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권력과 영광The Power and the Glory> 1961년
소설 <권력과 영광>은 멕시코에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술주정뱅이 신부’(the whishy priest)로 알려진 이름 없는 신부로, 그는 자신의 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의무감에 따라 숨어 다니며 신도들에게 성사를 베푼다. 이 신부는 자신의 삶과 신앙의 의미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독자들에게도 그의 내면적 여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은 문제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인간의 약점과 신앙의 힘 사이의 긴장, 그리고 죄와 구원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제1부]
낯선 사내가 말했다. “나는 누굴 만나려고 했습니다. 이름은 로페즈입니다.”
“아, 몇 주 전에 총살당했지.” 텐치 씨가 말했다.
“죽었습니까?”
“알다시피 이곳 돌아가는 사정이 그러니까. 그 사람 친구요?”
“아니 아닙니다.” 남자가 황급히 부인했다. “친구의 친구입니다.”
“아무튼 돌아가는 사정이 그래요.” 그는 빈틈없는 햇살 속으로 가래를 모아 뱉었다. “그 사람이 뭘 도왔다고 하던데..... 그, 불순분자들을.... 그러니까 도망갈 수 있게 말이죠. 지금은 경찰서장이 그 사람 여자애를 데리고 살지.” (P19)
집. 그건 사방에 벽이 있고, 그 안에서 사람이 잠자는 곳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였다. 집 같은 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습기 때문에 초록색으로 변해 가는 죽은 장군과 야자나무 아래 탄산수 가판이 있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작은 광장을 가로질렀다. 집이란 한 뭉치의 그림엽서 속에 든 한 장의 그림엽서와 같았다. 그 그림엽서를 섞으면 출생지인 런던 지하철 지구의 노팅엄도, 사우스엔드의 막간극도 나왔다. 텐치 씨의 아버지 역시 의사였다. 생애 첫 기억은 휴지통에 버려진 치형(齒型)을 본 일이었다. 도시에서 발굴된 네안데르탈인인가 자바 원인인가의 것과 비슷한 모양에 점토로 만들어 까칠까칠한, 이도 없는 벌린 입. 그에게는 줄곧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사람들은 메카토세트로 그를 유혹해 보려고 했지만, 운명은 이미 그를 강타했다. 어린 시절에는 문이 열리고 그 문으로 미래가 들어오는 한순간이 존재한다. 뜨겁고 습기 찬 강의 하구와 독수리도 그 휴지통에 숨어 있었고, 그는 그냥 끄집어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주위의 찬장이며 서가 등 모든 곳에는 공포와 몰락이 숨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걸 볼 수 없었다. 그 점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P20-21)
습한 냄새가 사방에서 올라왔다. 지구가 우주 공간 속으로 떨어져 나올 때의 화염에도 그 습기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다. 그래 봐야 이 끔찍한 지역의 안개와 구름만 겨우 빨아들였을 뿐이리라. 쭉쭉 미끄러지는 노새 위에서 아래위로 흔들거리며 그는 브랜디로 굳어 버린 혀를 놀려 기도했다. 「곧 체포되기를 바라옵니다……. 곧 체포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는 탈출하려 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바람이 잠잠해지지 않을 때면 몸조차 눕히지 못했던 서아프리카 한 부족의 추장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P33)
벌레들이 천장에서 폭음을 내는 동안 경위는 두 눈을 뜬 채 등을 대고 누웠다. 그는 붉은 셔츠단이 언덕 위 공동묘지 벽에 세워 놓고 총살한, 붕어눈에 약간 살이 찐 또 다른 사제를 떠올렸다. 그는 몬시뇰이었고, 그 호칭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위의 신부들에 대해 경멸감을 지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설명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야 겨우 기도를 기억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고, 회개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 허락되었다. 경위는 그걸 모두 지켜봤다. 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모두 다섯 명의 사제가 처형됐다. 두세 명은 도망갔는데 주교는 멕시코시티에 무사히 도착했고, 한 명은 모든 사제들은 결혼하라는 주지사의 법령에 순응했다. 그는 이제 강 근처에서 자신의 하녀와 살고 있다. 이렇게 그들 신앙의 약함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를 남겨 두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사제들이 실행해 온 사기술을 보여 주는 셈이다. 진정 그들이 천국이나 지옥을 믿었다면, 이 조그만 고통에 그 무한한 보상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을 테니...... 습하고 어두운 밤, 딱딱한 침대에 누운 경위는 그 육신의 연약함에 조금의 동정도 느끼지 못했다. (P43)
공포는 항상 그녀의 어깨 바로 뒤에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다가 그녀는 쇠약해졌다. 두려움에 옷을 입혀야만 겨우 볼 수 있었다. 열병, 쥐, 실업이라는 형태로. 직접 보는 것은 그녀에게 금기였다. 그 이상한 곳에 매년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 누구도 찾지 않는 묘지, 살아 있는 거대한 무덤 속에 그녀가 머무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짐을 꾸리고 떠났다. (P55)
하지만 문제는 그게 누구라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은 분명히 자랑 삼아 떠들어 댈 게 분명했다. 파드레 호세는 살찐 손가락으로 깍지를 낀 채 머리를 흔들며 로페즈가의 묘석에 부딪힐 때까지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존경받는 신부 대접을 받자 두려운 가운데서도 알 수 없는 자부심이 일기 시작했다. 파드레 호세가 말했다. “자녀들이여, 내가 할 수만 있다면야......”
