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7일
9월 27일, 일요일. 상태는 머리에 철모를 쓴 듯 묵직함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뻣뻣한 목을 좌우로 움직여 풀어주고는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피곤했는지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상태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려 찬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했다. 세면대에 고개를 수그리고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태는 수건으로 물기를 대강 닦아 내고 머리를 말렸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치자 아내가 눈을 살짝 뜨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어디 가냐고 물었다. 상태는 일이 있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집을 나섰다. 며칠간 미세먼지로 뿌옇던 공기가 오늘은 멀리 있는 사물들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맑았다. 한낮의 뜨거움이 예상될 만큼 오전의 햇살은 강렬했으나 간간이 불어오는 상연한 바람은 여름의 그것과는 달리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상태는 마음이 조급하여 청명한 가을날을 느낄 겨를도 없이 전철역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아파트로 가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는 이제 몇 시간 뒤면 눈앞의 아파트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고 주변을 둘러봤다. 작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전신주에서 뻗어 나온 굵고 검은 전선들은 허공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하늘을 어지럽혔다. 저 멀리 주택 베란다에서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눈이 부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자세히 보니 아이가 5층 베란다에서 놀고 있었다. 상태는 불안한 마음에 그리로 달려갔다. 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한쪽 다리가 베란다의 세로 창살 사이로 튀어나와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했다. 위를 쳐다보고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큰 소리에 놀란 아이만 머리를 창살 사이로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일자형의 알루미늄 사다리가 옆 건물의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상태는 급히 사다리를 가져왔다. 사다리가 짧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4층의 에어컨 실외기 설치대를 밟고 서면 아이에게 겨우 손이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사다리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운 아이를 다시 한 번 올려보고는 마침내 사다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 소리와 함께 사다리가 조금씩 흔들렸고 그럴수록 고소공포가 상태를 잠식해 나갔다. 3층 높이에 이르자 상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피를 흘리며 사지를 미세하게 떨던 인부가 떠올랐다. 얼굴이 창백해졌고 몸은 차가워졌다. 현기증이 나 저도 모르게 사다리를 꽉 잡았다. 몸이 굳어져 어찌할 수 없을 즈음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올려봤다. 아이의 한쪽 팔도 창살 사이로 빠져나와 있어 아이가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을 잃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상태는 몇 번의 심호흡 끝에 한 발을 겨우 옮길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땀에 젖은 뒷목을 스쳐 지나가자 상태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이제 그만 내려가고 싶다는 본능과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이성이 상태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상태는 결국 사다리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이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에 꼭 감은 눈가로 물기가 스며들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불안한 마음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놀란 얼굴로 상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걸려 사다리에서 내려온 상태는 탈진해서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볼썽사나운 모습과는 달리 아이가 무사하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아이 엄마는 아이가 잠든 줄 알고 잠깐 가게에 다녀오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며 상태에게 연신 미안해했다. 상태는 괜찮다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계를 보니 12시 55분이었다. 앞으로 두 시간 남짓 지나면 아파트가 무너질 테다. 상태는 여전히 다리에 힘이 없고 기운이 빠져 몸을 가누기 어려웠지만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일요일 오후. 점심 무렵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뜸했다. 상태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화재경보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띵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다. 문이 천천히 열렸고 그 틈으로 관리소장이 보였다. 상태는 얼른 등을 돌렸지만 관리소장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관리소장은 상태를 알아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사람이 또 왔네. 빨리 나가요. 신고하기 전에.”
“소장님, 곧 있으면 아파트가 무너져요.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된다니까요.”
“아직 정신 못 차렸구먼. 경찰 불러?”
상태는 손목시계를 봤다. 1시 30분이었다. 관리소장이 정말 경찰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관리소장은 상태가 진짜 떠나는지 의심스러운 듯 등을 돌려 나가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태는 관리소장을 피해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아 아파트를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는 폭삭 무너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정도로 견고하고 안전하게 보였다. 상태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관리소장이 보이지 않았다. 1층 출입구에 도착했다. 2시 30분이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던 화재경보기인데 막상 버튼을 누르려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상태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고는 버튼을 세게 두서너 번 눌렀다. 비상벨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불이야. 불이야.”
