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입장 전, 교실 이야기
2월 14일, 2024학년도가 마무리되었다. 이별의 슬픔과 아쉬움은 아주 잠시 동안 누릴 수 있을 뿐이었다. 종업식일, 학생들을 보내자마자 바로 2025학년도를 시작한다. -돌아보니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부터 아쉬움과 슬픔에 몸부림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이 하교한 후, 각종 짐을 다이소 가방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계속 쓸 것과 비워야 할 것을 정리해 두었으면 좋았겠지만 나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학년말 정리뿐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일이 몰려왔는데,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한 나는 정리 정돈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건 이제 안 쓸 건데!’ 하면서도 가방에 죄다 쑤셔 넣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짐을 빨리 빼 줘야 다음 주인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2월 17일, 새 학년과 업무 발표날이다. 새로운 학년도의 시작을 여는 일장 연설과 함께 넘버 1,2,3,4의 당부 말씀이 이어졌다. 학년과 업무 분장표를 넘기기 전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양해를 구한다.
“선생님들의 희망을 최대한 고려하려고 했으나… 알다시피…….”
'아니, 알았고요. 빨리 그 종이나 좀 넘겨요!’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 참는다. 아마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학교는 되도록 전년도 업무를 계속해 줬으면 하는 분위기다. 업무마다 매우, 무척, 많이 다르기에 아무리 쉬워 보인다 한들 적응하고 나면 일 년이 지나있다. 푸르딩딩 어린 시절엔 참 부지런했다. 학년, 업무 배정 희망서에 '저 너무 힘들었으니 고려해 주십시오!'라며 한 편의 글을 써 놓곤 했으니 말이다. 20년 이상 경력이 쌓이다 보니 이제는 알겠다. 학교 일은 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더군다나 학급 수가 적은 우리 학교 같은 경우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경한 업무를 맡았다고 좋아할 필요도 없다. 조금 쉴 틈이 있다 싶으면 두세 개씩 얹어 주는 게 이 바닥 룰이니까.
1 희망 : 6학년
2 희망 : 4학년
3 희망 : 2학년
4 희망 : 1학년
업무는 1 희망 빼고 뭘 썼는지 기억도 안 난다.
1 희망 : ****
2 희망~4 희망 : 기억 안 남. 걍 아무거나 씀.
희망서는 이미 겨울 방학 전에 제출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겨울방학 중 물밑 작업을 위한 윗분들의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하다. 역시나 겨울 방학 근무일, 교감님이 한 말씀 건네신다.
"6학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 말에 절대 속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나 무시해?'라며 맘속으로 버럭 했을 테지만, 이제는 눈치 백 단이다. 그분의 의도는 매우 단순하다.
'그 업무 하면서 6학년 가능하겠어?'
네네 그대의 마음 훤히 보입니다요!
"하루라도 젊었을 때 할게요.“
교감님은 나의 답에 토를 달지 않으셨다. 대화의 요지는 이미 오간 게 분명하니까.
'힘들어도 다 네가 희망한 거다!'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거다.
지금 학교에 발령을 받으며 학년 배정이 좀 꼬였다. 보통은 전근하는 해에 6학년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늘 그랬다. 6학년이 가장 힘든 학년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청소년기답게 돌발 행동이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경전도 만만치 않다. 그 예민함은 때때로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아서 깊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성장 과정의 일부임을 알고는 있지만 다른 학년의 몇십 배는 고민도 걱정도 많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는 옮기는 해에 항상 6학년을 맡았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에서는 조금 달랐다. 내가 처음 맡은 학년은 1학년이었다. 코로나를 맞이하는 두 번째 해였다. 당시 1, 2학년은 발달 단계를 고려해 전면 등교가, 3학년에서 6학년은 거리 두기를 위해 부분 등교가 확정이었다. 방역의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두려움이 컸다. 당시의 분위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상황별 대처 매뉴얼이 있긴 했지만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1, 2학년을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학교생활을 좀 해 본 고학년을 맡고 싶었다. 1, 2학년들이 과연 그 답답한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옮기는 해엔 희망 학년에 배정받지 못하는 게 룰인 걸까? 1학년에 한자리가 남아 있었는데 그 자리가 내 자리였다. 아이들은 급식시간을 제외하고 늘 KF 94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누군가가 코를 풀기 위해 마스크를 잠깐 내리면 곧바로 신고가 들어왔다. 짝 활동도 모둠 활동도 모두 조심스러웠다. 교사들도 학생들도 참 힘든 해였다.
