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론드> 2022년
할리우드 전설 마릴린 먼로(노마 진 베이커)의 다사다난했던 사생활과 그녀가 견뎌야 했던 유명세를 대담한 상상력을 더해 재창조한 픽션.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다.
[1]
아이 (1932-1938)
1926년 6월 1일.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병원의 자선 병동에서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거기 없었다.
내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 누구도 몰랐다!
나중에야 그녀가 숨어 있는 걸 발견한 사람들은 충격과 거룩함을 느꼈다. 예쁜 아기가 태어났어요. 모텐슨 부인. 당신 아이들 안아보고 싶지 않아요? 여자아이예요. 젖을 주셔야죠. 하지만 어머니는 벽 쪽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가슴에서 고름처럼 새어 나오는 젖도,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나를 들어 올려 아는 법을 어머니에게 가르친 이는 타인에 불과한 간호사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갓난아기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등을 받치는 법을 가르쳤다.
떨어뜨리면 어떡하라고.
떨어뜨리지 않을 거예요!
너무 무겁고, 뜨거워, 이게.... 발로 차는 걸
건강하고 정상인 아기예요. 미인이네. 저 눈 좀 봐요!
글래디스 모텐슨이 열아홉 살 때부터 일해온 스튜디오. 그곳에는 눈으로 보는 세상이 있고 카메라로 보는 세상이 있었다. 전자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후자야말로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어머니는 얼마지나지 않아 거울을 통해 나를 인식하는 법을 익혔다. 내게 미소를 짓는 것도 거울들을 통해서였다. (눈과 눈이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절대로!) 거울에 비친 상은 카메라의 눈 같아서, 어쩐지 사랑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난 아이의 아버지를 흠모했어. 그가 내게 이름을 말해줬지만 알고 보니 그런 이름은 없더군. 내게 225달러와 전화번호를 줬지. 아이를 떼라고. 내가 진짜 어머니라 할 수 있나? 가끔 난 그게 믿기지가 않아.
우리는 거울을 통해 보는 법을 배웠다.
거울 속 친구도 생겼다. 내가 볼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다.
내 마법의 친구.
이런 행동에는 순수함이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얼굴과 육체를 내면(잠처럼 무감각한 상태)을 거쳐서 느끼지 못하고, 예리함과 분명함이 존재하는 거울을 통해서만 받아들였다. 그게 내가 스스로를 인지하는 방식이었다. (P58-59)
창문 밖 야자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 글래디스는 그 소리를 그렇게 불렀다. 언제나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며.
“우리 안으로 말이야.” 글래디스가 덧붙였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몸이 많지 않거든. 시대를 막론하고 삶이란 늘 충분하지 못했어. 그런데 전쟁 이후로는...... 아, 물론 넌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으니까 전쟁이 기억나지 않겠지만 난 기억한단다. 난 네 어머니고, 너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단 말이지. 어쨌든 전쟁으로 남자도 여자도 아이들도 잔뜩 죽은 후로 몸이 더욱 부족해졌어. 이 가엾은 죽은 영혼들은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데 말이야.” (P63)
글래디스 인생에는 그처럼 알 수 없는 일이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눈을 떼지 않는 동시에, 신비롭다 할 정도로 무심하게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플라톤에서 존 듀이까지 모든 철학자들이 그랬지. 운이 다할 때까지는 가지 말라고 말이야. 자기 운이 다하면 그때 가는 거야.” 글래디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그것이 그녀의 낙관론이었다.
그래서 내가 운명주의자가 된 거다. 논리와 싸울 수 없으니까! 비상사태에 잘 대처하는 것도, 혹은 잘 대처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연기해낼 수 없었던 건 매일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삶이었다. (P68-69)
일요일에 드라이브를 할 때면, 글래디스는 노마 진을 태우고서 스타나 ‘영화계’ 사람들이 사는 저택을 지나가며 네 아버지가 근처에 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네 아버지가 여기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아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가끔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것은 델라 할머니가 던지곤 하던 경고나 예언처럼, 그저 가볍게 넘기면 되는 말이었다. 설령 가볍게 넘기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윙크 같은 힌트. 그저 한순간 짜릿한 기분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그래서 노마 진은 무엇이 진실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진실’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궁금했다. 인생은 거대한 직소 퍼즐 같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직소 퍼즐에서는 모든 조각들이 얼마나 깔끔하고 아름답게 맞아떨어지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완성된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 그 풍경이 동화 속 나라처럼 아름다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볼 수 있고, 감탄할 수 있고, 심지어는 파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인생에 완성된 그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깨달았다. (P80-81)
“지금은 20세기야. 야훼가 군림하던 때와는 달라서, 일대 격변을 맞았단 말이지.”
글래디스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글래디스는 여윈 엉덩이에 손등을 얹고 진 할로를 닮은 섹시한 목소리로 그런 말들을 했다. 그녀의 반짝이는 시선은 차분하고 확고했으며 부풀어 오른 입술은 붉고 촉촉했다.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매료되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높은 창문에서 몸을 지나치게 앞으로 내밀고 있는 사람이나 촛불에 머리카락을 너무 가까이 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녀의 이마에서 시작된 흰머리(‘상관없다’며 글래디스는 염색을 거부했다)나 멍든 것 같은 다크서클, 열을 내며 안달하는 그녀의 몸에도 개의치 않았다. 글래디스는 방갈로 현관에서 앞길과 거리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장면을 연출했다. 영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래디스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라도 연기를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었고, 그러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관심을 대부분이 에로틱하다는 것도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에로틱. 그건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니까.
광기는 고혹적이고 섹시하니까. 여성의 광기는.
그 광기 어린 여성이 충분히 젊고 매력적이기만 하다면.
수줍음 많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 여자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들이 글래디스의 불안한 웃음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 때문에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는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당신과 결혼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신명 나는 연기를 벌인 후 집으로 돌아오면 글래디스는 약을 한 웅큼 삼키고는 황동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몇 시간씩이나 몸을 떨며 점액질에 덮인 듯 흐려진 눈으로 의식 없이 누워 있기만 했다. 노마 진은 그런 게 싫었다. 노마 진이 옷을 풀어주려고 하면 글래디스는 욕을 내뱉으며 손을 쳐냈다. 꼭 끼는 펌프스를 벗기려고 하면 발로 그녀를 차버렸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 너한테 문둥병을 옮길 수도 있어! 날 좀 내버려두란 말이다.”
어머니가 그 남자들과 조금만 더 잘해보려 했더라면. 글쎄 아마도. 정말로 잘되었을 텐데! (P98-99)
누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아이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 어떤 얼굴, 어떤 이름도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많은 날 동안 아이는 입을 닫고 지냈다. 억지로 불을 삼킨 듯 목구멍이 쓰라리고 바짝 말라 있었다. 먹을 때마다 구역질을 했고 자주 토했다. 아이는 아파 보였고 실제로도 아팠다. 아이는 죽기를 바랐다. 그 소망을 분명하게 표현할 만큼 성숙한 것이었다. 난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아. 난 죽고 싶어. 하지만 그런 소망을 가져온 분노를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그런 분노가 언젠가 지필 광기의 황홀함도, 언제가 되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정복해 세상에 복수하려는 광기 어린 야망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 없이 홀로 떨어져, 우글우글한 곤충들 속 외로운 벌레 한 마리의 가치밖에 없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무슨 수로 ‘세상’을 ‘정복’할지는 둘째 문제였다. 그래도 난 당신들 모두가 날 사랑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벌을 내려서 당신들의 사랑을 괴롭힐 거야. 그 당시 노마 진이 생각한 협박은 이런 게 아니었다. 비록 영혼에는 상처를 입었지만, 격분한 어머니 때문에 하일랜드 거리 828번지의 방갈로에서 타 죽거나 화상을 입지 않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그나마 행운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P136)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보호소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노마 진은 눈물이 말라버리고 말았다. 한꺼번에 너무 쏟아 버린 탓이었다. 그저 인형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말도 없는 파란 눈의 낡은 인형처럼 그녀도 더 이상 울 수 없게 되었다. 못생겼지만 마음은 따뜻한, ‘미텔스타트 박사’라는 고아원 원장이 경고한 바 있었다. 상기된 얼굴의 땅딸막한 고아원 교사가 경고한 바 있었다. 플리스, 로이스, 데브라 메이, 재닛처럼 먼저 들어온 소녀들이 경고한 바 있었다. “어린애같이 울지 마! 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거든.” 델라 할머니가 다니던 교회에는 빛나는 얼굴로 늘 환희로워 하던 목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말했던 것처럼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은 그녀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실은 지금껏 모르고 지냈을 뿐인 그녀의 형제자매였을는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래알만큼이나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들 모두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다 똑같이 신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닐는지. (P138-139)
1938년 11월. 노마 진이 드디어 밴누이스의 위탁 가정을 찾아 고아원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그녀의 ‘계좌’에는 20달러 60센트가 모여 있었다. 이디스 미텔스타트는 작별 선물로 그 돈의 두 배를 쥐어주었다. “우리를 좋게 기억해다오, 노마 진.”
그럴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고아원 이야기를 엮어 써낼 수도 있으리라. 그녀의 자존심은 그처럼 값싸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P165)
소녀 (1942-1947)
그녀는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망각과 생리를 연결하는 마법 같은 방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이제 생리가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독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라고 이해했다.
몇 주마다 한 번씩 일어나는 바람직한 현상이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두통과 미열과 구역질과 통증은 진짜가 아니라 나약함의 징후일 뿐이었다. 엘지 이모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모든 소녀와 여자가 감내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저주’라고도 불렸으나 노마 진은 절대 그런 말을 입에 답지 않았다. 하느님이 내리신 것이 은총 이외의 다른 것일 리 없었으므로.
이제 그녀는 ‘글래디스’라는 이름을 혼잣말이라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새 가정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거의 모든 일이었고 어쩌다 엘지 이모에게만 하는 정도였다) ‘영어 선생님’이나 ‘새 스웨터’ 또는 ‘발목’이라는 말을 하듯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라고만 지칭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생리가 사나흘 만에 끝난 후였다. 시작할 때만큼이나 불가사의하게 멈춘 날.
