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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07. 2024

레인 피플

타인의 손

 해는 여섯 시 오십팔 분에 질 것이다. 어제 해는 일곱 시에 졌다. 가을 해는 하루 평균 이 분씩 빨리 진다고 했다. 내일 해는 여섯 시 오십육 분에 지게 될 것이다. 핸드폰 잔여 통화 시간은 사십삼 분, 인터넷 약정은 내년 사 월, 전화는 구 월까지고, 무선주전자를 사은품으로 준다고 해서 먹게 된 우유 약정은 여섯 달이나 남아있다. 달력을 본다. 30개의 숫자, 영문으로 쓴 일곱 개의 요일들 중 하나에 동그라미가 쳐 있다. 누구의 생일일까. 기억나지 않는다. 팀장은 나에게 이십만 원이 넘는 보험을 권했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위기 상황을 탄탄히 보장할 보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출 기한, 은행의 잔액, 아파트 전세 액수, 남편의 급여와 국민연금. 나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숫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안방 침대 위에 아기가 양 다리를 벌린 채 자고 있다. 늦은 오후, 비가 내리고 있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아기는 먹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고 있는 새 아가의 배는 홀쭉해질 것이고, 잠시 후 잠에서 깨 자지러지게 울며 먹을 걸 찾을 것이다. 자고 먹고 싸는 것. 생존에 필요한 몇 가지로 온전히 완벽한 인생의 짧은 시기. 아이가 크면 아이의 미래 역시 가상의 숫자들로 좌우될 것이다. 온기 없는 삶. 생기가 사라진 일상. 가스 불을 켠다. 구멍마다 파란 불꽃이 입김을 내뿜고 있다.      

  사랑은 타이어 같지.

  왜?

  타이어를 잘 봐. 멀리서 보면 고무로 된 둥근 바퀴일 뿐이잖아. 근데 가까이 가보면 무수한 균열과 무늬가 물결을 이루고 있거든. 들여다보면 볼수록 저게 원래 타이어라는 걸 모르거든. 

  사랑은 덮치는 거 아닐까?

  덮친다고?

  갑자기 속수무책으로 무자비하게.

  글쎄.

  자기 나 사랑해?

  글쎄.     

  화면 속 주인공들이 그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는 걸 남자는 보고 있다. 둘은 연인이고 성향이 다르다. 남자는 채널을 바꿔버린다. 주말 오후, 거실로 반쯤 들어온 햇살에 적당히 나른해진 남자는 허벅지를 벅벅 긁으며 소파 위를 뒹굴고 있다. 탁자 위에는 국물이 조금 남아있는 컵라면과 감자칩 봉지가 놓여 있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냉장고에 캔맥주가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감자칩만 싹쓸이한 상태다. 남자의 주말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뒹굴 거리기. 티브이 보기. 먹다가 자기. 티브이를 보고 있는 사내 앞에 느닷없이 뭔가 나타난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유형이다. 사람과 흡사하지만 비현실적인 존재들. 몸집이 아주 작아 요정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착각하지만 그들이 난장이라든지 요정이 아니라는 걸 남자는 안다. 어떻게? 그냥 안다. 그들은 그러니까 그들 자체에 알맞게 생긴 어떤 형태이므로 특정한 고유명사를 갖다 붙일 수 없다. 주말, 거실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남자 앞에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한 일은 그가 보고 있는 티브이를 거실에서 안방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아주 열심히, 당연하다는 듯이. 티브이를 옮겨놓고 난 후 그것들이 한 일은 열을 맞춰 집을 나가는 것이었다. 인사도 없이. 할 일을 마쳤으니 집을 나가는 게 뭐 어떠하냐는 듯이. 그들이 집을 빠져나가고 난 뒤 남자는 생각한다. 저것들은 뭐지? 어떻게 집에 들어왔지? 왜 티브이를 옮겨놓았지? 낯선 그들의 침입에 흥분한다거나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거나 이건 꿈이 아니야 고개를 가로젖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어쨌거나 지금은 없는 거지? 남자가 다음에 취한 행동은 안방으로 옮겨진 티브이를 따라 제 몸을 옮긴 뒤,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다시 티브이를 보는 것뿐이다. 

