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77년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소년 ‘스티븐 디덜러스’가 성장하며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의식의 흐름’ 기법의 기원이 담겨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1914년부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잡지 <에고이스트>에 연재했고, 이해 첫 장편소설 <더블린 사람들>을 출간했으며, 대표작 <율리시스>를 집필하였다.
늙으신 아버지시여, 늙으신 공장(工匠)이시여,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없이 저를 도와 주옵소서.
Old father, old artificer,
stand me now and ever in good stead.
- <젊은 예술가의 초상>중에서 에필로그
정치의 의미를 잘 알 수 없다든지 우주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는 자기가 작고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쯤 시반(詩班)이나 수사학반에 속한 애들처럼 될 수 있을까? 그들은 목소리가 높았고 큼직한 구두를 신고 있으며 삼각 함수도 배운다. 까마득해 보인다. 우선 방학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학기가 시작될 것이고, 다시 방학이 닥쳐온 다음에 다른 학기가 시작되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방학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차가 터널을 들락거리는 것과 같고 또 식당에서 귓바퀴를 닫았다 열었다 했을 때 학생들이 법석을 떨던 소리와 같다. 학기와 방학이 바뀌고, 기차가 터널 속에 들어갔다 나온다. 법석을 떠는 소리가 들리다가 그친다. 아, 얼마나 까마득한가! 자리에 들어 잠이나 자는 것이 좋겠다. 채플에서 기도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고 나면 자리에 드는 거다. 그는 몸을 떨었고 하품을 했다. (P27)
케이시 씨는 아일랜드의 독립과 파넬을 지지하고 있었고 아버지 또한 그러했다. 단티 또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원한다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밤 광장에서 악대가 마지막으로 “신이여, 여왕을 도우소서”를 연주하고 있을 때, 한 신사가 모자를 벗으니까 단티는 들고 있던 우산으로 그의 머리를 갈긴 적이 있었으니까.
디덜러스 씨는 경멸조의 콧소리를 냈다.
“그래, 존” 그가 말했다. “정말이야, 그들이 모두 잡고 있어. 우리는 불행히도 성직자들에게 얽매여 살고 있는 거야. 과거에 내내 그러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 꼴을 면하지 못할 거야.”
찰스 아저씨가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어!” (P59)
아일린은 소녀이므로 손이 길고 가늘며 싸늘하고 하얀 색이었어. 그 손은 꼭 상아와 같았는데 다른 점이 있었다면 부드럽다는 것뿐이었지. 성모 마리아를 <상아탑>에 비유하는 것도 바로 그런 뜻이겠지만, 개신교도들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롱하고 있어. 어느 날 그는 그녀 옆에 서서 호텔 마당을 들여다본 일이 있었다. 웨이터가 깃대에 한 줄의 휘장을 올리고 있었고 폭스테리어 종 개 한 마리가 양지 바른 잔디밭에서 오락가락 질주하고 있었다. 그가 한쪽 손을 집어넣고 있던 주머니 속으로 아일린이 자기 손을 넣었는데 그는 그녀의 손이 무척 차고 가늘고 부드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주머니란 아주 맹랑한 것이라고 말한 뒤에 갑자기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굽은 비탈길을 따라 웃으며 달아나버렸다. 그 노란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황금빛을 내며 등뒤로 흘러내리고 있었지. <상아탑>이니 <황금 궁전>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했어. 사물은 생각해 보면 결국 이해되는 법이야.
하지만 하필이면 변소에서였을까? 변소란 볼일을 보고 싶을 때에나 찾아가는 곳이 아닌가? 그곳은 온통 두꺼운 슬레이트 판으로 되어 있었는데, 온종일 작은 구멍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물이 썩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떤 칸막이의 문을 열어보면 붉은 연필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로마 시대의 의상을 입은 그 턱수염 사내는 두 손에 벽돌 한 장씩을 들고 있었는데, 그림 바로 밑에는 제목이 있었다.
