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미지> 1994년
<데미지>(Fatale, Damage)는 영국에서 제작된 루이 말 감독의 1992년 드라마, 멜로/로맨스 영화이다. 제레미 아이언스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루이 말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내면의 풍경이란 게 있다. 영혼의 지형이랄까. 우리는 평생토록 그 지형의 등고선을 찾아 헤맨다. 운이 좋아 그것을 찾는 이들은 물이 돌 위를 흐르듯 느긋하게 그 등고선 위를 흘러 집에 이른다.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 그것을 발견하는가 하면, 바싹 말라붙은 채로 바닷가 고향마을을 떠나 사막에서 상쾌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강렬하고 분주한 도시의 고독 속에서만 안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탐색이 아이나 어머니, 할아버지, 형, 연인, 남편, 아내, 혹은 원수 등 다른 이의 흔적을 찾는 일이다.
우리는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사랑받거나 사랑받지 못한 채 삶을 헤쳐 나간다. 뭔가 깨달아 온몸이 굳어버릴 듯한 충격을 느껴보지 못하고, 영혼 속에서 뒤틀린 쇠붙이가 저절로 풀어져 마침내 제자리를 찾는 고통도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P5-6)
잉그리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늘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몸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결혼흔 흔히 말하듯 복불복이 아니다. 생활을 하면서 통제력을 얻는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낭만적일 뿐 아니라 대단히 지적인 일이기도 하다. 자기 명성에 흠집을 낼 만한 일에 무모하게 덤빌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잉그리드와 나의 결혼은 둘 다 놀랄 일 없는 절차를 밟은 것이었다. 우리는 예상한 만큼 상대를 사랑했고, 우리의 성격이 요구하는 것 만큼 신중했다.
그런데 자식은 크나큰 도박이다. 자식이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무력감은 커진다. 다른 일은 우리가 잘 알고 노력해서 모양을 잡아가지만, 자식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우리 삶의 중심이자, 존재의 위험한 가장자리가 된다.
그여말로 복불복인 자식들의 건강을 우리는 자신이 잘 키우고 보살핀 덕분으로 여기기 일쑤다. 자식의 위중한 병은 행복을 무너뜨린다. 그러다 회복하면 그 후 오랫동안 자식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의식하며 산다. 부모는 멋대로 열정을 쏟는다. 많은 부모에게 그것은 대단한 연애다. 그러나 보통의 연애 상대와는 달리 자식의 경우에는 누구를 아들이나 딸로 삼을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다.
마틴이 세상에 나올 때, 땅이 흔들릴 만한 인생의 본질이 밝혀지는 일은 없었다. 그 아이는 우리가 언제나 기대한 것처럼 사랑스럽고 완벽한 아들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샐 리가 태어났다. 완벽한 가족이었다. (P15-16)
시간이 내 인생을 뚫고 지나갔다. 승리자. 난 고삐를 꽉 움켜잡지조차 않았다.
젊어서 죽은 이들 -- 시간을 빼앗긴 이들 --을 애도할 때는 잃어버린 기쁨 때문에 흐느낀다. 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기회와 즐거움 때문에 운다. 우리가 평생 찾았지만 헛수고였던 갈망의 기쁨을 웬지 젊은 시신은 알았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젊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시험을 당하지 않은 영혼이 자유롭게 날아갔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아직도 찾고 있는 환희를 그 영혼은 이미 알았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인생이 달콤하다고, 깊은 만족이 있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밤낮 할 것 없이 몽유병 환자처럼 자면서 돌아다니며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간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면서 폭포수처럼 우리 위로 흘러내리게 내버려둔다. 하지만 우리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스치는 하루하루는 독특하다. 되돌릴 수 없다. 끝난다. 그리고 또 다른 월요일이 있을 뿐이다. (P17)
나는 죽은 사람들의 옛날 사진을 가끔 본다. 사진 속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죽음의 징후가 있는지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몇 시간이나 며칠 후, 자동차 사고나 비행기 추락, 가정 폭력으로 삶이 끝나리란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징후는 찾을 수가 없다. 전혀 없다. 그들은 평온하게 쳐다본다. 우리 모두에게 무서운 경고를 한다. ‘아니요, 난 몰랐어요, 당신이랑 똑같아요, 그런 징후는 없었어요.’ ‘나는 서른 살에 죽었지만 나 역시 마흔 살이 되면 뭘 할지 계획을 세워두었지요.’ ‘나는 스무 살에 죽었지만 당신처럼 언젠가 장미 핀 시골집에-서 사는 꿈을 꾸었답니다. 당신은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왜 아니겠어요? 그런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죠? 왜?’