  책을 덮는다. 걸레로 방을 훔치다 책장을 받치고 있던 것이 책이라는 걸 안다. 책장에 책이 제법 꽂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받쳐놓은 저 책이 궁금하다. 책장 한쪽을 밀어낸 뒤 발로 살살 돌려 책을 빼내고 다른 책으로 받쳐놓는다. 삼분의 이쯤 책장 무게에 눌려 자국이 남아있는 책은 누군가의 단편소설이다. 펼친다. 누렇게 바랜 종이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촌스러운 서체들. 누군가가 선물로 준 책인지 내가 산 책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첫 단편에 등장한 것이 바로 티브이를 옮겨놓고 다니는 이 기묘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좀전에 기저귀를 갈아준 아기는 자고 있다. 책을 후루룩 들춰본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버석거리는 냄새가 코로 스민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난 남편은 티브이를 본다. 회사에 가지 않는 주말과 휴일에도 남편은 티브이를 본다.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기저귀를 갈고 빨래를 너는 동안에도 남편은 티브이를 본다.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린다. 분유 좀 타줘.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분유 좀 타 달래도. 티브이를 다 본 남편은 소파에 드러누워 코를 곤다.      

  집을 나서려는 내게 티비 피플이 손을 흔든다. 괜찮아, 우리가 티브이를 옮겨줄게. 원한다면 남편 회사로 갖다 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염려 마. 아기는? 아기? 아기가 누구지?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작고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아기라 하나 보지? 미안하지만 아기는 좀. 우린 티브이만 옮길 수 있거든. 아기를 사랑해?    

  

  팀장은 집 근처 카페에 있다고 했다. 외근을 나오던 차에 들렀다고 말했다. 수인이를 낳기 위해 출산휴가를 받아 집에서 시일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먼 거리도 아니지만, 더운 날 만삭의 몸은 힘겨웠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튀어나온 배 밑에 쩍 들러붙은 팬티 라인이 가려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팬티를 내려보니 빨간 줄 사이로 땀띠가 오글거리고 있었다. 뱃속이 심하게 출렁거리다 오른쪽 옆구리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잡아보니 작은 망치 모양의 아기 발이었다. 손에 잡힌 발은 쏜살같이 미끄러져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악스러운 힘, 불만에 가득 찬 발길질. 또 한 차례 출렁.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팀장은 기다리는 걸 못 견딘다.

  우리 애.

  참치 샌드위치 하나를 허겁지겁 먹어치운 팀장은 입가에 소스를 닦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있잖아. 화장기 없는 얼굴, 쪼글거리는 목 주변에 건 유별나게 큼직한 터키석 목걸이.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까맸다. 여전히 굶주린 얼굴이었다. 

  어제 말했다. 마더라고…. 분명 마더였어.

  미국서 태어난 찰리는 일곱 살이었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찰리가 할 줄 아는 말은 아, 어와 같은 의성어뿐이었다. 아이가 세 살 때 심하게 부부 싸움을 했고, 다섯 살 연하의 남편은 팀장을 떠밀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엄마를 찰리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후 아들은 말을 멈췄다. 아동학 박사인 팀장에겐 크나큰 상처였다. 남편과 헤어진 팀장은 찰리와 둘만 서울에 왔다. 회식 후 팀장이 끌고 간 집에서 일곱 살 찰리는 으어어어라고 괴성을 질러댔었다. 찰리, 울 아가!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껴안고 뽀뽀를 퍼붓던 팀장의 과장된 몸짓. 새벽 술에 취해 외롭다고 흐느끼던 그녀. 모든 상황이 지나치게 연극적이었다. 

  요새 잠도 못 자.

  찰리 땜에요?

  아니 ‘비밀의 문’ 자니 땜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니? 내가 걔 땜에 아주 미치겠어. 정란이한테 얼마나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지 알어? 지난 회 때 입은 녹색 카디건 정말 죽여줬어. 재방 보느라 잠도 못 잔다니까. 너 그거 봐?

  아뇨.

  얼마나 재밌는데, 안 보니? 봐봐 끝내줘.

  ‘열쇠’가 종영된 뒤 몇 달 잠잠하던 드라마병에 다시 도진 팀장은 다시 주인공과 사랑에 빠졌다. 이번엔 가수 자니였다. 그가 처음 출연한 드라마는 호평이었다. 열혈 팬들이 시청률까지 끌어올렸고 그 기세를 몰아 그는 최근 신곡을 발표하고 대형 콘서트를 기획 중이었다. 수십만 원의 티켓은 판매 삼 일 만에 매진됐고, 팀장은 사흘 예정의 콘서트 중 이틀치 표를 예매했다고 했다. 차를 마시는 내내 팀장은 행복한 표정으로 드라마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군대 가기 전 팬서비스 차원으로 이번에 드라마 출연한 거래. 군대 갔다 오면 팍 늙겠지 뭐. 그땐 누굴 좋아할까 지금 고르고 있어. 지금은 무조건 자니야.   