상태는 불이 났으니 얼른 대피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뛰쳐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몇 명은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히 내밀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상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집에서 빨리 나오라고 외치며 윗 층으로 뛰어갔다. 윗 층에서도 화재경보기를 울렸고 대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꼭대기 층까지 도달한 상태는 시간을 황급히 확인했다. 2시 52분이었다. 자신도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난간을 잡고 서너 계단씩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가던 사람들도 상태가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2시 58분. 상태가 아파트에서 빠져나온 시간이었다. 밖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멀쩡한 아파트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런 미친놈이! 결국 사고를 치네. 깜빵에 가봐야 정신을 차리지.”
마침 관리소장이 상태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와 상태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상태는 멱살이 잡힌 채 휘둘리면서도 사람들을 향해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힘껏 소리쳤다.
마침내 3시가 되었다.
“쾅.”
굉음이 울렸다.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근처에 있는 공사현장에서 벽돌이 가득 실린 나무 박스를 포클레인에 매달아 옮기다 나무박스의 밑판이 떨어지며 벽돌이 땅에 처박힌 것이었다. 관리소장은 상태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상태는 한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채 강박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 1분이었다. 상태는 양팔을 옆으로 크게 벌려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뿐이었다. 그 무한의 공간은 구름 한 점 없이 오로지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상태는 문득 자신이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잠시 정신이 아찔했고 그 순간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과 강박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했다. 상태를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댔지만 상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관리소장은 누워있는 상태에게 다가가 이런 짓거리를 한 번만 더하면 가만 안 있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은 상태를 일으켜 세웠고, 아파트는 그 견고함을 뽐내듯 강렬한 태양 아래 우뚝 솟아 있었다. 상태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차가운 느낌을 주는 진한 회색 외벽을 쓰다듬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왔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졌을 때 묻은 흙이 어느새 바짝 말라 상태가 움직일 때마다 황갈색 먼지가 되어 풀풀 날렸다. 상태의 얼굴에는 땟자국이 꺼뭇꺼뭇하게 남아 있었다. 상태의 모습에 놀란 아내가 어서 씻으라며 상태를 욕실로 떠밀었다. 상태가 씻고 나와 소파에 않았다. 아내는 상태가 나오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따졌다. 상태의 말을 듣는 동안 아내는 슬슬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입이 벌어지더니 급기야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며 난리를 쳤다. 상태는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아내는 상태가 못 미더웠는지 여러 번 다짐을 받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상태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디지털시계가 보였다. 얼마 전부터 시계가 고장이 났으니 수리를 맡기라고 아내에게 채근했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아이는 장난감 블록을 높게 쌓아 올리다가 자신이 만든 모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블록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는 다시 쌓고 있었다. 상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았고 이내 소파에 앉은 모습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내가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탕탕거리며 손질하는 소리에 상태가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켰다. 상태는 모처럼 만의 단잠을 깬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이는 양손에 블록 조각을 하나씩 쥐고 텔레비전 만화 영화에 쏙 빠져있었다. 일요일 저녁의 평온하고 익숙한 일상이었다. 상태는 자신을 끊임없이 옥죄던 불안에서 벗어난 것만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아내는 상태가 일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쓰레기를 버리고 오라 했다. 상태는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의 한쪽 벽면에는 아파트 외벽 도색 공사에 대한 공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공사 기간은 10월 15일부터 21일까지이며 외벽의 도색 디자인과 색상은 주민 투표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상태는 첫 번째 디자인 시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긴 생활 쓰레기를 수거함에 툭 던지고서는 유리병이며 플라스틱 같은 재활용품은 따로 구분하여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쓰레기를 다 버리고 집에 들어온 상태는 자연스레 고장 난 디지털시계를 봤다. 오후 3시. 며칠째 그 숫자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액정 화면 한 귀퉁이에 작게 표시되어 있는 날짜가 상태의 시선을 붙잡았다. 10월 21일. 아파트 외벽 도색 공사가 끝나는 바로 그날이었다.
‘10월 21일 오후 3시, 오후... 3시.’ 상태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요하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상태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봤다. 시계는 고장이 난 채 오후 3시에 멈춰있었다. 한동안 손목시계에 머물던 상태의 시선이 천천히 아내와 아이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