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2016년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A Tale of Love and Darkness)는 2015년 미국과 이스라엘 합작 드라마 영화이다. 아모스 오즈의 동명 자전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나탈리 포트만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그녀의 감독 데뷔작이다. 영화는 어두움에 몽환적인 요소까지 삽입하여 한층 더 어둡게 만들었다.
[1]
우리는 나머지 세계를 보통 ‘거대한 세계’라 불렀지만 다른 호칭도 있었다. 개명(開明)된 세계, 바깥 세계, 자유 세계, 위선적인 세계, 나는 오로지 우표 수집을 통해서만 나머지 세계를 배웠다. 단치히,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우방기샤리, 트리니다드 토바고, 케냐와 우간다와 탄자니아, 그 미지의 모든 세계는 저멀리에 있고 매혹적이고 경이롭지만 위험하고 위협적인 곳이었다. 그 세계는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영리하고 재치 넘치고 성공했기 때문이지만 또한 그들이 시끄럽고 나서기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세계는 이곳, 이스라엘 땅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빈약한 습지와 돌덩어리, 사막조차 내주기를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세계 저편에 있는 모든 벽이 낙서로 가득 뒤덮였다. “유대인 녀석들, 팔레스타인으로 꺼져라.” 그래서 우리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자 나머지 세계가 일어서서 또 소리치기 시작했다. “유대인 녀석들, 팔레스타인에서 나가라.” (P13)
개척자들은 우리 시야 너머에, 갈릴리, 샤론, 그리고 골짜기들에 살고 있었다. 거칠지만 조용하고 마음이 따뜻하기에 당연히 사려 깊은 젊은 남자들, 그리고 건장하고 정직하고 자제심이 강한 젊은 여자들은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들은 상대가 수줍어하고 당황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비록 상대가 몸집이 작더라도 그를 아이가 아니라 성인을 대하듯이 애정과 진지함과 존중을 담아 한 남자로 대우했다.
나는 이 개척자들을 강하고 진지하고 비밀을 지킬 줄 아는 자들로 묘사했다. 이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비통함과 열망의 노래, 격렬한 정욕의 노래를 부르며 격렬하게 춤을 출수 있어서 마치 육체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고 명상할 줄도 알며 들판에서의 천막생활, 거친 노동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우리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너희 부모가 너희에게 쟁기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면, 오늘 우리는 너희에게 총이 가져온 평화를 줄 것이다! “우리를 어디로 보내든 우리는 간다”고 노래부르며, 거친 말을 타거나 또는 넓은 바퀴가 달린 트랙터를 운전하고, 아랍어로 말할 수 있으며, 모든 동굴과 와디를 알고 있고 총과 수류탄을 잘 다루면서도 시와 철학을 읊을 줄 알았다. 탐구심 강하고 감정을 감춰둔 통큰 사람들, 그들은 짧은 아침 시간 동안 천막 안 촛불 곁에서 삶의 의미와, 사랑과 의무 간의, 애국과 보편적 정의 간의 선택의 무게가 주는 의미에 관해 속삭이며 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P15-16)
그러나 이건 농담이 아니다. 삶은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 이제 나는 깨닫는다. 그들이 다시 이야기하게 될 거라 확신하지 못했고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는가. 폭동, 학살, 피를 부르는 숙청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아랍인이 봉기해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을 살육할지도 모르며, 전쟁, 끔찍한 재앙이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히틀러의 탱크가 전부 북아프리카와 캅카스 두 방향에서 몰려와 우리 문지방에 거의 다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 공허한 대화는 진실로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서투르고 어색했을 뿐. (P25)
우리가 가지고 있던 단 한가지, 그건 엄청난 책이었다. 책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벽에서 벽까지, 복도에, 주방에, 현관과 모든 창틀에도 없는 곳 없이. 수천 권의 책이 집 구석구석에 있었다. 나는 사람들은 왔다가 가고 태어나고 죽지만, 책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내 야심은 자라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니라 책 말이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죽을 수 있다. 작가들은 어떤 인물이든 쉽게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계획적으로 파괴하려 들어도 늘 하나의 복사본이 살아남고, 레이캬비크나 바야돌리드 혹은 밴쿠버의 어딘가에 인적 드문 도서관 한구석 선반에서의 삶을 계속 즐길 기회를 얻는다. (P46)
그래서 나는 다양한 비밀을 배웠다. 삶은 서로 다른 길들로 만들어져 있음을. 모든 일이 다른 악보와 병렬의 논리에 따라, 그렇게 일어나고 또한 다르게 일어날 수 있음을. 이러한 병렬의 논리학은 각각 자신의 방식에 따라 일치하고 일관되며, 그 자체로 완벽하고, 다른 모든 것과는 무관함을.
내 작은 도서관을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던 그때, 내가 다루고 카드처럼 뒤섞었던 이삼십 권의 책은 온갖 종류의 다른 방법들로 재배열되었다.
그래서 나는 책들로부터 작문 기술을 배웠다. 책에 쓰여 있는 내용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책 자체, 물리적인 존재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것들은 내게 현기증 나게 넓은 주인 없는 땅이나, 허락된 공간과 금지된 공간 사이, 합법적인 것과 기괴한 것 사이, 표준적인 것과 변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여명의 공간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이 교훈은 아직 나에게 남아 있다. 사랑을 발견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애송이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곳에 다른 메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에 자동차 도로와 풍경 좋은 길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인적이 드문 샛길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거의 금지된 것은 허락된 것이고 거의 허락된 것은 금지된 것이다. 수많은 다른 길이 있고 또 있었다. (P50)
많은 일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 도시는 파괴되고 다시 건설되고, 또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설됐다. 정복자들이 예루살렘에 줄줄이 와서 얼마간 다스리다가 몇 개의 벽과 성과 돌 사이의 틈새만 남겨두고 떠나갔고, 한줌의 질그릇과 서류는 사라져갔다.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는 아침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예루살렘은, 남자가 하품을 하며 여자를 떨쳐내려 하기도 전에 연인을 죽음에 이르도록 쥐어짜는 색정증(色情症) 노부이고, 수컷이 자신을 관통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신의 짝을 삼켜버리는 미국산 암컷 독거미다. (P53)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외로움이란 무거운 망치로 얻어맞는 것과 같아서, 유리는 산산조각 내지만 쇳덩이는 더 단단하게 한다고 했다. (P58)
다시 말하면, 좋은 독자가 좋은 문학을 읽으면서 갈아엎으려고 하는 공간은 작품과 작가 사이의 영역이 아니라 작품과 당신 사이의 영역이다.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학생이었을 때 진짜 나이든 과부들을 죽이고 도적질을 했을까?’가 아니다. 독자인 당신 자신을 라스콜니코프 자리에 대신 세워보는 것이다. 자신을 느껴보고 그 공포와 좌절과 지독한 참담함과 나폴레옹적인 교만의 허망함과 위대함의 기만과 죽음에 대한 동경과 함께 배고픔과 고독과 욕망과 피곤의 열기를 스스로 느껴보며, 이야기 속 인물과 작가의 삶 속 온갖 스캔들 사이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인물과 비밀스럽고 위험하고 참담하고 미쳐 있고 범죄적인 ‘나’인 당신 사이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그 결과는 비밀스럽게 남을 것이다). 가장 어둡고 깊은 감옥에 늘 깊숙이 가둬든 그가 바로 무시무시한 당신 그 자체다.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차려선 안 된다. 당신의 부모도,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도, 괴물 앞에서 도망치듯 그들이 충격에 휩싸여 달아나지 않도록 — 당신이 가십거리나 찾는 독자가 아니라 좋은 독자라는 가정 아래, 라스콜니코프의 이야기를 읽을 때 당신은 라스콜니코프를 자신의 내면으로 데려올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의 지하길로 당신 안의 어두운 미궁으로 모든 창살 뒤편으로 감옥 속으로, 그곳에서 그와 당신의 수치스러움과 치욕스러운 당신 안의 괴물들을 만나게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라스콜니코프의 괴물과 당신의 괴물을 비교할 수 있다. 이 괴물은 문화적인 삶에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어떤 이에게도 이 괴물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귓속말로도, 침상에서도, 밤마다 당신 옆에 눕는 사람의 귀에도. 바로 그 순간 참담하게도 그것들이 이불을 낚아채 뒤집어쓰고는 위협적인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라스콜니코프는 그 수치심과 감옥에서의 외로움을 조금은 달콤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모두가 한평생 자기 안에 숨겨둔 죄인들에게 선고해야 하는 판결이다. 그렇게 책들은 당신의 치욕스러운 비밀로 인한 재앙을 조금이나마 안위해주는 것이다. 당신뿐만 아니라 어쩌면 어느 정도는 당신과 비슷한 우리 모두를, 우리 모두는 반도일지언정 섬은 아니다. 거의 모든 면이 시커먼 물로 둘러싸였지만 일부는 다른 섬들의 일부와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바다]에서 리코 다논이 히말라야 산속 미스터리한 설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P68-69)
그대여, 묻지 말라. 이것들이 사실이요? 이게 저 작가에게 일어난 일이오? 스스로 질문하라. 자신에 관해 물으라. 그러면 그 답을 당신에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니. (P70)
때로 사실은 진실을 덮지 못한다. (P71)
열다섯 살 때 나는 집을 떠나 키부츠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책과 학문과 각주에서 자유로워지고, 관념 따위는 없는 사회주의적 개척자, 햇볕에 갈색으로 그은 강건한 트랙터 운전자로 변하길 원했다. 비록 요셉 큰할아버지는 사회주의(그의 기록에는 ‘소치알리스무스’라 되어 있다)를 믿지 않고, 키부츠를 좋아하지 않으며, 내가 마음을 바꿔 먹길 바랐지만 말이다. 큰할아버지는 자기 집 서재에서 단둘이 대화를 좀 하자면 나를 초대했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평일이 아닌 토요일에. 나는 이 대화를 앞두고 무척 긴장했으며, 큰할아버지와의 논쟁에 대비해 방어벽을 단단히 준비했다. ‘인간 금수가 아닌 양심이 가리키는 길’을 따르겠다며 용감히 맞설 작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큰할아버지에게서 유감스럽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나중에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하여 나는 요셉 큰할아버지의 동의 없이, 그리고 골리앗 앞의 다비드 혹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 속에서 임금님에게 진실을 말한 어린아이 같은 강렬한 대면 없이, 키부츠 훌다에서 개척자와 농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P119)
대체로 위대한 작가에게는 성령의 육십 가지 중 하나, 예언의 육십 가지 중 하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허무주의자가 나타나기 전에 투르게네프가 그의 훌륭한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 허무주의자 바자로프를 묘사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악령>이 놀라운 정확성으로 볼셰비키주의자의 도래를 완벽히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에게 흐느끼는 문학은 필요 없다. 우리는 만달리 시절 소도시 지방색에 질렸고, 거지, 젊은 종교인, 학생, 누더기 장사꾼 그리고 온갖 종류의 논쟁가, 율법학자 들이 나오는 인간적인 내용들도 충분히 접했어. 이제 이곳 우리 땅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문학이야. 주인공이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인 여자와 남자가 나오는 문학, 이상적인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강한 본능의 소유자, 비극적인 약점의 소유자, 신랄한 내적 모순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문학 말이다. 우리의 청소년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인물, 그들의 사상과 행실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인물, 우리 세대의 남녀 주인공이나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 가운데 비극적이고 신화적인 인물, 경외감과 동질감을 일으키고 구역질과 동정을 일으키지 않는 인물, 히브리적이고 유럽적인 문학의 주인공이 지금 이 땅, 우리에게 필요한 거야. 더 이상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나 주절대는 코미디언, 중재자, 관리인, 거지 들은 필요 없다. (P125-126)
당시 유럽은 완전히 변했고, 이쪽 벽에서부터 저쪽 벽까지 유럽인들로 가득했다. 더불어 유럽의 낙서들도 역시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함께 변화해왔다. 빌나에서 아버지가 젊은 청년이던 시절에는, 유럽의 모든 벽에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꺼져라”라는 낙서가 있었다. 50년이 흐른 후, 그가 방문자 유럽에 다시 돌아갔을 때, 벽들은 모두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꺼져라.” (P135)
10월 혁명 후 내전과 적군의 승리에 당황한, 재산을 잃고 검열을 받고 공포에 젖은 히브리 작가들과 오데사의 시오니스트 활동가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요셉 큰할아버지와 치포라 큰할머니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1919년 말 루슬란호에 올라 팔레스타인으로 향했고, 제3차 알리야의 시작을 알리며 욥바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다른 이들은 오데사를 떠나 베를린, 로잔, 미국 등지로 피했다.