  카페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가 가늘게 실눈을 뜨며 아이처럼 과장된 손짓을 흔들어댄다. 갈게. 잘 있어. 애 낳으면 바로 문자 때려라. 같이 일할 때 앙큼을 떨던 팀장의 독기 어린 눈빛이 온데간데없이 흐릿하다. 몇 달 전 팀장은 나에게 사은품 박스를 나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었다. 애 가진 게 무슨 유세냐며 그렇게 나이브하게 일할 거면 그만두라고 얘기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팀장에게 대들었다. 너도 애 낳아 봤다면서 그게 할 말이냐. 배가 이런데 박스를 어떻게 나르느냐 발악을 했다. 다른 부서 사원들이 달려왔고 중재에 나섰다. 팀장은 네가 나가든 내가 나가든 사생결단을 내자며 소리를 쳤고, 그 와중에 배가 굳어져 내가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무너졌다. 얼굴이 퍼렇게 된 팀장이 울면서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미쳤나 봐. 팀장을 봤고 눈이 마주쳤는데, 나와 같은 불안을 발견한 나는 허무해졌다. 이후부터 팀장과 나 사이에는 유대가 생겼다. 전화가 온다. 정미다. 같은 부서였던 정미는 회사 욕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언니, 팀장 드디어 나간다. 독한 년이야. 여덟 달 채워 실업급여 신청한 거 있지? 

  조금 전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팀장을 떠올린다. 두 주 전 사장이 팀장의 책상을 치워버렸다고 했다. 아침에 출근한 팀장은 간이 의자에 잠깐 앉아 있다가 외근 계획서를 들이밀고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고. 무슨 업체 미팅건, 업무 제휴건 등 그럴듯한 이유들이 적혀 있었지만 그녀는 종일 방황하고 다녔을 것이다. 인터넷 사업부 콘텐츠를 책임졌던 팀장의 아이디어는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사이트에 가입하는 모든 회원들에게 최고급 포켓 앨범을 선물로 주자는 제안은 성공적인 듯했다. 신문과 제휴 사이트 곳곳에 광고를 실었고, 자동차와 고가의 장난감을 건 이벤트로 회원들을 유혹했다. 적지 않은 투자금이 홍보비로 들어갔지만 실적은 적었다. 달콤한 사탕에 현혹당한 소비자들은 다른 공짜를 내놓기 전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우리 사이트가 아니어도 공짜를 내주는 사이트들은 숱했다. 아이티 사업을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에서 무더기로 돈을 방출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투자자들이 명분 없이 돈줄을 대지는 않았다. 회사는 눈에 보이는 성과물을 내야 될 시점에 직면해 있었다. 각 부서 팀장들은 부진한 매출의 원인을 타 부서로 돌렸다. 사장은 팀장을 지목했다. 마녀사냥인 셈이었다. 투자금은 윗선에서 더 많이 탕진했다. 부서 자체를 없애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휴직계를 제출하던 즈음의 일이었다. 며칠 뒤 소문처럼 부서가 사라졌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난 뒤 돌아갈 부서를 잃었다. 팀장은, 버텼다. 찰리 때문이었다. 팀장을 만난 날 새벽 수인이가 나왔다. 병원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도 팀장이었다.