“발부스는 벽을 쌓고 있었다.” (P68)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하여 제6급 반에서 첫 학기를 끝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의 민감한 성격은 예상하지 못했던 더러운 생활 양식의 채찍을 맞으며 언제나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영혼은 더블린의 침체 현상으로 인해 언제나 혼란을 겪으며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2년에 걸친 몽환 기간에서 깨어나 어떤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지만, 그 환경에서 마주치는 사건이나 인물들은 모두 그에게 내밀한 영향을 주면서 그를 실망시키기도 했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망이었건 유혹이었건 간에 그에게 불안과 고통스러운 생각을 불어넣었다. 학교 생활 이외의 야가를 그는 불온한 작가들을 읽는 데 보냈고, 이 작가들의 조롱과 난폭한 언사는 그의 머릿속에서 일종의 발효 작용을 거친 후 마침내 머리에서 빠져나와 조잡한 글로 표현되곤 했다.
일주일 동안 하는 과제 중에서도 에세이 쓰기가 으뜸가는 일이었다. 화요일마다 그는 귀가 도중에 겪게 되는 일들을 가지고 자기의 운명을 점쳐보곤 했다. 가령 앞서 가는 사람과 경합하면서 어떤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그를 앞지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든지, 또는 보도 포장석의 문양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이번 주에는 자기 에세이가 1등을 할 것인지 못할 것인지를 점쳐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화요일, 그가 달리던 승리의 행로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영어를 가르치던 테이트 선생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무뚝뚝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녀석의 에세이에는 이단적인 생각이 들어 있더군.” (P123)
이 경쟁 대상자에게는 걸핏하면 언쟁을 벌이려는 우의(友誼) 정신이 있음을 얼마 전부터 스티븐은 눈여겨보았지만, 그것이 묵묵히 순종하려는 그의 습성을 감퇴시키지는 못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우의 정신은 딱하게도 성인기의 도래를 예견케 했지만, 그 정신이 빚을지 모르는 혼란을 그는 밎지 않았고 그 성실성 또한 의심하고 있었다. 거기서 제기되는 체면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그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실체 없는 환영(幻影)을 추구하거나 우유부단하게 그 추구를 외면하고 있는 동안, 그는 주위에서 자기더러 무엇보다 먼저 신사가 되고 무엇보다 먼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아버지나 학교 선생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런 목소리들이 이제는 그의 귀에 텅 빈 소리로 들리게 되었다. 체육관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또다른 목소리가 그에게 튼튼하고 사내답고 건강한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민족부흥 운동이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때 또다른 목소리가 그에게 조국을 참되게 대할 것이며 조국의 언어와 전통을 부활하는 사업을 도와주도록 명령했다. 그가 예상한 대로, 범속한 세계에서는 세속적인 목소리가 그에게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아버지의 떨어진 지위를 높여주도록 명하고 있었다. 한편 학우들의 목소리는 그에게 훌륭한 학생이 되어 다른 애들이 비난당하지 않게 하고 다른 애들이 벌을 받지 않게 용서를 빌어 주고 또 최선을 다해 많은 휴강을 얻어내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그가 환영을 추구할 때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속이 텅 빈 이 목소리들이 내는 소음이었다. 그는 이런 목소리들에 대해 잠시 동안만 귀를 기울였을 뿐이며, 이런 목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그것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으며 혼자 있거나, 아니면 그 환영들이나 벗삼고 있을 때에만 행복감을 느꼈다. (P130-131)
만약 어떤 사람이 젊은 시절에 1파운드를 훔쳐서 그 돈을 엄청나게 불리는 데 사용했다면, 그는 얼마를 도로 내놓아야 하는 것일까, 그가 훔쳤던 1파운드, 아니면 그것에 복리 이자를 계산하여 더한 금액, 아니면 그의 엄청난 재산 전부? 평신도가 세례를 받는데 말씀이 있기 전에 물을 부어 버리면 그 아이는 세례를 받은 것일까? 생수로 세례를 받아도 유효한가? 산상 수훈의 진복팔단(眞福八端) 중 첫 번째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약속하는데, 두 번째로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 땅을 약속하는 건 무슨 영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과 피, 영혼과 신성으로서 빵에만, 그리고 와인에만 계신다면, 왜 성체 성사는 빵과 와인 두 종류로 집행되는 것인가? 축성된 빵의 작은 조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육신과 피가 들어있는 것인가, 아니면 육신과 피의 일부만 들어 있는 것인가? 축성된 이후에 와인이 식초로 변하거나 빵이 상해 버려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신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그 안에 현존하시는 것인가? (P144)
