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학교가 끝났다. 상태는 서둘러 책가방을 멨다. 가방끈을 엄지로 걸어 움켜잡고 앞으로 쭉 당기자 허리께까지 축 쳐져 있던 책가방이 순식간에 치솟으며 등에 꼭 밀착됐다. 가방 지퍼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단소는 상태의 키를 한 뼘은 더 커 보이게 했다. 아이들은 교실 문을 나서자마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교문을 향해 달려갔다. 상태도 뒤질세라 기세 좋게 뛰쳐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놓인 작은 돌멩이 하나를 제 발 앞에 몰고 오더니 신발 앞축으로 툭툭 차며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등에 달라붙어 있던 책가방은 어느새 허리춤까지 흘러내렸고 가방 지퍼는 단소 주변에서부터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퍽.” 왠지 소름이 끼치는 둔탁한 소리였다.
상태의 발길에 차여 도르르 굴러가던 돌멩이는 얼마 못가 동력을 잃고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니 공사 중인 건물 주위에 설치된 비계의 안전 난간이 무너져 있었고 그 아래 시멘트 바닥에는 사람이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그의 머리 주변으로 번져나가던 피는 한 지점에 고여 피 웅덩이가 되고 있었다.
“사람이 떨어졌다.” 인부들이 비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얼마 뒤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며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했다. 상태는 제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경찰이 다가와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 순간, 책가방의 지퍼가 확 벌어지며 위태롭게 걸쳐져 있던 책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경찰은 바닥에 흩어진 책을 추슬러 가방에 담고 상태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상태의 엄마는 경찰의 말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많이 놀랐을 겁니다. 잘 다독거려주세요.”
그날 밤 폭우가 쏟아졌다.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세차게 때리며 눅눅하고 어두컴컴한 상태의 작은 방을 불규칙한 리듬으로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왈칵 겁이 난 상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미세하게 경련하던 그의 사지가 생생하게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여보, 뭐해?”
“응?”
“소파에 앉아 넋 놓고 뭐하냐고. 아이랑 좀 놀아줘.”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며 소리쳤다. 아내의 말에 상태는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상태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지난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던 기억이기도 했다. 축 늘어진 사지의 미세한 떨림. 피 웅덩이. 사이렌 소리.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사건 이후로 상태는 높은 곳에만 올라가면 정신이 아뜩해졌고 오금이 접혀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대학생 시절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해발 1100미터의 출렁다리. 관광 명소라 했다. 두 산봉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두꺼운 강철 케이블이 다리 가운데에서 아래로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벌집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발판은 그 밑으로 보이는 풍경에 육각형의 실금들을 더했다. 식은땀이 났다. 다리의 난간을 꽉 그러쥔 손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변했다. 앞서가던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상태는 고개를 쳐들고 빠르게 발을 놀려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가 심하게 출렁댔다.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았다. 상태는 결국 더이상 가지 못하고 허둥지둥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했고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 끝났다.
상태는 아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이는 장난감 블록을 이리저리 쌓으며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무언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갑작스레 졸음이 몰려왔다. 잠시 쉴 요량으로 이마에 손을 얹고 소파에 눕자마자 이내 손이 소파로 툭 떨어졌다.
상태는 어느새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돌아다니기 딱 좋은 날씨였다. 파란 하늘은 너무 가까워 땅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고 그늘을 찾아가면 선선한 바람에 쉬기 좋았다. 천천히 걷던 상태는 문득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월 27일 오후 2시 50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주택들 사이로 유난히 높은 건물이 보였는데 베란다가 있는 건물 앞쪽은 진한 회색으로 측면은 검고 흰 체크무늬로 칠해진 한 동짜리 복도식 아파트였다. 참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
“얘 울잖아.” 아내는 상태의 무릎을 탁 때리며 아이에게 뛰어갔다.
“응? 왜? 괜찮아?” 상태는 꿈에서 깨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별일 아니었다. 아이는 엄마 품에서 울음을 멈췄다.
“제대로 좀 놀아줘. 성의 없게 그러지 말고.” 아내는 눈을 흘기고는 부엌으로 가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넘치지 않게 불의 세기를 줄였다.
상태가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살배기 아이는 상태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듯 장난감 블록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상태는 아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서 가닥가닥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드러운 머리칼을 코로 비벼댔다. 아이는 가지고 놀던 초록색 플라스틱 조각에 미련이 남은 듯 그것에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상태는 아이를 내려놓고 책장에 꽂혀있는 그림책 몇 권을 가져왔다. 상태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이는 책 속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봤다. 때로는 그 조그마한 손을 쭉 뻗어 책장을 움켜쥐고 좌우로 휙휙 흔들어 보기도 했다. 꽤 많은 책을 읽었고 목이 아프기 시작할 즈음 아내가 저녁 준비를 마치고 상태를 불렀다. 식탁 위에 놓인 된장찌개가 오글보글하자 두부며 버섯 같은 건더기들이 달싹거리며 식욕을 자극했다. 찌개 주위로는 네다섯 가지 밑반찬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아내는 입이 짧은 아이에게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 했고 아이는 입으로 불쑥 들어오는 숟가락을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며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필사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 후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아내는 아이를 재우고 맥주 한 캔을 가져와 상태 옆에 앉았다. 자기 전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내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다른 날과 비슷한 하루를 보낸 그날 밤, 상태는 또다시 꿈을 꿨다. 10층 높이의 복도식 아파트가 보였다. 아까 꿈에 나왔던 그 건물이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빛은 아파트에 부딪쳐 더이상 뻗지 못하고 그림자를 길게 만들었고 눈부신 햇살을 피해 그림자로 찾아든 아이들은 배드민턴 채를 휘두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렇게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쾅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풀썩 주저앉았다. 상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반쯤 굽히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너진 건물 주위로 흙먼지가 확 피어올랐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태는 천천히 허리를 세워 일어나며 무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월 27일 일요일 오후 3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