  아기도 남편도 자고 있다. 분유와 기저귀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쪽지도 하나 남긴다. 수인이 울면 기저귀 갈아 주거나 분유 타줘. 분유는 타서 손등에 꼭 찍어보고 온도 맞춰봐. 꼭 가야 되냐. 그럼 얼마 만에 보는 애들인데. 일찍 와. 외출하는 게 달갑지 않은 남편이 인상을 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스카라를 바르고 입술을 바른 뒤 휴지로 한 번 찍고 옷장 문에 걸어둔 스카프를 맨다. 돌체 앤 가바나 향수를 코트 안쪽에 두어 번 뿌린다. 지하철을 탈까 하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면 지하철보다 30분은 더 가야 하는 거리다. 풍경이 보고 싶다. 마음을 좀 골라야 한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맞은편으로 지나가는 가로수와 자전거를 탄 아이와 등산복을 입은 여자와 무리를 이루어 재잘거리는 어린 여학생들을 구경한다. 여유롭다. 흥분된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머릿속에 잠깐 수인이 지나간다. 잠깐의 외출이다. 주문을 외우듯 읊조린다. 불안하지 않다. 주말 오후라 차가 막히지 않아 맞은편 차선의 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집안에서와 다른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생기가 있다. 뱃속에 수인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난 뒤 갑자기 모든 게 변해 버렸다. 공부를 하다 수인이가 생겼고 돈을 벌다가 수인이를 낳았고 그러다 갇혔다. 창문을 조금 연다. 창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쌀쌀하다. 불쑥 창문이 닫힌다. 뒷자리에 앉은 중년의 여자가 내게 묻지도 않고 창문을 닫아버린다.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살핀다. 소방서 맞은편 오피스텔 7층 1208호. 눈앞이 흔들린다. 벨을 누르는 손끝이 떨린다. 자동키가 울리며 문이 열린다. 그가 얼굴을 내민다. 그 사이 눈 밑에 주름이 잡혀 있다. 소년 같은 표정 대신 오랜 시간 웃지 않아 굳어진 근육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다. 나를 본 그는 몹시 당황한다.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의 그가 문을 벌려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준다. 화가 난 것도 같다. 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구두를 벗고 나도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나를 거실에 남겨두고 침대만 놓인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 거실 낯익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간 이후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이전에도 그는 잘 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게서 술 냄새가 난다. 담배도 피운 것 같다. 거실은 어둡다. 창밖을 바라보니 밖은 깜깜하다. 시계를 들여다본다. 밤 11시가 넘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았을 때는 낮 밝은 오후였는데 지금은 밤이다. 그 사이 시간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 버렸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를 탔고 친구들을 만난 다음 술을 마시다가, 노래방에 갔다가 그곳 화장실에서 변기를 붙잡고 토를 했던가. 친구 하나가 나를 택시에 태웠고, 번호판을 기억하겠다고 했던가. 택시 안에서 나는 기사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2층에서 그의 말소리가 내려온다.

  가.

  화장실로 들어간다. 혼자 사는 남자의 화장실은 휑하다. 모가 삐져나온 칫솔 하나, 샴프와 알뜨랑 비누, 물때가 고여 있는 타일과 머리카락이 없는 수챗구멍. 그 사이 그에겐 여자가 없었나. 옷을 벗고 샤워를 한다. 그의 귓전으로 물소리가 흘러 들어갈 것이다. 술에 취한 몸이 비틀거린다. 여전히 들어가지 않은 볼록한 배, 퀭한 눈, 취기가 가시지 않은 입. 샤워를 마치고 나와 티브이가 앞에 놓인 쇼파에 옷도 입지 않은 채 손 하나를 귀 뒤에 감추고 모로 눕는다. 체온이 닿지 않은 가죽쇼파에서 찬 기운이 올라온다. 재킷으로 몸을 덮는다. 난방을 돌리지 않은 거실은 싸늘하다. 편안하다. 거실은 추워. 그의 목소리가 반갑고 화를 낼까 봐 걱정도 된다. 눈을 잠시 감는다. 어두운 시야가 돌아간다. 오른쪽으로 돌다가 왼쪽으로 돌아간다. 몸을 일으켜 2층으로 올라간다. 어두운 계단이 한사코 불쑥 올라온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그의 옆에 눕는다. 그가 몸을 반대편으로 돌린다.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와 등을 맞대고 나도 모로 눕는다. 등이 닿아 있음을 느낀다. 웃음이 나온다. 그가 몸을 돌려서 나를 끌어안는다. 그의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다. 그가 중얼거린다. 씨. 술냄새.   

    

  선배는 먼저 라디오를 틀었다. 경쾌한 리듬, 중음의 리드미컬한 음성, 윤수일의 ‘아파트’였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파트.” 모두가 무심결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안,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칠판 위에 커다랗게 인화한 사진을 붙였다. 펼쳐진 사진에는 한강변을 마주하며 일렬로 세워진 아파트가 보였다. 천편일률적인 모양에 흰 페인트가 칠해진 한강의 아파트들은 감옥 같기도 하고 공장 같기도 했다. 그 앞으로 흐르는 한강은 하늘색 색소를 뿌려놓은 듯했다.  