독이 빠져나갔어. 난 다시 행복해졌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야! (P208-209)
연극부 시험도 쳤다. 손터 와일더이 [우리 읍내] 오디션이었다. 왜냐고? 그건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상적이어야 했다. 정상보다 더 정상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발탁되어야만 했다. 기대감도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이는 이 연극 속으로 들어가면, 이 연극에서 연기를 하게 되면, 그녀가, 노마 진이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녀는 ‘에밀리’가 될 테고 모두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리라. 그녀는 대본을 읽고 또 읽으며 충분히 내용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녀 영혼의 일부가 분명히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를 가상의 상황 속에 집어넣어 가상의 삶. 가상의 세계 중심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 이것이 내게 허락된 구원임을. 하지만 무대 위 밝은 조명 속에서 가늘에 뜬 눈을 깜박이며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는 앞줄을 쳐다보자, 불현 듯 공포가 엄습했다. 연극부 교사가 소리쳤다. “다음? 다음은 누구지? 노마 진, 시작해봐라.” 하지만 그녀는 시작하지 못했다. 떨리는 손에 쥔 대본 속 글자가 흐릿해지고 목구멍이 막혔다. 머릿속에서는 바로 그날 저녁에 외운 대사들이 미친 파리 떼처럼 윙윙거리며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성급히 대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혀가 입속을 가득 틀어막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더듬거리고 더듬거리다 줄을 놓치고 말았다. “고맙다.” 연극부 교사가 말했다. 노마 진은 대본에서 시선을 들어 말했다. “죄, 죄송하지만, 다시 해도 될까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숨죽인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전 에밀리가 될 수 있어요. 저, 전 알아요. 전 에밀리예요.” 내가 옷을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신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의 알몸으로 당신들 앞에 설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러면 날 봐주겠지! 하지만 연극부 교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흠, 노마 진이었나? 고맙다, 노마 진. 하지만 손턴 와일더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구나.” 오디션에서 유리해진 다른 아이들은 그의 재치 있는 대답이 우스워서, 그리고 그 앞에 선 노마 진이 우스워서 거리낌 없이 웃었으리라.
그녀는 무대를 떠났다. 얼굴이 활활 타는 것 같았으나 위엄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래야 영화에서 죽은 사람 역할이라도 맡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타인의 시선 앞에서만큼은, 품위를 유지해야 하니까.
노마 진의 뒤로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가 쫓아왔다. (P210-211)
“사랑해요! 이제 내 인생은 완벽해요.”
마침내 그날이 왔다. 1942년 6월 19일. 노마 진의 열여섯 번째 생일에서도 3주가 채 지나기 전이었다. 노마 진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소년과 성스러운 결혼 서약을 나누었다. 소년도 첫눈에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부드러운 눈길로 서로를 응시했다. 안녕! 난 버키라고 해. 난 노, 노마 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베스 글레이저와 엘지 피릭의 미소 띤 얼굴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사실이었다. 그날 캘리포니아 미션힐스 그리스도제일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여자들은 어린 신부의 그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2센티미터에 86킬로그램인 신랑 곁에 서자 신부는 꼭 열네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랑 역시 열여덟 살 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행동은 어설프지만 서글서글하고 씩씩한 성격이며 짧게 깎은 삐죽삐죽한 검은 머리 사이로 분홍빛 귀가 드러난 게, 성인이 된 재키 쿠건처럼 잘생긴 소년. 사람들은 고등학교 레슬링 챔피언이자 축구선수이기도 했던 그가 고아였던 어린 소녀를 잘 지켜주리라 믿었다. 둘 다 첫눈에 빠진 사랑. 약혼 기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전쟁 통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초고속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 좀 봐!
신부의 얼굴은 볼연지를 바른 뺨만 살짝 붉은 빛을 띨 뿐 진주처럼 창백하고 은은하게 빛났다. 두 눈이 춤추는 불꽃 같았다. 햇빛을 옮긴 듯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짙은 금발이 인형 같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일부는 곱슬거리고 일부는 신랑의 어머니가 땋아준 머리에 은방울 꽃이 엮여 있었으며 그 위로 신부의 얇은 베일이 숨결처럼 가볍게 떠 있었다. 작은 교회 안은 사랑스럽고 순수한 은방울 꽃으로 가득했다. 내가 평생 기억하게 될 향기였다. 행복이 충족된 그 향기. 그리고 내 심장이 멈춰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만 같았던 두려움. (P243-244)
세상일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의 충격이 가시기 전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진의 연속 같아서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하며 눈을 떴다. 신문 머리기사, 라디오 뉴스. 그건 그만큼 흥분되는 나날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마흔이 넘었거나 이미 군대를 제대한 사람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소집되지 못한 남자들을 동정했다.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었노라고 반박한들 그건 너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만이 현재였다. (P250-251)
그녀는 완벽해지려고 했다. 그는 그런 아내를 둘 자격이 있으니까.
캘리포니아, 미션힐스의 라비스타 거리 2881번지, 버버두고가든스의 단층 아파트 5A호.
신혼의 꿈같은 몇 개월.
첫 결혼. 무엇도 그처럼 달콤하지 않다! 정작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할 뿐.
옛날 옛적에 한 어린 신부가 있었다. 어린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짬을 내어 비밀 일기장에 끼적었다. 버키 글레이저 부인. 뷰캐넌 글레이저 부인. 노마 진 글레이저 부인.
‘베이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내 기억조차 사라지겠지.
버키는 노마 진보다 겨우 다섯 살 위였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대디’라고 불렀다. 자랑스러운 큰 물건의 소유자라는 의미로 ‘빅 대디’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베이비’, 또는 ‘베이비 돌’이었다. 자랑스러운 작은 물건의 소유자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처녀였다. 확실히, 버키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P257-258)
글레이저 집안의 여자들이 ‘가정’ 밖에서 일을 하지 않는 건 자존심. 남자의 자존심 문제였다. 순진하게도 노마 진이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예요, 다르지 않아요?” 그녀의 질문은 무시당한 채 허공을 맴돌았다.
내 아내는 안 돼, 절대로!
남자에게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 두 눈에 담긴 표정. 단단해지는 성기. 가치는 없을지언정, 필요한 존재가 된다.
어머니는 널 원하지 않았지만 이젠 너는 필요한 존재가 된다.
아버지는 널 원하지 않았지만 이젠 너는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것이 진정한 진실이든 우스꽝스러운 진실이든, 내 인생의 근본적인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남자가 나를 원하는 동안만큼은 안전하다는 것. (P274)
“전 이제 누구의 딸도 아니에요. 그런 건 이제 끝났어요.”
그녀는 미션힐스에 있는 글레이저 가족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버두고가든스에 남지도 않았다. 버키가 리버티호를 타고 떠난 다음 주, 그녀는 버뱅크에서 동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라디오플레인 군수공장에서 조립 라인 일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전차 선로 근처에 있는 하숙집에서 가구 딸린 방을 얻어 그곳에서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그날, 지쳐 쓰러진 그녀는 꿈도 없는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노마 진 베이커는 더 이상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피보호자가 아니야. 다음 날 아침 그런 생각은 마치 샌가브리엘 산 위에서 폭풍으로 검게 물든 하늘을 밝히는 섬광 같은 번개처럼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난 그런 이유로 버키 글레이저와 결혼했던 걸까?
비행기 공장의 우레 같은 소음속에서 그녀는 왜 자신이 열다섯에 약혼을 했으며 열여섯에 결혼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는지 스스로에게 그 이유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왜 열여덟의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혼자 살면서, 이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자각하며 공포와 흥분을 함께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전쟁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P320-321)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으며 세상이 검은 잔해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노마 진은 전쟁이 좋았다. 전쟁은 굶주림이나 잠처럼 한결같고 분명했다. 전쟁은 항상 거기에 존재했다. 낯선 사람들과도 전쟁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전쟁은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이었다. 전쟁 중에는 누구도 외로워질 수 없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로 몇 년 동안 외로움이 찾아올 여유가 없었다. 전차안, 거리, 가게, 직장, 언제 어디서든 우려나 열망을 담아, 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을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언제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태평양에서는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뉴스는 좋거나 좋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거나 속상해 하기도 했다. 서로 낯선 이들이 함께 울었다. 모두가 모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에게 저마다의 의견이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세상은 밀려오는 꿈처럼 모두를 위해 어두워졌다. 이때가 바로 마법의 시간이라고 노마 진은 생각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차단되고 불 밝히던 창문과 건물 입구가 막혔다. 귀청을 찢는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임박한 침공에 관한 거짓 경보와 헛소문이 떠돌았다. 음식이 늘 부족했고, 다른 물건들도 부족해 원성이 자자했다. 암시장이 생겼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라디오플레인의 작업복인 바지, 셔츠, 스웨터를 입고 스카프로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은 노마 진은 자신이 낯선 사람들과 놀랄 정도로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애처로울 정도로 수줍음이 심해서 시댁 식구들과 있을 때도 말을 더듬었으며, 까탈을 부리는 남편에게도 때때로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이라도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거의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낯선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정했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노마 진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는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들조차도. 그녀는 욕망을 담아 전하는 따뜻하고 강렬한 시선을 알아차렸고,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공공장소에 있는 한은 그럴 수 있었다. 그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 영화를 보러 가자 청해오면 말없이 자신의 반지들을 가리키기만 하면 됐으니까. 남편 이야기를 물어와도 조용히 대답하기만 하면 됐다. “남편은 해외에 나가 있어요. 호주에 있답니다.”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남편이 뉴기니에서 ‘임무 수행 중 실종’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남편이 이오지마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노마 진은 달리 생각했다. 전쟁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P327-328)
오토 오제. 그는 우수 어린 왕자님이었다. 도료실에 있던 노마 진을 습격해 [성조기]에 실릴 사진들을 아주 많이 찍었다. 작업복을 입은 노마 진을. 버키에게 사진을 찍힌 후로 사진 찍는 게 부끄러워진 그녀가 아무리 저항하고 아무리 수줍어해도. 그는 비행기 동체 주위로 그녀를 따라다니며 거부 의사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군 공식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건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해외에서 싸우는 미군의 사기를 높이려면 작업복을 입은 예쁜 소녀들의 사진이 필요했다. “우리 군인들이 절망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건 반역죄나 마찬가지라고.” 오토 오제는 노마 진이 봐온 남자들 중에서 가장 못생겼지만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최면술사처럼 그녀를 들여다보면서 몸을 웅크리고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우리 [성조기]의 사장님이 누군지 알아? 론 레이건이셔.” 노마 진은 어리둥절해진 머리를 흔들었다. 레이건이라고? 배우인 로널드 레이건? 짝퉁 타이런 파워 아니면 짝퉁 클라크 케이블이라 불리던 배우? 노마 진은 레이건 같은 배우가 군사 잡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배우가 뭔가 현실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유두, 엉덩이, 다리.....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오제.’라고 레이건은 말하지. 공장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지만 다리 사진을 찍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하지 않는 멍청이야.” 정말이지 노마 진은 그렇게 무례하고 못생긴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P344-345)
글래디스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노마 진이 보여주는 사진들을 계속 들여다보며.