그는 다른 모든 것을 부질없고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던 그 격렬한 마음의 갈망들을 진정시키고자 열렬히 노력했다. 그는 자기가 지옥에 떨어질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든지 자기의 생활이 둔사(遁辭)와 허위투성이라는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하고 있던 그 극악무도한 것들을 실현해 보려는 마음속의 야만적 욕망 곁에서는 아무것도 신성할 수 없었다. 자기 눈에 매력적으로 비치는 이미지이면 무엇이든 꿋꿋이 더럽히는 데서 희열을 느끼게 했던 그의 은밀한 격정에는 수치스러운 면면이 있었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서 그는 냉소적으로 관대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는 외부 세계의 왜곡된 이미지들 사이를 쏘다녔다. 낮에는 새치름하고 순진해 보이던 여인의 모습도 밤이 되어 수면 세계라는 그 꾸불꾸불한 어둠을 통해 나타날 때는 음란한 간계로 인해 얼굴이 이지러져 있었고 야수적인 환희로 눈은 빛나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그 어둠 속에서의 격정적 도취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라든가 그 예리하고 굴욕적인 탈선감 때문에 괴로워하곤 했다. (P153-154)
“자아, 이 피정이란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보시고 일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왜 피정은 가장 건전한 수행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피정은 우리가 양심의 상태를 점검하고, 거룩한 종교의 신비를 성찰하며, 나아가서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일상 생활의 걱정이라든지 이 속세의 걱정에서 잠시 동안 물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나는 여러분에게 사말(四末)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교리문답을 통해 알고 있다시피 사말이란 죽음, 심판, 지옥, 천국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말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영구히 득을 볼 수 있도록 며칠 동안 이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려 애써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가지 것, 오직 한 가지 것만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고 불멸의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은 아무 가치도 없지요. 딱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멸의 영혼을 상실한다면 온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내 말을 믿으세요. 이 비참한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영혼의 상실을 보상해 줄 수 없습니다.” (P173)
“지옥에서 저주받은 자들의 영혼을 괴롭히는 두 번째 고통은 양심의 고통입니다. 죽은 사람의 몸이 썩으면 그 속에 구더기가 생기듯이, 버림받은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는 죄악의 부패로부터 영원한 후회가 생깁니다. 이는 교황 이노센티우스 3세가 세 가지 침을 가졌다고 한 바 있는 바로 그 벌레 즉 양심의 가책입니다. 이 잔인한 벌레가 가하는 첫 번째 침은 지나간 쾌락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야말로 참으로 무서운 기억이 되겠지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불의 호수에서 오만한 왕은 그의 화려한 궁정을 기억할 것이요, 현명하지만 간악했던 사람은 자기의 연구용 도서와 기구를 기억할 것이요. 예술적인 도락의 애호가는 대리석 조각품이니 그림이니 기타 소중한 예술품들을 기억할 것이요, 식도락가는 공들여 장만한 요리 및 최고급 포도주를 곁들인 화려한 잔칫상을 기억할 것이요, 구두쇠는 자기가 감춰두었던 금은보화를 기억할 것이요, 강도는 자기가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재산을 기억할 것이요, 성 나고 복수심 넘치고 잔인한 살인자들은 그들이 즐겨 저질렀던 그 피투성이의 폭력적 소행을 기억할 것이요, 부정한 간음자들은 그들이 즐겼던 말 못할 정도로 추잡한 쾌락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는 자기 자신들과 자기네 죄악을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토록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당하도록 저주받은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쾌락들이 얼마나 비참해 보이겠습니까, 그들은 이 세상의 찌끼라든가, 몇 푼 안 되는 돈, 허망한 명예, 육체적 안락, 말초신경의 자극 따위를 탐하다가 그만 천국의 환희를 상실하게 된 것을 생각하고는 입에 거품을 물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후회할 것입니다. 