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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단편소설] 오후 3시 (2)

#9월 25일

by 이돌 Mar 26. 2025

9월 25일, 금요일.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상태는 빠르게 출근 준비를 마쳤다. 현관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나섰다. 전철역으로 가며 어젯밤 꿈에 대해 생각했다. 꿈은 시간이 흐르면 대개 그 기억이 점점 흐트러지고 희미해져 마침내 기억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꿈에 나온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이런 다름이 상태를 불안하게 했다. 전철역에 도착한 상태는 회사로 가는 전철을 탔다. 서고 가기를 몇 번 반복한 전철은 어느새 지하에서 나와 지상을 달리고 있었다. 전철의 유리창 밖으로 낮은 층수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가 보였다. 그 건물들 사이로 홀로 우뚝 솟은 아파트 한 채가 상태의 눈길을 끌었다. 창이 나 있는 전면은 진한 회색이었고 측면은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였다. 꿈속에서 본 건물과 똑같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꿈이 맞는다면 창 너머로 보이는 저 건물은 이틀 뒤면 무너질 테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회의 중에도 상대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는 시늉만 했을 뿐 회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상태는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다 그만 책상 위에 놓인 머그잔을 툭 치고 말았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가 서류에 왈칵 쏟아졌고 서류는 삽시간에 커피를 흡수하며 진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상태는 일이 자꾸 꼬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정리하던 서류를 책상 한편으로 내던지고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쳐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태는 자신의 꿈이 예지몽이라 확신했고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퇴근 시간. 상태는 책상 위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지고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상태는 숨도 쉬지 않고 무작정 어젯밤 꿈에 대해 떠들어 댔다. 아내의 시큰둥한 표정에 무관심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태는 그런 아내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꿈속에서 본 건물과 똑같은 건물을 출근길에 실제로 봤다고 했다. 아내는 우연이라며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건물을 가까이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상태는 문 앞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신발을 한 발씩 차례로 신고 집을 나섰다. 어디 가냐는 아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쾅 닫혔다. 얼마 뒤 전철에서 내린 상태는 지상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출근길에 봤던 건물이 멀리서 보였다.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다다른 곳에는 10층 높이의 복도식 아파트가 우뚝 서 있었다. 어둑한 저녁인데도 외부 조명을 받아 아파트 외벽의 진한 회색과 체크무늬가 선명하게 보였다.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아서인지 1층 출입구를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가는 사람, 장을 보고 오는 사람,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손에는 얼마나 쪽쪽 빨아 댔는지 끝이 뾰족하게 녹아버린 막대 사탕이 꼭 쥐여 있었다. 상태는 어떻게든 저들을 구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 갑자기 전철의 전등이 깜빡거리다 꺼졌고 전철 안은 금세 캄캄해졌다. 중간중간 스마트폰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사람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춰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곧 전등이 다시 켜졌고 사람들은 정전이 익숙한 일인 듯 평온해 보였다. 전철에서 내린 상태는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걸어갔다. 밤거리를 은은하게 비추는 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새 한 마리가 발을 오므린 채 죽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새의 사체는 어디 한 군데 훼손된 곳 없이 멀쩡해서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불현듯 이 모든 것이 불길한 징조인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 잘 될 거야. 괜찮아.’ 상태는 순식간에 자신에게 찾아든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 주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도착한 상태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거실 벽에는 디지털시계가 고장이 난 채 걸려 있었다. 아내는 잠이 깊이 든 모양인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옆으로 누운 상태는 이 생각 저 생각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로 한참을 궁싯거리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꿈속이었다.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건물의 잔해는 그야말로 거대한 쓰레기 산 같았다.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간 단면에서 길고 삐죽하게 튀어나온 철근 다발은 사방으로 구부러져 흉물스러운 모습이었고 천장이 그대로 내려앉으며 몇 조각으로 쪼개져 버린 콘크리트 벽은 사람보다 몇 배는 족히 커 보였다. 거대한 크기의 잔해 사이사이에는 잘게 부서진 돌덩이, 나무의 결대로 이리저리 쪼개져 뾰족한 모양새로 위협하고 있는 목재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플라스틱 쪼가리들이 빼곡했다. 그 밑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매몰돼있을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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