사진마다 노마 진의 모습이 각기 달라 신기했다. 소녀 같은가 하면 성숙하고 화려했으며, 이웃집 아이처럼 평범한가 하면 세련돼 보였고 천사 같은가 하면 섹시하기도 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도 했고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몇 살이었더라? 노마 진은 자기 살을 꼬집고 나서야 자신이 겨우 스무 살임을 기억해냈다.) 머리를 내린 사진, 머리를 올린 사진. 그녀는 건방지고, 애교 많고, 사색적이고, 동경 어리고, 말괄량이 같고, 위엄 있고, 밝았다. 그녀는 귀엽고, 예쁘고, 아름다웠다. 조명은 환하게 그녀를 비추거나 그림처럼 은근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진은 오토 오제가 아닌 스튜디오의 다른 사진사가 찍은 것이었다. 1946년에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은 여덟 명의 젊은 여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들은 세 줄로 나누어 각자 서거나 소파에 앉거나 바닥에 앉았다. 노마 진은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카메라가 없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열려 있었으나 카메라를 보며 날 봐요! 날 좀 봐줘요! 나만 봐요! 하고 애원하듯 미소 짓는 다른 여자들처럼 웃는 건 아니었다. 노마 진의 에이전트인 미스터 신은 이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마 진의 옷이 다른 여배우들처럼 화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깊은 브이넥에 리본이 달린 흰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양갓집의 세련된 아가씨가 입을 만한 옷이지 섹시함을 내세우는 핀업걸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다. 노마 진은 카펫 깔린 바닥에 앉아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넓게 벌려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 실크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드러났지만 짙은 색 치마와 느슨하게 모은 손으로 가렸다. 글래디스의 까다로운 눈에 거슬릴 만한 점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글래디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알 수 없는 물건을 보듯 햇빛 쪽으로 사진을 돌렸다. 노마 진이 사과하듯 웃었다. “‘노마 진’의 모습이 안 보이죠? 전 배우가 되면, 물론 그들이 허락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제가 허락하게 하겠지만요. 언제나 일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절대 혼자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글래디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뭔가 기분 좋은 말, 혹은 격려의 말을 들려주기를 기대하며. “어, 어머니?” (P358-359)
1947년 9월, 노마 진 베이커의 꿈이 모두 실현되었다. 고아원 지붕 너머로 RKO 타워와 멀리서 반짝이는 할리우드의 불빛을 바라보던 모든 고아 소녀들의 희망이,
그날 저녁 미스터 신은 축하의 의미로 마릴린 먼로를 저녁 만찬과 무도장에 데려가고 싶어했다. (난쟁이 도깨비처럼 작은 이 남자는 키가 내 어깨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나는 고맙지만 지금은 행복에 겨워 멍하고 어지러우니 혼자 있고 싶다고 잽싸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영화 촬영을 위한 방음 스튜디오 안에 있는 소파로 비틀비틀 걸어가 털썩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나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그곳을 나왔다. 늘 타는 곳에서 전차를 탈 때, 나는 혼자서 미소를 지으며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난 배우야. 난 마릴린 먼로야. 전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자 놀라서 흩어지는 새들처럼 내 마음도 하늘로 떠올랐다. 불이라도 난 듯 산타아나 바람이 부채질한 것이었다. 설탕 타는 냄새, 머리카락 타는 냄새와 함께 콧속으로 재가 날아들었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내쉬를 타고서 산불이 난 북쪽으로 도망치다,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세워놓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멈췄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 그 일도, 그날 아침 보았던 새장과 그 속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던 남자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어! 오늘부터 시작이야! 이제야 시작된 거야. 난 스물한 살. 난 마릴린 먼로야. 곧잘 있는 일이지만 전차 안에 있던 한 남자가 내게 기분이 좋지 않으냐고 말을 붙였다. 나는 미안하지만 지금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전차에서 내렸다. 거기가 내가 내리려던 바인 역이라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날카로운 아픔이 두 눈 사이와 배 속을 찔러댔다. 나는 길 위에 휘청거리고 서서 혼란스러운 머리로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스앤젤레스의 어디쯤, 할리우드가 서쪽 같았으나, 나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주위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드는 생각. 대체 어느 쪽이 집이야? (P388-389)
[2]
여자 (1949-1953)
“날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아요, 오토. 부탁이에요.”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복수였고, 복수가 달콤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그는 노마 진이 무릎으로 기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러운 작업복 차림에 도료 통을 들고 비행기 기체 뒤에서 어딘가로 숨고 싶은 듯 움츠리고 서 있던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누드 사진을 찍을 날이 오길 고대했다. 마치 그에게서 숨을 수 있다는 듯 움츠리던 그녀.
죽음의 눈을 피할 수 없듯, 오토 오제의 카메라 역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평생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옷과 가식, 그리고 ‘존엄성’을 벗겼는지 모른다. 그들도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단언했다. 자신이 운명보다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 아가씨처럼. 절대 안 돼요, 절대!
마치 처녀이기라도 하다는 듯, 그녀의 영혼이.
마치 침범당할 수 없다는 듯. 하지만 자본주의 소비 경제에서 침범할 수 없는 육체나 영혼 따위는 존재치 않는 법.
마치 누드 사진을 찍게 되면 핀업 사진을 찍을 때와는 달리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다는 듯.
“어쨌든, 베이비. 머잖아 나한테 찾아오게 될 거야.” (P13-14)
그녀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일거리였다. 제작자의 초대를 거절한 그녀는 이제 오토 오제의 어수선한 스튜디오에 알몸으로 서 있었다. 땀이 난 손에 꼭 쥐어져 있던 동전 같은 냄새가 스튜디오에서 풍겼다. 먼지 덩어리와 몇 달 전에도 보았던 말라비틀어진 곤충 껍질들이 발아래에 굴러다녔다. 그때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절대로! (P20-21)
노마 진은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날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아요, 오토. 부탁이에요.”
오토는 경멸스럽다는 듯 말했다. “넌 이미 웃음거리야! 여자의 몸은 실제로 웃음거리라고. 생식력이든, 아름다움이든. 수컷의 머리를 물어 뜯는 암컷 사마귀처럼 남자를 미치게 만들어서 교미를 하고 인류를 재생산하는 게 목적이지. 하지만 인류가 뭔데? 나치가 생기고 미국이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이상 인류의 99퍼센트는 살 자격이 없어.”
노마 진은 오토의 공세에 몸을 떨었다. 그는 전에도 인류의 무가치함에 대해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치와 그 희생자 이야기를 비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마 진이 반박했다. “미국이 혀, 협력해요? 무슨 소리예요, 오토? 난 우리가 그들을 구, 구했다고....” “포로수용소 생존자들은 구했지. 좋은 선전거리니까. 하지만 6백만 명의 죽음은 막지 않았어. 미국의 정책은 유대인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스실로 돌려보내는 거였거든.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지. 이건 네가 찍은 등신 같은 영화들과는 다르니까. 미국은 전후 파시스트(자칭 파시스트들은 이제 패배하고 없으니까)가 붐을 이루는 나라야.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는 그들의 게슈타포인 셈이고. 너 같은 여자들은 돈 있는 자들을 위한 달콤한 캔디인 셈이지. 그러니까 모르면 그냥 입 닥치고 있어.” (P26-27)
오토 오제는 이 촬영 순간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된다. 이 촬영으로 역사에 한 자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찍고 있는 대상이 드물게 마음에 들었다는 점 외에는. 그는 자신과 작업하는 여자 모델들을 대부분 싫어했다. 물고기 같은 알몸이 싫었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눈빛도 싫었다. 눈에다가 테이프를 붙여놓을 수만 있다면, 말을 할 수 없게 입에다가도 테이프를 붙여놓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노마 진은 말이 없었다. 포즈를 잡아주기 위해 그녀를 만질 필요가 거의 없었다. 손가락질 한 번이면 충분했다.
먼로는 어린 나이에도 자연스러웠다. 머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본능적으로 움직일 줄 알았다. 그녀는 카메라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점이 바로 성적 접촉 자체보다도 더 강렬한 섹시함의 원천이었다.
그는 환상 속의 인어상 뱃머리처럼 상체를 세우라고 모델에게 지시했다. 드러난 가슴과 눈동자처럼 커다란 유두. 노마 진은 그가 요구하는 자세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계속해 중얼거리는 동안에는 말이다. “훌륭해, 멋져. 그래, 그렇게, 잘했어.” 그가 먹잇감에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음에도 먹잇감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의 먹잇감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다. 이상했다. 분명 노마 진 베이커는 그의 모델들 가운데 가장 똑똑했는데. 남자에게서나 기대할 만한 명민함이 있지 않았던가. Y를 따기 위해 X를 포기할 줄 아는 도박사의 명민함. 비록 실제로는 Y를 딸 희망이 거의 없고 X를 잃을 가능성만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녀의 문제는 그녀가 멍청한 금발 여자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금발도 아니고 멍청한 것도 아니라는 데 있었다. (P28-29)
카스는 어디 있지? 왜 시사회에 오지 않았지? 노마 진은 그를 향한 사랑과 욕구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 밤 그녀가 얼마나 겁에 질려 있을지 알고, 함께 와서 그녀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카스 채플린이 참석을 약속했다가 나타나지 않은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가 공공장소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저 사람은?하고 흥분해서 소리쳤다가 아니, 그럴 리 없어 라거나 분명히 그의 아들일 거야 하며 이내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변했다가 금세 또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그래, 저 사람이 바로 채플린의 아들이로군! 어린 리타의 아들!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느 그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사과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 받고 불안해했다는 사실에 노마 진이 사과하는 쪽이었다. 카스는 찰리 채플린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자신에겐 차라리 저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이들은 어리석게도 축복이라고 믿으려 할 저주. “동화 속 이야기 같지. 난 왕의 아들이거든.” 그는 또 수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은 방랑자가 아이들,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싫어한 잔인한 이기주의자였다고 밝혔다. 아들이 태어난 지 1년이 다 되도록, 당시 10대였던 아내가 이름조차 짓지 못하게 했다고. 다른 사람과 자신의 이름을 공유하면 안 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혈육이건만! 채플린은 2년 후 리타와 이혼했고, 아들이 찰리 채플린 2세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한 후 그를 저버렸다. 그가 원한 건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타인들의 아첨일 뿐이었다. “난 태어나자마자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아버지마저 내 존재를 바라지 않는다면 존재할 권리조차 없는 거니까.” (P56-57)
그녀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녀 자신이었다. 내가 맡은 배역인 레온이 원하는 안젤라가 되었다. 그가 욕망하는 대상.
그 시간 이후로 노마 진은 더 이상 안젤라로서 불안해하지 않았다.
노마 진은 세트에서 조용하고 조심스러웠으며 주의 깊고 기민했다. 이제 자신이 맡은 배역의 수수께끼를 풀고 나자, 다른 이들이 그들의 배역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거나 풀기 위해 애스는 모습에 매혹당했다. 연기란 한 가지만으로는 나머지를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작업이었으므로. 배우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연기를 통해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유지되는 자아들의 연속체였으므로. I.E. 신의 젊은 고객인 금발의 ‘마릴린 먼로’가 자기 스케쥴이 없을 때조차 세트에 나타나 다른 배우들의 리허설과 촬영을 그토록 집중해서 본 이유는, 다름 아닌 호기심이었다.
그녀는 출세를 위해 남자들과 동침했다. Z로 시작해 그다음은 X와. 물론 신도 있었다. 휴스턴도. 영화 제작자들, 위드마크, 로이 베이커, 솔지겔, 하워드 호크스, 그 밖에 누구든 말만 하면 알 만한 사람들까지.