알렉산더 할아버지와 슐로밋 할머니는 두 아들과 함께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로 이주하지 않았다. 러시아어로 쓴 시에 고동치는 할아버지의 시온주의자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 나라는 여전히 위생과 문화의 최소 기준치에도 미치지 못한 너무 난폭하고 미개하고 뒤떨어진 곳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25년 전에 클라우스너 일가, 할아버지의 부모와 요셉과 베찰렐 형제가 먼저 떠나간 리투아니아로 갔다. 빌나는 여전히 폴란드령이었고, 언제나 존재해왔던 격렬한 반유대주의가 해를 더할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복당하고 종속당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커다란 유대계 소수민족은 압제 체제의 대행자로 여겨졌다. 국경 너머 독일은 나치의 새롭고 냉혹하며 살인적인 유대인 혐오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P207)
낡아 해진 사진첩은 빌나의 세월에서 살아남았다. 여기 아버지와 그의 형 다비드는 둘 다 여전히 학교에 있고, 창백하고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뾰족한 모자 아래로 큰 귀가 두드러진 가운데, 정장 차림을 하고 넥타이에 뻣뻣한 칼라 셔츠를 입고 있다. 알렉산더 할아버지는 슬슬 대머리가 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콧수염이 있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차르 정부의 이류 외교관처럼 보였다. 그리고 단체 사진 몇 장이 있는데, 아마도 김나지움 시절의 모습인 듯하다. 아버지 아니면 형 다비드? 누구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얼굴이 흐릿하게 나온 사진이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야구 모자를 썼고 소녀들은 둥근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소녀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이고, 몇몇은 자신이 죽어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운명이라 정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발설할 이유는 없다는 듯 모나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다.
이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실상 이 단체 속 모든 젊은이들은 아마 분명 나신인 채로 포나리의 거대한 구덩이 속에서 달리도록 강요받고 채찍질 당하고 개에 쫓기고 굶주리거나 꽁꽁 얼어붙었다. 내 아버지 외에 그들 중 어떤 이가 생존했는가? 나는 밝은 빛 아래서 단체 사진을 연구하고 얼굴에서 뭔가 구별해내려 애썼다. 두 번째 줄 왼편에 있는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 무엇일지 추측하고, 모든 고무적인 말들을 불신하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게토 아래로 난 배수로를 타고 내려 가서, 숲의 일행과 합세하게 하는 교활함이나 단호함의 어떤 단서나, 이 소년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내면의 강인함 같은 것의 단서를 구별해 내기 위해. 아니면 중앙에, 영리하고 냉소적으로 보이는 얼굴을 한 예쁜 소녀는 어떨지, 나의 미운 사람, 그들은 나를 속일 수 없으니, 나는 아직 청년이지만 그것을 모두 알고 있고, 심지어 내가 알 것이라고 그들이 상상조차 못한 일도 알고 있다. 혹 그녀가 살아남았을까? 루드니크에 있는 일행과 합세하기 위해 탈출했을까? 수녀원에 피신했을까? 아니면 시간이 있는 동안 탈출했을까? 독일인과 그들의 심복인 리투아니아인의 눈을 교묘히 피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러시아 국경으로 몰래 넘어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에게 시간이 있는 동안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했을까? 그러고는 일흔여섯의 나이가 될 때까지 이즈르엘 계곡에 있는 키부츠에서 벌을 치거나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말없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인생을 보냈을까?
그리고 여기, 열일곱 살의 젊은 나의 아버지 — 내 아들 다니엘(다니엘의 중간 이름은 예후가 아리에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과 아주 닮은, 정말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빼다 박은 — 가, 키만 멀대처럼 크고 마른 모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둥근 안경테 너머로 나를 살피는 순수한 눈을 가진, 조금은 당황스럽고 조금은 자랑스러운 모습의, 다변가지만 아직 모순이라고는 전혀 없고, 아주 수줍어하며, 검은 머리를 말끔하게 이마 뒤로 빗어 넘기고, 얼굴에는 발랄한 낙관주의가 흐르는, 걱정하지 마, 친구들아,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리는 극복하게 될 거야, 더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 그리 나쁘지 않아, 모두 좋아질 거야, 라고 말하는 나의 젊은 아버지가 있다.
이 사진 속 아버지는 내 아들보다도 어리다. 가능하기만 했다면, 나는 사진 속으로 걸어들어가 아버지와 그의 활기찬 동료들에게 경고했을 것이다. 아마 준비해야 할 것을 알려주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해도 분명 믿지 않았겠지만. 되레 놀림감이 되었겠지. (P209-211)
외할아버지의 명랑한 관용을 시험하는 한 가지는 잔인한 행동이었다. 그는 그런 짓을 끔찍이 싫어했다. 사악한 행위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면 그의 유쾌한 푸른 눈은 흐려졌다. “사악한 짐승? 그런데 이 말이 뜻하는 게 뭐지?” 그는 이디시어로 곰곰이 숙고했다. “어떤 짐승도 사악하지 않다. 어떤 짐승도 악을 저지를 수가 없어. 동물들은 악한 일을 만들지 않아. 그건 만물의 영장인 우리의 전매특허지. 그러니 결국에는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었겠지? 아마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사이에는 성서에는 안 나와 있는 독나무, 즉 악의 나무라는 또다른 나무도 자라고 있었을 거다(그는 그것을 ‘리슈아스나무’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우연히 먹은 나무가 바로 그거 아니겠니? 야비한 뱀은 이브를 속였고. 이게 분명 선악과나무라고 약속하며 그녀를 이끌었지만, 사실은 리슈아스 나무였던 거지. 아마 우리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에 잘 붙어만 있었더라면 에덴동산 밖으로 내던져지지 않았겠지?”
그러고는 그는 유쾌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을 하고 따스한 음성으로 그림을 그려내듯, 천천히 낭랑한 이디시어로 장폴 사르트르가 바로 몇 년 뒤 발견했던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나갔다. “그런데 지옥이 뭐냐? 천국은 뭐고? 분명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단다. 우리 각자의 집에 있어. 모든 방에서 너희는 지옥과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게다. 모든 문 뒤에. 두 겹 담요 아래. 사실은 이런 거야. 작은 사악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지옥이 되지. 작은 연민, 작은 관대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천국이 되고.
나는 작은 연민과 작은 관대함은 말했지만 사랑은 말하지 않았어. 나는 그런 박애주의적인 사랑을 믿는 신봉자가 아니야. 모두를 위한 모두의 사랑, 그런 건 예수에게나 넘겨줘야 해.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야. 그건 관대함이나 연민 같은 것과는 일절 관계가 없거든. 반대지. 사랑은 극단적인 이기심과 전적인 헌신이 섞여 있는 양극의 기묘한 조합물이야. 패러독스! 게다가 모두가 늘 사랑,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랑은 질병처럼 네가 선택하거나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재앙처럼 거기에 걸려드는 거란다. 그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겠니? 인간이 삶의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뭐겠어? 관대함 아니면 비열함이겠지. 아무리 작은 아이도 모두 사악함이 아직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우리가 과거에 거기서 먹은 그 사과에서 이 모든 게 비롯된 것 같으니. 우리는 모럴의 사과를 먹은 거야.” (P289-291)
네 외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는 공산주의자였지만, 빨갱이 볼셰비키주의자는 아니었어. 그는 언제나 스탈린을 또다른 폭군 이반으로 여겼어. 뭐랄까, 반전평화주의자 — 공산주의자 같은, 나로드니크였다 할까, 피 흘리는 것에 반대했던 공산주의자 — 톨스토이주의자 말이야. 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 모든 영혼에 숨어 있는 악을 가장 무서워했어. 세상에 있는 모든 점잖은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보통 정치 체제가 도래하는 날이 반드시 와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지. 그렇지만 무엇보다 모든 국가 기구와 군대, 비밀경찰 조직이 점차 제거될 필요가 있고, 오로지 그런 이후에만 점진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간의 평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어 다른 사람에게 주는 행위는 피를 부르는 것이기에, 천천히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지. 미트 아로프팔렌디케르. 내리막길. 심지어 일고여덟 세대가 걸린다 할지라도, 그렇게 되면 부자들은 그들이 더 이상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지. 아버지 의견의 요점은 결국 불의와 착취가 인류의 질병이며, 정의만이 유일한 처방이라는 점을 우리가 세상에 납득시키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단다. 실은 쓰디쓴 처방이자 몸이 익숙해지게 될 때까지 한 방울씩 들이켜야만 하는 강한 치료약이지. 한꺼번에 삼키려는 자는 누구든 재앙을 일으키고 피가 강이 되도록 흐르게 할 거야. 바로 레닌과 스탈린이 러시아와 온 세계에 한 일을 봐라! 월스트리트가 세계의 피를 빠는 뱀파이어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뭐? 피를 빠는 흡혈귀를 결코 제거할 수 없고, 반대로 강하게 해줄 뿐이며 더욱더 신선한 피를 먹이고 있을 뿐이잖니!
네 외할아버지가 생각하시기에, 트로츠키와 레닌, 스탈린과 그의 동무들의 문제는 그들이 삶 전체를 일거에, 책에서 본 이론대로,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처럼 그들과 같은 사상가들의 이론대로 재조직하려 든 것이었지. 그들은 책을 아주 잘 알 것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삶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악의나 질시, 시기나 빈곤, 다른 이의 불행에 대해 득의양양해하는 감정들도 몰랐어. 결코, 결코, 이론에 따라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책으로는 안 되지! ‘탁상공론’으로는, 나사렛 예수로는, 마르크스의 선언문으로는 안 돼! 결코! 일반적으로, 네 외할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좀 덜 조직하고 덜 재조직하는 게 더 낫고, 좀 더 서로 도와주고 용서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단다. 네 외할아버지, 그분은 두 가지를 믿었어. 연민과 정의. 데르바르멘 운 게레크티케이트. 그래서 그 둘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셨어. 연민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도살장이라고. 반면, 정의 없는 연민은 예수에게는 무방하겠지만, 악의 사과를 먹은, 죽을 수밖에 없는 단순한 인간들에겐 그렇지가 않다고. 그게 네 외할아버지의 관점이었어. 좀 덜 조직하고, 좀 더 불쌍히 여기는 것. (P309-310)
이후에 파니아가 프라하에서 내게 철학적인 편지를 써 보냈는데, 내가 열여섯이고 그녀가 열아홉 학생이었을 거야, 내게 쓴 그녀의 편지는 너무 고차원적인 것 같았는데, 그건 내가 늘 어리석은 어린 여자애로 여겨졌기 때문이지만, 그게 유전형질과 주변 환경과 자유의지에 대한 길고 자세한 편지였다는 것은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단다.
