라는 이미 배에 승선해 있었다. 배 위로 오르려는데 한 친구가 내게 귀띔했다. “운이 없으시네요. 세 명의 대배우가 방금 승선했는데 신부님과 함께 인터뷰를 하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신부라면 잡아먹으려고’ 드는 사람입니다. 썩 유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나는 승선했다. 무루지가 먼저 소개를 했다. 문제의 세 배우는 <사탄의 태양 아래>라는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온 것이었다. 상드린 보네르(Sandrine Bonnaire)와 제라르 드파르디외(Gerard Depardieu), 그리고 ‘신부 잡아먹는’ ‘입심 좋은’ 모리스 피알라(Maurice Pialat)였다.
이브 무루지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세 사람이 대답을 마치자 무루지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신부님께서는 영화에도 뛰어드시는 겁니까?” 나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는 바를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늙으면 ‘떠나기 전에 네가 아는 걸 말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요. 그리고 내가 아는 건 삶이 자유에 바쳐진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자유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가 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불쑥, 그 무시무시한 피알라가 소리쳤다. “왜 그 사실을 제가 어렸을 때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놀라운 순간이었다. (P101-103)
나는 종종 배의 이미지를 이용해 이 문제를 설명한다. 우리의 자유는 돛을 펼치기 위해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없다. 바람이 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령인 바람이 불더라도 돛이 펴져 있지 않다면 그때도 배는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거기다가 기수를 정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나는 덧붙이고 싶다. 인간은 키를 잡고 돛을 편다. 그제서야 성령께서 그를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P106-107)
인간의 자유는 그것이 사랑을 위해 쓰여질 때만이 위대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부의 예가 놀랄 만큼 잘 들어맞는다. 만약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만 하려 들고, 매순간 자신의 기분과 변덕만을 충족시키려고 든다면 그 결합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반대로, 각자가 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태세가 되어 있다면 그들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것이며 두 사람 모두가 전보다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전능함에 자발적으로 다시금 자기자신을 내맡길 때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P128)
나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힌두교, 회교, 혹은 또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광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오랫동안 자문해보았다. 오늘날 종교적 광신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동한 데서, 종교에 대한 개인적 추구가 정치적 권위에 대한 욕망으로 전환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절대자에 대한 개인적 탐구는 성스러움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 정치적 탐욕으로 변질되어버린 절대자는 온갖 형태의 광신을 향해 열린 문과 같다. (P133)
1996년 여름에는 브라질에 있는 돔 헬더 카마라(Dom Helder Camara) 형제의 사제직 근무 60주년을 기념하는 계기로 그의 곁에서 며칠을 보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빨갱이 주교’라는 비난을 받으며 일부 부유한 브라질 성직자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던 헬더 카마라는, 교회가 약자들을 억압하는 부자 지주들과 한통속이 되어 호사를 누리고 있음에도 굳게 복음을 믿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희망이었다.
레시프의 주교로 임명되자 헬더 카마라는 호화스런 주교관을 떠나 그 도시의 빈민굴 한가운데에 있는 검소한 집에 들어가 살았다. 복음에 충실한 이 행동은 너무도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돔 헬더는 수십 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작은 방의 덧창을 열다가 그와 함께 일하는 젊은 사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고문당하고 눈이 뽑힌 채 목매달려 있는 걸 발견한다. 시체의 목에는 ‘곧 네 차례가 될 것이다’라고 씌어진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돔 헬더를 비난하는 점은 무엇보다 그의 투쟁이 갖는 정치적 측면이다. 그가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평생을 바쳤다면, 그런 그의 행위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현실생활에의 참여를 연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이며, 인간들간의 정당한 분배를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불의에 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P167-168)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영향이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보다 영적인 것임은 잊은 채 그러한 영역만을 강조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와 같은 망각행위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이라고 불리던 것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 신학은 복음을 마르크스주의의 부속물로 만들기도 했다 그 신학이 추구하는 유일한 목표는 정치적 해방이었으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도 (폭력적인 것일지라도) 좋다고 간주되었다.
개인적으로 돔 헬더 카마라를 본받고자 했던 나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그같이 해석하고 이용하는 것에 한번도 동의해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수단도 용인하는 정치적, 경제적 해방이 어떠한 경우에도 목적 자체가 될 수 없다. 진정한 해방신학이란 사랑 안에서 불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사랑과 해방이라는 이 두 개념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억압하는 자를 증오해서도 안되며 복수를 갈망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카마라와 마틴 루터 킹의 메시지이며, 또한 간디나 달라이라마 같은 비그리스도인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독재권력에서 해방되자마자 새로운 통치자들이 불의를 재현하곤 하지 않는가. 가까운 예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가 하나의 가혹한 본보기이다. (P172-173)
그리스도가 가져다준 구원과 해방은 우리의 자유가 갖는 특성과 그 진정한 목표를 밝혀줌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구원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자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격받고, 억압받고, 죽임을 당할까봐 항상 두려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두려움을 없애고, 두려움을 사랑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유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진정한 해방은 내면적인 것이다.
돔 헬더 카마라는 그러한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기에 이런 글을 썼다. ‘우리를 구속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할 때 그 무엇보다 내면적 해방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머릿속에 떠올리자. 자기자신의 노예인 자가 어떻게 다른 이들을 해방시킬 수 있겠는가? 모든 이를 위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자기자신을 이기는 자이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자만이 남을 해방시킬 수 있다.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올바른 규율에 따를 수 있을 정도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로운 것이다.’ (P176-177)
사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목표, 즉 행복을 추구한다. 진짜 문제는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이다.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조건, 어떤 문화 속에서 생활하건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하게 마련이다. 타인들 없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들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혼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할 것인가. 매일 아침 새롭게 다집해야 할 이 선택은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의 실체를 결정짓고 우리를 만든다. (P181)
고통은 인간을 압도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마음을 크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깜깜한 암흑 속에 빠뜨리거나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준다. 우리 모두는 이 양 극단을 오갈 수 있다. 끔찍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절망에 빠져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삶이라는 건 완전히 부조리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같은 고통을 줄 리 없어.” 또한 우리는 희망 속에서 성장하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느님,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께서 사랑이심을 믿으며, 그래도 당신을 믿습니다.” 이 두 번째 태도는 살아가고 시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이 더 크게 자랄 수 있게 해준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보일지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을 느끼며, 황금이 불 속에서 제련되듯이 고통의 시련 속에서 그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P209-210)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해서 이별을 말한다. 남겨진 이들에게 죽음이 이별로 경험된다면 죽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죽음이란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환상적인 만남이 주는 눈부신 순간이다. 하느님과, 천사들과, 이 땅에 살았던 무수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렇다. 죽음은 우리네 삶에서 황홀한 순간일 수 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더구나 이 두 문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음은 시간의 암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다름아니다. 암흑에서 빠져나와 빛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 만들어온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타인과 공감하는 자인가 아니면 홀로 만족하는 자인가. (P226)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너는 홀로 족하기를 원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홀로 족하거라!‘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빛에 에워싸인 채 나누고 교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