노마 진은 재능 있는 배우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지혜가 피부로 흡수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훌륭한 감독과 함께 있으면 스스로를 ‘감독’하는 법을 익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휴스턴은 천재적인 감독이었다. 그녀가 휴스턴에게 배운 결정적 진실은, 장면 속에 무엇이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장면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누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영화에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배우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배우를 뛰어넘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스터링 헤이든의 연인 역을 연기한 진 헤이건의 경우 세트에서는 개성을 뿜어내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스크린에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불안한 데다 유혹적이지 못했다. 노마 진은 생각했다. 나라면 저 역할을 좀 더 여유 있게, 깊이 있게 연기했을 거야. 그녀에게는 신비스러움이 모자라.
반면, 젊지만 몹시도 천박한 금발의 안젤라는 신비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 천박함이야말로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아닐까? 그녀가 순진함을 무기로 자신에게 푹 빠진 늙은 남자를 조종하는 게 아닐까? ‘삼촌’을 파멸시키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사랑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녀의 백지처럼 텅 빈 얼굴은, 관객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제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수면(水面)이었다.
노마 진은 몹시 신이 났다. 이제 그녀는 배우였다! 다시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으리라. (P76-77)
구질구질한 스캔들!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이 스캔들은 한국전의 미군 사상자 숫자, 전기의자행이 선고된 원자폭탄 첩자 줄리어스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의 사진, 소련의 수소폭탄 실험 기사 따위의 헤드라인들과 나란히 실렸다. 그 사건이 터지기 직전, I.E. 신은 <노크는 필요 없어요>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들의 주를 이룬다며 축하 전화를 걸었다.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진지하고 지적이며 정중하다고 말했다. “나머지 거지 같은 것들은 신경쓰지 마. 지들이 뭘 알겠어?” 노마 진은 몸을 떨었다. 빨리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시사회 이후로 그녀는 돌팔매와 총알에 노출된 전선 위의 새 같은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소총의 망원 조준기를 통해 관찰당하는 벌새. I.E. 신은 그녀가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비평가들에 맞서 그녀를 변호해주는 V나 다른 친구들처럼 친절했다. (P160-161)
걸레 같은 년. 로즈는 남편을 조롱하고 있다. 그녀에게 쓸모없는 남편이므로. 남자도 아니므로. 그녀는 그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란다. 그는 남자가 아니니까.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 남자가 남편 노릇을 못 한다면 여자에겐 그를 없앨 권리가 있다. 영화에서 로즈의 애인은 나이아가라 폭포로 그를 떠밀어서 떨어지게 할 계획을 세운다. 남자의 아내가 된다고 해서 그의 소유가 되는 건 아니다. 그녀의 몸도, 영혼도. 남자의 아내가 된다고 해서 그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구와 사랑을 나눌지는 그녀가 결정할 문제다. 그녀의 인생은 심지어 그것을 포기하는 것까지도 온전히 그녀의 몫이다. 1953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심술궂은 진실이다.
나는 로즈가 좋았다. 어쩌면 관객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한 여자가 나 하나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엄청난 히트였다. 토요일 낮에 상영하는 어린이 영화처럼 극장 밖으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로즈는 너무나 아름답고 섹시해서 우리는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대로이기도 했다. 우리는 동정하고 이해하는 데 지쳤으니까. 용서하는 데 지쳤으니까. 착하게만 구는 것에 지쳤으니까! (P205-206)
조명이 꺼지고 폭포 장면과 함께 <나이아가라>가 시작된다. 우레처럼 쏟아지는 폭포 옆에 선 남자는 작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다가 장면은 노마, 그러니까 ‘로즈’에게로 넘어간다. 침대 속. 달리 어디겠는가? 그녀가 시트 아래 알몸으로 누워 있다. 깨어 있지만 잠든 척한다. 영화 내내 ‘로즈 루미스’는 뒤돌아 다른 일을 꾸미며 앞에서는 모르는 척한다. 관객들은 그 사실을 알지만 그녀의 멍청한 남편은 모른다. 남자는 전쟁을 겪은 애처로운 정신병자이건만 관객들은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다. 모두들 ‘로즈’가 화면에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달콤하지만 도를 넘은 악인. 라나 터너는 저리 가라다. <나이아가라>를 떠올리면, 적어도 완전한 누드 장면이 한 컷 정도는 있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1953년인데? 그녀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카스와 나는 <나이아가라>를 열 번도 넘게 볼 정도였으니..... 로즈는 곧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우리처럼 잔인하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도덕의식이 없다. 늘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스스로를 애무한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하지만 다들 그런 걸 나쁘다 하지 않나. 베드신은 어떻게 검열을 통과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그녀는 무릎을 벌리고 있다. 시트 위로 그녀의 금빛 음모가 비치는 것만 같다. 관객들은 매혹당한 채 그저 쳐다볼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그건 차라리 특별한 종류의 새로운 성기이다. 축축하고 붉은 입과 혀. 로즈가 죽으면 영화도 죽는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나는 바지에 그대로 사정할 뻔했다. 이게 바로 그녀이다. 이게 바로 노마이다. 섹스를 전혀 할줄 몰라 남자가 95퍼센트를 알아서 해야 하는 여자. 마치 연기를 연습하듯, 대사를 읊듯 “아—아—아!” 소리만 낼 뿐인 여자. 하지만 영화 속 ‘마릴린’은 분명 할 줄 알았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할 줄 아는 건 오직 카메라뿐인 것 같았고, 우리는 최면에 걸려 화면을 바라보는 관음증 환자들이었다.
영화 중간. 발기가 안 되는 남편을 로즈가 놀리고 비웃는 장면에서 카스가 내게 말한다. “이건 노마가 아니야. 이건 우리의 꼬마 붕어가 아니야.” 사실이었다. 이 로즈라는 여자는 우리가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우리로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릴린 먼로’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이 하나같이 상이한데도 그들은 그 점을 막무가내로 무시하며 말했다. “그 여자는 연기하는 법을 몰라. 그냥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뿐이지.”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배우였다. 천재성이라는 걸 믿는다면, 그녀는 천재였다. 노마 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자기 안의 빈 공간을 채워야 했다. 영화에 출연할 때마다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 우리들 역시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모든 이가 다 그렇게 비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차이점이라면 단지 노마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뿐.
그것이 우리가 아는 노마 진 베이커였다. 우리가 아직 ‘쌍둥이’였을 때, 그녀가 우리를,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녀를 배신하기 전의 그녀. 아주 오래전, 우리가 아직 어렸던 시절의. (P234-235)
마릴린 (1953-1958)
1953년은 노마 진에게 믿기 힘들 만큼 경이로운 해였다. ‘마릴린 먼로’는 스타가 되고, 노마 진은 아기를 밴 그해.
“정말 행복해! 내 꿈이 다 이루어졌어.”
그것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샌타모니카 해변의 거칠고 따가운 파도처럼 갑작스럽게 그녀를 덮쳐왔다.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기억나는 파도처럼. 하지만 이제 곧 그녀는 어머니가 될 것이며, 그녀의 영혼은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메트로놈 소리 같은 그 목소리도 이내 고요해질 것이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나도 거기에 있을 거야. 네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그곳에서 널 기다릴 테니. (P255)
숭배자들을 경계하라! 오직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이들과 예술에 대해 논하라. 위대한 스타니슬랍스키가 이렇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지금 그녀는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숭배자인 척하는 이들에게 (P259)
전직 운동선수가 금발의 여배우를 ‘자칼 떼’ 가득한 ‘여기서 데리고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스튜디오(그는 중역들이 그녀를 어떻게 빨아먹었는지,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그녀에게 얼마나 적은 돈을 지불하는지 알았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할리우드와 그 너머 거대한 세상이 그녀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혹은 누구의 성공이든 상관없었다. 그가 골절 후 돌기 생성으로 다리를 절며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기록했을 때 야구팬들 또한 그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던가!) 이런 가차 없는 혐오감은 그의 내면에 쭉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열댓 명에 이르는 비루하고 끈질긴 팬들이 호텔 건너편, 비에 씻긴 월셔 대로에서 (호텔의 화려한 입구에서는 도어맨들이 제지했으므로) 플라스틱 커버를 씌운 큼직한 사인북과 싸구려 코닥 카메라를 들고서 이 유명 커플이 나타나기를 지칠 줄 모르고 기다리던 바로 그 순간에도 말이다. 이런 숭배자 놈들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잘생긴 전직 운동선수와 아름다운 금발의 여배우가 바로 그 순간 시바 신과 샤크티 여신처럼 우주를 창조했다 허물었다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단 말인가? 볼 수도 없으며 접근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소. 이 열정적인 고백을 받은 금발의 여배우가 혼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뭔가 한마디 했다는 것. 하지만 그녀의 말소리는 피지직거리는 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끈질기게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려던 사람들은 여배우의 대사를 이렇게 추정했다. 아!.... 하지만 난 행복해요. 난 평생 행복했어요. 그런 다음 전직 운동선수와 금발의 여배우는 킹사이즈 침대의 뒤엉킨 실크 시트 속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불타올라 마치 폭발을 일으키는 신성처럼 육체 없는 빛으로 화한다. 그리고 필름은 녹아버린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아이러니할지라도 틀림없이 들어맞는 사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늘 그러했듯, 우리는 그것에 순응하며 사는 법을 배워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즉시 필름을 되감고 그 장면을 다시 돌려 보려 한다. 이번만큼은 다르기를 바라며, 금발 여배우의 더듬거리는 말을 좀 더 분명하게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서라, 우리는 결코 그것을 들을 수 없을지니. (P345-346)
난 실패할 수 없어. 실패했다간 죽어야 해.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마릴린의 비밀이었다. 아기를 지우고 난 후였다. 욱신거리는 자궁의 통증이 그녀가 받는 벌이었다. 처음에는 출혈이 심하더니 (그녀는 따지지 않았다. 당연한 벌이었으니까) 점점 출혈이 사라지며 눈물같이 뜨겁고 축축한 습기가 자궁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 그녀에게 내려진 벌.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받은 값비싼 프랑스 향수를 뿌렸다. 피를 흘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채 세트에서 비틀거리며 나와 분장실에 숨었다. 그저 변덕을 부리는 것뿐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해주길 바랐다. 남녀를 막론하고 화려한 스타들은 모두 그랬으니까. 이런 식의 공포를 느끼는 스타야 없었겠지만. 밤에는 코데인의 약효가 떨어져 (전직 운동선수가 가고 난 후 혼자) 잠에서 깼다. 난 이 아픔에서 로렐라이 리를 창조해낼 거야. 이는 노마 진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시사회 관객들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다.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리라. (P371)
전직 운동선수는 출장 중이었다. 금발의 여배우는 패서디나 극장에서 공연하는 동시대 미국 극작가의 연극을 보러 갔다.
친구들이 그녀를 데려갔다. 전직 운동선수는 밤마다 집을 비웠고, 그녀는 극장에 연극을 보러 다녔다. 이즈음 금발의 여배우는 각기 다른 다양한 분야에 수많은 친구를 두고 있었다. 전직 운동선수가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었다. 작가, 배우, 무용수. 그중 한 명은 금발 여배우의 마임 선생이었다.