그녀가 말했던 것을 네게 말해주겠지만, 물론 그건 파니아 언니 말이 아닌 내 말로 풀어놓은 내용이 될 게다. 파니아 언니가 표현한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이게 파니아가 내게 썼던 내용 중 일부란다. 유전형질과 우리를 양육하는 환경과 우리의 사회적 계급, 이런 것들은 모두 게임 시작 전에 무작위로 돌려지는 카드 같은 것이라더구나. 여기엔 자유가 없어. 세상이 주는 거고, 넌 선택할 기회 없이 주어진 걸 그저 받기만 할 뿐이지. 하지만 그녀가 프라하에서 내게 쓴 바로는, 문제는 각 사람이 자신에게 돌려진 카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거라고 했지.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패를 가지고도 영리하게 게임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로 한다고 말이다. 그들은 아주 좋은 패를 가지고도 모근 걸 탕진하거나 잃기도 한 대. 그게 우리 자유가 도달하는 범위라는 게지. 우리에게 나눠진 패를 가지고 우리 손으로 게임하는 법. 하지만 게임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하는 그 자유조차도, 네 어머니가 쓰기론, 아이러니하게도 각 사람의 운이나 인내심, 지력, 직관, 모험심 같은 것에 달려 있다는 거야. 그래서 최후에는 분명 이것들 역시 게임 시작 전에 우리에게 돌려졌거나 돌려지지 않은 패라는 거지. 그렇다면 그다음에 우리 선택의 자유에 남겨지는 건 무엇이겠니?
당치 않아, 네 어머니가 쓰기를, 그건 당치 않은데, 아마도 마지막 수단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조건에 대해 비웃거나 슬퍼할 자유, 게임을 하거나 손에서 패를 던져버릴 자유, 그게 무엇인지, 그게 무엇이 아닌지 얼마간 이해하려 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으려는 자유일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작은 견과류 껍데기 속에서 선택은 이 삶을 깨어 있는 상태로 계속하거나 무감각 같은 상태로 지속하게끔 한다는 거지. 이게 대충 내 말로 표현한 네 어머니, 파니아가 말한 내용이야. 언니가 한 말 그대로 옮긴 건 아니고. 난 네 어머니의 단어들로 말할 수가 없구나. (P319-320)
모든 유대인 가정 속에 있던 두려움은 결코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독처럼 한 방울 한 방울씩 우리에게 주입된 것으로, 어쩌면 우리가 정말 완전히 깨끗하지 못하고, 너무 소란스럽고 뻔뻔하며, 간교하고 돈에 악착같을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두려움이었지. 어쩌면 우리는 적절한 태도를 갖추지 못했는지도 몰라. 우리가, 하느님 맙소사, 이교도들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르고, 그다음엔 그들이 화가 나서 우리에게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들을 자행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어.
모든 유대인 자녀의 머리에는 이교도들에게, 설령 그들이 무례하고 술에 취해 있어도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하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든 그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되고, 말다툼해도 안 되며, 흥정해도 안 되고, 그들을 자극해서도 안 되고, 머리를 들어도 안 되며, 그들에게 말할 때는 그저 조용히 웃으면서 말해야만 그들이 우리더러 시끄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고, 그들에게는 항상 훌륭하고 정확한 폴란드어로만 말해야 그들이 우리가 자기네 언어를 더럽힌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폴란드어로 말할 때도 너무 크게는 말하면 안 되고, 그래야 그들이 우리가 주제넘게 야심을 갖는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거고, 우리가 탐욕스럽다는 어떤 비난의 여지도 주어서는 안 되고, 그래서, 맙소사, 그들이 우리 치마에 얼룩이 졌다고 말할 수 없게 해야한다는 내용이 수천 번도 더 주입되었어. 요는, 우리가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하고, 이가 있는 더러운 머리의 아이 한 명이 전체 유대 민족의 평판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아이도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 그들은 우리 모습 그대로를 견딜 수 없어했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맙소사, 그들에게 우리를 참을 수 없는 이유들을 점점 주게 된 것이지.
여기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너는 어떻게 끊임없는 낙숫물이 네 모든 감정을 비틀리게 하는지, 어떻게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녹처럼 부식시키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게다. 그건 너로 하여금 점점 고양이처럼 잔꾀 많고, 부정직하며,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 되게 하지. 난 고양이가 끔찍하게 싫어. 개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개가 더 낫겠어. 개는 이교도 같아서, 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네가 내 말 뜻을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분별없이, 고양이가 된 게야.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은 군중의 무리를 무서워했어. 그들은 정부 간의 간극 속에 벌어질지도 모를 일에 공포를 느꼈지. 예를 들면 폴란드인들이 내쫓기고 대신 공산주의자들이 오면, 막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패거리나 흥분한 폴란드 대중이나, 더 북쪽의 리투아니아인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까봐 두려웠던 거지. 그건 줄곧 용암이 뚝뚝 떨어지고 화염 냄새가 나는 화산이었던 거야. “그들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칼을 갈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했고, 그건 그들 중 누구든 될 수 있기에 그들이 누구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어. 군중. 이곳 이스라엘에서조차 유대인 군중은 조금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지.
우리가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유일한 사람들은 독일인이었어. 1934년인가 1935년에 다른 가족들이 모두 떠났을 때도 난 뒤에 남아 간호 훈련을 마치기 위해 로브노에 머물고 있었는데, 거기엔 만일 히틀러가 온다고 해도, 최소한 독일엔 법과 질서가 있고 독일인 모두가 자기 분수를 알기에, 히틀러가 말한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정작 문제는 저너머 독일에서 그가 독일식 질서를 강요하는 것과 군중이 그를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이 꽤 많았어. 문제는 히틀러의 독일에는 거리에 폭동이 없고 무정부 상태도 없다는 것이었지. 그때 우리는 여전히 무정부적 상태가 가장 나쁜 국가 상태라고 생각했거든. 우리의 악몽은 어느 날인가 목사들이 예수의 피가 유대인 때문에 다시 흘러내리고 있다고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됐고, 그들이 무시무시한 종을 울리자 농부들은 그걸 듣고 배를 술로 채우고서 도끼와 갈퀴를 들었지.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지곤 했단다. (P363-365)
1943년인가 1944년경, 더 일찍은 아니었을 텐데, 어머니는 모두가, 바로 로브노 근처, 그곳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떻게 독일인과 리투아니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들이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온 도시를 행진하여, 늙은이들과 젊은이들 모두 소센키 숲으로 몰아냈는지 이야기한 게 분명하다. 소센키 숲은 날씨 좋은 날엔 모두 소풍을 오고, 보이스카우트 대회를 개최하고,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노래하고,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시내가 흐르는 강둑 위에 침낭에서 자던 곳이었다. 나뭇가지와 새들과 버섯, 까치밥나무와 산딸기가 있는 그곳에서, 독일인들은 이틀간 구덩이 끝에서 사격을 개시하여 약 2만5천 영혼을 도륙했다. 어머니의 친구들이 거의 모두 비명에 갔다. 그들 부모와 함께, 그리고 모든 이웃들과, 아는 사람들, 사업 경쟁자들, 적들과 함께, 부유한 자와 프롤레타리아와 독실한 자와 동화된 자와 세례받은자, 공산주의 간부들과 회당의 공무원들과 행상인, 물 긷는 자와 공산주의자들, 시온주의자들, 지식인, 예술가, 마을의 바보, 그리고 약 4천명의 아기들 모두. 학창 시절 어머니를 가르친 선생님 역시 거기서 죽었고, 빠져들 듯한 눈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그 시선으로 그렇게나 많은 사춘기 여학생들의 꿈을 꿰뚫었던 교장 선생님 이사하르 레이스도, 멍하고 얼빠지 이삭 베르콥스키도, 성정이 불 같고 유대문화를 가르쳤던 엘리에제르 부스리크도, 지리학과 생물, 통계학도 같이 가르쳤던 판카 자이드만도, 화가이던 그녀의 형제 슈무엘도, 쭉 이를 앙다물고 일반 정치사를 가르쳤던 현학적이고 화난 듯 보이던 모세 베르그만 박사도 거기서 죽었다. 그들 모두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아랍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격했을 때, 어머니의 또다른 친구 피로슈카, 피리 야나이 역시 직격탄을 맞아 죽었다. 그녀는 그저 대걸레와 물통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을 뿐이었다. (P411-412)
사이프러스 나무들 너머, 렘베르그가의 울타리 너머 누군가가 전등불을 울타리 위에 설치했는데, 여기 누우면 누가 있는지, 렘베르그 부인인지 슐라인지 혹 아바인지, 누가 거기에 불을 켜는지 볼 수 있고, 아교처럼 흘러내리지만 너무 걸쭉해서 쏟기도 어렵고, 너무 질척해서 움직이기도 어렵고, 찐득찐득한 용액이 그렇듯 발을 떼기도 어려운 노란색 전깃불을 볼 수 있다. 걸쭉한 모터오일처럼, 이제는 약간 잿빛으로 변한 푸른 저녁을 가로질러 희미한 노란색이 느릿하게 나아가는데 산들바람이 불어 일순간 그것을 날름 삼킨다. 그리고 45년 후, 내가 아라드 정원 테이블에 앉아서 연습장에다가 저녁 산들바람이 불고, 다시금 이 저녁에도 이웃집 창문에서 질척하고 느릿한 노란색 전깃불이 걸쭉한 모터오일처럼 흐르는 바로 그 저녁에 대해 쓸 때 — 우린 서로 잘 알고, 오랫동안 알아와서,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 마당에서 입속에 돌을 넣었던 그 저녁은 여기 아라드로 와서 잊었던 것을 상기시켜주거나, 오래된 열망을 되살려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저녁을 습격하러 왔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어떤 여자와 같아서, 그녀가 매력이 있거나 말거나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우연히 마주치면 언제나 그녀는 다소 닳고닳은 말을 하며, 미소를 건네고, 익숙한 방식으로 가슴을 가볍게 치곤 했는데, 오직 지금, 이번 한번만, 우연히도 아니며, 그녀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손톱으로 꽉 움켜쥐면서, 정욕적으로, 필사적으로, 눈은 질끈 감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마음대로 하기로 작정하고서, 당신이 떠나게 두지 않기로 결심하고, 당신이나 당신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당신이 가고 싶은지 아닌지에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면서, 오직 그녀가 신경쓰는 건, 그녀가 했어야 하는 일뿐이고 그런 자신을 참을 수 없어, 이제 손을 뻗어 작살을 던지고 당신을 끌어당겨, 손톱으로 쥐어 파고 찢기 시작했지만, 사실 당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끌어당겨 글을 쓰고, 끌어당겨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당신으로, 당신은 작살에 찔린 돌고래 같이 가능한 한 온갖 힘을 내어 작살을 당기고, 작살에 매달린 줄과 줄에 매달린 작살 총과 그 총이 부착되어 있는 어부의 배를 잡아당기면서, 끌어당겨 분투하고, 도망치려 당기고, 바다로 뒤덮어버리려 당기고, 어두운 심연으로 빠져들기 위해 끌어당겨 쓰면서 더욱더 끌어당긴다. 그 돌고래가 사력을 다해 단 한 번만 더 끌어당기면, 살에 박혀 자기를 찌르고 물고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에서 어떻게든 간신히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기에, 당신은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기지만 그것은 그저 당신의 살을 꽉 물고 있으며, 당신이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길수록, 더 깊게 파고들어, 상처에 점점 더 깊게 파고들지만 결코 고통을 되돌려줄 수 없으며, 그것은 포수이고 당신은 먹잇감이라 더욱더 당신을 상처 입히고, 그것은 사냥꾼이고 당신은 작살에 찔린 돌고래이고, 그것은 가하고 당신은 당하며, 그것은 예루살렘의 저녁이고 당신은 이곳 아라드의 저녁이며, 그것은 당신의 죽은 부모이기에, 당신은 그저 끌어당겨 쓰기를 계속할 뿐이다. (P461-462)
만년에 그들은, 내가 다섯 살 때, 알파벳을 뗀 지 2주후, 아버지의 색인 카드 중 한 장 뒷면에다가 대문자 활자체로 ‘작가 아모스 클라우스너’라고 썼고, 그걸 내 작은 방문에 핀으로 고정시켜 걸어놨다는 것을 거듭해서 내게 상기시켰고, 그 일을 되새겨주고 있다는 데 대한 자긍심으로 킬킬 웃으며 상기시키고, 손님들 앞에서 내게 상기시켰으며, 스가랴 씨 가족과 루드니츠키 씨 가족과 하나니스 씨 가족과 바르 이츠하르 씨 가족과 아브람스키 가족 앞에서도 언제나 내게 그 일을 되새겨주었다.