갑자기 예기치 못한 고통이 묘지에 찾아왔다. 그들은 아이를 잃는 일에는 둔감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 그러니까 희망이 사라지는 일은 잘 버텨 내지 못했다. 애엄마는 눈물 없이 마른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꼭 덫에 걸려 빠져나가기 위해 기를 쓰는 짐승의 울음 같았다. 노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내밀었다. “파드레 호세......” 노인이 말했다. “여긴 우리밖에 없잖습니까....” 노인은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봤다. 파드레 호세는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무덤에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고 그는 허공에 십자가를 그었다. 그때, 마약처럼 공포가 되살아났다. 거기 부두로 가면 경멸과 안락한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파드레 호세는 모든 걸 다 포기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그들에게 애원했다. “날 내버려 두시오.” 파드레 호세가 말했다. “난 그럴 자격이 없소. 모르시오? 겁쟁이란 말이오.” 무덤 한 가운데 두 노인이 무릎을 꿇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모든 일의 구실인 것처럼 작은 관이 놓여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파드레 호세 역시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스스로를 관찰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고, 지금 자신이 온갖 굴욕을 견디며 추한 얼굴로 늙어 가는 뚱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천사들의 매혹적인 합창 소리는 조용히 사라지고 파티오에서 아이들이 놀려 대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침대로 와요, 호세. 침대로 와요> 그 어느 때보다 더 날카롭고 높고 귀를 긁어대는 소리였다. 그는 자신이 용서 받지 못할 죄, 절망의 손아귀에 붙들렸다는 걸 알았다. (P81-82)
[제2부]
사제를 태운 노새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거의 12시간 가깝게 숲 속을 헤매고 다녔으니, 처음에는 서쪽으로 가다가 군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붉은 셔츠단이 활동 중이라고 해서 이번에는 북쪽을 향해 힘겹게 습지를 지나 캄캄한 마호가니 숲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둘 다 지칠대로 지쳤고 노새는 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제는 노새의 등에서 구르듯 내려오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행복이 느껴졌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유쾌한 순간들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묘한 경험이었다. 비교할 만한 더 안 좋은 순간들은 얼마든지 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비참한 지경에 놓인다 해도 추는 좌우로 움직이며 균형을 잡는다. (P99)
거기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 마을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한 번 더 포기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비슷한 포기를 여러 번 경험했다. 제일 먼저 축일과 단식일과 금욕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성무 일과서를 더 자주 작성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중단하다가 여러 번 탈출을 꾀하던 항구에 다 놔두고 왔다. 그다음에는 제대석(祭臺石)을 없애 버렸다. 그건 너무 위험해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제대석이 없으니 이젠 미사를 올릴 수도 없게 됐다. 직무가 정지될 게 뻔했지만, 민간인의 유일한 형벌이 사형인 이런 주에서 교회의 처벌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일상 생활은 이제 금이 간 댐과 같아 그 틈으로 스며나온 망각이 이것저것 모두를 씻어 내리고 있었다. 5년 전 그는 용서받지 못할 죄, 즉 절망에 무너진 바 있었다. 이제 그 절망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그건 절망마저도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타락한 사제였고, 그도 그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제를 <위스키 사제>라고 불렀지만, 모든 태만은 시야와 기억에서 곧 사라지고 만다. 그 태만들이 은밀한 곳에 쌓이다가 언젠가는 은총을 모두 막아 버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계속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과 피로와 주술에 사로잡힌 채, 수치스러울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P100-101)