패서디나 극장에 모인 수많은 관객들이 저녁 내내 은밀하게 금발의 여배우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연극에 감동한 것 같았다. 화려한 옷차림은 아니었고 주목을 끌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그녀를 보호하듯 양쪽에 앉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연극이 끝나고 다른 관객들이 자리를 뜨는 동안에도 금발의 여배우는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진짜 비극이야.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나중에 그녀는 술을 마시며 말했다. “그거 알아? 난 그 극작가랑 결혼할 거야.” (P406-407)
공식적으로 1954년 야구 시즌 개막을 위해서 일본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전직 운동선수였으나, 기자, 사진사, 텔레비전 관계자 등이 흥분해서 보려고 몰려든 건 금발의 여배우였다. 도쿄 공항에서 보안 경찰들은 구경 나온 수백 명의 일본인들을 막았다. 두어 명만이 섬뜩할 만큼 한결같은 소리로 “몬짱! 몬짱!” 하고 외칠 뿐 일본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무표정하고 조용했다. 몇몇 젊은 팬들이 꽃을 던졌지만 총에 맞은 울새처럼 더러운 콘크리트 길바닥에 떨어졌다. 지구 반대편은 고사하고 아주 가까운 외국에도 가본 적이 없던 금발의 여배우는 전직 운동선수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보안 경찰들이 재빨리 그들을 리무진까지 에스코트했다. 전직 운동선수에게는 기분 나쁠 정도로 명백하게 눈에 보였지만 금발의 여배우는 아직도 군중이 그가 아닌 그녀를 위해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몬짱.’ 이 뭐예요?”
금발의 여배우가 불안한 듯 묻자 그들의 호위를 맡은 사람이 조그맣게 키득거리며 “당신이에요”라고 말했다. “저요? 하지만 초대받은 건 남편이지 내가 아니에요.” 그녀는 그를 대신해 화를 냈다. 화가 나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공항으로 연결되는 도로 양옆으로, 검은색 보호 유리 너머 리무진 뒷자석에 뻣뻣하게 앉아 있는 몬짱을 보기 위해 더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공항 안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활발하게 손을 흔들고 꽃을 던졌다. 더 크고 더 많은 꽃들이 리무진 차창과 지붕 위로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들은 로봇처럼 섬뜩하고 한결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몬짱! 몬짱! 몬짱!” (P438-439)
열광하는 사진사들과 텔레비전 취재진들 사이에서 금발의 여배우는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덜컹거리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 다음에는 더 심하게 덜컹거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시골에 있는 해병과 육군의 야영지로 향했다. 금발의 여배우는 군대에서 지급한 짙은 황록색 긴 내의에 바지, 셔츠, 바람막이를 입고 무거운 군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에는 턱 아래로 버클을 채우는 군모를 써서 차가운 바람을 막았다. (4월이었지만 로스앤젤레스의 4월과는 천양지차였다!) 커다랗게 끈 긴 속눈썹의 아름다운 푸른 눈과 붉은 립스틱을 칠한 입술을 제외하면 그녀는 정말 열두 살짜리 소녀처럼 보였다.
마릴린이 무서워했냐고? 무슨 소리.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어. 아마 헬리콥터에서 사고가 많다는 걸, 특히 그렇게 바람이 셀 때는 더 심하다는 걸 몰랐을 거야. 어쩌면 마릴린이 탑승한 헬리콥터라면 추락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그 어린아이 같은 매력적인 목소리로 우리한테 말했듯, 진짜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몰라. 자기 운이 다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P447)
또 해봐요. 금발의 여배우가 다정하게 조르자 조종사는 아이같이 웃으며 헬리콥터를 돌려 시계추처럼 캠프 위로 내려간다. 바람이 우리를 뒤흔들고, 금발의 여배우는 군인들에게 또다시 손을 흔든다. 벌써 아까보다 많은 군인들이 나왔다. 이번에는 군인들도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아이들처럼 헬리콥터를 따라 뛴다. 우리는 이제 착륙해볼까 생각하지만 여배우는 저 사람들을 놀라게 해줘요. 네? 문을 열고 날 매달아주면 안 돼요? 하고 말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이 아름답고 정신 나간 여자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믿을 수가 없지만,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는 그 장면이 지상에서 어떻게 보일지 잘 아는 것이다. 항공 장면과 지상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 긴장감 도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녀는 헬리콥터 바닥에 엎드려 우리에게 다리를 잡으라고 지시한다. 어느새 우리는 모두 이 영화 속으로 들어와 있다. 우리는 문을 살짝 연다. 몸이 뒤집어질 정도로 바람이 강하다. 하지만 마릴린은 완고하다. 그녀는 군모까지 벗는다. 그래야 누군지 알아보죠! 그리고 문밖으로 몸을 내민다. 자칫하면 떨어질 지경이지만 그녀는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우리를 보며 웃는다. 우리가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가락 자국에 멍이 들 정도로 그녀의 다리를 꼭 붙잡는다. 분명히 아플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린다. 하지만 조종사는 그녀의 요청에 따른다. 그녀처럼, 우리 모두처럼. 이제는 그 역시 운이 다하면 그땐 어쩔 수 없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헬리콥터에 마릴린 먼로를 매달고서 캠프 위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손을 흔들고 키스를 날리며 아. 사랑해요! 미군 여러분! 하고 소리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세 번! 이제는 캠프 전체가 밖으로 나와 있다. 장교들과 캠프 사령관을 포함해 모두가. 부엌에 있던 병사들, 병원에 있던 잠옷 차림의 병사들, 변소에서 바지를 올리며 밖으로 뛰쳐나오는 병사들. 하나 같이 “마릴린! 마릴린!”하고 소리치고 있다. 지붕이며 물탱크 위로 올라가는 병사들, 올라가다 떨어져 뼈가 부러지는 병사들도 있다. 불쌍한 놈들. 한 병사는 병원에서 나오다 미그러져 넘어지더니 발에 짓밟힌다. 폭동 장면이다. 동물원의 유인원들. 원숭이들에게 먹이 주는 시간. 헌병들은 이 정신없는 병사들을 활주로에서 쫓아내기 위해 두들겨 패야 한다.
헬리콥터가 착륙하고, 우리를 양옆에 낀 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한다. 우리는 전기 충격을 받고서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마릴린은 서리처럼 하얀 뺨과 코, 유리처럼 맑은 푸른 눈과 긴 속눈썹을 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이리저리 뭉쳐 있다. 그런 머리 색은 영화에서밖에 본 적이 없다. 진짜 같지 않겠지만 틀림없는 진짜. 그녀가 눈에 눈물을 머금고 소리친다. 아! 아! 지금은 내 생애 가장 해, 행복한 시간이에요. 우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휙 하고 달려나가 자신을 향해 내민 군인들의 손을 붙들었을 것이다. 고향에서 찾아온 모두의 연인인 양 그들을 껴안고 키스했을 것이다. 그러면 군인들은 사랑을 못 이기고 그녀의 사지를 찢어놓았을 것이다. 마릴린을 향한 사랑에 미쳐 헝클어진 금발을 모조리 뽑아 갔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붙잡아야 했고, 그녀도 우리를 뿌리치지는 않지만 마치 큰 깨달음을 안겨준 심오한 진리라도 되는 듯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에요. 아, 고마워요!
그 말이 진심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P448-449)
“아아아아아아.”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이른 싱싱한 육체의 소녀. 물결치는 부드러운 주름 속에 담긴 가슴을 위로 모아주는 상아색 홀터 탑 크레이프 선드레스. 그녀는 맨다리를 벌린 채 뉴욕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서 있다. 황홀한 듯 금발을 젖힌 가운데 풍성한 플레어스커트가 위로 날리며 하얀 면 팬티가 드러난다. 순백의 면! 상아색 크레이프 선드레스가 마법처럼 둥실 날아오른다. 드레스는 마법이다. 그 드레스가 없다면 소녀는 날 것으로 노출된 고깃덩이 같은 여체에 불과하리라.
그녀는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다! 그렇고말고.
그녀는 일회용 밴드에이드처럼 건강하고 깨끗한 미국 소녀이다. 한 번도 더럽거나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한 번도 우울한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한 번도 난폭한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한 번도 절망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한 번도 미국적이지 않은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종이처럼 얇은 선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의 간호사. 달콤한 입과 튼튼한 허벅지, 탄력 있는 가슴, 겨드랑이에 조그맣게 접히는 젖살을 소유한 간호사. 스커트가 또다시 위로 솟구치자 그녀가 네 살배기 아이처럼 웃으며 소리를 지른다. 옴폭한 자국이 있는 무릎, 무희처럼 단단한 다리. 이 기운 세고 건강한 소녀의 어깨와 팔, 가슴은 성숙한 여인의 그것. 그러나 얼굴만은 소녀의 얼굴이다. 가빠지는 연인의 호흡처럼 지하철 증기가 스커트를 들어 올리는 가운데 그녀가 뉴욕의 한여름 속에서 몸을 떨고 있다.
“아! 아아아아아.”
밤 시간의 렉싱턴 거리. 51번가. 하지만 새하얀 조명이 한낮처럼 열기를 내뿜고 있다. 사랑의 여신은 몇 시간째 굽이 뾰족한 흰색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린 채 이렇게 서 있다. 발에 꼭 끼는 샌들에 새끼발가락은 영원히 모양이 변해버렸다. 웃고 소리를 지르느라 입이 다 아프다. 철 환풍구 위의 소녀. 꿈속의 소녀. 새벽 2시 40분. 이글거리는 하얀 조명들이 그녀에게 초점을 맞춘다. 오직 그녀에게만, 소리를 지르는 금발, 웃고 있는 금발, 금발의 비너스, 불면증에 시달리는 금발, 매끈하게 면도한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금발, 날아오르는 스커트 때문에 평범한 흰색 면 팬티가 드러나지 않도록 부질없이 손을 휘휘 내젓는 금발, 그리고 그림자, 표백한 치부의 그림자.
“아아아아아.”
이제 그녀는 크고 탄력 있는 가슴 아래를 감싸 안는다. 눈꺼풀이 팔딱거린다. 다리 사이가 깨끗하다는 사실이야 의심할 필요가 없다. 더러운 소녀가 아니다. 이질적이지도 이국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곧 미국의 상처, 그 화신. 텅 비어 있다. 보장한다. 벅벅 긁어내고 깨끗하게 씻어냈기에, 쾌락을 방해할 그 어떤 반흔도 냄새도 남아 있지 않다. 이름 없는 소녀, 기억 없는 소녀. 그녀는 오래 살지 않았으며 장차 오래 살지도 않을 것이다.
날 사랑해줘요! 때리지 말아요. (P451-452)
[3]
극장 앞 차양에는 <7년만의 외출>의 그 말도 많은 포즈를 취한 마릴린 먼로가 3미터짜리 사진으로 석고보드에 붙어 있었다. 금발의 마릴린은 주름진 상아색 스커트를 날리며 다리와 허벅지와 하얀 면 팬티를 드러낸 채 다리를 벌리고 서서 웃고 있었다.
