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더 하우스> 2000년
라쎄 할스트롬이 감독을 맡고 마이클 케인, 토비 맥과이어,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을 맡은 영화 〈사이더 하우스〉는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마이클 케인)과 각색상을 받았다.
미국 메인 주에 세인트 클라우드라는 고아원이 있다. 그리고 고아원의 의사이자 남아관 책임자이며, 사실 고아원의 설립자이기도 한 <월버 라치>라는 사람이 있다. 이곳에서 라치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낙태 수술을 하거나 분만하고 입양을 시킨다. 네 번 입양을 갔다가 파양되어 되돌아온 호머 웰즈는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의사를 돕게 되고 나름대로 의료 기술을 익히지만 태아도 살아있는 생명이라며 낙태 수술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젊은 시절 밖에 나가 방황도 하고 사랑도 하고 나름대로 사람들과 엮어 살아가면서 세월이 흐르고 결국에는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와 라치가 하던 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사과농장의 벽에는 노동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붙어 있다. '침대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 '술 마시고 지붕에 올라가지 말라'등의 무용지물과도 같은 문구다. 우리나라에도 존재할지 모르는 '사과농장의 규칙'이다.
사과농장의 규칙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낙태금지 법규와 연결된다. '태아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거부하는 닥터 '라치'를 극의 중심에 뒀다. 오히려 출산 후 버려지는 무수한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해 낙태수술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공공연하게 낙태시술을 하는 라치를 현실과 대조시킨다.
라치를 아버지로 여기고 자랐지만, 그의 낙태사상에 동의하지 못하고 바깥세상으로 떠나는 '호머 웰즈'는 교훈적 메시지를 품은 전령사다. 불륜을 범하고, 주위 사람들을 속이며 15년을 살아가는 호머의 모습을 통해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 대체 라치냐, 호머냐고 묻는다.
[1]
고아원 의사이자 남아관 책임자이며, 사실 고아원의 설립자이기도 한 월버 라치는 자칭 이 마을의 역사가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맨 처음 ‘클라우즈’라고 불렸던 이 벌목촌은 “아무 데나 ‘세인트(聖)’을 붙여 자연적으로 얻기 힘든 은총을 부여하려는 오지인들의 광신적인 본능”에 따라 ‘세인트 클라우즈’가 되었다. 그리고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그대로 불리다가 이 벌목촌의 기원에 대해 무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어떤 이가 ’를 덧붙이면서 St. Clouds가 아니 St. Cloud’s가 되었다. 그러나 그즈음 이 마을은 벌목촌이라기보다는 제재소 마을에 가까웠다. 숲은 사방 수마일에 걸쳐 벌거숭이가 되었다. 강가에 통나무들이 가득 떠 있고 나무에서 떨어졌거나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절름발이나 불구가 된 사내들이 우글거리는 벌목촌의 풍경 대신, 방금 자른 판자들을 높고 반듯하게 쌓아놓고 흐릿한 태양 아래에서 건조시키는 광경을 쉽게 볼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톱밥 가루가 떠돌았고 그 입자들은 가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했지만 주민들의 재채기와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간질거리는 콧구멍과 헐떡거리는 폐에 늘 존재했다. 부상자들도 멍이나 부러진 뼈가 아닌, 제재소 톱에 베여 꿰맨 자국이나 아예 잘려나가 병신이 된 부위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다녔다. 날카로운 전기톱 소리는 축축한 안개와 마찬가지로 세인트 클라우즈를 떠나지 않았다. 눈 속에 갇힌 춥고 습한 긴긴 겨울에도, 가랑비 속 악취 나는 찜통더위(이따금 거센 폭풍우가 찾아올 때나 숨통이 트이는)의 여름에도. (P15-16)
메인 주의 이 지역에는 봄이 없었고 그나마 봄이라고는 불릴 만한 3월과 4월도 눈이 녹아 생긴 진창의 계절일 뿐이다. 이 시기가 되면 벌목 작업을 하던 중장비가 가동을 멈추면서 조업도 중단되었다. 진창 때문에 도로의 통행이 불가능해져서 주민들은 집에 갇혀 지냈고, 봄 강은 물이 불고 물살도 빨라져서 아무도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봄은 사건을 의미했다. 음주와 싸움, 매춘과 강간. 봄은 자살의 계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봄이면 고아의 씨들이 과도하게 뿌려졌다.