그래서 나는 안다. 내가 그 순간에 어떤 사진을 찍었든 자신 있고 약간 냉정하게 쳐다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것은 이제는 내가 잘 모르는 사내의 얼굴이다. 나와 그를 연결하는 다리는 안다. 하지만 저쪽은 사라져버렸다. 바다가 집어삼킨 육지처럼 사라졌다. 썰물일 때 해변에 표시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전부다.
“그 아이는 너보다 나이 들어 보이더구나. 많이는 아니지만, 몇 살이니?”
“서른세 살이에요.”
“그럼 너보다 여덟 살 많구나, 마틴,”
“그게 어때서요?”
“그게 어떻다는 건 아니다. 그저 너보다 여덟 살 많다는 사실만 말하는 거야.”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요?”
내가 물었다. 우리는 부엌에 있었다.
“안나 바턴, 마틴의 최근 여자친구예요.”
“아, 새로 사귀는 거 맞지?”
“네, 제가 카사노바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글쎄다, 그럼 아니냐?”
“아뇨.”
마틴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P30-31)
우리는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시선을 비꼈다. 그러다 다시 그녀를 보았다. 잿빛 눈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길에 사로잡혀 난 꼼짝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 안나가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그렇네요.”
내가 대답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잘 가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늘씬한 몸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사라졌다.
나는 적막에 휩싸였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들기라도 한 듯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알아본 데 대한 충격이 거센 물살처럼 내 몸속을 흐르고 지나갔다. 잠깐 동안 나는 같은 부류를, 나 같은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었고 그냥 흘려보내고 싶었다. (P37)
나는 안나의 얼굴을 씻어주었다. 맨살이 축축했다. 스펀지를 짜서 물이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흐르게 했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몸을 방책 삼아 전투를 벌였다. 전투가 끝나자 나는 그녀 곁에 누웠다.
“안나, 제발 나한테 말해줘. 당신은 누구지?”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아니라고요? 하지만 당신에게 나는 바로 그런걸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또 다른 것들이죠.”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것들?”
“마틴,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오랫동안 말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내 가족, 과거의 친구들, 현재의 친구들.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당신도 그렇고요.” (P51-52)
“형제가 하나 있었어요. 애스턴이라고.....로마의 우리 아파트 욕실에서 손목과 목을 그어 목숨을 끊었어요. 오해의 가능성은 없어요. 그것은 도와달라는 비명이 아니었어요. 당시에는 아무도 이유를 몰랐지요...... 말해줄게요. 오빠는 보답 없는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았어요. 나는 내 몸으로 그를 위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서 똑똑 끊어 말했다.
“그의 고통, 내 어리석음, 우리의 혼란...... 그는 목숨을 끊었어요. 이해할 만하죠. 그게 내 이야기에요. 간단히 말해서, 제발 다시는 묻지 마요. 미리 경고해두려고 당신에게 말한 거예요. 나는 상처 입었어요. 상처 입은 사람들은 위험해요.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걸 알거든요.”
오랫동안 우리는 잠자코 있었다.
“왜 애스턴의 자살을 ‘이해할 만하다’고 말한 거지?”
“난 이해하니까요. 나는 그걸 알고 살아가죠. 이 이야기는 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키는 보물단지가 아니에요. 그저 당신은 모르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죠.”
“그게 당신을 위험하게 만드나?”
“상처 입은 사람들은 누구나 위험해요. 살아남은 게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요.” (P53)
나는 비밀 창고의 문을 연 셈이었다. 거기 엄청난 보석이 있었다.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터였다. 내가 그토록 신중하게 쌓아온 방책들 -- 아내, 아이들, 가정, 직업 --이 모래 위에 지은 요새였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길이 있는 줄 모르고 세월을 지나 길을 걸어왔다. 그저 정상적인 지표들만 찾고 거기 매달리면서.
이 비밀의 방에 대해 항상 알았을까? 기본적으로 내 죄는 외도였을까? 아니면 비겁함이려나? 그럴 가능성이 더 크겠지.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안다. 비겁한 자는 두려움을 알고 달아나고.
내가 안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 얼마나 참혹함에 시달렸을까! 하지만 난 안나를 만났다. 또 그래야만 했다. 문을 열고 나 자신의 비밀 창고에 들어갔다. 나는 지상에서의 시간을 원했다. 이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르는 노래를 들었으니, 충격받은 구경꾼들의 시선에서 무희들을 몰아가는 난폭함을 알았으니, 점점 깊이, 더 깊이 떨어지고 점점 높이, 더 높이 솟아 하나의 실체로 들어섰으니, 자아로의 눈부신 폭발이랄까. (P56-57)
그래서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30년이나 같이 산 아내를 속일 수 있는 눈빛을 가진 남편과, 3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그렇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아내. 우리의 습관 같은 몸짓은 잘 기억하는 옛날 노래처럼 쾌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마지막 떨림에 무릎 꿇으면서 나는 알았다. 잉그리드는 싸우는 줄도 모르는 전투에서 마지막 패배를 거두었음을. 그리고 싸운 적조차 없는 안나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P95)
“마틴이 당신에게 청혼할 것 같아.”