네년 꼴을 좀 봐! 헤픈 년 같으니. 사람들 면전에서 젖통과 치부를 다 드러내고 있잖아.
노마 진도 차양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보나 마나 마찬가지였다. 내 아내라면 그럴 수 없어. 듣고 있어? 들었고 말고. 그가 그녀를 때리자 귀가 윙윙 울렸다. 아직도 희미하게 그 울림이 들려왔다. 빨라진 맥박 소리와 한데 섞인 채.
“하지만 그 사람도 다시는 날 때리지 못하겠지. 누구도 그렇게 못 할 거야.”
지금은 좋은 시기였다. 이번 달은, 지난달은 좋지 않았다. 그 전달도. 10월에 별거와 이혼을 한 후로는 계속 그랬다. 그녀는 몇 차례 이사를 했다. 전화번호는 그보다 더 자주 바꿨다. 전 남편의 협박 때문이었다. 전 남편은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를 배신할 수가 없었다. 9개월간의 고통스럽던 결혼 생활. 마릴린의 진짜 이야기.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진짜 이야기란 없었다. 뉴욕 병원에서 마릴린을 본 목격자 증언 -- ‘심하게 맞은 상태였다.’ 하지만 목격자는 없었다. 뉴욕에서건 어디에서건 병원에는 간 적도 없었다. 호텔 의사가 그녀를 치료했으니까. 그리고 한 시간 반이 지난 새벽 5시에, 전직 운동선수가 나가고 없는 화려한 스위트룸으로 화이티가 조용히 들어와 그 마법의 손으로 멍 자국과 왼쪽 눈 위에 생긴 구타 자국을 가려주었다. 그녀는 고마움을 못 이기고 화이티의 손에 키스했다. 거울 속에서 금발의 미녀가 되살아난 것을 보며.
가슴 속에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거울 속에서는 되살아났으니까. 이제 여기, 금발 머리를 한 의기양양한 마법의 친구가 세풀베다 극장의 차양 위에 웃으며 서 있었다. 추악한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듯이. 앞으로도 절대 일어날 일이 없다는 듯이. (P8-9)
여배우는 자신의 인생에 의지해 연기한다. 인생 전체에.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 시절에. 실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도 못하거늘.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거늘! 조금 더 나이가 든 사춘기 시절도 마찬가지다. 많은 기억이 그저 꿈만 같다. 즉석에서 만들어내고. 과거로 돌아가 그 과거를 조작하는 꿈.
하지만, 그래! 난 행복했다. 사람들은 내게 친절했다. 아파서 어머니 노릇을 해주지 못한 친어머니도, 밴누이스의 수양어머니도. 언젠가 클리퍼드 오데츠나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의 연극에 나오는 진지한 배우가 되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인간성에.
“어머, 저게 나라고요?”
놀라운 건 <7년만의 외출>이 대단히 재미있다는 사실이었다. 톰 이웰의 여름밤 환상이 투영된 위층 아가씨는 재미있는 인물이었다. 노마 진은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에 주먹을 대고 웃었다. 자신의 모습에 겁을 먹던 그녀에게 이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할리우드 사람들과 비평가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P15-16)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에게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네가 그 여자를 통제할 수 없느냐? 무슨 결혼이 그러냐? 너한테나 그 여자한테나.
급기야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남자로서, 양키스의 거포이던 과거의 그로서. 이 또한 그녀를 미워하는 이유가 되었다. 사실 대부분이 그것 때문이었다. 당신은 남자를 말려버려. 당신은 내면이 죽어 있어. 정상적인 여자가 아니야. 당신이 절대 아기를 갖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어.
그녀는 따졌다. 한때는 마릴린을 사랑했으면서 이제는 왜 미워하지? 왜 위층 아가씨를 미워하지? 아가씨는 다정하고 착하고 사려 깊고 친절했는데. 물론 그녀는 남자들의 성적 환상, 섹스의 천사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섹스는 재미있는 것 아니던가? 위층 아가씨는 남자를 초대해 함께 웃음을 나누었다. 하지만 잔인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아이러니가 없어서 좋아하는 거예요. 상처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법도 모르니까요.” 어른이 된 사람들은 상처와 실망과 수치심으로부터 아이러니를 배우지만 위층 아가씨는 그런 것들을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1950년대 중반, 뉴욕의 전문직 여성이 된 어여쁜 공주님.
우수 어린 왕자님이 곁에 없는 어여쁜 공주님. 어떤 남자도 그녀를 감당할 수 없기에.
치약, 샴푸, 소비재들을 광고하는 어여쁜 공주님. 예쁜 여자들이 물건을 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은 비참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재미있는 일이다. 오토 오제는 왜 그 속에 숨어 있는 유머를 읽지 못했을까? “세상 모든 게 다 홀로코스트는 아니잖아.” 사실 노마 진이 <7년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먼로’가 만들어낸 인물을 통해, 어린 시절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새롭게 승화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그녀가 감독인 와일더에게 말한 것처럼) 심오하고 멋진 반전이었다.
이제 스커트가 날리는 장면이 나올 차례였다! 뉴욕에서 네 시간 넘게 그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그녀의 결혼은 끝장났다. 하지만 그때 촬영한 분량은 단 1초도 영화에 사용되지 않았다. 촬영은 경찰 바리케이드 뒤로 몰려들어 멍하니 바라보는 남자들이 없는 할리우드의 방음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스커트가 날리는 장면은 장난스럽고 아주 짧았다. 충격적일 건 하나도 없었다. 그다지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전직 운동선수는 실제 영화 속 이 장면을 보지 않았다. 위층 아가씨는 비명을 지르고 웃으면서, 날리는 스커트를 계속해 두드려 내린다. 팬티는 보이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P23-24)
펄만! 극작가는 사반세기 동안 알고 지낸 뉴욕 연극 앙상블의 이 당돌한 설립자를 언제나 두려워했다, 마음 속으로. 동시대 사람들이 어느 극작가에 열광하든, 펄만은 이미 죽어서 ‘고전’이 된 극작가들을 가장 존경했다. 전후의 뉴욕에 가르시아 로르카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칼데곤의 <인생의 꿈>, 입센의 <대건축가 솔네스>와 <우리 죽은 자들이 눈뜰 때> 등을 급진적으로 정치화해 무대에 올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연출만 한 게 아니라 체호프의 작품을 직접 번역했고 체호프가 의도했던 장송곡풍의 비극이 아니라 달콤 씁쓸한 희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은 세대, 같은 유대계 독일인 이민자라는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자신이 극작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극작가를 짜증나게 한 인터뷰에서 펄만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하는 변이를 통해 ‘부분적인 재능들’이 서로 섞여들고 부대끼고 희롱하면서 독특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연극의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협동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자기가 없었으면 내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처럼 말했지.” 하지만 펄만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극작가의 초기 작품들은 앙상블에서 발전했고, 펄만은 극작가가 가장 야심을 기울인 작품의 첫 무대를 연출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영원히 그의 이름과 함께할 작품이었다. 펄만은 자신이 그 작가의 라이벌이 아니라 정신적인 형제라고 공언했다. 극작가가 상을 받고 훈장을 받을 때마다 축하를 건네면서도 극작가가 듣는 곳에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명성이 지고 나면 천재가 남지.” (P48-49)
“진정한 배우는 죽는 날까지 계속 성장한다.” 펄만은 말했다. “죽음은 마지막 장의 마지막 장면일 뿐이다. 우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회의적인 동시에 펄만과는 아주 다른 유형의 자만심 때문에 고통 받는 극작가는 이 남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에너지! 그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가! 펄만은 투우사를 연상시켰다. 그는 173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키에 잘생겼다거나 잘 꾸미고 다닌다거나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멋쟁이였다. 피부에서 거칠고 뜨거운 땀내를 풍겼으며, 숱이 적은 머리를 불그스레한 이마 위로 넘겨 빗고 다녔다. 40대 초반에는 얼룩진 앞니에 갑자기 캡을 씌워 이제 웃을 때마다 반사 조명처럼 이가 번쩍거렸다. 그는 자정이 지날 때까지 배우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키기로 악명이 높았다. 공정 계약이 도입되기 전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는 숭배를 받았다. 적어도 존경은 받았다. 누구에게도 그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기준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 열두 시간, 열다섯 시간씩 일했다. 자신에게 강박증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신이 ‘선택성 정신병자’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아이가 다섯 있었다. 수없이 많은 연애를 했으며 그중 몇 번은 (소문에 의하면) 젊은 남자가 상대였다. 그는 사람의 외모와 상관없이 ‘내면의 불꽃’에 매력을 느꼈다. (인터뷰에서 그는 금발의 여배우와 일하게 된 것이 그녀의 ‘영적인 재능’에 대한 관심일 분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펄만이 인정하는 배우들 가운데 몇몇은 ‘특이하다’할 만한 얼굴이었다. 미국 연극 감독들 가운데 펄만만이 유일하게, 자격만 갖추었다면 땅달막한 남자와 여자도 마다않고 자신이 작품에 캐스팅했다. 앙상블에 올린 입센의 연극에서 그는 183센티미터의 기골이 장대한 헤다 가블러를 캐스팅한 일로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내가 말하려는 건 헤다가 피그미 남성들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외로운 여장부라는 거야.” 펄만은 비웃음을 살지언정 절대 틀린 적이 없었다.
“사실이야. 난 그에게 많은 빚을 졌지. 하지만 모든 게 그 덕분은 아니야.”
극작가는 키가 크고 여윈, 황새 같은 남자였다. 내성적이고 신중한 눈에 입으로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뉴욕의 연극계에서 그는 ‘캐릭터’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근면한 일꾼이자 청렴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 시인(그의 라이벌인 테네시 윌리엄스처럼)은 아니지만 숙련공이었다. 그의 별난 행동 가운데 하나는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연극 연습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치 로웨이의 캘비네이터 가게에서 일하던 그의 세일즈맨 아버지가 직장에 출근하듯이. 그에 반해 맥스 펄만은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데다 말이 많았으며, 너저분한 스웨터에 벨트 없는 바지를 걸쳤고, 머리에는 선장 모자나 말쑥한 중절모, 겨울에는 트레이드마크인 검정색의 아스트라한산(産) 양가죽 모자를 쓰고 다녔다. 모자들은 그의 키에 몇 센티미터를 더해주었다. 극작가가 연습 때나 독회가 끝난 후에 배우들에게 꼼꼼하게 적은 쪽지를 건네주는 스타일이라면 펄만은 한 시간씩 연설을 늘어놓아 듣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동시에 지치게 하는 쪽이었다. 극작가가 오랜 풍상을 견뎌온 로마인 흉상 같은, 어떤 여자들은 미남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길고 여윈 금욕적인 얼굴을 가졌다면, 펄만은 차마 잘 생겼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민하고 안목 높은 그 눈만은 특별했다. 극작가는 웃음이 금지된 장소(학교나 유대 교회당 정도?)에서 불현 듯 들려온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소년처럼 살며시 웃었고, 펄만은 웃음이 재채기처럼 건강에 좋다는 듯 열정을 다해 웃었다. 펄만의 웃음소리는 벽 너머 극장 밖 시끄러운 길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배우들은 이미 수십 번은 들었을 그들의 희곡 대사에 여전히 웃음을 터뜨리는 펄만을 좋아했다. 공연 중이면 펄만은 언제나 버릇처럼 극장 뒤에 서서, 헌신적이고 편집광적인 감독들이 그렇듯이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어 그들과 동화된 채 얼굴과 몸을 움찔거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극장에서 가장 크고, 가장 전염성 강한 웃음이었다.
