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다
어느 목요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섰어요. 목요일은 다른 요일보다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은 편이라 출근 시간이 단축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요. 시간은 촉박했지만 막연한 기대를 품고 차에 시동을 걸었어요. 하지만 주차장 출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차량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16개 동이 자리 잡고 있기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입주민들과 마음이 잘 맞는 날이면 아파트를 벗어나는 것부터 인내가 시작돼요. 앞차와의 간격을 좁혀보며 단 몇 초의 시간이라도 줄여보고자 기를 써 봅니다. 좌회전 차선으로 진입했어요. 앞에 차가 열 대 정도 있네요. 운이 좋으면 이번에 마주할 초록신호등에 단지를 빠져나갈 수 있겠어요. 아주 운이 좋으면요.
초록 신호등이 나를 향해 반짝이네요. ‘어서 오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나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웃들이 협조를 안 해 주네요. 첫 번째로 대기 중인 차는 여유가 있었나 봐요. ‘요이준비땅’ 마인드가 아니었네요. 덕분에 초록불을 한 번 더 맞이하는 기회를 얻었어요. 지각은 따놓은 당상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었지요. 그렇게 포기하듯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그리고 올려다본 하늘
구름이 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었어요. 보통 저런 구름은 비행기와 함께 보이기 마련인데요. 짝꿍 없이 홀로 있는, 게다가 흐트러짐 없이 곧고 선명하기까지 한 구름을 휴대전화 앨범에 담아냈어요. 직선 구름을 볼 때마다 '조종사가 무슨 기교를 부리는 걸까?' 궁금했어요. 여유 있었던 앞차 덕분에 구름을 눈 안에 담아냈네요. 내 앞에 놓인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여러 교차로를 지나고, 신호등과 마주하고, 앞차를 따르며, 가고 서기를 반복하다가 일터 근처에 이르렀어요. 대로변을 벗어나는 삼거리 교차로에서 다시 조금 긴 기다림이 시작됩니다.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처럼 제 앞에 서 있는 친구들이 제법 많았어요. '너희들은 모두 어디로 향하고 있니?' 소리도 대답도 없는 질문을 건네 봅니다.
그리고 다시 제 눈에 들어온 하늘, 직선 구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요.
아까 앨범에 담아놓은 구름이었을까요? 선명하고 곧았던 구름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또 다른 직선 구름이었을까요? 갑자기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구름이 희미해져 가는 모습에 마음이 요동칩니다. 다시 한번 휴대전화 앨범에 두 번째로 만난 직선 구름을 담아 봅니다.
곧게 그리고 선명하게 뻗었던 구름,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름 앞날이 창창하던 시절의 내 모습과 조금은 닮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목표도 분명했고, 옳고 그름도 분명히 가리고자 했던 시절, 아니다 싶으면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할 말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당황함이 역력했던 눈빛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옆으로 퍼져있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구름, 나의 모습인 것 같아 우울해집니다. 목표도 소신도 흐리멍덩해지는 지금의 나를 무척 닮았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듯합니다. 그냥저냥 축 처진 상태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앨범에 담아놓은 직선 구름이 떠올랐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초록창을 열어 직선 구름, 직진 구름, 비행기구름, 다양한 검색어를 넣어 봅니다. 그리고 '비행운'이란 세 글자를 발견합니다.
차고 습한 고도에서 비행기가 날 때 비행기의 자취를 따라 뒤에 꼬리 모양으로 생성되는 얇은 구름, 비행운은 작은 물방울과 얼음 결정으로 이루어져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응결되거나 동결될 때 생김. <출처 : 위키 백과>
비행기 근처 공기가 주변의 낮은 온도로 인해 순식간에 응결이 되는 현상이었나 봐요. 거침없이 드러냈던 처음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의 작은 물방울들과 어우러졌겠지요. 지면과 만나 대지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고요. 강으로 바다로 떨어져 또 다른 생명을 품고 있을지도 몰라요.
목표와 소신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모습이 변하고 있더라도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나름 의미가 있는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구름을 만난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구름을 만나서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