이것은 양심의 벌레가 쏘는 두 번째 침인데 이미 저지른 죄악에 대해 뒤늦게 부질없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이 불쌍한 자들이 자기네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만 오성(悟性)을 계속 집중시키도록 요구합니다. 더욱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죄악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죄인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죄인들에게도 죄가 하느님의 눈에 나타나듯이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들은 자기네 죄가 지니고 있는 그 모든 추잡한 면들을 바라보며 후회하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날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ㅛ 그것을 소홀히 했던 것을 생각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이것은 양심의 벌레가 지니고 있는 가장 깊고 가장 잔인한 마지막 침입니다. 양심은 말할 것입니다. 너는 회개할 시간과 기회가 있었는데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너의 부모는 너를 종교적으로 양육했다. 너는 또한 네게 도움이 될 성사와 은총과 사면을 교회로부터 누려왔다. 너에게 설교를 하고, 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너를 불러들이고, 또 네 죄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흉측하다고 하더라도 네가 고백하고 회개만 한다면 너를 용서해 주었을 하느님의 대리자가 너에겐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너는 거룩한 종교의 성직자들을 모욕했고, 고해소에 등을 돌렸으며, 결국 죄악의 수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하느님께서는 어서 당신 앞으로 돌아오라고 너에게 호소와 위협과 간청을 했다. 오, 정녕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이구나! 이 우주의 지배자께선 흙에서 빚어낸 보잘것없는 존재인 너에게 너를 만드신 분을 사랑하고 또 그분의 율법을 지키도록 간청했다. 그런데도 너는 그 간청을 듣지 않았다. 설사 너에게 아직도 울 힘이 남아 있어서 너의 눈물이 지옥에 온통 홍수를 일으킬 정도로 참회한다 해도, 네가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진정한 회개의 눈물 한 방울이면 얻을 수 있었을 하느님의 용서를 이제는 영영 얻지 못하고 말 것이다. 이제 너는 인간 세상에서의 삶을 한 순간이나마 다시 허용해 준다면 회개하겠다고 애원하겠지만, 물론 헛된 일이다. 회개할 시간은 사라졌다.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바로 세 겹으로 된 양심의 가책이고 이 가책은 그 불쌍한 인간들의 심장 한복판을 독사처럼 물어뜯습니다. 그러므로 지옥 같은 분노를 느끼면서 그들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저주하고, 자기네를 이런 파멸로 이끌어 온 간악한 친구들을 저주하고, 인간 세상에서 그들을 유혹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영원히 그들을 비웃으며 고통을 가하고 있는 악마들을 저주하고, 심지어는 가장 높으신 하느님까지도 헐뜯고 저주합니다. 지난날에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善)과 인내를 비웃거나 멸시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정의와 권능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P200-202)
그는 방문 앞 층계참에 멈추었다가 도자기 손잡이를 움켜잡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의 몸 속에서 영혼이 번민하는 가운데 겁을 먹고 망설이면서 문지방을 넘어설 때 그는 죽음이 그의 이마에 닿지 않도록 또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악마들이 그를 압도하는 힘을 갖지 못하도록 말없이 기도했다. 그는 마치 어두운 동굴 입구에 서 있듯이 자기 방문 앞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여러 얼굴들이 거기 도사리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눈들도 있었다.
“물론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지. 결국은 밝혀지고야 말 것이지만, 정신적 절대권자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도록 자기 자신을 유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중얼거리는 얼굴들이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중얼중얼하는 소리들이 동굴의 어두운 공간을 채웠다. 그는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지독히 겁이 났지만, 머리를 용감히 치켜들고 당당히 방으로 들어갔다. 문간 그리고 방, 똑같은 방이요 똑같은 창문이었다. 어둠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던 그 중얼대는 말들은 절대로 아무 의미도 없다고 그는 자신에게 침착하게 다짐했다. 그는 그저 문이 열려 있는 자기 방일 뿐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P211)
일요일은 거룩한 삼위 일체의 현묘함에 바쳤고, 월요일은 성령에게, 화요일은 주보 천사들에게, 수요일은 성 요셉에게, 목요일은 제대(祭臺)의 거룩한 성체에게, 금요일은 수난중의 예수에게, 토요일은 성모 마리아에게 각각 바쳤다.