  바로 요겁니다. 이 아파트가 우리의 미학적 시선을 가로막고 있어요. 세계가 현존재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말이죠. 세계와 어우러지지 못한 존재자로서의 상황, 실존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거죠. 지구상에서 아파트에 미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평소 우아한 자세로 턱을 받치고 있던 교수는 학생의 도발적인 발제에 매우 만족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의 발표를 경청하던 학생들의 시선 역시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어디선가 비판이 날아온다. 

  건축학과 수업 아닌데요.

  하이데거를 말하지 않습니까? 

  학창 시절, 선배였던 남편이 나의 질문에 호기롭게 미소를 짓는다.     

  새벽, 아기 옆에 누워 있는 나를 향해 남편이 슬금거리며 다가온다. 현관 자동키 소리가 날 때부터 그가 온 걸 알고 있었다. 남편의 퇴근은 언제나 불규칙하다. 새벽에 들어올 때는 항상 취해 있기 때문에 굳이 깨 있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잠시 후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냄비가 어딨는 거야, 라면은 어딨어. 라면을 끓이려나 보다. 남편은 술을 마시면 먹을 걸 찾는다. 가스 불 내뿜는 소리, 버스럭 봉지 뜯는 소리, 냉장고에서 김치를 찾는 소리, 오늘은 양호한 편이다. 대개 남편은 먹을 걸 달라고 자고 있는 나를 깨우기 일쑤다. 라면을 다 끓인 남편이 뜨거운 면발을 식히려 입김을 후 불다가 후루룩 라면을 씹는다. 라면을 먹으면서 남편은 연신 욕을 내뱉는다. 씨발 새끼, 씹새끼, 개새끼, 좇같은새끼. 뭔가 안 풀렸나 보다. 다니던 건축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해서 친구와 동업 식으로 회사를 차린 뒤부터 남편의 폭음과 욕설은 심해졌다. 남편은 오늘도 단란주점에 갔을 것이다. 접대를 하지 않으면 수주를 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느새 그는 향락에 익숙해져 있었다. 도시에서 아파트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남편은 최근 아파트 리모델링 수주를 따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오늘 그와 술자리를 한 사람들 역시 그 일을 성사시키는 데 힘을 실어줄 이들일 것이다. 문자 신호음이 들어온다. 남편에게 새벽에 날아오는 문자는 대개 술집 여자들이 보낸 것이다. 오빠, 잘 들어갔어? 담에 또 와야 돼. 알지? 술이 떡이 되지 않으면 오는 즉시 지워버릴 문자들. 문자는 왜 보내고 난리야. 마사지를 받으러 가면 돈을 더 주고 섹스까지 치르고 온다고. 언젠가 친구들과 집에서 술을 마시며 남편은 말했다. 수영복 차림의 여자가 들어와 오일을 묻혀 마사지를 해주고 난 다음 묻는다. 다음 해드려요? 돈을 치르라는 얘기고, 셈이 끝나면 여자는 알몸이 된다. 남편이 길게 오줌을 눈다. 잠시 후 그림자가 문지방에 들어온다. 돌아누워 있는 내 옆으로 남편이 드러눕는다. 목덜미로 입김을 내뿜는 남편에게선 냄새가 난다. 조금 전 먹은 라면 냄새, 소주와 맥주가 뒤섞인 알코올내, 안주로는 마늘과 쌈장을 잔뜩 묻혀 고기를 싸먹었을 것이다. 머리 좀 감지. 남편이 중얼거린다. 남편의 손이 원피스 잠옷 아래로 들어가 옷을 끌어올리며 위부터 훑는다. 유방을 한쪽씩 주무르던 남편의 손은 배로 향한다. 늘어진 뱃살을 한 움큼 잡아 굵기를 가늠한다. 그의 손이 엉덩이 부근에서 더듬거린다. 팬티 밖으로 튀어나온 두툼한 쿠션감을 감지한 그가 아랑곳하지 않고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그의 손을 낚아챈다. 남편이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간다. 잠시 후 거칠게 코 고는 소리가 난다. 부스스 일어나 핸드폰을 열어 시계를 본다. 2시 반. 아이를 살핀다. 4시쯤 깨서 울 것이다. 잠버릇이 잘못 든 탓에 새벽에 깨 칭얼거린다. 30분은 넘게 엎어서 어르지 않으면 잠이 들지 않는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거슬린다. 아무래도 아기가 더 일찍 깰 것 같다. 무릎을 받치고 일어나 어둠 속에서 팬티를 속 생리대를 뺀다. 생리가 시작되려면 나흘은 더 남아있다. 