나는 심지어 내가 책을 읽을 수 있기도 전에 어떻게 책이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몸을 숙이고 있는 아버지 등뒤로 살금살금 들어가 발끝으로 서곤 했는데, 아버지의 지친 머리는 책상 스탠드의 노란 불빛 웅덩이 속에 떠다니고, 그는 천천히 공을 들여, 책상 위에 놓인 두 더미로 나뉜 책들 사이에 만들어진 꾸불꾸불한 계곡 사이로 자기 길을 재촉하며, 앞에 펼쳐진 두터운 학술 서적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자세한 내용을 뽑아서 찢어내, 스탠드 불빛을 향해 붙들고 잘 살펴 분류한 다음, 작은 카드에 내용을 베껴 쓰고, 그다음엔 마치 목걸이를 꿰듯, 퍼즐의 제자리에 각각을 맞춰두고 있었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처럼 일했다. 나는 시계 제조상이나 재래식 은세공인처럼 일했다. 한쪽 눈은 바짝 찌푸린 채 가늘어져 있고, 다른 한쪽 눈은 시계 제조상의 확대경에 고정되어 있으며, 손가락 사이엔 미세한 핀셋이 들려 있고, 내 책상 앞엔 카드가 아니라 종잇조각이 놓여 있으며, 그 책상 위에서 나는 여러 가지 단어, 동사 형용사 부사, 그리고 분해된 문장 조각, 표현과 묘사의 분절, 온갖 종류의 시험적인 결합을 기술했다. 이따금 나는 이 입자들, 즉 테스트의 분자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핀셋으로 들어올려, 불빛에 가져다가 신중하게 검토하고, 여러 방향으로 돌려보고 구부려보고 문질러보고 광을 내고는, 다시 불빛으로 가져다가 살짝 비벼보고, 그다음에 굽혀보고, 내가 직조하고 있는 옷감의 직물에 끼워넣는다. 그러고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여전히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집어 빼내, 다른 단어로 교체하거나 같은 문장의 다른 위치에 끼워 맞추려 애써 본 후 제거하고, 아주 아주 조금 한 줄로 쓴 다음, 약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맞춰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르게 배치해보거나? 어쩌면 그 문장을 훨씬 밑에다가? 아니면 그다음 문장의 첫 부분에? 아니면 그 단어를 잘라내어 독립된 한 단어짜리 문장으로 만들어야 하나?
나는 일어난다. 방 주위를 걸어다닌다. 책상으로 돌아온다. 몇 분간 그것을 노려보거나, 혹은 좀더 긴 시간 노려보고, 전체 문장을 찍찍 그어버리거나 전체 페이지를 찢어버린다. 나는 절망 속에 포기한다. 나는 거기 앉아 전체를 다시 한번 시작하면서도, 큰 소리로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일반적인 글쓰기를 저주하고 모든 언어를 저주한다.
소설을 쓰는 것은, 내가 한 번 말한 적이 있는데, 레고로 에돔 산을 만들려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성냥개비로 파리 전체, 건물이며, 광장이며, 가로수 길, 맨 마지막으로 거리의 벤치까지 만들려 하는 것과 같거나.
8만 단어짜리 소설을 쓴다면 수천 번 결정을, 그것도 그저 플롯의 개략적인 내용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건지, 누가 사랑에 빠지고 누가 불충할 것인지, 누가 부자가 되고 누가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들 것인지를 결정하고 인물의 이름이며 외양, 그들의 습관이나 직업, 장을 나누는 일, 책 제목(이런 것들이 가장 단순하고 가장 광범위한 결정이다)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저 무엇을 이야기해나가고 얼버무릴지가 아니라, 뭐가 먼저 오고 뭐가 나중에 올 것인지, 무엇을 명쾌히 하고 무엇을 넌지시 암시할지 등도(이런 것들 역시 꽤나 광범위한 결정이다). 그러나 그 문단 끝 세 번째 문장에서 ‘푸른’을 쓸 건지 ‘푸르스름한’을 쓸 건지 같은 수천 개의 더 미세한 결정 역시 내려야 한다. 아니면 ‘창백한 푸른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하늘빛?’ ‘기품있는 푸른색?’ 아님 정말 ‘푸른빛이 도는 잿빛’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이 ‘잿빛 푸름’은 문장 서두에 와야 하나, 끝에서 빛을 발해야 하나? 문장 중간에? 아니면 단순히 복문의 흐름속에서 종속절에 따라 붙어야 하나? 아님 ‘잿빛 푸름’이니 ‘먼지 같은 푸름’이니 하는 색깔은 넣지 말고, 세 단어 ‘그 저녁 빛’만 쓰는 게 가장 좋을까? (P500-501)
한번은, 내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이었을 때, 우리는 약국인지 어린이 신발 가게인지로 가는 마크세르 회사의 버스 맨 끝 의자에 앉았는데 어머니는 내게, 사람만큼이나 책도 세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반면, 차이점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상대로부터 더 이상 어떤 이점이나 쾌락이나 이익이나 아니면 최소한 좋은 느낌을 얻을 수 없는 때가 오면 상대를 버리는 반면, 책은 절대로 상대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연히 너는 때때로, 아마도 몇 년 동안, 혹은 심지어 영원히, 책을 저버리기도 할 거라고. 그렇지만, 네가 책을 배신해도, 책은 절대로 네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고. 책은 침묵하여 겸손히 선반 위에서 너를 기다리는 일을 계속할 거라고. 그들은 10년을 기다렸다고. 불평도 하지 않을 거라고. 어느 날 밤, 심지어 새벽 세시쯤에, 네가 갑자기 책 한 권이 필요할 때, 설령 그 책이 네가 버린 것이고, 수년간 네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던 것이라 할지라도, 그 책은 결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고, 네가 필요한 그 순간에 선반에서 내려와 친구가 되어줄 거라고. 책은 너한테 그것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 혹은 네가 그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너와 여전히 서로 잘 맞는지 확인하려 들거나 복수를 하려 들거나 변명을 하거나 물어보려 들지도 않고, 네가 요청하자마자 곧 올 것이라고. 영원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P513)
[2]
우리의 여름이 지난 다음해 여름, 예루살렘은 우리가 아침 내내 앉아 있던 곳과 마주하는 언덕 꼭대기부터 포격당했다. 베이트 이크사 마을 바로 옆과 나비 슈무엘 언덕 옆에서 트란스요르단 아랍군에 복무하는 영국군 포병 중대의 총들이 전투 태세를 갖췄고, 포위당하고 굶주린 도시 위로 수천 개의 포탄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몇 년 후 우리는 라마트 에쉬콜, 라못 알론, 마알롯 다프나, 탄약 언덕, 기바트 하미브타르, 프랑스 언덕, 그리고 포격으로 녹아내린 모든 언덕의 꼭대기가 빽빽이 들어찬 주거지로 뒤덮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여름, 모든 바위 언덕, 가벼운 바위와 어두운 덤불 밭뙈기로 얼룩진 경사면들은 여전히 유기되어 있었다. 내 눈은 홀로 남은, 강한 겨울바람에 등이 굽어버린, 고집스러운 늙은 소나무 위를 맴돌았다. (P27-28)
그 시절에, 말했듯이, 나는 한 권의 책이 되기를 바랐다.
작가가 아니라 한 권의 책 말이다. 이는 커다란 공포에서 비롯된 꿈이었다.
독일인에게 모두 죽임당해 이스라엘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그 가족들 위로 천천히 여명이 밝아왔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공포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가슴 깊숙이 그걸 묻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려 애썼다. 로멜의 탱크들이 거의 이스라엘 땅 관문까지 이르렀다. 이탈리아 항공기들이 전쟁 동안 텔아비브와 하이파에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인들이 떠나기 전에 우리에게 자행할지도 모를 일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떠난 후, 피에 굶주린 아랍인 약탈자 무리와 광기 어린 수백만의 무슬림이 수일 안에 우리 중 꽤 많은 이들을 살육하고 말 것이었다. 그들은 단 한 명의 어린아이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자연히 어른들은 아이들 면전에서 이러한 공포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단단히 애썼다. 적어도, 히브리어로는. 그러나 때때로 한마디가 새어나가거나, 누군가 자다 말고 절규했다. 우리 공동주택 전체가 새장만큼이나 비좁고 갑갑했다. 저녁에 불이 꺼지고 난 뒤 나는 어른들이 부엌에서, 프로민 비스킷과 함께 마시는 차 한 잔 너머로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헬름노, 나치, 빌나, 게릴라들, 악티오넨, 죽음의 수용소, 죽음의 열차, 다비드 삼촌과 말카 고모와 나와 같은 나이의 어린 사촌 다니엘에 대해서도 눈치챘다.
어느 정도는 내게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 나잇대의 아이들은 언제나 자라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때로 나쁜 사람들이 와서 요람이나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을 죽인다. 한번은 느헤미야 거리에 사는 신경쇠약에 걸린 한 제책소 직공이, 발코니로 나와, 유대인들, 도와줘요, 서둘러요, 그들이 우리 모두를 불태울 거예요, 라고 소리질렀다. 공포를 품은 공기는 무거웠다. 나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이미 헤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태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참으로 그러했지만, 내가 한 권의 책으로 자라났다면, 그때 그곳이 아니라 어떤 다른 나라에, 다른 도시에, 멀리있는 어떤 도서관에, 어떤 외딴 서재 한편에 있었다면, 최소한 한 권의 사본은 간신히 살아남을 좋은 기회를 얻었을 터였다. 결국, 나는 내 두 눈으로 혼잡한 소동 가운데 먼지 낀 어둠 속에서 책들이 발췌물과 잡지 더미 아래, 어떻게 가까스로 숨는지, 혹은 어떻게 다른 책들 뒤로 숨을 자리를 찾는지 보았던 것이다. (P42-43)
그는 자신이 평소 쓰던 재치 있는 경구로 어머니와 나를 즐겁게 해주려 애썼다. 누군가가 책 한 권을 훔치면 표절자이고, 다섯 권을 훔치면 학자이며, 쉰 권을 훔치면 대가(大家)이다. (P103)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통치를 마무리하고 유엔의 위임통치로 복귀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하자, 유엔은 팔레스타인과 수천만 유대인 유민들, 2년 이상을 유럽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았던 나치 대학살 생존자들의 실태가 조사하고자 팔레스타인 특별기구(UNSCOP)를 창설했다.