매일 아침 그는 어떤 거룩한 이미지나 신비로움 앞에서 자기의 몸을 새로이 정화시키곤 하였다. 그의 하루는 교황의 의도를 위해 시시각각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영웅적으로 바친 후, 이른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음산한 아침 공기가 결의에 찬 그의 신심을 더욱 첨예하게 했다. 몇 사람의 기도자들과 함께 보조 제대에 무릎을 꿇고 비망(備忘) 카드가 끼여 있는 기도서를 들고 신부의 나지막한 기도를 따라 가고 있을 때면, 그는 흔히 잠시 동안 눈을 들어 신약과 구약을 상징하는 두 촛대 사이의 침침한 곳에 서 있는 제의 입은 신부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고 자기가 카타콤베 속에서 미사에 참석하느라 무릎을 꿇고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다. (P229-230)
그는 길을 가면서도 묵주신공을 외울 수 있도록 바지 주머니에 늘 묵주를 넣고 다녔다. 그가 끊임없이 외운 묵주신공은 여러 개의 화관(花冠)으로 바뀌었으며 그 꽃들은 결이 너무 막연하고 비현세적이어서 그가 보기에는 이름 지을 수 없었고 색깔이나 향내마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매일같이 세 차례의 작은 묵주신공을 올렸다. 그것은 세 가지의 신덕(信德) 즉 자기를 창조하신 성부께 대한 신덕(信德), 자기를 대신해서 속죄하신 성자에 대한 망덕(望德) 그리고 자기를 깨끗하게 해주신 성령에 대한 애덕(愛德)을 그 자신이 굳건히 지켜나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렇게 세 겹의 기도를 성모 마리아를 통해 삼위 일체께 올리되 반드시 그분의 즐겁고 슬프고 영광스러운 신비의 이름으로 올렸다. (P231)
그는 갑자기 그녀로부터 돌아서서 해변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두 볼이 화끈거렸다. 몸도 불타고 있었다. 사지는 떨렸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는 모래밭 저 멀리로,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며, 그를 향해 외쳐 부르던 삶의 도래를 맞이하기 위해 외치며 계속 걸어갔다.
그녀의 이미지가 그의 영혼으로 영원히 들어왔고, 어떤 말로도 그가 느끼는 황홀경의 거룩한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그를 불렀고 그의 영혼은 그 부름에 날뛰었다.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고, 삶으로부터 삶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야성의 천사가, 인간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천사가, 삶의 아름다운 궁정에서 보내온 사절(使節)이 그에게 나타나, 황홀의 순간에, 모든 과오와 영광의 길로 이르는 문들을 그에게 열어젖혀 보여 준 것이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P232)
흔히 그가 자기의 의심과 망설임이라든지 기도중에 순간적으로 산만해진 주의력이라든지 영혼 속에 일어난 사소한 분노라든지 언동에 있어서의 교활한 꾸밈 따위를 고백할 때면, 고해 신부는 그의 죄를 사하기 전에 과거에 지은 몇 가지 죄를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럴 때면 그는 겸허함과 창피함을 느끼면서 그 죄를 말했고 다시 한번 그 죄에 대해 참회하곤 했다. 그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 또 여하한 미덕과 완벽함을 이룩한다 해도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굴욕감과 창피함을 금할 수 없었다. 불안한 죄책감은 늘 그의 앞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고백하고 회개하고 사죄받고 다시 고백하고 외개하고 다시 사죄받는 일이 헛되이 되풀이될 것이다. 어쩌면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가 짜냈던 첫 번째 성급한 고백이 잘못된 것이나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기의 절박한 파멸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죄악 그 자체에 대한 진정한 참회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의 고백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고 또 자기 죄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가 알기로는, 자신의 생활의 개선이었다.