그렇다면 가을은? 닥터 월버 라치는 고아원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 비슷한 자신의 일지에 가을에 대해 썼다. 그의 일지는 늘 “이곳 세인트 클라우즈에서는”이라는 구절로 시작되거나 아니면 “바깥세상에서는”으로 시작되었다. 가을에 대해 닥터 라치는 이렇게 써놓았다. “바깥세상에서는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다. 사람들은 봄과 여름의 수고로 맺은 결실을 거둬들인다. 이 결실은 겨울이라고 불리는 비성장의 계절과 긴 잠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 세인트 클라우즈의 가을은 5분이면 지나간다.”
하기야 고아원에서 어떤 날씨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휴양지’의 날씨? 또 광원이 ‘청정’ 마을에서 번창할 수 있기나 할까?
일지에서 닥터 라치는 종이에 대해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개미만한 글씨로 앞뒷장을 빽빽이 채웠다. 닥터 라치는 여백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곳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숲의 적은 누구일까? 버려진 아이들의 사악한 아비들은 누구며, 강이 죽은 나무들로 막히고 계곡 주변의 숲이 발가벗겨져 홍수에 휩쓸려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만족을 파괴자(처음엔 수액으로 끈적거리는 손과 짓찧어진 손가락을 가진 벌목꾼을, 그다음엔 손가락이 잘려나간 거칠고 갈라진 손을 가진 제재소 노동자를 하수인으로 보낸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찌하여 나무에 대한 탐욕은 채워지지 않는 걸까?..... 누구일까?” (P16-17)
인간의 육체는 분명 아이를 원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정신은 그 문제에 대해 모호하기만 하다.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아이를 원치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갖게 만들기도 한다. 상대 역시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어떤 이들은, 뱃속에 원치 않는 생명이 자라고 있음이 분명할지라도 그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태어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런 주장을 고집하는 걸까? 닥터 라치는 그것이 궁금했다. (P26)
라치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곳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단 한가지다. 앞으로도 고아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어차피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고아들을 돌보는 수밖에 없다.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 역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아원은 어차피 파산할 수밖에 없다. 임신한 모든 여자가 아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자들이 원치 않는 아기의 출산을 거부할 권리를 갖게 되는 보다 개명된 시대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시대에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혼란과 공포에 빠지는 여자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서 원치 않는 아기들이 태어날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생명이었건만 불의의 사고나 계획적, 우발적 폭력 행위로 인해 고아가 되고 마는 아기들도 있게 마련이며 그것 또한 문제가 아니다. 이곳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우리는 그러한 추한 현실을 해결 가능한 문제인 양 여기며 우리의 제한된 힘과 상상력을 낭비한다. 이곳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우리의 문제는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호머 웰즈다. 우리는 지금까지 호머를 매우 성공적으로 키워왔다. 우리는 호머가 고아원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도록 만들었으며 바로 그것이 문제다. 만일 주나 정부에서 설립한 기관에 가정에나 어울릴 법한 사랑을 심으려고 노력한다면, 만일 그 기관이 고아원이고 사랑 심기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된다. 더 나은 삶을 향해 가는 간이역이 아닌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역이며 고아들이 원하는 유일한 역인 고아원 말이다.