1947년 8월 말 영국 위임통치는 최대한 빨리 종결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가 담긴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대신, 팔레스타인 땅은 두 개의 독립 국가 — 하나는 아랍인, 하나는 유대인을 위한 — 로 분할되어야 했다. 두 국가로 배분된 지역은 규모 면에서 거의 동일했다. 두 나라를 나누고 있던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국경은 각 인구의 통계학적 분포를 따라 대략적으로 그어졌다. 두 국가는 단일 경제로, 통화나 기타 등등에서 연계될 것이었고, 예루살렘은, 위원회가 권고하기를, 유엔이 임명한 총독이 있는 신탁통치하의 중립적 분할 구역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권고안이 총회로 제출되었고, 승인되기 위해서는 찬성 3분의 2 이상의 다수결을 요했다. 유대인은 이를 갈면서 분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할당된 영토에는 예루살렘이나 북부와 서부 갈리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유대국가 지역으로 제안된 곳은 4분의 3이 경작되지 않은 불모지였다. 그러는 사이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자들과 모든 아랍연맹 국가들은 곧바로, 자신들은 어떠한 절충안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러한 제안의 이행에 무력으로 저항할 것이며, 팔레스타인 땅 위 단 한 평에서라도 시오니스트 자주 독립체를 창건하려는 그 어떤 시도라도 한다면 피에 빠져 죽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들은, 영국이 들어와서 외국인 무리를 흩어놓아 구릉을 깎아내게 하고, 고대의 올리브숲을 뒤엎게 하고, 음모에 음모를 거듭하여, 부패한 지주를 협잡으로 속여 땅을 구매하게 하고, 수세대에 걸쳐 땅을 일궈온 소작농들을 내쫓게 하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 전체가 수백 년간 아랍인의 땅이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들이 끝내지 않는다면, 이 교활한 유대인 식민주의자들은 아랍인 삶의 모든 흔적을 박멸하고, 빨간 지붕의 유럽식 식민지로 대지를 뒤덮고, 거만하고 음탕한 방식으로 대지를 부패시키면서 나라 전체를 삼켜버리고, 빠른 시일 내에 이슬람 성지를 통제하고 인근 아랍 국가에까지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순식간에, 그들의 사악함과 기술적 우위, 그리고 영국 제국주의의 지원 덕택에, 그들은 백인들이 미국과 호주, 그리고 곳곳의 토착민에게 가했던 것고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일을 이곳에서 자행하게 될 것이라고. 만약 그들로 하여금 여기에 국가를,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세우도록 허락하면,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을 교두보로 사용할 것이고, 메뚜기떼처럼 수백만으로 넘쳐나, 모든 언덕과 골짜기마다 정착하고, 아랍의 특색 있는 고대의 풍경들을 약탈하고, 아랍인들이 자신의 선잠을 흔들어 깨울 새도 없이 모든 것을 삼키게 될 것이라고. (P108-109)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차 한 잔 마시러 훌쩍 방문한 자신의 친구들에게 18세기 중반 이후, 현대 시오니즘이 출현하기 오래 전, 그것과는 상관없이,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예루살렘 인구의 다수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의 이주가 아직 시작되기 전,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예루살렘은, 이미 나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였다. 거주민이 5만5천 명이었는데, 그중 약 3만5천 명이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이제, 1947년 가을엔,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과, 무슬림과 기독교도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영국인과 여러 다른 국적을 지닌 약 6만5천 명의 비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북쪽, 동쪽, 남쪽에는, 셰이크 자라흐와 미국인촌, 구도시에 있는 무슬림과 기독교도 지구, 독일인촌, 그리스인촌, 카타몬, 바카, 아부 토르를 포함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 아랍 이웃이 있었다. 예루살렘, 라말라, 엘 비레, 베이트 잘라, 베들레헴 둘레 구릉에 아랍 도시도 있었고, 여러 아랍 마을도 있었다. 엘 아자리야, 실완, 아부 디스, 엣 투어, 이사비야, 칼란디야, 비어 나발라, 나비 슈무엘, 비투, 슈아팟, 리프타, 베이트 하니나, 베이트 이크사, 퀼로니아, 세이크 바들, 데어 야신(여기서 1948년 4월 백 명 이상의 거주민이 이르군과 슈테른 폭력단에 의해 도륙당했다), 수바, 에린 카렘, 베이트 마즈밀, 엘 말리하, 베이트 사파파, 움 투바, 수어 바히.
예루살렘의 동서남북으로 아랍인 지역이 있었고, 히브리 정착촌은 몇 개만이 도시 주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북으로는 아타롯과 느베 야콥, 동으로는 사해 해안가에 칼야와 베이트 하 아라바, 남으로는 라마트 라헬과 구쉬 에치온, 서로는 못사, 키리얏 아나빔과 마알레하 하미샤, 1948년 전쟁 때, 이들 히브리 정착촌의 대부분이 구도시 성벽 안쪽에 있는 유대지구와 함께 아랍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독립전쟁 당시 아랍인에게 점령당한 모든 유대인 정착촌은 — 예외 없이 완전히 — 파괴되었고, 그곳 유대인 거주민들은 살해당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도망쳤지만, 아랍군은 전쟁이 끝난 후 그 어떤 생존자도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영역에서는 유대인들이 한 것보다 더 완벽한 ‘인종 청소’를 수행했다. 전쟁 당시 수십만의 아랍인들이 달아났거나 이스라엘 국가 영토 밖으로 추방당했어도, 10만 명 정도는 남아 있었는데, 반면 요르단과 이집트 통치하에 웨스트뱅크나 가자 지구에는 한 명의 유대인도 없었다.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정착촌은 말살되었고, 회당과 공동묘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P119-120)
개인과 민족의 삶에서 역시 가장 극악한 대립은 종종 박해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박해당한 자와 압제당한 자가 연대와 사람을 넘어서 무자비한 압제자에 대항하여 함께 행동할 거라는 상상은 순전히 희망적인 생각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학대하는 같은 아버지 밑에서 난 두 아이가 자신들이 공유한 운명 탓에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꼭 공동 전선을 펴지는 않는 법이다. 종종 각자는 다른 쪽을 함께 불행을 겪는 동료가 아니라 공동 압제자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이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 백 년 된 대립의 사정인 것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착취와 억압으로 아랍인을 학대하고, 굴욕감을 주고, 압제하던 유럽은 유대인을 압제하고 박해하고, 종국에는 독일인이 유대인을 대륙 온 구석구석에서 뿌리 뽑아 거의 전부를 살해하도록 허가하더니 심지어 돕기까지 했던 바로 그 유럽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우리를 볼 때, 좀 히스테리컬한 생존자 무리가 아니라 고도로 정교하게 자신들을 착취하는 식민주의자로서 — 이번에는 시온주의자의 외양을 하고 — 처음부터 다시 그들을 착취하고, 축출하고, 압제하기 위해 교묘하게 중동으로 돌아온 유럽의 새로운 곁가지로 본다. 반면 우리가 그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동료 희생자나 역경 속의 형제 어느쪽도 아니라, 웬일인지, 마치 이곳 이스라엘 땅에 다시 나타난 것처럼, 여전히 그저 재미로 유대인의 목을 따는 것에만 흥미를 느끼던 대량 학살을 일으킨 코사크인들, 피에 굶주린 반유대주의자, 변장한 나치로 본다. (P121)
1947년 9월, 10월과 11월, 케렘 아브라함에 있는 그 누구도 유엔 총회가 팔레스타인 특별기구 다수파의 보고서를 승인하기를 기도해야 할지, 아니면 영국이 ‘아랍인들의 바다 속에 혼자 무방비 상태’로 있는 우리의 운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바라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자유 히브리 국가가 마침내 건설되기를, 영국이 부과한 이민 제한이 철폐되고, 히틀러의 몰락 이후 난민 캠프와 키프로스 감옥에서 허덕이던 수십만 유대인 생존자들이 마침내, 그들 태반이 유일하게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염원의 이면에서, 그들은, 다시 말해, 수백만의 지역 아랍인들이, 영국이 철수하는 순간, 아랍연맹 국가 상비군의 원조로 군사를 일으켜 60만 유대인을 살육할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며) 두려워했다. (P122)
아랍연맹 사무총장, 아잠 파샤는 유대인에게 “만일 유대인들이 아랍 땅에 단 한 평이라도 감히 시오니스트 독립체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을 자기 피에 빠져 죽게 할 것”이며, 중동은 “몽골 정복이 하찮은 것으로 빛바랠 정도의 잔악무도한” 참사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라크 국무총리, 무자힘 알 바자지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아랍인들이 승리한 후, 1917년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소수의 유대인만 살려두고, 심지어 “이슬람의 날개 아래 피란할 수 있게끔 허락할 것이며, 단호하게 이번만 그들이 시오니즘의 독에서 깨어나, 이슬람의 보호 아래서 다시 한번 자기 자리를 아는 종교 공동체가 되어 이슬람의 법과 풍습에 따라 살겠다는 조건하에서만 관대하게 대하기로 맹세” 했으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짐을 싸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유대인은, 욥바에 있는 대(大) 모스크에서 한 설교자가 덧붙이기를, 한 민족도 아니고, 심지어 한 종파도 아니었다. 측은히 여기는 자, 자비로운 자이신, 알라 자신이 그들을 몹시 혐오하고 있다는 것과 고로 그들이 영원히 모든 땅에 흩어져 저주받고 멸시받도록 판결 내리셨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유대인은 목이 곧은 자들 중에서 가장 목이 곧은 자들이다. 예언자(무함마드)는 그들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고, 그들은 그에게 침을 뱉었다. 잇사(예수)는 그들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고, 그들은 그를 살해했으며, 그들은 심지어 자기 신앙의 예언자들을 정식으로 돌로 쳐 죽이기까지 했다. 유럽의 전 국가가 단호하게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은 헛된 일이 아니고, 이제 유럽은 그들 모두를 우리가 짊어지게 하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우리 아랍인은 유럽인이 그 쓰레기를 우리에게 내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랍인은 거룩한 팔레스타인 땅을 세상의 모든 폐물 찌꺼기를 위한 쓰레기 더미로 변하게 하려는 이 사악한 계획을 우리의 칼로 좌절시킬 것이다. (P123-124)
