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9월 26일, 토요일. 눈이 떠졌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상태는 소파에서 일어나 손목시계를 봤다. 9시였다. 아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 간밤에 아이를 달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어젯밤 비가 몰아치기 시작한 것은 한 줄기 빛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히고 곧이어 가슴이 덜컥할 정도의 큰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킨 때부터였다. 오래된 아파트 창문은 세찬 비바람에 통째로 뜯겨나갈 듯 흔들리며 창틀과 맞부딪쳐 쉴 새 없이 덜커덕거렸다. 뇌성과 거센 비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잠에서 깼고, 아내는 아이를 품에 안았지만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상태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부엌으로 가 커피를 진하게 내렸다. 커피 향이 집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유리 포트에 담긴 커피를 머그컵에 가득 따르고 거실로 갔다. 거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제의 요란스러웠던 날씨를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맑았지만 상태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얽섞여서 머그컵을 한 손에 들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아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일이면 아파트가 무너진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상태는 아내가 씻는 동안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전날 찾아갔던 장소에 도착해 보니 아파트 옆 공터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벽돌을 실어 나르는 트럭과 커다란 삽으로 땅을 고르고 있는 포클레인이 보였다. 인부들은 벽돌을 등에 지고 비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시끄러운 공사현장이 눈길을 끌었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일 뿐이었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리지?’ 고민을 하던 상태는 문득 며칠 전 아파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던 안내방송이 생각났다. 실내에서 흡연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안내방송을 해야겠다.’ 상태는 아파트 관리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던 관리소장과 입주민으로 보이는 여자는 상태가 들어가자마자 싸움을 멈추고 문쪽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요?” 관리소장이 멀뚱한 표정으로 물었고 여자는 허공을 쳐다보며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내일이면 아파트가 무너져요.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안내방송을 해야 합니다.”
관리소장과 여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이내 관리소장은 터무니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나가라며 사무실에서 상태를 쫓아냈다. 아파트 주위를 초조하게 서성대던 상태는 무언가를 작정한 듯 아파트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내일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집에서 나오셔야 됩니다.” 상태가 큰소리로 말했다.
“뭐요?” 집주인은 어이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마치 ‘뭐야, 이 미친놈은.’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제가 꿈에서 아파트가 무너지는 것을 봤어요. 대피하셔야 해요”
침묵이 흘렀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가세요.” 잠시 뒤 집주인이 매섭게 말했다.
상태는 포기하지 않고 층층마다 돌아다니며 집 밖으로 대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조금 뒤에 복도 끝에서 관리소장이 나타나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까닥거리며 호통을 쳤다. 상태는 관리소장에게 다가가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니 안내방송을 해 달라고 다시 한 번 사정했다. 관리소장은 팔을 휘두르며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샌가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다.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단호했다.
“꿈 때문에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안 돼요. 지금 그만두지 않으시면 파출소로 가셔야 합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상태는 별도리 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관리소장은 경찰을 붙잡고 상태를 가리키며 미친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설득이 안되면 강제로라도 그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해야 했다. 마침 1층 엘리베이터 옆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비상 화재경보기가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사람들을 대피시킬 방법이 상태의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
그날 저녁 상태가 집에 들어오자 아침부터 어디를 다녀왔냐고 아내가 물었고, 상태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별일 아니라고 했다. 상태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던 아내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시간이 멈춘 채 거실 벽에 걸려있는 디지털시계가 오늘은 유난히도 상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이는 거실에서 장난감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놀고 있었다. 상태는 신경이 예민해져 괜스레 화를 낼 것만 같아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손바닥으로는 한쪽 턱을 괴고 구부정하게 앉았다. 마우스를 잡고 좌우로 빠르게 몇 번 움직이자 캄캄했던 모니터 화면이 확 밝아지며 인터넷 검색창이 나타났다. 문득 화재경보기 작동법을 검색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는 자세를 바로잡고 타자 치기 좋은 위치로 자판을 끌어왔다. 역시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화재경보기의 버튼을 강하게 누르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지만 상태는 마치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듯 화면 속 화재경보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소리에 거실로 나가 보니 아내가 벌겋게 부어오른 아이의 이마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피고 있었다. 장난감 블록을 밟고 미끄러져 거실 탁자에 얼굴을 부딪쳤다고 했다. 상태는 울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워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꿈을 꿨다. 무너진 건물 근처에는 회백색 흙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 여자가 양손을 땅바닥에 짚고 주저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아이가 여자의 가느다란 팔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날아든 파편에 유리창이 다 깨지고 지붕이 처참할 정도로 우그러든 자동차의 운전석에는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남자가 축 늘어져 있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주위는 부상당한 이들을 부축해서 옮기는 사람들,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거는 사람들, 근처 상가와 주택에서 밖으로 나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로 혼잡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