잔인한 소리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고아원에서는 사랑을 억제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아원에서 사랑을 억제하지 못하면 고아들이 떠나기 싫어하는 고아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인트 클라우즈만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는 호머 웰즈 같은 진짜 고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절대자(하느님이든 어떤 이름이든 관계없이)의 용서를 구한다. 나는 고아 한 명을 만들어냈다. 그 고아는 호머 웰즈이며 영원히 세인트 클라우즈에 속하게 될 것이다.” (P45-46)
월버 라치는 손에 든 병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는 ‘태동’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태동이 있다 함은 임산부가 태아의 움직임을 느낀다는 뜻이며 임신 기간의 중반부인 임심 4개월에서 5개월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종교를 가진 일부 의사들은 태동이 느껴지면 태아가 영혼을 갖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월버 라치는 인간이 영혼을 지녔다는 믿음 자체를 거부했지만 태아의 움직임을 처음으로 감지하는 ‘태동’이 있기 전의 임신중절을 합법화한 19세기 중반까지의 단순한 관습법이 사리에 맞다고 여겼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의사로서 태동 이전에 임신중절을 하는 것이 임산부에게 위험하지 않다고 믿는다는 점이었다. 월버 라치는 석 달이 지나면 태동이 있건 없건 태아가 자궁에 달라붙어서 때어내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P89)
월버 라치는 포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의료사에서 낙태가 합법화되었던 지난 세기를 떠올렸다. 당시 의대생들은 단순한 낙태보다 더 복잡한 처치들도 배웠다. 태아의 머리를 절단하는 자궁 내 단두술과 태아 분쇄술이 대표적이었고 이 처치들은 더 위험한 제왕절개 대신 이용되었다. 라치는 그 이름들을 웅얼거렸다. 자궁 내 단두술, 태아 분쇄술. 그는 포틀랜드에 도착했을 즈음 그 문제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아이들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 그의 동료들은 이것을 ‘주님의 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낙태 시술자로서 어머니들을 구제했다. 그의 동료들은 이것을 ‘악마의 일’이라고 불렀지만 그에겐 이것 역시 주님의 일이었다. 맥스웰 부인도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진정한 의사라면 무한히 넓은 아량과 따뜻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P122)
호머는 처음 참관하게 된 분만 현장에서도 감동했다. 그를 감동시킨 건 닥터 라치의 어떤 특별한 기술도, 앤젤라와 에드너의 의례적이고 효율적인 처치도 아니었다. 그를 감동시킨 건 닥터 라치의 산과적 처치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히 진행된 산모와 태아의 자연적인 분만 과정이었다. 분만의 정확한 리듬(그것으로 시계를 맞춰도 되리라), 산모의 태아를 밀어내는 근육의 힘, 태어날 아기의 절박함. 그 과정에서 호머 웰즈에게 가장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기가 태어나 처음으로 폐를 움직이게 되는 환경, 즉 새로운 세계를 아기가 너무도 분명하게 적대적이고 비우호적으로(시시하고 재미없게는 아니지만)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만일 아기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도로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멜로니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기가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고 말했을 터였다. 호머는 멜로니와의 섹스가 아무리 즐거워도 그 행위가 출산의 고통을 내재하고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 괴로웠다. (P191-192)
“호머, 듣고 있니?” 수술이 끝났을 때 월버 라치가 물었다.
“예.” 호머 웰즈가 대답했다.
“나는 이 일이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알겠니? 임산부 자신의 선택이라는 거지. 임산부에게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알겠니?” 라치가 물었다.
“맞아요.” 호머 웰즈가 대답했다. (P196)
호머는 닥터 라치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건 누구 한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라치의 탓이 아니었으며 라치는 자신이 믿는 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월버 라치가 두 간호사 앤젤라와 에드너에게 성자였다면 호머 웰즈에겐 성자이자 아버지였다. 라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았다. 그러나 태동이 있기 전에는 낙태를 해도 된다는 그의 생각은 호머 웰즈에겐 먹히지 않았다. 호머는 그 존재를 태아라고 부르든 배아라고 부르든 태아 산물이라고 부르든 호칭과 관계없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낙태는 — 그 일을 뭐라고 칭하든 — 생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는 쓰리 마일 펄즈 아기의 열린 가슴 속에 완벽하게 전시된 상처 입은 폐동맥을 바라보았다. 라치가 이것을 뭐라 부르든 그건 그의 선택이라고 호머는 생각했다. 라치가 이것을 태아라고 여긴다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호머에게 이것은 아기였다. 라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에게도 선택권이 있다고 호머는 생각했다. (P298-299)
호머가 조용히 물었다. “제가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지 여쭸던 거 기억하세요? 원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참관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기억하세요?”
“꼭 참관해야만 돼.” 월버 라치가 큐렛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말했다. 그의 호흡은 얕으면서도 규칙적이었다.
닥터 라치가 말했다. “넌 최소한 참관자로서 아마추어적으로 보조하며 수술 과정을 배워야 해. 결국 낙태를 하기로 결정하든 안 하든.”
라치가 물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여자가 절대 낙태는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아기를 낳아 고아 하나를 더 만들겟다고 하면 내가 반대하니? 내가 안 된다고 해?”