아주 이른 꼭두새벽부터, 오스터 씨가 갑자기 가게를 열자 스바냐 거리와 게울라 거리, 챈슬러 거리와 욥바 거리, 킹 조지가에 있는 모든 간이 매대들도 문을 열었고 온 도시에 있는 바들도 모두 문을 열더니 새벽 동이 트기까지 청량음료와 스낵, 그리고 심지어 알코올을 건넸고, 과일주스 병, 맥주, 와인이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거리마다 낯선 이들끼리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나누고, 깜짝 놀란 영국 경찰 역시 춤추는 이들의 둥근 대열 속으로 이끌려, 맥주 캔이며 달콤한 리큐어로 부드러워졌고, 주연에 취한 열광한 자들은 영국 장갑차에 기어 올라가, 아직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밤, 저멀리 레이크 석세스에서 건설될 권리가 있다고 결정된 그 국가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국가는 167번의 낮과 밤이 지난 후인, 1948년 5월 14일 금요일에 건설되는데, 백 명의 남자, 여자, 노인네들, 아이들, 아기들, 춤추고 연회를 베풀며 기쁨에 넘쳐 마시고 울던 그 군중들 가운데 한 명, 즉 그날 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흥분한 사람들 중 딱 1퍼센트는, 레이크 석세스에서 있던 총회의 결정이 난 지 일곱 시간 만에 — 영국이 떠나자, 폭격기로 남쪽과 동쪽, 북쪽에서부터 아랍연맹 상비군, 보병대, 기갑 부대, 포병대, 전투기의 원조로, 성명서가 발표되고 하루이틀 내에 신생 국가를 끝장낼 목적으로 침공한 아랍 5개국 정규군에 의해 — 아랍인들이 시작한 전쟁으로 죽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1947년 11월 29일 밤, 거기서 나를 어깨에 태우고 춤추는 이들과 흥청거리는 이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마치 나한테 물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은 알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못박으려는 듯이 내게, 그저 보렴, 아가, 꼭 잘 보렴, 아들아, 저것 모두를 잘 살피렴, 죽는 날까지 이날 밤을 잊지 못하게 될 거니까, 우리가 떠나 없어지고 나면, 네 아이들, 네 손자들, 네 증손들에게 오늘밤에 대해 말하게 될 거야, 라고 말했다. (P146-147)
영국이 여전히 통치를 계속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주로 전쟁에서 아랍인을 돕고 유대인의 손을 결박하는 데 쓰는 동안에, 유대 예루살렘은 점차 나라의 나머지 부분에서 단결되어갔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유일한 도로는 아랍군에 의해 차단되었고 식료품과 보급품을 전하는 호위대는 불규치한 간격으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2월 말, 예루살렘 유대지구는 사실상 포위되었다. 영국 내각이 로슈 하 아인에 위치한 양수장을 통제하도록 허용해준 이라크 정규군은 양수 설비를 폭파해버렸고, 유대 예루살렘은, 우물과 저수지는 별도로 하더라도, 단수 상태로 남겨졌다. 구도시, 예민 모세, 메코 하임, 라마트 라헬 장벽 안에 있는 유대지구처럼 고립된 유대 지역들은, 그 도시의 다른 유대 지역으로부터 차단되면서 포위에 포위를 경험했다. 유대기구가 세운 긴급대책위원회가 식료품 배급과 함께 이삼일마다 1인당 물 한 동이를 배분하며 포격이 한바탕 지나간 사이에 거리를 도는 유조차들을 관장했다. 빵과 야채, 설탕, 우유, 달걀과 다른 식료품들이 엄격하게 배급되었고, 보급품이 떨어져 이따금 빈약한 분유, 건조된 러스크 빵, 이상한 냄새가 나던 달걀가루를 대신 배급받기 전까지는, 식료품 쿠폰 체계로 가족들에게 배분되었다. 의약품과 의료 보급품은 거의 다 떨어져갔다. 부상자들은 때로 마취제 없이 수술을 받았다. 전기 공급이 끊어져 파라핀을 얻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 이후로 우리는 어둠 속에서 혹은 촛불에 의지하여 몇 달간을 지냈다. (P151)
1948년 5월 14일 금요일에서 5월 15일 토요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영국 위임통치 30년 만에, 다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몇 시간 일찍 공표했던 그 국가가 탄생했다. 요셉 큰할아버지가 선언하기를, 약 1900여 년의 간극이 지난 후 유대 통치가 다시 한번 이곳에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자정이 되기 바로 직전, 선전포고도 없이 아랍 정규군의 보병부대와 포병대, 기갑부대가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트란스요르단과 이라크에서 동쪽으로,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북쪽으로, 즉 나라 전체로 쏟아져 들어왔다. 토요일 아침에는 이집트 비행기들이 텔아비브에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은 몇 개 아랍 국가들로부터 무장 무슬림 자원병뿐 아니라, 아랍 군대와 트란스요르단 왕국의 절반이 영국군인 부대와 이라크군 상비 부대를, 영국 위임통치가 공식적으로 끝나기 전, 국가 전체의 중요 거점을 강탈하기 위해 초청했다.
올가미가 우리 목을 조여들고 있었다. 트란스요르단 군대는 구도시의 유대지구를 포위했고, 막대한 군사력으로 텔아비브와 해안 평야로 향하는 간선도로들을 차단했으며, 도시의 아랍 지구를 통제했고, 예루살렘 둘레 언덕 위에 포병대를 배치했으며, 민간인의 사망을 불러왔고, 정신을 파괴하고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량 폭격을 시작했다. 런던의 후견을 받던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왕은 이미 자신을 예루살렘의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군대의 총기 포병대는 영국 포병 장교가 통솔했다.
동시에 이집트군은 예루살렘의 남쪽 변두리에 도달해서, 소유주가 두 번이나 바뀌었던 라마트 라헬의 키부츠를 공격했다. 이집트 비행기는 예루살렘에 소이탄을 투하했고, 무엇보다, 우리와 멀지 않은 곳, 로메마에 있는 양로원을 파괴했다. 이집트 박격포는 민간인에게 폭탄을 투여하기 위해 트란스요르단 포병부대와 합류했다. 마르 리아스 수도원 근처 언덕에서부터 이집트인들은 4.2인치짜리 포탄들로 예루살렘을 두들겨댔다. 포탄은 이 분에 하나꼴로 유대인 지역으로 떨어졌고 거리는 끊임없는 라이플총 발포에 쫓겼다. 언제나 젖은 울 냄새와 세탁비누 냄새가 나던 그레타 갓, 나에게 피아노를 쳐주던 보모였던 그레타 아줌마, 나를 옷가게로 끌고 다니곤 했고 그녀를 위해 아버지가 바보 같은 운문을 지어주곤 했다. 그녀는 어느 날 아침 빨래를 널러 베란다로 나갔다. 한 요르단 저격수의 총알이, 들리는 말로는, 그녀의 귀를 뚫고 눈을 통과해 나갔단다. 치포라 야나이. 피리는 스바냐 거리에 살던 어머니의 수줍음 많은 친구였는데, 대걸레와 양동이를 가지고 오려고 잠깐 뜰에 나갔다가 직격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P168-170)
한번은 대답이 무엇일지 알면서도 내가 용기를 내어 아일리 아주머니에게 예수가 누구였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그녀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며, 특히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던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만약 내가 내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면 그가 오셔서 내 마음에 거하시고 내게 고통도 주겠지만 고통을 넘어 빛나는 엄청난 행복도 주신다고 대답할 때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이 말은 내게 너무나 이상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듯 여겨져서 나는 아버지에게도 물어볼 필요를 느꼈다. 그는 내 손을 잡더니 나를 부엌에 있는 요셉 큰할아버지의 피난처인 매트리스로 데려가서는 <나사렛 예수>의 유명한 저자에게 예수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기를 부탁했다.
요셉 큰할아버지는 지치고 우울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거뭇거뭇한 벽에 등을 대고 안경은 이마에 걸친 채 자기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답은 아일리 아주머니의 대답과 사뭇 달랐다. 그가 보기에, 나사렛 예수는 “모든 유대인 중 전대미문의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이자, 할례받지 않은 마음을 지닌 자들을 혐오하고 유대교의 독창적인 소박함을 회복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랍비들의 권력으로부터 그것을 잡아 떼내기 위해 분투했던 훌륭한 도덕가”였다.
나는 할례받지 않은 마음을 지닌 자들이나 따지기 좋아하는 랍비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요셉 큰할아버지의 혐오하여 잡아 떼내기 위해 분투했던 예수와, 아일리 아주머니의 미워하지도 싸우지도 비틀지도 않고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특히 죄인들과 자신을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예수를 일치시키는 법도 알지 못했다. (P183-184)
1948년에서 194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전쟁은 끝났다. 이스라엘은 처음엔 이집트, 그다음으로는 트란스요르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리아와 레바논 등 인접 국가들과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라크는 어떤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은 채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이 모든 협정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랍 국가들은 언젠가는 자신들이 인정하기를 거부한 이 국가를 끝장내기 위해 2차전에 착수할 것이라고 계속 선포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침략 행위에 사활이 달려 있다고 단언하면서. 이스라엘을 ‘알 다울라 알 마주마’, 즉 ‘부자연스러운 국가’라고 명명했다.
예루살렘에서 트란스요르단 사령관 압둘라 알 탈 중령과 이스라엘 사령관 모세 다얀은 도시를 반분하는 구획 경계선을 긋고, 마운트 스코푸스에 있는 대학 캠퍼스로 가는 호송선의 통행로와, 트란스요르단 군대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 내 이스라엘 군락을 내버려둔다는 합의점에 도달하기 위해 몇 번 만났다. 절반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절반은 아랍 예루살렘이던 거리들을 차단하기 위해, 경계선을 따라 높은 콘트리트 벽이 세워졌다. 서 예루살렘에서는 저격수들의 시야로부터 통행자들을 가려주기 위해 도시의 동쪽 지역에 있는 지붕 등지에 여기저기 골함석 방벽이 세워졌다. 요새화된 철책로와 지뢰밭들, 사격 지점과 감시 초소들이 북쪽과 동쪽, 남쪽으로 이스라엘 구역을 에워싸면서 전체 도시를 가로질렀다. 오로지 서쪽만이 개방된 채 남겨져 있었고, 단 한 개의 구불구불한 길만이 예루살렘을 텔아비브 그리고 신생 국가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해주었다. 그러나 이 길의 일부는 여전히 아랍 군대의 수중에 있었기에 우회로를 짓고, 영국이 놓았지만 일부는 파괴된 수도관을 대신할 신설 수도관을 우회로를 따라 놓고, 아랍의 통제하에 남겨진 양수장을 교체하는 일도 필수적이었다. 신설된 도로는 ‘버마로路’라 명명되었다. 1년인가 2년 뒤 아스팔트로 포장된 새로운 우회로가 놓였다. ‘용사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시절 신생 국가 내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전투 중에 죽은 자들의 이름을 따 지어지거나, 무용담과 투쟁, 불법 이주와 시온주의자들의 꿈의 실현을 따라 지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했고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과 감정의 정당성에 에워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수십만의 팔레스타인 난민과 유민들의 운명, 그들 중 상당수가 도망쳤고, 또 다른 상당수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정복된 도시와 마을에서 추방당한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은 물론 참혹한 것,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지만, 사람들은 누가 아랍인더러 그걸 시작해달랬느냐고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유엔에서 통과된 분할 절충안을 받아들였고, 어떤 절충안도 거부하며 우리 모두를 살육하려 들었던 것은 아랍인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나 전쟁은 희생자를 요구하니, 2차대전 당시 수백만의 난민들은 여전히 유럽 주위를 떠돌고 있고, 전체 인구가 뿌리째 뽑혀나가고 어떤 이들은 다른 곳에 정착을 하고, 파키스탄과 인도 등 신생 국가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맞교환했으며, 그리스와 터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들이 욥바와 람레와 리프타와 엘 말카와 에인 카렘을 잃은 것처럼. 우리도 예루살렘 구도시 내의 유대지구를 잃었고, 에치온 블록, 크파르 다롬, 아타롯, 칼리야와 느베 야콥을 잃었다. 수십만의 아랍 유민 대신, 아랍 국가에서 쫓겨난 유대 난민이 이곳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추방’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조심했다. 디르 야신에서 벌어진 대학살은 ‘무책임한 과격론자들’ 탓이었다.