“그래요?”“그 아이에게는 몹시 슬픈 일이 되겠지. 하지만 그래야 이 무시무시한 상황이 해결될 수 있겠지.”
“마틴에게 뭐가 슬플 거라는 거죠?”
대리석 같은 냉랭함. 차디찬 깊은 충격이 나를 휘감았다. 그녀의 말이 공중에서 얼어붙은 것 같았다. 꿈을 꾸는 것처럼 그녀의 말이 귀에 들렸다.
“나는 마틴을 좋아해요. 우리는 함께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죠. 나는 그와 진짜 인생을 일굴 수 있어요, ‘좋다’고 말하게 될 것 같네요. 마틴은 워낙 영리하니, 받아들여질 가능성 없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가 입 밖에 낼 줄은 꿈도 꾸지 않은 말이었다.
“마틴이랑 결혼할까 고민 중이란 건가?”
“고민 중이에요, 그래요.”
“내 아들이랑 결혼을 하겠다고?”
그런 대답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럴걸요, 처음에 당신에게 경고했어요.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지요.”
“상처 입은 사람들은 위험하다. 그들은 이기고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당신은 내게서 원하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원해요. 우리는 평생토록 함께할 수 있어요. 인생을 그런 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요. 내가 마틴이랑 결혼한다면 얼마나 수월하게 그렇게 될지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늘 서로 볼 수 있어요. 나는 아이비가 나무를 휘감듯 당신에게 나 자신을 휘감을 수 있어요. 난 당신이 내 지배자라는 걸 알아봤어요. 당신을 본 순간 복종했죠.” (P100-101)
“그게 내가 원하는 거죠. 마틴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나를 위해서 행복해지세요. 당신은 날 덜 갖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더 갖게 될 거예요. 더 많이, 꾸준히 더 많이, 잘 들어보세요. 난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생각하게 될 거예요. 잉그리드 때문에 몹시 고민하기 시작하겠죠. 당신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거예요. 내 말을 들어요. 마틴은 절대,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영원히 그를 잃게 될 거라고요. 샐리는 무시무시하게 상처받겠지요. 끔찍한 스캔들의 중심에 내가 있을 거고요. 그리고 당신, 당신은 파멸할 거예요. 뭘 위해서 그러죠? 우리가 같이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서죠. 그건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요. 우린 그렇게 생기질 않았어요. 그래요, 우리는 지금 이대로 살도록 생겼다고요. 서로에 대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충족하면 되죠.”
“아마도 당신은 미쳤어, 안나. 당신이 이런 말을 하는 건 그 때문이야. 세상에, 맙소사....”
“난 정신이 온전해요.” (P102)
월버가 말했다.
“물론 이건 진부한 말이지만, 난 진실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진실의 유형들은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 아무도 진실 전체를 알지 못하니까. 안 그런가. 마틴?”
내가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말했다.
“그거 약간 냉소적으로 들리는군요. 로맨스는 이상주의처럼 냉소적인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일 수도 있지요.”
마틴이 웃음을 터뜨렸다. 월버가 그에게 몸을 돌렸다.
“자네는 자신을 내놓고 살지 않는군, 마틴, 자네는 로맨스의 가면을 쓴 냉소주의자인가, 진실의 가면을 쓴 위선자인가?”
“저는 안나와 비슷합니다. 진실하지요. 하지만 남들 나름의 리얼리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엇이든 가능한 진실로부터 자신의 리얼리티를 창출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자네와 안나가 잘 맞는다는 것은 안 봐도 알 것 같군. 안나 말로는 자네가 소설 쓰는데 관심이 있다더군, 마틴.”
“네, 하지만 많은 저널리스트가 그렇게 말하죠.”
“그래도 자기는 진심이잖아.”
안나가 말했다.
마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P125)
안나는 여러 사람에게 엄청난 아픔을 안겨주었지요. 제 견해로 그 애는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재앙의 촉매제이기는 합니다. 마틴은 다를지 모르겠군요. 그는 안나를 내버려두는 것 같아요. 안나에게는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누군가 제지하려고 들면 안나는 싸울 겁니다. 누구도 안나를 부술 수 없어요. 그 애는 이미 부서졌거든요. 안나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P132~133)
안나는 정말 확고하고 강해 보였다. 운명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여신 같았다. 그녀의 결정이 옳고 그녀의 판단이 현명하리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배신과 기만이 얼룩진 인생 계획을 공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하고 잔인한 간통 이상일 뿐 아니라 오랜 금기를 깨는 행위였다.