라치는 자궁벽을 긁어내며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 낳게 하지, 빌어먹을. 넌 여기서 태어나는 아기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 아이들 앞에 장밋빛 미래가 놓여 있을 거라고 여기니? 그래?”
라치가 계속 말했다. “아니지. 그렇다고 내가 반대하니? 반대 안 해. 낙태를 권하지조차 않지. 나는 그들이 원하는 걸 줄 뿐이야, 고아든 낙태든.”
“어쨌든 저도 고아예요.” 호머 웰즈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나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니? 그렇지 않아.” 닥터 라치가 말했다.
“그러길 바라시잖아요.” 호머 웰즈가 대답했다.
“나를 찾아오는 여자들은 바라는 대로 되는 사람들이 아니지.” 월버 라치는 그렇게 말하고 중간 크기의 큐렛을 내려놓고 작은 걸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호머 웰즈는 작은 큐렛을 준비하고 있다가 기계적으로 건넸다.
“전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호머가 그렇게 운을 뗐으나 닥터 라치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숨지 말아야지. 외면해서도 안 되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면, 모든 일에 참여하려면 모든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너였어. 너한테 아무것도 숨겨선 안 된다고. 나는 바로 너한테 그걸 배웠어! 그래, 네가 옳아.” 라치는 그렇게 말한 뒤 마지막 말을 정정했다. “네가 옳았어.”
“태아는 살아 있어요. 이유는 그것뿐이에요.” 호머 웰즈가 말했다.
“네가 하고 있는 일에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도, 그걸 중단시키는 것도 포함되지. 네 입장은 잘 알고 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넌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어. 하지만 모르는 건 안 돼. 아예 배우지도 않아서 그 일을 할 수 없는 건 안 돼.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예요.” 호머 웰즈가 말했다.
“좋아, 그럼. 네 의지에 반해, 이를테면 임산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술을 해야만 할 때도 있으니까.” (P328-329)
닥터 라치는 꿀과 젤리를 허겁지겁 먹어대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저 두사람은 하루 동안 고아들과 놀아주고 모든 아이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여기 온 걸까? 그는 그런 궁금증에 적었다. 그가 만약 캔디를 봤더라면 그들이 여기 온 이유를 금세 알았을 터였다. 월버 라치는 강렬한 불빛 아래서 여자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에 여자들의 눈을 똑바로 보는 데 서툴렀다. 이따금 앤젤라는 닥터 라치가 여자들을 똑바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걸 본인도 알까 궁금했다. 그녀는 여자를 똑바로 보지 않는 것이 산부인과 의사들의 직업병 비슷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경향이 있는 남자들이 산부인과라는 분야에 이끌리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호머 웰즈는 여자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앤젤라는 바로 그런 이유로 호머가 수술대에 누운 여자들을 보기를 꺼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호머가 닥터 라치와 낙태 환자의 음모를 면도하는 문제를 놓고 입씨름할 때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때마다 호머는 이렇게 말했다. 꼭 면도를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은 음모를 면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연예사업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니?” 닥터 라치는 그렇게 응수했다. (P341-342)
은인, 호머는 은인을 만난 거야! 월버 라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호머 웰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메인의 왕자’를 만난 거야. ‘뉴 잉들랜드의 왕’을 본 거야. 그리고 그의 성에 초대 받았어.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무수히 읽었지만 이제야 스티어포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어린 데이비드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 눈에 대단한 힘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그에겐 달빛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베일에 가려진 미래 따윈 없었다. 내가 꿈속에서 밤새 걸어다니는 정원에 그의 희미한 발자국은 없었다.”