콘크리트 커튼이 내려와 우리를 세이크 자라흐와 예루살렘의 다른 아랍 지역으로부터 갈라놓았다. (189-190)
기억은 나를 속인다. 나는 그 일이 벌어진 후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바로 기억해냈다. 열여섯 살 무렵에 나는 그것을 다시 기억해냈고, 그러고 나서 다시 잊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40년도 더 된 일인, 그 이전 기억을, 마치 늙은 달이 호수를 비치고 있던 유리창에 비치듯이, 떠올리자, 기억은 호수에 비친 것 자체가 아니라, 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저 거기 비쳐 있는 앙상한 하얀 뼈만 가져다주었다. (P227)
그녀가 죽기 2년 전인, 그 봄 축제 때 텔아즈라 숲에 우리 셋이 있던 장면에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글쓰기도 여기서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기운으로 씻긴 소나무 머리 위로 지저귀는 새떼와, 파란색 원피스에 목에는 우아하게 빨간색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똑바로 앉아 있던, 예뻐 보이던 어머니,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한쪽 무릎은 아버지 머리를 받쳐주고, 한쪽은 내게 무릎 베개를 해준 채, 우리 얼굴과 머리를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져주던 어머니. (P231)
나는 결코 다시는 황홀경에 빠진 군중 속으로 행복하게 섞여들거나, 거대한 초인간체의 눈먼 분자가 되거나 하지 않았다. 반대로, 병적인 대중 공포증이 생겨났다. “침묵은 곧 수렁이다”라는 구절은 이제 내게 널리 창궐하는 위험한 질병을 선언하는 것 같아 보인다. “피와 불”이라는 구에서는 사람 살 타는 냄새와 피맛을 알 수 있다. 6일 전쟁 동안 북부 시나이 평원에서, 욤 키푸르 전쟁 때 골란 고원의 빛나는 전차들 가운데서 난 것처럼.
클라우스너 교수, 바로 요셉 큰할아버지의 자서전은, 내가 이 글에서 클라우스너 일가의 역사에 대해 쓴 것은 주로 이 책을 참고했는데, ‘부활과 구원으로 이르는 나의 길’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 토요일에, 요셉 큰할아버지의 동생인, 마음씨 고운 알렉산더 할아버지가 내 귀를 잡고 밖으로 끌어내어 공포와 광기의 흐느낌 같은 맹렬한 분노의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부활과 구원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도망쳐나온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숨막힐 듯한 지하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리고 그 둘과 그 모든 책 사이에서, 질식할 것 같던 생활, 야심가들, 억압된 자들, 로브노와 빌나에 대해, 그리고 홍차 수레와 빛나는 하얀 냅킨으로 구현된 유럽에 대해 거부당한 향수, 아버지의 삶과 실패에 대한 부담, 어머니의 상처, 암묵적으로 때가 되면 내가 승리로 바꿔야 하는 임무로서 주어진 실패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나를 압박해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다른 경우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 혹은 자기를 버리기 위해 — 부모의 집을 떠나 에일라트나 시나이 광야로 간다. 나중에는 뉴욕이나 파리로, 그다음엔 인도에 있는 힌두교 수행자들의 마을로 조용히 지내러, 아니면 남미 정글로, 아니면 히말라야로(그곳은 내 책 <같은 바다>에서 외동이던 리코가 자기 어머니가 죽자 도망치듯 갔던 곳이다). 그러나 50년대 초에 부모의 압제에 대한 ‘상극’은 키부츠였다. 거기, 예루살렘 저멀리, ‘악한 음모의 언덕 너머’ 갈리리나, 샤론, 네게브나 골짜기들에 있던 그곳에서 — 그래서 그 시절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 새롭고 억센 개척자 종자는 강하고 진지하지만 복잡하지 않으면서, 말수 적고 비밀을 지킬 수 있고, 분별없이 춤의 분방함 속에 휩쓸릴 수 있으나, 또한 홀로 생각에 잠길 수 있어, 들판이나 텐트촌에서의 삶에 적합한 성질을 갖추고 있다고. 풍성한 문화적, 지적 삶과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감정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종류의 고된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강인한 젊은 남녀.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유대계 예루살렘을 그득 채운 우울한 피란민 학자들 중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얼마 후 나는 그 시절 그 구성원들이, 학교를 마치고 난 다음 나할, 즉 국경을 따라 신설 키부츠를 창설하는 일에 특화된 군대에 입대해서, “일하고 싸우는 키부츠에” 계속 있을 셈으로 들어가던 정찰병 운동에 등록했다.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참된 자유주의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있었기에, 슬프게 몇 마디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정찰병 운동이라. 좋지, 그래, 그렇게 하자. 왜 안 되겠니. 하지만 하필 키부츠인 거냐? 키부츠는 단순하고 강인한 사람들을 위한 곳인데, 너는 그 둘 다 아니야. 너는 재능이 많은 아이다. 개인주의자고. 분명 너는 우리 사랑하는 조국에 근육으로 하는 일 말고, 네 재능과 관련된 일로 봉사하기 위해 크는 편이 더 나아. 근육이 그렇게 발달하지도 않을 거고.”
어머니는 그때 저멀리에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저버렸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게 내가 억지로라도 두 번 이상 먹고 달리기와 운동을 통해 허약한 근육을 강화시키려 한 까닭이었다. (P268-270)
베긴과 그의 동료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 즉 권력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은 힘의 첫째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게 어떤 것들로 되어 있는지, 힘이라는 것의 약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도 없어. 결국, 권력도 그걸 휘두르는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위험 요소거든. 스탈린, 그 호래자식이 일찍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나? 글씨, 좀더 나이든 내 말을 들어봐. 정말이지, 권력은 지배계급의 아편이야. 그리고 지배계급뿐 아니라, 권력은 온 인류에게 아편이야. 권력은, 내 보기에, 내가 악마를 믿는다고 한다면, 악마의 유혹이야. 사실, 나는 악마를 조금 믿거든. (P272)
어느 겨울 저녁 나는 에브라임 아브네리와 함께 야간 근무를 서게 되었다. 우리는 부츠를 신고 있었고, 해진 군용 작업복에 까칠까칠한 울 모자 차림이었다. 우리는 창고와 우사 뒤편에 있는 담장을 따라 진창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목초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오렌지 껍질을 발효시키는 악취가 다른 고향의 냄새와 뒤섞여 있었다. 비료, 밀짚 썩는 냄새, 양 우리에서 나는 후덥지근한 증기, 닭장에서 날리는 깃털 먼지. 나는 에브라임에게 독립전쟁 때나 30년대 문제의 시기 동안에, 살인자들을 하나라도 쏴 죽여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둠 속에서 에브라임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잠시 동안 시름에 젖은 침묵이 흐른 후, 입을 연 그의 음성에는 어떤 전복적인 아이러니, 기묘하게 냉소적인 슬픔이 담겨 있었다.
“살인자들? 넌 그들에게 무슨 기대를 하는데? 그들 관점에서는, 우리가 자기네 땅에 침입해서 안착하더니, 조금씩 자기네 땅을 접수한 외계 이교도들인데,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가서 온갖 만난 것들을 아낌없이 주겠노라고 — 버짐이나 트라코마를 낫게 해주겠노라고 — 약속하면서, 그들의 땅을 점점 더 교활하게 움켜잡은 거야. 글씨,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데? 그들이 우리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북과 심벌즈를 치며 나와 우리를 환영해야 한다고? 우리 조상들이 여기 한 번 산 적이 있으니까, 그 땅 전부로 가는 열쇠를 공손히 넘겨줘야 한다고? 게다가 이제 우리는 그들을 박살내고 그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고 그들 중 수십만 명이 난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는데 — 뭐, 그들이 우리를 축하해주고 행운이라도 빌어주길 기대하는 거야?”
나는 충격을 받았다. 비록 헤롯의 사상과 클라우스너 가문에 거리를 두고 있다고는 해도, 나는 여전히 시오니스트 훈육에서 나온 순응주의의 산물이었다. 에브라임이 밤에 한 말은 나를 놀라게 했고 심지어 분노하게까지 했다. 그 시절에 그런 식의 사고는 배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나는 너무나 아연실색하여 빈정대며 물었다.
“그런 거라면, 뭐하러 총을 들고 여기 서 있어요? 이민을 가지 그래요? 아니면 총 들고 그쪽 편에 가서 싸우든가?”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슬픈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쪽 편? 허나 그쪽 편은 날 원치 않아. 세상 그 어느 곳도 날 원하지 않지. 세상 그 누구도 날 원하지 않고. 그게 핵심이야. 모든 나라마다 나 같은 종자가 너무 많은 것 같아. 그게 내가 여기 와 있는 유일한 이유야. 그게 내가 총을 들고 있는 유일한 이유고. 그러니 그들이 어디서나 나를 발로 쫓아낸 방식으로 나를 여기서 쫓아내지는 못해. 하지만 넌 자기 마을 터전을 잃어버린 아랍인에 대해 내가 ‘살인자들’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볼 수 없을 거야. 최소한 쉽지는 않을걸. 나치에 대해서, 그래, 스탈린에 대해서도, 그래. 다른 사람들의 땅을 훔친 그 누구에 대해서든.”
“아저씨 말에 따르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 땅을 훔쳤다는 말 아니에요? 하지만 우린 2천년 전에 여기 살지 않았나요? 강제로 쫓겨나지 않았어요?”
“그건 이런 거야,” 에브라임이 말했다. “정말 단순하지. 여기가 아니라면 유대인 땅은 대체 어디니? 바다 밑에? 달나라에? 아니면 유대인은 자기 고향 땅을 조금이라도 가질 자격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종자야?”
“그럼 그들에게서 우리가 얻은 건 뭐예요?”
“글씨다, 아마 너는 48년에 그들이 우리 모두를 한번 다 죽여봤고 한 일을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그때 48년에 끔찍한 전쟁이 있었고, 그들 스스로가 그 문제를 그들 아니면 우리라는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문제로 단순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이겨서 그들로부터 그 땅을 얻은 거지.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야! 허나 48년에 그들이 우리를 만신창이로 두들겨 팼으니, 거기도 자랑할 일이 없는 거야. 그들은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살아남게 두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리고 오늘날도 그들의 지구 전체에는 살아 있는 유대인이 단 한 명도 없는 게 사실이야. 허나 그게 중요한 점이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48년에 한 일로 그들에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제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로부터 그 어떤 것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바로 그거야. 그리고 그게 베닌 씨와 나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이고. 우리가 만일, 이미 이제 우리가 뭔가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그들로부터 좀더 받아내려 한다면, 그건 아주 큰 죄가 될 거야.”
“페다이온(아랍 무장 게릴라)이 지금 여기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들이 그런다면,” 에브라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글씨, 우리는 진창에 엎어져서 총을 쏴야만 하겠지. 그리고 그들보다 더 잘, 더 빨리 총질을 하려고 최선을 다할 거고. 허나 그들이 살인자의 민족이어서 우리가 그들에게 총질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역시 살 권리가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 땅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야. 그냥 그들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이제 네 덕분에 나는 벤구리온처럼 계속할 거야. 이제 너만 괜찮으면, 우사에 들어가서 조용히 담배나 한 대 피우려는데, 내가 간 사이에 여기 망 잘 보고 있어. 우리 둘 다를 위해 망 잘 보라고.” (P274-276)
벤구리온의 스파르타식 집무실에서 보낸 스피노자의 아침 이후 40여 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이후 난 정치 지도자들, 매혹적인 명사들을 포함한 많은 유명인을 만났고, 그들 중 몇몇은 대단한 개인적 매력을 발산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자기 육체의 존재감으로 혹은 감전시키는 듯한 의지력으로 예리한 인상을 남긴 적은 없었다. 벤구리온은, 최소한 그날 아침에는, 최면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 벌린의 무자비한 관찰이 옳았다. 벤구리온은 플라톤과 스피노자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본 바로, 그는 공상에 젖은 농부였다. 그에겐 뭔가 원시적인, 동시대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정신의 단순성은 거의 성서적이었다. 그의 의지력은 레이저 광선과 닮은 데가 있다. 그는 북부 폴란드 플론스크의 작은 유대 마을의 젊은 청년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두 가지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에 조국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과, 자신이 그들을 인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 젊은 시절부터 그의 삶 전체에 걸쳐 이 두 가지 결정 사항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그 두 가지에 종속되었다.