“나는 내 삶을 개선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P238)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그의 어지러운 자기 성찰을 지워버리는 인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교 출입구에서 저무는 날을 반영하고 있던 어떤 침울한 가면의 인상이었다. 그러자 이 학교 생활의 그늘이 무겁게 그의 의식을 스쳐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숙하고 질서정연하고 열정이라고는 없는 삶이요 물질적 걱정도 없는 삶이었다. 그는 수련원에서 첫날 저녁을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이며, 기숙사에서의 첫 아침에 잠이 깨면 얼마나 불안할 것인지 궁금했다. 클롱고우스 학교의 긴 복도 냄새가 그에게 다시 괴롭게 회상되었고 불타는 가스등의 조용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기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한꺼번에 솟은 불안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이어 열에 들뜬 맥박이 점점 빨라졌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소음이 되어 그의 정돈된 생각들을 여기자기로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덥고 습하고 몸에 해로운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그의 허파는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 했다. 그리고 클롱고우스의 목욕탕 속에서 맥빠진 토탄 빛깔의 물 위에 감돌던 그 덥고 습한 공기를 다시 한번 냄새 맡는 기분이었다.
이런 것들을 기억하자 교육이나 신심보다도 더 강한 본능이 잠에서 깨어났고, 그가 그런 생활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미묘한 적대적 본능을 발동시키면서 묵종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생활의 냉기와 질서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그는 추운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줄을 지어 새벽 미사에 나가서 기도함으로써 뱃속의 허기를 극복하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학교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그렇다면 낯선 집에서 먹거나 마시는 일을 꺼리는 그의 뿌리 깊은 수줍음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 버렸을 것인가? 또 어떤 질서 속에서도 자기야말로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던 그 오만한 정신은 또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P248-249)
그 흐릿한 이미지의 도도함이 다시 그로 하여금 자기가 거절했던 성직(聖職)의 존엄함을 생각하게 했다. 소년 시절 내내 그는 자기의 숙명이라고 흔히 여기면서 성직을 곰곰이 생각해 왔지만, 정작 성소에 복종해야 할 때가 되자 그 부름을 외면하고 방종스러운 본능 앞에 굴종하고 말았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세월이 흘렀다. 서품의 성유(聖油)가 그의 몸에 도포(塗布)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는 거절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P255)
-- 스테파네포로스!
이제 생각하니 그것들은 시신이 떨쳐낸 수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밤낮없이 그가 걸어다닐 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그 공포, 그를 옥죄고 있던 그 의혹, 안팎으로 그를 무안하게 만들던 그 수치심, 이런 것들이야말로 수의요, 무덤에서 나온 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영혼은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시절의 수의를 떨쳐버렸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옛날의 위대한 명장(名匠)처럼, 그도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 (P262)
학감은 웅크리고 앉아 장작에 불이 붙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티븐이 침묵을 깨기 위해 말했다.
“저는 불붙이는 일을 못해 낼 것 같은데요.”
“자네는 예술가가 아닌가? 디덜러스 군.” 학감이 그를 쳐다보며 파리한 눈을 끔벅였다. “예술가의 목표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무엇이 아름다우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는 그 문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멋없이 손을 비비고 있었다.
“이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가?” 그가 물었다.
“아퀴나스는 Pulcra sunt quae visa placent(보기에 즐거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앞에 피워놓은 불도 보기에 즐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도 역시 아름다운가?” 학감이 물었다.
“시각으로, 즉 심미적 사유 작용으로, 그 불이 파악되는 한, 그 불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Bonum est in quod tendit appetitus(선은 욕구가 미치는 것 속에 있다)라고도 했습니다. 불이 따뜻함에 대한 동물적 욕구를 충족하는 한, 불은 선하지요. 그러나 지옥에서는 불이 악으로 됩니다.”