“베일에 가려진 미래 따윈 없다.” 호머 웰즈는 그렇게 웅얼거렸다. 난 바닷가로 가겠어! (P349)
호머 웰즈는 바깥사회의 이런 면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 좋은 사람들조차도, 왜냐하면 윌리는 분명 좋은 사람이니까 — 누군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하다가도 정작 본인 앞에서는 아주 살갑게 굴곤 했다. 세인트 클라우즈에서는 비판이 노골적이라 숨길 수 있다 하더라도 숨기기가 어려웠다. (P440)
[2]
호머 웰즈는 윌 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에 관심이 없어서 전쟁 소식에 어두웠다. B-24는 4발엔진 대형폭격기로 교량, 정유공장, 연료공급창, 철로 따위를 폭격하는 전략적 폭격에 이용되었다. 그러니까 산업을 파괴했지 군사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진 않았다. 사람들은 중형 전술폭격기 B-25가 맡았다. 윌리는 메인 대학에서 배우는 식물학이나 그 어떤 과목보다 더 열심히 전쟁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나 당시 메인에서 ‘유럽 전쟁’이라고 불린 그 전쟁은 호머에겐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 가족을 가진 사람들만이 전쟁을 걱정하는 법이니까. (P56)
월버 라치는 이런 글을 남겼다. “고아는 우울해지면 거짓말을 하고 싶어진다. 거짓말은 최소한 하나의 활기찬 활동으로서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에 대해 갑작스러운 책임을 지고 기민함을 유지하게 만든다. 거짓말을 하려면 기민해야만 하고 그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게 하려면 기민함을 유지해야 한다. 고아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 운명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줘도 여간해선 믿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면 자기 인생을 주도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고아들에겐 거짓말이 특히 유혹적이다. 나도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기에 그걸 안다. 나는 거짓말하는 걸 좋아한다.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운명을 속인 듯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운명과 다른 사람의 운명을.” (P126)
에테르를 마시며 조제실 천장에서 달음박질치는 별들을 보고 있는 월버 라치는 그냥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사치인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버틴다고 해도 발각될 수 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낙태시술자는 만약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는 이 업에 너무 오래 종사해왔다. 때가 되기 전에 누가 나를 고발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고 노인 라치는 걱정했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는 또 하나의 적을 만들고 말았다. 임신 8개월의 여자가 4개월밖에 안 됐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낙태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히스테리를 부리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는 있었다. 만일 단호함이 요구되면 앤젤라에게 넘길 수도 있었고 에드너는 손 잡아주는 걸 더 잘했다. 그러면 조만간 차분해졌다. 그는 임신이 너무 많이 진행되어 낙태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면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모든 걸 안전하게 처리해주겠다고, 아기를 낳아 입양하는 것이 늦은 낙태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낫다고 임산부를 설득시켰다. 대개는 그런 설득이 통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히스테리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랜 증오로 인한 평온함이 그녀를 침착해 보이게 만들었다. (P160-161)
회복실에 간호사도 한 명 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간호사로 그들 나이 또래의 수수한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캐롤라인이었는데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의사들에겐 단호했다.
“호머, 에테르에 대해 많이 아네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과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호머가 웅얼거렸다.
“병원은 완벽한 곳이 아니죠. 사람들은 병원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만. 그리고 의사들도 완벽하지 못해요. 스스로 완벽하다고 착각할 뿐이지.” 캐롤라인이 말했다.
“맞아요.” 호머 웰즈가 대꾸했다. (P188)
그는 규칙에 대해 생각했다. 손을 다친 선원은 누군가의 규칙에 따르는 칼싸움을 한 것이 아니었다. 로즈 씨와의 싸움에는 로즈 씨 자신의 규칙이(그게 뭔지는 몰라도) 있을 터였다. 로즈 씨와의 칼싸움은 작은 새에 쪼여 죽는 것과 흡사하리라고 호머 웰즈는 생각했다. 로즈 씨는 예술가이며 코끝이나 단추, 젖꼭지만 살짝 벨 것이다. 주스 공장의 진짜 규칙은 로즈 씨가 정한다.
그렇다면 세인트 클라우즈의 규칙은 무엇일까? 라치의 규칙은 무엇일까? 닥터 라치는 어떤 규칙을 지키고 어떤 것을 깨거나 고쳤을까? 어떤 신념을 가지고? 분명 캔디도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규칙? 윌리는 규칙이 무엇인지 알까? 그리고 멜로니..... 멜로니도 어떤 규칙을 따르고 있을까? 호머 웰즈는 그런 궁금증에 젖었다. (P195)
편지에서 닥터 라치는 호머에게 물었다. “세인트 클라우즈에서의 삶이 어떤지 잊었느냐?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이제 타협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아인 네가 말이다. 어떻게 해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잊었느냐? 타협에 대해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항상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녀를 사랑한다니, 그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라. 설령 그것이 네가 마음에 둔 길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어라. 그녀가 원할 때. 반드시 네가 적절한 때라고 생각하는 때일 필요도 없다. 그럼 그녀는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녀에게 남겨진 것만을 줄 수 있겠지.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보다 적다 한들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느냐? 그녀가 자신의 백 퍼센트를 너에게 줄 수 없다고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그녀의 일부가 버마에 있다고 남은 부분가지 거부하겠느냐? 전부가 아니면 싫다고 버티겠느냐? 그런 걸 쓸모 있는 사람의 자세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 낭만적이진 않군요.” 앤젤라가 에드너에게 말했다.