펄만은 사람들이 신에 대해 말하듯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연극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 속에서 사는 것이므로 신 이상이었다. “목숨을 걸어라! 당신들의 재능에! 진정한 자신을 찾아라! 자신에게 엄격해지면 이룰 수 있을지니. 무대 위에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다. 제군들.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P50-52)
나중에 금발의 여배우를 좀 더 잘 알게 된 극작가는 그녀가 원하지 않을 때는 거의 ‘마릴린 먼로’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그럴 수 있는 건 ‘마릴린 먼로’가 단지 그녀가 연기하는 역할 중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역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극작가는 언제나, 영원히 그 자신이었다. (P69)
독회가 있던 그날 밤,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질없는 노고가 드러난 이후로 그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침에는 바람을 맞으며 공원 멀리까지 긴 산책을 나갔다 돌아왔다. 열이 오른 상태를 추위가 바로잡아주었다. 그는 자연사 박물관의 찬바람 드는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아이작 같은 소년 시절, 그가 과거의 준엄한 익명성에 사로잡혀 꿈꾸듯 생각에 잠겨 있었던 장소. 이 얼마나 수수께끼 같은 일인가. 세상은 우리보다 앞서 나가 우리를 낳고, 잠시 동안 아껴주는 듯하다가 허물 벗듯 팽개쳐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나는 나의 글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기억할 가치가 있기를.
극작가는 금발의 여배우가 그와 동등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가 한 번 이상 연기한 역할, 괜찮은 보답까지 받은 적이 있는 역할을 재연하고 있음을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그녀는 어린아이였다. 그는 나이 많은 남자 스승이었고. 하지만 그는 이 여자에게 스승이나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연인이 되고 싶은 건가? 금발의 여배우에게는 둘 다 똑같을 테지만 극작가에게는 스승이든 연인이든 그렇게 되는 것이나 그렇게 보이는 것 모두가 어딘지 비뚤어진 거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만 사랑할 수 있어. 내가 그런 남자인가? 그는 자신의 실패를 알고 있었다! 그는 글을 쓸 때 자신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았다. 그에게는 시적인 천재성이 없었다. 변화무쌍하고 마법같은, 자연 발생적인 천재성. 텅 빈 하늘에서 튀어나오듯, 평범해 보이는 것에서 번쩍하며 솟아나는 체호프적인 순간. 갑작스러운 박장대소, 늙은이의 코골이 소리, 솔리오니의 손에 남은 죽음의 냄새. 슬프게 사라지는, 현이 끊어지는 소리. (P87-88)
그가 혼자 헛다리 짚는 게 아닌 한은. 그녀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유세를 벌이고 있었다. 아내를 떠나 그녀를 사랑하도록. 그녀와 결혼하도록.
금발의 여배우는 일을 위해, 사랑을 위해 살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녀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눈꺼풀이 떨렸다. 아, 그녀는 사랑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녀가 간절한 말투로 말했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지니는 건 자기 자신 이상의 뭐, 뭔가 아닐까요? 우리의 머릿속에, 몸속에, 역사 속에 있는 그 무엇 말이에요. 당신이 작품 속에 남겨놓는 어떤 일부분 같은 거요. 사랑을 하면 우린 더 높은 존재로 승화하죠. 그건 단순한 우리 자신이 아니에요.” 그녀의 열정적인 말에 극작가는 그녀가 단순히 외우고 있는 말을 읊는 게 아닌지 반신반의했다. 그 순진함, 이상주의. 혹시 그녀는 지적이지만 치명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체호프의 젊은 여자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갈매기>의 니나 혹은 <세 자매>의 이리나를? 아니면 보다 가깝게, 극작가가 몇 년 전에 쓴 대사라든지? 하지만 그녀의 진정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웨스트빌리지에 있는 6번가 재즈 클럽의 뒤쪽 어둑한 부스 안에 함께 있었다.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극작가는 조금 취했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금발의 여배우도 레드와인을 두 잔 마신 상태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기 때문에. 내일이면 극작가의 아내와 집으로 돌아올 터였다. “여자라면,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면, 여자는 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해요. 아이는..... 아, 당신은 아버지니까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도 알겠죠! 아이를 만드는 건 당신만이 아니에요.”
“그렇소. 하지만 당신도 그건 마찬가지지.” (P90-91)
그녀에게는 남자가 너무 많았다. 그녀를 가진 남자가 너무 많았다.
극작가는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친구에게서, 금발의 여배우가 곧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몇 달간 앙상블에서 받은 집중적인 훈련으로 보다 강해진 그녀는 영화배우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하지만 예전 조건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스튜디오는 마릴린 먼로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요구도 수용했다. 할리우드의 역사에 남을 사건.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경멸받아오던 마릴린 먼로가 스튜디오를 굴복시키다니! 이제 그녀는 프로젝트, 대본, 감독에 대한 승인권을 갖게 되었다. 급료도 영화 한 편당 10만 달러로 인상되었다. 왜? 그녀를 대신할 만한 금발 미인을 만들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싼 가격에 수백만 달러를 벌어줄 금발 미인을.
그는 금발의 여배우를 질투하지 않았다. 그녀가 잘되기를 바랐다. 그녀의 눈 속에 자리한 그 깊은 슬픔. 그것은 30년 전 막다의 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슬픔이었다. 그때는 사춘기 소년의 사랑에 눈이 멀어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슬픔. (P114-115)
극작가는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독백을 쓰는 것으로 극작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독백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말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론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그녀에게도 경고하지 않았던가. “난 늘 당신이 타고난 배우라고 생각했소. 지식은 당신의 재능을 손상할 뿐이야. 뉴욕에서 당신은 강박적으로 연기 수업을 준비했지. 그러다 몇 주 지나고 나서 지쳐버리고 말았어. 그건 당신이 아마추어라는 말이오. 그런 건 광신자들의 행동이란 말이지. 어쩌면 재능이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자신의 역할에 탐험해보지 않은 여백을 남겨두는 게 훨씬 중요한 거라오. 그게 존 베리모어의 비밀이기도 하지. 당신은 브랜도와 친구 사이잖소? 그건 브랜도의 테크닉 중 하나이기도 하오. 심지어는 대사를 완전히 외우지도 않고 자기가 맡은 인물의 말로 대사를 만들어내기도 하지. 뛰어난 무대 배우는 같은 연기를 절대 두 번 하지 않소. 대사를 암송하는 게 아니라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 말을 하는 거라오. 펄만은 당신에게 이 말을 해줘야 했소. 하지만 맥스 녀석은 당신에게 스타니슬랍스키의 그 잘난 ‘메소드’를 가르쳤지. 솔직히 그건 헛소리라오. 벌새가 파닥이는 자기 날개를 의식하고 자기의 비행 패턴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소? 날 수 있을 것 같나? 우리가 우리 입으로 내뱉는 말들을 모두 의식한다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펄만은 잊어요. 스타니슬랍스키도 잊어버리고, 말도 안 되는 이론 따위도 잊어버려. 배우에게 위험한 건 과도한 연습과 탈진이오. 내 희곡을 제작하던 극단이 하나 있었는데, 연출자가 배우들을 너무 심하게 몰아쳤지. 그들은 개말 날이 되기도 전에 절정에 올랐다가 추진력을 잃고 비실비실해지고 말았소. 펄만에게도 똑같은 일이 있었지. 사람들은 ‘그의 연습실 바닥에 피가 떨어져 있다’고 떠벌렸지만 그건 더한 헛소리요. 달링, 당신은 체리를 속속들이 다 안다고 했지? 자매처럼? 하지만 그게 꼭 아주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 사실은 당신이 틀렸는지도 모르고. 당신은 체리가 당신에게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소. 당신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막다는 내가 알던 것 이상의 인물이었지. 체리에게 숨 쉴 틈을 주는 게 어떻겠소? 체리를 믿어요. 그럼 그녀는 내일 촬영장에서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할 테니까.” (P149-151)
극작가는, 맥스 펄만의 말처럼, 예상과는 달리 많은 여자들이 노마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과 달리 여자들은 질투하고 시기하며 싫어하는 대신 노마, 혹은 ‘마릴린’에게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혹시 그녀를 보며 그들 자신을 발견했던 것일까? 이상화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남자들은 그런 오해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망상이나 혼란이라고 치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노마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건 특정한 부류의 남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에게 성적으로 이끌리지만, 현명하게도 거절당할 것을 아는 남자들. 극작가는 남자의 자존심이 위협 받을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어떤 전략을 취하는지 잘 알았다.
금발의 여배우가 그토록 분명히 그에게 이끌리지 않았다면 극작가 역시 그녀를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했을지 모른다.