  무슨 피를 일주일이나 흘리냐? 피 흘린다고 섹스 못하는 건 아니잖아.  

  만지지 마.

  하자.

  하기만 해!

  화가 난 남편이 작은방 문을 소리 나게 닫는다. 잠시 후 남녀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남편은 들으라는 듯 포르노 동영상을 크게 틀어놓는다. 당장이라도 황홀경에 빠질 듯한 여자의 교성과 연신 예스를 외치는 남자의 헐떡이는 신음이 거실까지 덮치고 들어온다. 아기가 듣고 있다는 것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다. 포르노를 틀어놓고 남편은 자위를 시작한다. 남편이 나간 작은방 휴지통에는 휴지들이 수북하다.      


  침대 위에서 대자로 뻗어 자던 남편이 몸을 모로 튼다. 다리를 벅벅 긁던 그가 몸을 굴려  방향을 틀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바로 밑에는 아기가 자고 있다. 툭. 순식간에 남편의 육중한 몸이 아기를 덮친다. 툭. 호박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질 때 터지는 소리. 아기는 남편의 몸에 눌려 즉시, 작은 비명 하나 없이 숨이 끊어진다. 아악. 내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남편은 몸을 배시시 틀며 일어나지만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기는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아기는 내 등에 업혀 있다. 새벽이다.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포대기도 두르지 않은 상태로 아기를 등에 올려 몸을 살살 흔들며 눈을 감고 있다. 아기가 등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툭. 바닥에 놓여 있던 핸드폰 위로 아기의 정수리 아랫부분이 찍힌다. 툭. 아기의 머리를 짓누른 핸드폰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며 환한 빛이 들어온다. 오빠, 잘 들어갔어? 담에 또 와, 알았지? 아니,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던 뜨거운 물이 아기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진열장 위에 놓인 시계가 아기의 머리 위로 곤두박질친다. 누군가 던진 날카로운 다트가 아기의 오른쪽 눈에 날아와 박힌다. 아직 닫히지 않은 아기의 대천문에 커다란 주먹이 날아온다. 쾅 닫힌 냉장고 문 사이의 아기의 가녀린 팔이 끼어 있다. 아니, 아기에겐 아무런 물리적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기는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다. 안심한 나는 아기 옆에서 피곤한 몸을 누인다. 아침이다. 눈을 뜬 내가 품에 안은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 아기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다. 얼굴은 푸른 납빛으로 변해 있다. 아기의 목구멍에는 바닥에 떨어뜨린 10원짜리 구리 동전이 걸려 있다. 


  보행기에 앉아 나무로 된 자동차를 입에 물고 있는 아기가 바닥에 침을 뚝뚝 흘린다. 빨기에 몰두하던 아기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는다. 음음. 빨기. 눈 마주치기. 웃기. 음음. 빨기. 두리번거리기. 눈 마주치기. 웃기. 음음. 그러다 자동차를 내던지고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음음. 싫증이 난 모양이다. 엄마를 찾는다. 보행기를 버둥거리며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온다. 그래 내가 엄마다. 음음. 음음.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길한 생각들. 베란다 창을 활짝 연다. 날이 차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른다. 병원 갈 때를 빼고 아기와 나는 몇 달째 외출을 하지 않았다. 밖은 여전히 춥다. 인터넷으로 식료품과 기저귀, 분유를 주문하면 다음 날 택배라고 쓰인 조끼를 입은 사내가 물건을 가져온다. 그는 언제나 벨을 누르고 내가 나오길 기다린 다음 눈이 마주치면 물건을 내려놓고 간다. 그뿐이다. 그와 나는 말이 필요없다. 사내가 가고 나면 온종일 나와 아기, 아기와 나뿐인 공간에서 나는 아기가 먹고 싸고 잠자는 것을 돌본다. 아기는 세 시간을 주기로 잠을 자고 먹고 수시로 오줌을 싸고 하루 네 번 똥을 눈다. 아기가 잘 때는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인터넷을 잠깐 하다가 늦은 끼니를 때우고, 때로 같이 잠을 잔다. 15평 아파트에 물건들이 꽉 차 있다. 침대와 냉장고 식탁과 오디오 들로 채워진 공간에서 나는 온종일 티브이를 틀어놓고 아기를 돌본다. 밖은 춥고 아기는 어리다. 외출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할 수 있다. 외출을 하기가 싫다. 불어난 몸, 튀어나온 배, 헝클어진 몸. 다시 일할 수 있을까. 껍데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알맹이는, 그러니까 어디 있더라. 전화를 건다. 엄마. 그래. 수인인? 놀아. 아픈 덴 없고? 응. 힘드냐? 아니. 아, 예. 얘, 손님 왔다. 그만 끊자. 엄마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를 사귀라고 한다. 봄까지만 참으면 괜찮다고 한다. 애 키우는 엄마는 다 힘들다고 한다.  