학교를 옮기자마자 고학년을 하면 좋은 점이 있다. 해가 갈수록 학년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학년별로 점수가 있긴 하지만, 학년을 희망할 때 내가 가장 크게 고려하는 부분이 있다.
‘맡았던 학생들은 피하자!’
일 년 정도가 지나면 내 밑천도 바닥난다. 1년 치 이야깃거리는 충분하지만 2년 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리 아이들과 나의 합이 맞다 한들, 교사의 학급 경영 방침을 다시 한번 맞이하는 아이들은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움은 적응이라는 관문을 요하지만, 긴장감과 설렘을 안겨다 준다. 아이들도 여러 선생님을 통해서 다양한 만남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한 번 만난 아이들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2025학년도의 4학년, 5학년은 이미 나와 만났던 아이들이다. 올해 저학년을 맡는다면 2026학년도에는 더더욱 선택의 폭이 좁아질 것이다. 올해 6학년은 나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역시나 이번 학년도, 예상대로 6학년 담임을 그리고 작년과 같은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학년, 업무 모두 1 희망을 받게 된 것은 아마 교직 생활 이후 처음일 거다. 동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나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 두 가지를 희망한 거죠?”
어차피 정답은 없다. 내가 희망하지 않았는데 배정받았다면 그게 내 운명인 것이고, 내가 원한 대로 받았어도 내 운명일 뿐이다. 인생은 늘 그랬다.
6학년은 4개 반, 나를 제하고 나머지 세 분은 작년에도 6학년 담임이었다. 나로서는 정말 행운인 셈이다. 우당탕탕 나와는 달리 비교적 차분하게 올해를 보내실 동료들과 한 학년이라니! 그분들은 이미 50퍼센트 이상은 준비되어 있을 텐데.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겠지만 긴장을 단단히 해서 동학년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챙길 것과 비워야 할 것을 모두 새 교실로 옮겨온 나는 정리를 시작해야 했다. 컴퓨터 파일도 정리하지 못했다. 개인 자료와 학교 자료는 뒤죽박죽 섞여 있었고, 학교 컴퓨터를 믿지 못해 여러 군데 흔적을 남겨 놓은 덕분에 시간은 꽤 걸릴 듯하다.
아주 운이 좋으면 2월의 시간을 오롯이 새 학년 준비에 집중할 수 있다. 운이 좋다는 의미는 업무의 시작 시기가 3월 이후, 혹은 조금 더 나중임을 의미한다. 나는 종업식 전부터 2025학년도의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새 학년 준비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리와 마음은 복잡해졌고, 걱정과 긴장은 커져만 갔다.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몸을 자꾸 움직였다.
새로 만나는 학생들 이름표를 뽑아서 오려도 보았고, 종이 파일에 이름표도 붙여 보았다. 몸을 쓰면서 걱정을 잊으려 노력했고, 하나 둘 결과물이 나올 때마다 안심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 중에는 다정한 사람이 참 많다. 귀한 자료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다. 재주 많은 선생님들이 공유해 주시는 자료를 여기저기서 다운로드해 컴퓨터에 저장해 놓는다. 학기 초에 사용하기 좋은 바탕화면, 텅 빈 교실이 금방 화사해졌다.
개개인의 작품이 게시될 판을 스테이플러로 열심히 고정한다. 잘 놓여 있는 교과서도 괜히 한 번 만져본다.
멀쩡한 날짜 판도 점검해 본다. 몸을 계속 움직여 본다.
열심히 쓸고 닦는다. 걱정과 긴장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아직 짐도 못 푼 상태였지만 컴퓨터에는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본다.
그렇게 2월의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학생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부족하다.
교실을 옮기는 것도 큰 스트레스 중 하나다. 매해 짐을 싸고, 풀고, 정리하는 것도 참 버겁다. USB 한 개와 사무용품이 담긴 작은 상자 하나 들고 새 교실로 이동하는 게 꿈인데, 아마 내 남은 교직생활 동안 아니 내가 눈 뜨고 살아있는 동안 초등학교에 그런 풍경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교사에게 2월은 긴장감과 피곤함이 넘치는 시간이다. 어쩌면 학생들보다 부담감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학생들끼리는 이미 어느 정도 관계란 게 형성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과연 학생들과 나의 합이 맞을지, 학급을 무탈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하루하루 물음표 상태로 지낸다. 일 년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부담감도 어마 무시하다.
주인공들의 입장 전, 그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일 년 동안 미소 가득한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쓸고 닦고 오리고 붙이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초등 교사의 2월은 흘러간다.
쌓여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