그는 책임감이라는 막중한 짐을 자각했다. 그건 사랑과 구분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이런 게 아마 부모의 마음인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손으로 성호를 긋고 고통을 덜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이런 식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육체의 하찮은 움직임과 희생할 뿐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고통을 면하는 길이다. 물론 오랜 세월동안 그는 많은 영혼들에 책임감을 느껴 왔지만, 이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이보다는 가벼웠다. 신이 정상참작을 하리라는 건 믿을 수 있지만, 천연두와 기아와 인간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얘야.” 브랜디 병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그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녀갔을 때 그 애에게 영세를 내렸다. 그때는 주름살 많은 늙은 얼굴을 가진 누더기 인형 같았다.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때는 후회뿐이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힘든 법이다. 그들 대부분에게 사제라고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사제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에게도. (P110)
“다음.” 심문은 계속됐다. 이름은? 직업은? 결혼은? 그러는 동안 태양은 숲 너머 높이 떠올랐다. 사제는 손깍지를 끼고 서 있었다. 다시 죽음이 유예됐다. 그는 경위 앞으로 뛰어나가 <내가 바로 네놈이 찾는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어마어마한 욕망을 느꼈다. 곧바로 총살될까? 그러면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그릇된 망상이 그를 유혹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정도 높이에서 바라보면 사람들은 이제 막 싸움을 벌이려는 육식동물들처럼 보일 터였다. 그놈은 죽은 고기를 바라고 작은 점처럼 보일 만큼 높이 떠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죽음은 고통의 종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평안이 있으리라 믿는 것도 일종의 이단 행위였다. (P125)
때리려고 치켜드는 마리아의 손, 어스름 속에서 애어른처럼 떠들어 대는 페드로, 숲을 뒤지는 경찰들. 폭력은 도처에 있었다. 그는 조용히 기도했다. 「아, 하느님, 통회하지 않겠사오니 어떤 식으로든 죄 중의 상태로 저를 죽여 주시고, 다만 이 애를 구하소서.」 그는 영혼들을 구제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한때 그 일은 정말 간단했다. 축복의 기도를 내리고, 조합을 만들고, 창살이 달린 창 안에서 할머니들과 커피를 마시고, 검은 장갑을 끼고 작은 향으로 새로 지은 집을 축성하는 일……. 그건 돈을 모으는 일만큼이나 쉬웠는데 이제는 신비로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그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절망적으로 감지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낄낄대며 도망가려고 하는 아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랑한다, 얘야. 난 네 아버지고 너를 사랑한단다. 넌 알고 있어야 해.」 (P134~135)
라는 단어를 들으니,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애인의 이름과 같은 꽃 이름을 낯선 남자가 입에 올리는 걸 들을 때처럼 그의 가슴이 쓰라렸다. 그 단어 덕분에 그는 비참한 행복에 푹 빠져들었다. 그 단어를 떠올리자, 아이가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쓰레기 더미 옆 나무 아래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딸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했다. 무심함을 가장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는 다시 라고 되뇌었다. (P201)
어디로 가든, 어느 정도 가면 물론 마을이 나올 것이다. 계속 가면 해안에, 태평양에, 과테말라로 가는 철도 선로에 닿을 것이다. 거기에는 길도 있고 자동차들도 있을 것이었다. 기차를 마지막으로 본 건 10년 전의 일이었다. 해안을 따라 검은 선이 쭉 이어지는 지도를 그는 상상할 수 있었다. 50마일, 1백 마일 너머로 펼쳐진 미지의 땅도 그는 볼 수 있었다. 거기가 바로 그가 지금 있는 곳이었다. 인간들로부터는 완전히 벗어난 셈이다. 이제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자연뿐이었다.
가던 대로 그는 계속 걸었다. 버려진 마을, 죽어 가는 잡종 개와 구둣주걱이 있는 바나나 농원으로 다시 돌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니까. 기어 내려가고 또 기어 올라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수밖에 없었다. 비가 지나간 뒤 협곡의 맨 위에 서서 바라보니 젖은 회색 장막이 출렁이는 아래로 일그러진 땅과 숲과 산들뿐이었다. 그건 꼭 절망을 바라보는 일 같았다. (P202)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가 또박또박 말했다. “저도 사제입니다.”