“그렇고말고.” 학감이 말했다. “자네는 정곡을 찔렀어.” (P286-287)
─ 집에 책이 한 권 있어. 스티븐이 말했다. 네 질문보다 더 재미난 질문들을 적어 놓은 책이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면서 나는 내가 설명하려고 하는 미학 이론을 발견했어. 내가 스스로 내놓았던 질문들은 이런 거야. <잘 만들어진 의자는 비극적인가 희극적인가? 내가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보고 싶어 한다면 그 작품은 좋은 것일까? 필핍 크램턴 경의 흉상은 서정적인가, 서사적인가, 극적인가? 똥이나 어린애나 이같은 것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왜 그럴까?>
─ 왜 그런데, 정말? 린치가 웃으면서 말했다.
─ <어떤 사람이 화가 나서 나무토막을 마구 난도질했는데>, 하고 스티븐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의 모양을 만들었다고 해봐. 그것은 예술 작품일까? 아니라면, 왜 아닐까?> (P290)
데이빈이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앞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라고, 하지만 듣고 보니 꼭 너다운 소리지 뭐냐. 넌 타고난 냉소가니까. 스티비.”
“다음에 헐리 채를 들도 다시 폭동을 일으킬 때도 밀고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스티븐이 말했다. “내게 부탁하면 이 대학에서 몇 놈을 구해 주지.”
“너라는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데이빈이 말했다. “언젠가는 영문학을 비방하더니 이제는 아일랜드인 밀고자들을 욕하는구나. 너처럼 괴상한 이름에 괴벽한 사상을 가진 사람도 도대체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니?” (P311)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라는 말을 정의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했지. 내 정의로 말하자면.....”
린치가 걸음을 멈추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만둬. 듣지 않겠어. 신물이 난다고. 간밤에 호런과 고긴즈하고 돌아다니며 죽으라고 퍼마셨지.”
스티븐은 말을 계속했다.
“연민은 인간의 고통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엄숙하고 항구적인 것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과 결부시키는 감정이야. 공포는 인간의 고통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엄숙하고 항구적인 것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그 고통의 은밀한 원인과 결부시키는 감정이고.”
“한번 더 말해 봐.” 린치가 말했다.
스티븐은 그 정의를 천천히 반복했다.
“며칠 전에 런던에서 어떤 소녀가 마차를 탔어.”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어떤 길모퉁이에서 한 화물차의 끌채가 그 마차의 창에 부딪쳐 창을 별 모양으로 부숴놓았어. 가늘고도 긴 바늘 같은 유리 조각이 소녀의 심장을 찔렀거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졌어. 신문 기자는 그것을 비극적인 죽음이라고 불렀어. 그러나 그건 틀렸어. 내 정의에 의하면, 그 죽음이 공포나 연민과는 거리가 멀지.
사실, 비극적인 정서란 두 방향으로 바라보는 한 얼굴이며 각각 공포와 연민을 향하고 있지. 이 두 가지는 모두 비극적 정서의 면면이야. 나는 방금 <붙잡는다>는 말을 썼는데, 비극적 정서는 정적(靜的)이라는 뜻이야. 아니, 극적 정서가 정적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 부적절한 예술이 자극하는 감정은 욕망이냐 혐오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적(動的)이거든. 욕망은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소유하거나 찾아가게 하는가 하면, 혐오는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버리거나 떠나가게 하니까. 그러므로 이 욕망이나 혐오를 자극하는 예술은, 그것이 외설적이냐 교훈적이냐를 막론하고, 모두 부적절한 예술이지. 그러므로 일반적인 술어로 말해 미적 정서는 정적이라고. 마음은 붙잡혀서 욕망이나 혐오를 초월하도록 고양되니까.“
“예술이 욕망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군.” 린치가 말했다. (P315-316)
스티븐은 말을 그쳤다. 비록 그의 친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의 논설이 사색에 도취된 침묵을 그들 주위에 불러들였음을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아름다움, 즉 문예의 전통에서 이 낱말이 가진 의미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어.” 그는 다시 시작했다. “일반사회에서는 아름다움의 뜻도 달라지겠지. 우리가 아름다움이란 말을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할 때에도 우리의 판단은 우선 예술 그 자체에 의해, 그리고 그 예술의 형식에 의해, 영향받게 되는 거야. 그 이미지가 예술가 자신의 마음 또는 감각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 또는 감각 사이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우리가 이 점에 유의한다면 예술이 필연적으로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지며 한 가지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발전해 간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 세 가지 형식이란 첫째 서정적 형식 즉 예술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제시하는 형식, 둘째 서사적 형식 즉 예술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제시하는 형식, 셋째 극적 형식 즉 예술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제시하는 형식이야.”