“윌버가 언제 낭만적이었던 적이 있나요?” 에드너가 물었다.
“당신의 충고는 지독히도 실용주의적이에요.” 앤젤라가 닥터 라치에게 말했다.
“흠, 내가 바라는 바요!” 닥터 라치가 편지를 봉하며 대꾸했다. (P209-210)
호머 웰즈는 혹시 생모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생모가 내 생각을 할까, 생모가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상상하면서 무수한 나날을 보냈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윌리의 모호한 상태를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고아는 중요한 사람의 ‘실종’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올리브와 캔디는 호머의 침착함을 무관심으로 오해하고 이따금 그에게 화를 냈다.
“난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걸 하고 있을 뿐이야.” 호머는 캔디를 겨냥하여 특히 강조해서 덧붙였다. “그냥 기다려보는 것.” (P211)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막상 출산이 완료된 후에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보호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태어나지 않은 영혼에 대한 사랑을 공언하는 사람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는 기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버려진 아이들, 학대받는 아이들을 돕는 데는 인색합니다! 그들은 태아에 대해서는 그토록 신경을 쓰면서 버려지거나 학대받는 아이들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임신사고의 희생자들을 비난하고 가난한 이들을 비난합니다. 가난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를 돕는 방법 한 가지는 가족의 수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선택의 자유가 명백히 민주적이며, 명백히 미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 루스벨트 부부는 국가적 영웅입니다! 당신들은 저의 영웅입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이 나라의 반미국적이고 반민주적인 낙태법을 용납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 닥터 라치는 편지 쓰기를 멈추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에드너가 조제실 문으로 가서 뿌연 유리창이 끼워진 문을 덜거덕거렸다.
“임신사고를 일으킨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민주사회야? 우리가 뭐야, 원숭이들이야? 사람들에게 자기 자식을 책임지라고 하려면 먼저 자식을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권을 줘야지. 당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게 뭐야? 당신들은 미치기만 한 게 아냐! 당신들은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이야!” 월버 라치가 하도 요란하게 고함을 질러대서 에드너는 조제실로 들어가 그를 흔들었다. (P221-222)
월버 라치의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저는 각하와 영부인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두 분께선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계셨지요. 감독파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낙태에 관해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각하께서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35퍼센트에서 45퍼센트에 이르는 인구증가율은 계획되지 않은, 원치 않는 출산 탓일 수도 있습니다. 부유층은 대개 아기를 원하며 부유층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17퍼센트만이 원치 않는 임신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42퍼센트가 원치 않는 임신에 의한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그건 절반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벤 프랭클린의 시대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프랭클린 대통령은 인구 증가를 위해 애썼지요. 지금 행정부의 목표는 현 인구에게 충분한 일거리를 제공하고 현 인구에 더 나은 삶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들을 옹호하는 이들은 살아 있는 생명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루스벨트 각하, 그 누구보다도 각하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은 태어난 생명만큼 비참하지도,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부디 태어난 생명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P230-231)
그래서 그들은 그해 겨울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젊은 신혼부부의 생활을 즐겼다. 그들은 그토록 즐겁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점점 배가 불러가는 사랑스러운 젊은 여인은 그 어떤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그녀의 아름다움과 육체적인 에너지는 여아관 원생들을 고무시켰다. 닥터 라치는 호머에게 소아과에 대해 더 가르쳐주는 일에 전념했다. 호머의 산과적 처치 능력은 이미 흠잡을 데가 없었고 호머가 낙태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겠노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호머의 그런 완강한 태도는 캔디까지 당황하게 만들어서 그녀는 호머에게 즐겨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시 한번 설명해봐. 어떻게 낙태 자체는 반대하지 않으면서 나쁜 짓이라고 느끼는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겠다는 건지.”