그건 종말과 같았다. 이제 더 이상 희망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내 10년에 걸친 추격이 끝났다. 그의 주위로 침묵이 찾아왔다. 그곳은 세상의 축소판 같았다. 욕정과 범죄와 불행한 사람들이 꽉 들어차 그 악취가 하늘까지 이르는, 하지만 시간이 짧다는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거기서도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P202)
그것은 종말로 향하는 시간인 동시에 모든 걸, 심지어는 탈출까지도 준비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만약 신이 그를 탈출시키고자 한다면, 그분은 사격하는 분대 병력 앞에서도 그를 낚아챌 수 있으리라. 하느님은 자비롭다. 그게 어떤 종류의 평화라도 하느님이 평화를 주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스스로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그가 아직 영혼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가 무슨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늘 쫓겨 다녔다. 자기 대신 목숨을 빼앗기는 사람이 있을까 봐 마을에는 감히 들어갈 생각도 못했다. 누군가는 어쩌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도 참회하지 못한 채 죽었을 수도 있다. 그가 완고하고 자만에 가득차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법은 없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미사조차 올릴 수 없다. 포도주도 없다. 그건 경찰서장의 마른 목구멍을 적시며 사라졌다. 모든 건 섬뜩할 정도로 복잡했다. 여전히 죽음이 무서웠고, 아침이 찾아오면 더욱 죽음을 무서워하게 될 테지만, 다만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는 죽음에 끌리기 시작했다. (P209)
[제3부]
“꽤 이상한 기분일 것 같습니다.” 사제가 말했다. “교회도 있고, 대학도 있는 도시라니.....”
“그러시겠죠.” 레어 씨가 말했다. “여동생과 저는 루터교 신자입니다. 우린 당신들 교회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부님. 제가 보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워요. 사람들은 굶주리는데.”
레어 양이 말했다. “그만해요, 오빠. 그게 신부님 잘못은 아니잖아요.”
“사치라고요?” 사제가 물었다. 그는 잔을 손에 들고 질그릇 옆에 서서 길고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 비탈진 풀밭을 바라보며 생각을 모아 보려 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아마 레어 씨가 옳을 것이다. 그는 한때 매우 안일하게 살았으며, 이곳에서도 이미 다시 나태해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성당에 있는 금박들을 보세요.”
“그건 그냥 칠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사제가 말했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사흘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 아무 일도. 그는 레어 씨의 신발이 우아하게 신긴 자신의 발과 레어 씨의 여벌 바지가 입힌 자기 다리를 내려다봤다. 레어 씨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 하시진 않겠지. 여기 있는 우린 모두 크리스천이니까.”
“물론 기분 나쁘게 들리진 --”
“제가 보기에 당신들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을 가지고 너무 요란을 떠는 것 같습니다.”
“예? 그러니까 --”
“단식이라든가.... 금요일에는 생선을 먹는다든가....”
맞았다.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그런 규율들을 지키던 시절을 떠올렸다. (P259-260)
사람이 얼마나 빨리 모든 걸 잊고 과거로 돌아가는지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는 아까 거리에서 콘셉시온 시절의 말투로 말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지도 못한 채 도망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화가 없다니. 그 자신이 부패해서인지 혀 끝에 닿는 브랜디에서 썩은 내가 났다. 비겁과 열정이라면 신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지만, 신성함을 가장한 것은 과연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일까? 그는 감옥에서 만난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의 자기만족을 뒤흔든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기분으로 브랜디를 마셨다. 혼혈인 같은 자들은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구원은 번개처럼 그런 사악한 심장에 가서 꽂히는 것이니. 하지만 신성함을 가장했을 때 허용되는 건 저녁 기도와 신자 모임과 장갑 낀 손에 공손히 와 닿는 입술의 느낌 정도일까, 다른 모든 것들은 배제된다. (P269-270)
사제는 무릎을 꿇고 앉아 숨소리를 들으려고 사내의 입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역겨운 냄새가 치올랐다. 토사물 냄새와 시가 냄새, 퀴퀴한 술 냄새가 뒤섞였다. 들릴락 말락 한 영어가 그의 귀에 닿았다. 「튀어요, 신부님.」 문밖 폭풍 앞의 햇살 속에서는 메스티조가 무릎에 조금 힘이 풀린 듯 오두막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살아 있는 거 맞소?」 사제가 활기차게 말했다. 「서둘러야겠군. 얼마 남지 않았으니.」
「튀라고요, 신부님.」
「나를 필요로 한 사람이 당신 맞소? 가톨릭 신자요?」
「튀어요.」 다시 목소리가 속삭였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배운 것 중 기억할 수 있는 표현은 그것뿐이라는 듯. (P297)
“우리에겐 사실들이 있고, 우리는 그걸 바꾸려는 게 아니오. 부자든 가난하든 세상은 불행하다는 것. 성인이라면 몰라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지. 이 삶에서 소소한 고통에 너무 마음을 쓰는 건 무가치한 일이오. 한 가지 믿음만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지. 1백년 안에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 말이오.” (P309)