(P142)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내 안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난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야. 몸과 영혼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거지. 내 존재 전체가 단 하나, 안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쏠려 있어. 그녀 이전의 내 삶은 잘 먹히는 거짓말이었고, 잉그리드 당신은 그 안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했지. 안나 이후의 삶은 그렇지 않을 거야. 그녀 이후에는 삶 같은 건 없을 테니.’ (P193)
‘난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야. 몸과 영혼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거지. 내 존재 전체가 단 하나, 안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쏠려 있어. 그녀 이전의 내 삶은 잘 먹히는 거짓말이었고, 잉그리드 당신은 그 안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했지. 안나 이후의 삶은 그렇지 않을 거야. 그녀 이후에는 삶 같은 건 없을 테니.’
(P193)
아파트에는 욕실과 주방이 달린 넓은 방 하나밖에 없었다. 방은 거의 빈 상태로 큰 탁자와 의자 몇 개가 있고, 구석에 작은 더블침대가 놓여 있었다. 텅 빈 책꽂이 밑에 낮은 유리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 메모가 있었다. ‘이 방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것도 두지 않을래요. 세상 속의 세상이죠.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이곳에 찾아올 거예요. 내가 만든 이 세상에서는 당신이 통치자고 난 당신의 노예니까요. 난 당신이 지정한 시간에 기다릴 거예요. 순종하면서 언제나 거기 있을게요.’ (P196)
문이 열리자 순간적으로 나만 마틴을 보았다. 나는 미친 듯한 손길로 귀에서 솜을 빼냈다. 안나가 소리쳤다.
“왜 그래요? 뭐예요?”
나는 그녀의 눈에서 리본을 풀었고, 그 순간 우리 둘 다 마틴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그는 문간에 선 채 좁은 입구에서 몸을 앞뒤로 흔드는 듯했다.
나는 마틴을 도우려고 일어났다. 그는 무서운 타격이라도 피하려는 것처럼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아이가 상상도 못한 악마에게서 물러가듯 로봇처럼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을 망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난간 밖으로 떨어져서 대리석 바닥에 부딪쳐 죽었다. (P212-213)
결국 우리는 앤드류가 몇 군데 법적인 자문을 구한 후, 나를 대신해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기로 합의했다.
“아들 마틴이 어젯밤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당연히 부검을 할 예정입니다. 이 비극과 관계된 몇 가지 사건은 안타깝게도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정부 요직과 국회의원직을 사임합니다. 제 사퇴는 즉시 효력이 발생됩니다. 여생 동안 평범한 시민으로 남을 것이며, 보통 시민으로서 아내와 제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젖어들 수 있도록 저희 삶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 가장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제 딸을 위해서도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현재도, 앞으로도 더 이상의 코멘트는 하지 않겠습니다.” (P241)
몇 안 되는 우리 가족은 무덤 주위에 모여 서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지켜보았다. 마틴의 매장, 이 검은 장면에서 나는 안나의 꿈을 꾸었다. 그녀가 새하얀 옷을 입고 무덤 옆에 서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온통 하얀 모습으로, 그리고 그녀는 한 아름 안은 붉은 장미를 무덤에 던졌다. 팔이 장미 가시에 찔려서 핏방울이 흙에 떨어졌고, 새하얀 드레스에 번졌다. 하얀. 새하얀. 순간적으로 모든 게 하얀 빛 때문에 흐릿해졌다. 그리고 끝이 났다. 우리는 검은 승용차를 타고 하틀리로 내달렸다. (P254)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마음 깊이 난 그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때로 우린 서로 어울리는 것 같았죠.”
“그랬지…… 아주 잘 어울렸지.”
(P256)
그는 미소 지으면서 나를 문으로 안내했다.
“그 경험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후회하오?”
“저는 안나와 그런 종류의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마틴도 그랬지요. 그런 면에서 안나와 당신은 서로 잘 어울렸습니다. 남녀가 하나가 되는 모든 길을 찾은 거지요. 온갖 종류의 길을. 두 사람의 길은 높고 위험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더 낮은 오솔길에 머무르지요.”
(P265)
나 자신을 당신에게서 떼어내야 해요. 나는 치명적인 선물이었어요. 난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쾌락이라는 가장 큰 보답을 주는 고통스러운 선물이었어요. 우리는 격렬한 한 쌍이 되어, 우리가 누구며 누구였든 자유롭게 솟구쳤어요. 지구에 온 외계인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발견했고, 발걸음마다 우리가 잃은 별나라의 언어를 새겼어요. 우리에게는 고통이 필요했어요. 당신이 갈구한 것은 내 고통이었어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당신의 허기는 충분히 채워졌어요. 이제 당신은 나름의 고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