그는 정직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공상가처럼, 그도 이것저것 계산해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혹은 잠시 멈추고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값이 무엇이든 치르자고.
플라우스너 가문과 케렘 아브라함의 반(反) 좌파 가운데서 자란 어린애로서 나는 이미 벤구리온이 유대인의 모든 고통에 책임이있다고 배웠다. 내가 자란 곳에서 그는 악하니었고, 좌파 체계라는 모든 전염병의 구현체였다.
다 커서, 어쨌든, 나는 다른 각도에서, 즉 좌파의 입장에서 그를 반대했다. 당대 많은 이스라엘 인텔리겐치아들처럼, 나도 그를 거의 독재 인사로 보았고, 그가 독립전쟁 당시 아랍인들을 다룬 거친 방식과 보복 기습에 움찔했다. 그에 대한 자료들을 읽고 내 생각이 옳은지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를 요약할 간단한 방법은 없다.
그리고 불현 듯, ‘거친 방식’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나는 벤구리온이 싸구려 과일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잡고 있던 방식과 자신을 위해 먼저 음료를 따르던 모습을 완벽히 투명하게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유리잔 역시 싸구려였고,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수류탄처럼 유리잔을 감싸쥐던 그의 거친 손가락은 두껍고 짤막했다. 나는 놀랐다. 내가 말실수라도 했거나, 무언가 그의 분노를 촉발할 말이라도 했다면, 벤구리온이 내 얼굴에 유리잔 안에 든 것을 내던지거나 벽에 잔을 집어던졌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혹은 잔을 너무 세게 움켜쥐다가 박살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유리잔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환해져서 시를 쓴 내 의도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을 내게 알리기 전까지, 그리고 내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유쾌하게 웃기 전까지.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작은 속임수를 쓴 재미난 익살꾼처럼 보이면서 스스로 되묻기 전까지. 그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P291-292)
모든 게 다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그 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에 내 오래된 방으로 되돌아갔을 때, 나는 잠들 수 없었다. 꼭 그녀가 거기 여전히 있는 것만 같았다. 미소 아닌 미소를 지으며. 기침소리가 아닌 기침 소리를 내며. 혹은 그녀가 내게 유산으로, 끝까지 그녀를 쫓고 이제는 나를 쫓고 있는 그 불면증을 남기고 간 것 같았다. 내 방 침대로 되돌아간 그날밤은 너무나 무서워서, 다음날 밤부터 아버지는 내 방으로 ‘짖는 소파’ 메트리스 중 하나를 끌고 와서 나와 함께 자야 했다. 한 주인가 두 주쯤 아버지는 내 침대 발치에서 잤다. 그후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그녀는 혹은 그녀의 불면증은,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가 우리를 휩쓸어, 우리 것이 아닌 어느 기슭에 우리가 각자 내쳐지기까지, 같이 내동댕이쳐서 떼어놓고, 우리를 빙글빙글 내던져 뒤범벅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지쳐서 침묵 속에 그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너무나 지쳤기 때문에. 눈 밑에 검은 반달이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그 몇 주간 나는 거울 속에서 내 눈 밑에도 검은 반달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해 가을, 같은 독방을 쓰는 세 명의 사형수처럼 함께 묶여 들러붙어 있었다. 아직 우리는 각자였다. 무엇으로 그나 그녀가 내 밤의 더러움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내 잔혹한 몸의 더러움을? 내가 몇 번이고 수치스러움에 이빨을 꽉 깨문 채, 그만두지 않으면, 오늘밤 그 짓을 그만하지 않으면, 내가 목숨을 걸고 어머니 알약을 몽땅 다 먹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짓도 끝날 거라고 맹세하며, 스스로에게 경고했는지 내 부모님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부모님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천 년의 빛의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아니, 빛의 세월이 아니다. 어둠의 세월이. 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뭘 알았을까?
그리고 그들 둘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련에 대해 뭘 알았을까? 어머니는 그의 고통에 대해 뭘 이해했을까? 천 년의 어둠의 세월은 모두를 떼어놓았다. 한 독방에 갇혀 있던 세 명의 죄수까지도. 텔아르자에서의 그날, 어머니가 나무에 등을 기대앉아 있고, 나랑 아버지가 어머니 무릎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 있고, 어머니가 우리 둘을 쓰다듬던 그 토요일까지도, 그 순간조차도, 내 유년 시절 중 가장 소중한 순간이던 그때조차도, 천 년의 빛 없는 세월은 우리를 떼어놓았다. (P307-308)
모든 어른의 죽음엔 신비롭고 강력한 주문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죽고 2년 뒤인 열네 살하고도 6개월의 나이에, 나는 아버지와 온 예루살렘을 죽이고, 이름을 바꾼 후, 폐허를 넘어서 내 힘으로 살기 위해 그곳 키부츠 훌다로 갔다. (P322)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키부츠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시험을 스스로 부과하고 그 결심을 적었다. 만일 정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라면, 나는 그들 중 하나처럼 보이기 위해서 2주 안에 피부를 검게 그을리기 시작해야 한다. 나는 단호하게 백일몽을 그쳐야 한다. 나는 내 성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매일 두세 번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한다. 나는 밤마다 하던 그 불결한 짓을 억지로라도 반드시 그만두어야 한다. 더 이상 시를 써서는 안 된다. 잡담을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된다. 내 새로운 고향에 조용한 남자로 등장해야 한다. (P354)
나를 그 사악한 순환논법에서 건져내, ‘내 글을 쓰는 손을 자유롭게 해 준’ 이는 바로 셔우드 앤더슨이다. 그에게 늘 감사하고 있다.
1959년 9월 암 오베드 출판사의 대중문고에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가 아하론 아미르의 히브리어 번역으로 나왔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와인즈버그가 존재하는 지도 몰랐고 오하이오라는 지명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혹은 그곳이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이름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수수한 책이 나타나 나를 뼛속까지 흥분시켰다. 여름밤 거의 내내 나는 새벽 세시 반까지 술 취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며, 상사병 걸린 시골 청년처럼 떨며 노래하고 껑충거리며, 기쁨과 무아지경에 흐느끼면서 키부츠 골목을 걸어다녔다. 유레카! (P367)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전체는 서로 다르게 생겨나 연관된 일련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로 되어 있었는데, 특히 그 이야기와 에피소드가 가난하고 버려진 누추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시시한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늙은 목수, 정신 나간 젊은 남자, 호텔 주인과 하녀. 그 이야기들은 또한 각 인물들이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서로 관련되었다. 한 이야기에서 주요 인물이던 이들이 두 번째 이야기에선 다시 배경 인물로 등장했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이야기들은 일련의 지역 가십이나 실현되지 못한 꿈을 토대로 해서, 매일의 사소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늙은 목수와 늙은 작가가 침대를 높이는 일에 대해 논의한다. 지역 신문사의 풋내기 수습기자로 일하는 조지 윌러드라는 꿈 많은 젊은 남자가 어쩌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생각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름이 비들봄이며, 별명이 왕비들봄인 한 괴짜 노인네가 있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로 리피 박사와 결혼한, 가무잡잡하고 키가 큰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일 년 뒤에 죽는다. 그다음엔 애브너 그로프라는 마을 제빵사와 노란 콧수염으로 뒤덮여 입이 축 늘어진 기골이 장대한 퍼시벌 박사가 있다. 그는 주머니 밖으로 검은색 시가 같은 것이 수십 개 튀어나와 있는 더러운 하얀색 조끼를 입고 있다. 그 외에도 다른 비슷한 인물들, 즉 내가 그 밤까지는, 독자들에게 단지 동정 섞인 냉소만 잠시 제공하는 배경 인물이 아니면 문학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여겼던 유형의 인물들이 나왔다. 게다가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서는 내가 필연적이라 생각했던,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사건과 사람들은 문학의 존엄성 저 아래 밑바닥에, 용인될 수 있는 문지방 저 아래에 있었다. 셔우드 앤더슨의 여자들에게는 대답한다고 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은 신비로운 요부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앤더슨의 남자들은 강하지도 않고, 담배 연기와 남성적인 슬픔에 과묵한 유형도 아니었다. (P368-369)
“언젠가 네가 결혼해서 가족이 생기면, 네가 결혼생활이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예로 나와 아버지를 생각하지는 않기를 정말 아주 간절히 바라.”
사랑과 우정에 대해 그녀가 몇 줄 전에 했던 말들과 함께 걸으면서, 내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분명한 일례로 들지 말라던 이 간청을 한마디 한마디 다 기억하고 있기에, 나는 이 말을 기억에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웃고 있던 목소리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와 어머니, 우리는 킹 조지 가에서 팔짱을 끼고 아버지를 직장에서 빼내려고 테라 상타 건물로 가는 길에 있는 탈리타 쿰이라는 건물을 지나고 있었다. 오후 한시 반이었다. 날선 빗방울과 뒤섞인 차가운 바람이 서쪽에서 불고 있었다. 바람은 행인들이 우산이 뒤집혀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우산을 꼭 붙잡게 할 만큼 강했다. 우리는 우산을 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빗속을 걸으며 어머니와 나는 탈리타 쿰 건물과 크네세트의 임시 거처이던 프루민 건물을 지나, 이후 하마아롯 건물을 지나쳐갔다. 1952년 1월 첫 번째 주 초였다. 그녀가 죽기 나흘인가 닷새 전이었다. (P392)
어머니는 옷을 다 입은 채 자기로 결심했고 자신이 다시 깨어 부엌에서 괴로운 밤을 보내지 않을 거라 아주 확신하며 언니가 침상 곁에 두고 간 진공 보온병에서 차 한 잔을 따라 좀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를 마시면서 수면제들을 삼켰다. 내가 토요일 저녁 여덟시 반이나 아홉시 십오분 전, 그 방에서 그 순간, 하야와 츠비의 아파트 뒤뜰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와 함께 있었다면, 나는 분명 그녀가 왜 그래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애썼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하면, 그녀가 자기 외아들에게 불쌍한 마음이 들도록, 그녀의 동정심을 자극할 만한 모든 일을 다 했을 것이다. 울며불며 부끄러움도 없느냐고 매달렸을 것이고 그녀의 무릎을 붙잡고 늘어지고, 심지어 그녀가 하려던 짓을 보고 절망에 빠져 기절한 척하거나 피가 날 때까지 나 자신을 때리고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살인자처럼 그녀를 공격하고, 주저 없이 그녀 머리 위로 화병을 집어던져 깨버렸을 것이다. 방구석 선반에 세워진 다리미로 그녀를 치거나. 아니면, 그녀가 약하다는 걸 이용해서, 그녀 몸 위에 올라가 손을 뒤로 묶고 그녀의 모든 알약, 정제, 약봉지, 물약, 시럽을 빼앗아 다 박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장례식에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P443)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건너다니며 거닐었던 예루살렘의 섬세한 풍경들 — 오즈는 인터뷰에서 ‘텔아비브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오직 예루살렘 사람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묘사’라 했다 — 과 작가의 뇌리 속에 짙게 남아 있는 실명(實名)의 거인들 —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사울 체르니콥스키, 다비드 벤구리온, 시를 가르쳐준 젤다, 큰할아버지 요셉 클라우스너 등 — 과의 만남은 섬세하지만 파노라마처럼, 작지만 큰 떨림으로, 좁지만 거대하게, 개인의 작은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처럼 직조된다. 사실과 추상, 경험과 상상, 진실과 허구, 현실과 꿈, 개인과 사회 그리고 사랑과 어둠이 각각 날줄과 씨줄이 되어 그려낸 세밀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445-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