“그 점에서 우리는 또 차이가 나는 거라오. 당신 같은 경우엔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목표를 향해 노력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오. 그리고 당신들 쪽이라고 모두가 좋은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결국에는 다시 굶주림과 매질과 물질주의가 생긴다는 얘기지. 하지만 내가 겁쟁이가 된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건 없다오. 다른 모든 사제들도 마찬가지지.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입에다 하느님의 육신을 넣어 줄 수 있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죄를 사해 줄 수도 있소. 성당의 모든 사제들이 나와 같다고 해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소.” (P310)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부정직한 인간은 아니오. 당신은 내가 제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죽음이 눈치채지도 못하게 그들을 낚아채면 모두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라고 말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나 자신도 믿지 않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사람들에게도 한 일이 없소이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심 같은 것에 대해선 아는 바가 하나도 없소. 인간의 마음이 그분에게 얼마나 추악하게 보이는지도 나는 모르오. 하지만 이것만은 안다오. 만약 이 주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나 역시 같은 신세가 될 거요.”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무슨 다른 대접을 원하는 게 아니오. 내가 원하는 건 정의일 뿐이오. 그게 다라오.” (P318)
이것이 바로 내가 항상 모든 이들에게 느껴야 했던 감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혼혈인, 경위, 심지어는 몇 십 분 동안 함께 앉아 있었을 뿐인 치과 의사와 바나나 농원의 그 아이에게로 생각을 돌려 보려고 했다. 끄떡도 하지 않는 무거운 문을 밀듯 주의를 한곳으로 모으며. 모두 각자의 위험에 처해 있던 그 사람들에게로. 「그들 모두를 보살피소서.」 그는 기도했지만, 기도하는 순간 그의 신경을 쓰레기 더미 옆에 서 있던 자기 딸에게로 돌아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실패였다. (P331)
그는 혼란스러웠고, 마음은 다른 것들에 가 있었다. 사람들은 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문득 감방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놀란 모습, 동시에 어리석고 하찮은 사람의 모습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망친 마당에 자기만은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다고 생각했다니, 그 얼마나 멍청한 일이었는가. 나란 인간은 얼마나 구제불능인가,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쓸모없는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구나. 나란 인간은 이 세상에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그의 부모는 모두 죽었다. 곧 그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아마 그 순간 그가 겁낸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공포마저 뒤로 물러섰다. 아무런 일도 한 것 없이 빈손으로 하느님에게 가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좌절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 순간, 성인으로 사는 건 꽤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다. 그건 약간의 자기 절제와 약간의 용기만 갖추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약속 장소에 몇 초 늦게 가서 행복을 놓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그는 확실히 알게 됐다.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건 단 하나 뿐이라는 것. 그건 바로 성인이 되는 일이었다. (P334-335)
[제4부]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해진 절차인 양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간부가 한쪽으로 물러서자 소총이 올라갔고, 자그마한 남자는 갑자기 두 팔을 버둥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럴 때 하고 싶은 말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어차피 정해진 듯 판에 박힌 말이겠지만, 입이 바짝 타들어 간 모양인지 <용서해 주십쇼>처럼 들리는 말을 빼고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소총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텐치 씨를 흔들었다. 꼭 창자 속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속이 메슥거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눈을 뜨고 봤더니 간부가 권총을 권총집에 넣고 있었고, 자그마한 남자는 정해진 것처럼 벽 옆에 쌓여 있었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치워야 할 물건인 것처럼. 안짱다리 남자 둘이 재빨리 다가갔다. 거긴 투우장이었고, 죽은 건 수소였으며, 이제 더 이상 나올 건 없었다.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