  애 키우는 게 뭐가 대수라고 유난스럽네. 울 엄만 넷이나 키웠어.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린다. 


  아이를 키우려면 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할 얘기가 없다. 할 얘기는 많다. 엄마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한다. 육아와 남편과 시어머니와 드라마와 쇼핑 이야기. 왜 재미가 없는 걸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없다. 엄마들이 나를 걱정한다. 걱정하는 엄마들이 짜증스럽다. 어느 날 나는 엄마들에게 묻는다. 레인피플이라고 아세요? 비를 타고 내려와서 소원을 들어준대요. 엄마들이 재밌다는 듯 들으며 각자 소원을 말한다. 다음 날도 나는 엄마들에게 묻는다. 레인피플이라고 아세요? 비를 타고 내려와서 소원을 들어준대요. 엄마들이 서로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한다. 다음 날도 나는 엄마들에게 묻는다. 레인피플이라고 아세요? 엄마들이 호호호 웃으면서 그 얘기 그만하라고 말한다. 다음 날에도 나는 엄마들에게 묻는다. 레인피플이라고 아세요? 한 엄마가 화를 낸다. 지금 무시하는 거냐고. 엄마들은 한두 가지씩 이유를 들으며 우리 집을 빠져나간다. 다음 날부터 엄마들은 아이를 하나씩 들쳐 업고 우리 집 벨을 누르거나 전화를 걸지 않는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와 자기 상태가 걱정된다고 말하며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나는 전화를 건 엄마에게 다시 묻는다. 레인피플이라고 아세요? 미친년! 통화가 뚝 끊겨 버린다. 유난스럽다. 술 생각이 난다. 


  비를 좋아한다. 비를 들여다보고 온기를 느끼고 손으로 쓰다듬으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비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라고 나는 단정한다). 비의 비. 바다의 바다. 그 옆 나무. 나무의 나무. 그 뒤 바람의 바람…. 그런데 나는 안 된다. 나로는 도무지 들어가지지를 않는 것이다. 나의 꿈, 사랑. 안 된다. 갑갑하다. 사람인 탓이라고 단정한다. 모르겠다. 그리고 너. 너는 왜 거기 그러고 있는 거지? 이리 와. 너는 싫다고 고개를 젓는다. 이리 와. 너의 떨리는 어깨, 야윈 뺨, 휘청거리는 몸. 초점을 잃은 눈동자. 우리 건너가자. 이리와. 너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감싼 채 훌쩍인다. 나, 너, 건너감.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건너갈 수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너를 어떻게 해야 엄마가 되는 건지, 우리가 함께 건너가야 할 곳이 어딘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이 불길한 상상을 멈출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지. 공간 속에 아이와 갇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것 같아. 그냥 건널까 어떻게든. 일어나. 너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울기만 한다. 울지 마. 듣기 싫어. 결국 나는 너를 버리고 가버리기로 한다. 그가 묻는다. 왜 그렇게 사니?      

  그새 더 컸네!

  팀장이 양팔을 뻗어 아기를 허공에 들어 올렸다가 내린다. 쑤웅, 꺄르륵. 아기가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팀장이 다시 아기를 허공에 올렸다 내린다. 쑤웅, 꺄르륵.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밝은 웃음 소리다. 사내애는 이렇게 거칠게 놀아줘야 돼. 아기는 좀처럼 싫증을 내지 않는다. 꺄, 꺄, 꺄르. 행복에 겨운 아가는 온몸을 버둥거린다. 아기가 웃고 커피향이 좋다. 화장을 한 팀장의 얼굴은 어색하다. 마흔이 넘도록 한 번도 하지 않았다던 화장을 하고 왔다. 눈썹은 양쪽이 삐뚤어졌고, 마스카라는 아래 꺼풀로 번져 있다. 파운데이션을 너무 두껍게 발라서 목 색깔에 비해 지나치게 뿌옇다. 솜씨가 서툴다. 화장이 아니라 분장을 하고 온 것 같다. 팀장이 아기를 보행기에 앉히고 식탁 위에 앉는다. 커피를 홀짝이던 팀장이 사과를 깎는 내 앞으로 서류를 내민다.