“맞아.” 호머 웰즈가 말했다.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제대로 이해한 거야.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어. 난 낙태를 원하는 이는 누구나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싶진 않아. 그걸 이해하기가 뭐가 그렇게 힘들어?”
“그래.” 캔디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계속 그에게 묻곤 했다. “넌 그걸 나쁜 짓이라고 느끼지만 그래도 그게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맞지?”
“맞아, 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본인이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자식을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더 개인적인 문제가 있을까?” 호머 웰즈가 말했다. (P264-265)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건 한 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사람이 괄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P319)
“한집에서 살자고? 네가 윌리와 결혼해도?” 호머 웰즈가 물었다.
“가족처럼.” 캔디가 말했다.
“가족처럼.” 호머 웰즈가 말했다. 가족이란 말이 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고아는 영원한 아이이며 고아는 변화를 싫어한다. 고아는 움직이는 걸 싫어하며 고아는 정해진 일과를 좋아한다.
15년 동안 호머 웰즈는 주스 공장에는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 만큼이나 많은 규칙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년 새로 규칙을 벽에 붙였다. (P326)
“원장님은 종교를 경멸하시잖아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 라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캐롤라인이 자신의 상대로는 좀 벅찰 정도로 젊고 빠르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약물에 의존하는 게 일종의 종교가 아니라면 뭐겠어요.” 캐롤라인이 물었다.
“난 기도에 대해서는 누구와도 언쟁을 벌이지 않아. 기도는 사적인 것이고 개인의 선택이니까. 누구한테 기도하든, 무엇을 기도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기도를 하면서 규칙을 만들기 시작하는 거니까.” 월버 라치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 기분을 느꼈다. 그는 캐롤라인이 자신보다 훨씬 말발이 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찬양했지만 빌어먹을 사회주의자와 이야기하는 건 독실한 신자와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캐롤라인이 낙태를 불법화하는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라고 주장하는 걸 숱하게 들었다. 낙태의 불법화는 여성에 대한 종교를 내세운 독선적인 형태의 폭력이며 그러한 폭력의 합법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낙태는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하며, 그러한 선택권을 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라치는 지겹도록 들었다. (P352)
이어서 라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젊은이들은 모험 거는 것을 찬양한다. 그들은 그것을 영웅적이라고 여긴다. 만일 낙태가 합법이라면 너는 거절할 수 있다. 사실 네가 갖고 있는 믿음을 감안한다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법인 한 네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느냐? 수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지 못했는데 네가 어찌 스스로에게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겠느냐? 그 여자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것이 옳지 않은 일임을 네가 알고 있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는 네가, 자유롭게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돕지 않겠다고 쉽게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너는 그들을 돕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야만 한다. 네가 거절하면 누가 그들을 도울지 생각해봐라.” 월버 라치는 피로에 지쳐 이대로 잠에 굴복한다면 나무껍질이 눈을 덮어 버릴 것 같았다.
라치는 계속 써내려갔다. “그것이 네가 걸려 있는 덫이다. 하지만 내가 쳐놓은 덫은 아니며 내가 너를 덫에 빠지게 하지도 않았다. 낙태는 불법이기에 그것을 원하는 여자들이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너도 — 그것을 실시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 선택권이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너는 선택의 자유를 침해당했으며, 모든 여자들의 선택의 자유 또한 침해당했다. 낙태가 합법이라면 여자들도, 그리고 너도 선택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을 다른 사람이 해줄 것이므로 너는 얼마든지 거부해도 좋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며 넌 덫에 걸려 있다. 여자들도 덫에 걸려 있다. 여자들은 희생자들이며, 너 또한 그렇다.” (P428-429)
윌리는 엔젤에게 말했다. “늘 하는 얘기지만, 호머를 세인트 클라우즈에서 데리고 나올 수는 있지만 세인트 클라우즈를 호머에게서 내보낼 수는 없어. 그리고 사랑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가 없어.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주기를, 우리 생각에 그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지. 우리는 모르는 사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도 간섭해서는 안 된단다. 그건 힘든 일이지. 간섭하고 싶고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만들고 싶은 때가 많으니까.”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도 힘들어요.” 엔젤이 말했다.
“우린 다른 사람을 보호해줄 수는 없단다. 사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월리가 말했다. (P517-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