“며칠 전에 네가 그걸 내게 말했었지.” 린치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훌륭한 논쟁을 시작했잖아.” (P328-329)
“이상한 일이야.” 크랜리가 감정을 죽이고 말했다. “네가 불신한다고 장담하는 그 종교에 실은 네 마음이 푹 젖어 있구나. 네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성체를 믿었니? 믿었겠지?”
“믿었어.” 스티븐이 대답했다.
“그때가 너는 더 행복했었니?” 크랜리가 조용히 물었다. “가령 지금보다 더 행복했었느냐고.”
“더러는 행복했고, 더러는 불행하기도 했어.” 스티븐이 말했다.
“그때는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의 내가 아니었고, 마땅히 변해서 되어야 했던 나도 아니었다는 뜻이야.” 스티븐이 말했다.
“지금의 네가 아니었고, 마땅히 변해서 되어야 했던 너도 아니었다고?” 크랜리가 스티븐의 말을 되풀이했다. “하나 물어보자. 너, 어머니를 좋아하니?”
스티븐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네 말의 뜻을 모르겠군.” 그는 순박하게 말했다.
“너 아무도 좋아해 본 적이 없니?” 크랜리가 물었다.
“여자 말이니?”
“그런 뜻이 아니야.” 크랜리는 전보다 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어떤 사람이니 사물에 대해서 애정을 느껴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스티븐은 친구와 나란히 걸으면서 보도를 침울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느님을 사랑해 보려고 했었지.”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노력에서는 실패했던 것 같아. 어려운 일이야. 나는 순간순간마다 나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를 결합시키려고 했었어. 그 점에서는 내가 늘 실패만 하지는 않았어. 어쩌면 아직도 그런 것은 할 수 있을지도......” (P369-370)
“아마도 나는 떠날 거야.” 그가 말했다.
“어디로?” 크랜리가 물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곳으로.” 스티븐이 말했다.
“그래.” 크랜리가 말했다. “네가 여기서 살기는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힘이 들어서 떠나려는 거니?”
“나는 떠나야 해.” 스티븐이 대답했다.
“가기 싫으면 굳이 네 자신이 쫓겨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네 자신을 이단자나 무법자로 여길 필요도 없기 때문에 하는 얘기야.” 크랜리가 계속해 말했다. “세상에는 훌륭한 신자이면서도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게 너에게 놀라우냐? 교회는 단순히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고 심지어는 성직자나 그들의 도그마도 아냐. 교회란 그 속에 있도록 태어난 모든 것들의 총집합체이거든. 나는 네가 일생 동안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라. 우리가 하코트 스트리트 정거장 밖에서 서 있던 날 밤 네가 내게 말했던 것이 너의 포부냐?”
“그래.” 스티븐은 크랜리가 장소와 관련지어서 생각들을 기억해 내는 데 대해 미소를 짓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날 저녁에 너는 샐리갭에서 라라스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놓고 도허티와 30분 동안이나 언쟁을 벌였지.”
“바보 자식!” 크랜리가 조용히 경멸을 표하며 말했다. “샐리갭에서 라라스로 가는 길에 대해서 그애가 뭘 알겠니?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그애가 도대체 무얼 아니? 넋두리 같은 소리나 하는 바보 자식이니까.”
그는 큰소리로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스티븐이 말했다. “너 그 나머지 것도 기억하니?”
“그날 네가 얘기했던 것 말이니?” 크랜리가 물었다. “그래, 기억하고말고. 너는 네 정신이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줄 삶 혹은 예술의 양식을 찾아야겠다고 했었지.” (P37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