영화배우치고는 나쁘지 않군. 하지만 무대에는 너무 약해. (P206)
종생(終生) (1959-1962)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를 부르는 장면은 먼로가 더 이상 훌륭할 수 없다고 만족할 때까지 서른일곱 번이나 찍었다. 그 서른일곱 번은 W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를 바 없이 보였겠으나 먼로에게는 모두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그 작은 차이가 그녀에게는 아주 중요했던 것이다. 마치 거기에 자기 인생이 걸려 있는 것처럼, 반대하는 것은 모두 자기 인생을 위협하는 것인 양 그녀는 심하게 화를 냈다.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녀 역시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만족했다. 미소를 지었다. W가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의 슈거 케인! 조심스럽게, <7년만의 외출>을 찍을 때 곧잘 그러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찬사의 말을 건넸다. 그러면 그녀는 미소와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답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먼로는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고양이처럼 뒤로 몸을 뺐다. 그 순간에는 사람들 손에 닿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그의 손에 닿는 것이 싫었던 건지도, 호흡이 뜨겁고 가빴다. W는 불을 붙이면 타오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저명한 감독이었다. 1955년, 상업성으로나 작품성으로나 성공을 거둔 코미디 영화에서 이 다루기 힘든 여배우를 지휘한 바로 그 감독. 당시 영화 속 위층 아가씨는 대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먼로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먼로는 너무나 많이 변해버려서 꼭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이제 위층 아가씨가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 인정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았다. 전직 운동선수와 결혼한 상태도 아니었고 멍을 숨기고 있지도 않았다. 뉴욕의 로케이션 장소에서 그녀가 심장이 무너진 사람처럼 W의 품안에서 흐느꼈을 때 W는 아이를 안아주는 아버지처럼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는 그 순간의 부드러움과 연약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지만 먼로는 까맣게 잊은 게 분명했다. 이제 먼로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사람들을 믿겠어? 사람들이 ‘먼로’에게 기대하는 건 하나뿐이야. 창피 당하는 꼴을 보려고 모두가 기다리는걸.” (P252-253)
무대 공포증. 이는 동물적인 공포이다. 배우의 악몽이자, 강력한 아드레날린의 공격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수도 있다. 요동치는 심장. 피가 너무 많이 몰려들어 터질까 두려워진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혀는 마비되고, 목소리는 희미해진다. 배우는 곧 자신의 목소리로 존재한다. 목소리가 사라지면 배우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종종 토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발작적으로. 무대 공포는 어느 순간 어느 배우에게나 닥칠 수 있는 미스터리이다. 경험 많은 베테랑 배우, 성공한 배우에게도 닥칠 수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도 그랬다. 그 올리비에가! 먼로는 30대 초반에 무대 공포증에 부딪혔다. 아주 호되게. 살아 있는 관객도 아닌 영화 카메라 앞에서. 왜? 사람들은 늘 무대 공포증이 죽음과 소멸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 일반적인 두려움이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단 말인가? 어째서 특히 배우들에게, 어째서 그토록 꼼짝을 못 하게? 왜 하필 이런 때 공포가 찾아오느냔 말이지? 왜? 누가 눈을 파내기라도 해? 누가 배를 찌르나? 어린 아이라서, 아기라서 누가 잡아먹는대? 왜, 왜, 왜?
무대 공포증. 이는 그녀가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감정들은 아름답고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분노만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상처와 당황, 공포, 고통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 역할은 설득력이 있게 연기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무대에서는 불가능했다. 분노로 소리를 높이면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누군가 연습실 뒤(이곳은 맨해튼의 뉴욕 앙상블로서 그녀는 마이크를 쓸 수 없었다)에서 소리를 치겠지. 마릴린. 미안하지만 안 들려. 그녀의 연인이던, 혹은 연인이 되고 싶어하던 그 남자는 그녀의 다른 연인들이 하나같이 그랬듯 자신만이 먼로이 수수께끼, 저주를 푸는 비밀을 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위대한 여배우가 되거나, 최소한 그럴 기회가 생길 거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그녀를 이끌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맡을 역할을 선택해주고 연출해주고 연극계의 위대한 여배우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눌 때(천천히,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는 한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괄호를 쳐놓은 듯, 절정의 순간과 그다음 아주 잠깐만을 제외하고는) 조차도 그녀를 조롱하고 나무랐다. 그는 그녀가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를 안다며 그게 무엇인지 알겠냐고 물었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면 그는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라기 때문이야, 마릴린. 세상이 당신을 파괴하지 않고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정작 당신은 세상을 파괴하고 싶어 하면서, 우리가 당신의 비밀을 간파하는 게 두렵겠지, 안 그래? 그녀는 그에게서 도망쳐 그의 친구인 극작가를 사랑했다. 그녀를 그의 막다라고 알고 있는 극작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의 몰랐다. (P256-257)
금발의 여배우는 자기도 모르게 사춘기 소녀처럼 신경을 긁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난 배우예요. 이건 내 인생이에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 거라고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은 바로 배우로서의 모습이에요.” 갈색 머리는 경멸스런 표정으로 남자처럼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도 없이 한 손으로 솜씨 있게 성냥을 그어서. 그녀는 연기를 뿜어내 금발 여배우의 눈에 눈물이 핑 돌게 하더니 마치 언니처럼 말했다. “누구를 위한 최선이죠, 노마? 팬들? 스튜디오 간부들? 할리우드?” 금발의 여배우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건.....” 세상을 위해, 시간을 위해, 나보다 오래 살기 위해. 그녀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더듬었다. “그건.....” 속눈썹이 긴 아름다운 갈색 눈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유혹하듯, 최면을 걸 듯. 그녀는 몸만 떨 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벤제드린의 힘으로 끄집어낸 기억 속에서 해리엇의 냉정한 검은 시선과 그 앞으로 덩굴처럼 피어오르던 연기가 떠올랐다. 나의 매혹적인 갈색 자매, 나의 쥐새끼 같은 자매. 갈색 머리가 말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죠? 당신은 먼로예요. 당신의 행동이 먼로예요. 지금부터 당신이 만들 영화가 죄다 흥행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당신은 평생 먼로예요. 죽은 후에도 먼로일 거라고요. 알겠어요?” 금발 여배우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 하지만 난 살아 있어! 난 살아 있는 여자야. “그 누구도 당신만큼 금발 역할을 멋지게 해내지 못해요. 물론 금발은 언제나 존재했죠. 할로가 있었고 롬바드가 있었고 터너가 있었고 그레이블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먼로가 있어요. 당신이 마지막일까요?” 금발의 여배우는 혼란스러웠다. (P286-287)
먼로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쓸데없는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런 성향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녀는 훌륭한 배우로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아이처럼 사랑받고도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가질 수는 없는 법.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P290)
마릴린이 우리에게 전파한 하나의 강령이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무척 자주했다. 운이 다하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우리는 그 말이 네바다 주 리노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로가 얼마나 늦게 나타나건, 얼마나 심란해하건 멍해 있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단 분장을 마치고 의상을 갖춰 입은 다음 분장실에서 나타난 그녀는 마치 자기 내면에 다른 자아가 살고 있는 것처럼 연기했다. 그녀는 로슬린이 되었다. 마릴린이 저지른 바보 같은 짓거리를 가지고 어찌 로슬린을 비난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촬영장에서 그녀가 카메라 안에 쏟아부은 것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매일 그날그날의 촬영분을 보면서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저게 도대체 누구지? 저 낯선 사람은?
단언컨대 먼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P313)
그는 포주였다.
하지만 평범한 포주는 아니었다. 아니고 말고!
그는 우수한 포주였다. 둘도 없는 포주, 독보적인 포주였다. 뛰어난 의상 감각에 스타일 있는 포주, 고급스러운 영국 억양을 구사하는 포주. 후손들은 그를 대통령의 포주로 기릴 것이다.
긍지에 찬 격조높은 남자. 대통령의 포주.
1962년 3월, 팜스프링스의 랜초미라지. 대통령이 낮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 금발 여자, 저 여자가 마릴린 먼로인가?”
그는 대통령에게 그렇다고 했다. 먼로는 그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였다. 맛있어 보이죠? 하지만 좀 제정신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내가 저 여자와 데이트를 한 적이 있던가?”
대통령은 재치가 있었다. 농담을 잘하고 이해도 빨랐다. 백악관과 대통령 업무의 압박에서 벗어나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아니라면 데이트를 주선하게. 프론토.”
대통령의 포주는 애매하게 웃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의 유일한 포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대통령이 자신을 가장 선호한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가장 정보력이 뛰어난 포주이기도 했다.
그는 재빨리 이 성질 급한 대통령에게 저 섹시한 금발 여자와는 관계를 가지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악명이 높다고. (P373-374)
비밀 요원들은 ‘대통령 전용 공간’이라고 이름 붙여진 방문을 노크했다.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내가 배달되는 고깃덩이가 된 건가? 룸서비스가 된 셈인가? 하지만 그녀는 우비를 벗어 요원들에게 건넸다. 슬랩스틱 장면은 이걸로 끝. 또다른 비밀 요원이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는 금발의 여배우에게 짧은 목례와 함께 욕설처럼 ‘부인!’이라고 짧게 내뱉으며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이 순간부터 장면은 카메라가 밀쳐진 것처럼 지그재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발의 여배우는 욕실을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혹시 씻고 싶으시다면.” 도금과 대리석으로 치장된 우아한 욕실 안에서 그녀는 제법 상태가 양호한 화장을 점검했다. 수정처럼 푸른, 크고 솔직한 눈, 흰자위는 터진 실핏줄이 더디게 회복되는 바람에 아직 변색되어 있었다. 눈 옆으로 희미하게 생긴 하얀 주름이 침실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에서는 연인의 시선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1962년 5월 29일이면 대통령은 마흔다섯, 1962년 6월 1일이면 금발의 여배우는 서른여섯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조금 나이 든 편이었으나, 그는 모르지 않았을까? 마릴린은 젊어 보였으니까! 자기 역할에 딱 맞게! 그녀는 향수를 뿌리고 한껏 치장했다. 쓸데없는 털을 공들여 제거했고, 예민한 피부가 아렸지만 기분 나쁜 보라색 약품으로 머리카락과 사타구니를 다시 탈색했다. 그리해 이제 대통령의 비밀 정부. 백금색 인형 마릴린 역할에 딱 맞아 보였다. (P404-405)
저격수.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저격수가 뒷문을 통해 12305 헬레나 드라이브에 위치한 멕시코 양식의 외진 집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정보원 R.F. 가 건넨 열쇠가 있었다. 저격수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자였다. 그가 받은 명령들은 엄연한 사실, 증거에 의지했다. 그는 해석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조차 해석하지 않았다. 열정도, 연민도 없었다. 창공을 나는 도살자 새처럼 가볍게 미끄러지듯 어두운 집을 통과했다. 그는 거울에도 비치지 않았다. 가느다란 손전등의 불빛은 고작 연필 크기이지만 강렬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저격수의 의지는 강렬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악이란 곧 과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과녁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악이다. 그는 기관이 자기를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리라. 대통령을 위협한, 그로 인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 대통령의 창녀로부터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오늘 밤 그가 맡은 임무가 외부로 노출될 경우, 금발의 창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대통령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인지. 대통령과 기관은 불변의 동지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하루살이 권력이지만 기관은 영원한 권력이었으므로. 저격수는 이 여자가 나라 안팎의 불순분자 조직과 오랜 관련을 맺어왔음을 알았다. 체제 위험인물인 유대인과 결혼,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인 수카르노와의 성관계(1956년 4월 비벌리힐스 호텔에서). 그리고 카스트로 같은 공산주의 독재자들을 위한 공개적 변호에 대해 알았다. 그가 목숨을 맹세한 바로 그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선동적인 청원서에 서명한 일도 알았다. 만일 그가 계산이 아닌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면 크게 분노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넘겨 짚지 않으리라. 그의 상상들이 검토한 후 파기할 수 있도록 증거를 수집해 가방에 담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어떤 증거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일기에 적힌 내용, 서류, 저격수가 결코 알 수 없는 잠재적(혹은 실제적) 협박거리. 그중 첫 번째 물품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거실 꽃병에 꽂혀 있는 은박지 장미였다. 그는 이것을 가방에 넣었다. 그다음은 여러 장의 종이가 덧붙은 일기장이었다. 그것은 작은 식탁 위에 책, 대본, 신문, 쓰고 난 컵, 유리잔, 접시 따위와 함께 널려 있었다. 그는 재빨리 일기장을 넘겨 보았다. 증거이므로 압수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P454-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