  보장을 탄탄히 했어.

  팀장은 먼저 남편의 이름으로 설계한 보험을 내민다. 특약이 어떠하고, 사망 후 보장 액수가 어떠하다는 팀장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죽은 담에 돈 많이 나와야 뭐 해. 아플 때 확실히 챙겨야지.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한참 후 내 것으로 이어진다. 부인병이랑 암 특약을 많이 넣었어. 한의원도 적용돼. 팀장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 포기하고 그냥 듣는 척만 한다. 팀장은 결국 보험 회사에 들어갔다. 찰리를 위해서다. 보행기에 탄 아가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아기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힌다. 무릎을 까닥이며 팀장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알겠지? 네? 네. 두툼한 서류를 전부 설명하려는 기세다. 그냥 들게요. 그럴래?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지. 팀장이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곳에다 사인을 한다. 한두 곳이 아니다. 찰리는 낼모레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특수학교 보냈어. 말을 못 하니. 별 수 없지 뭐.

  팀장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두꺼운 화장 때문에 눈가와 입가에 깊은 주름이 잡힌다. 그러다가 다시 자니 얘기로 빠진다.

  연기가 얼마나 늘었는지 알아? 사랑하는 여자 땜에 걔가 대신 죽는 길을 택했거든. 아, 얼마나 우는 연기를 잘하던지. 맘 아파 죽을 뻔했어. 어젠 밤새 울었다니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맘 아파 죽겠어.

  레인 피플이라고 아세요?

  팀장이 휴지에 눈물을 찍다가 갑자기 웬 자다 깬 봉창이냐는 식으로 나를 본다. 엉 뭔 피플? 레인 피플이요. 하늘에서 비가 오면요. 레인 피플들이 비를 타고 내려온대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러요. 팀장님은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요? 글쎄. 나야 뭐. 우리 애 말하는 거? 아냐, 자니 품에 꼭 한 번 안겨보고 싶어. 그나저나 밖에 비오나? 팀장이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 한쪽 손을 바깥으로 내민다. 날이 흐리긴 하다. 비가 오려나 봐. 네 말대로 레인피플이 내려오려나 봐 호호호. 팀장이 다시 식탁에 돌아와서 묻는다. 자긴? 소원이 뭐야? 

  저는 아기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서라, 애 들을라.

  왜일까요?

  힘들어서 그래. 

  지금이 딱 힘들 때야. 그래도 그런 생각 말아. 조금만 참아. 살 만해지면 애도 자연스럽게 이뻐 보여. 지금 네가 너무 지쳐서 그래. 너 이제 엄마야. 강해져야 해. 세상 살려면 독해야 된다. 미안, 나 들어가봐야겠다. 찰리 땜에 오래 못 있어. 남편 싸인 받아놔. 내일 다시 올게. 알았지? 참, 낼 올 때 달력 갖다줄게. 내 이름 찍힌 거 아마 나왔을 거야. 보험료는 일단 내가 먼저 넣을 테니까 나중에 계좌로 보내줘. 오늘 돈 넣으면 낼부터 보험 적용되는 거야. 수인, 안녕! 팀장이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아기를 향해 양손을 흔든다. 아기가 웃는다. 힘이 없는 걸 보니 졸음이 오는 모양이다. 내 보험과 아기 보험 서류만 가방에 집어넣고 팀장이 옷을 주워 입는다. 아기를 들고 신발을 신는 팀장을 배웅한다. 사인 부탁해. 서둘러 뛰어가는 팀장의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아기가 눈꺼풀을 살살 감는다. 침대에 내려놓자 아기는 이내 잠이 든다. 차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팀장은 거칠게 차를 몬다. 빗소리.      

  왜 답이 없어? 보고 싶어. 보고 싶다고. 사는 것 같지가 않아. 말 좀 해. 미안해. 미안하다고. 한 마디라도 좋으니까 해봐. 여자가 생긴 거야?           

  벨이 울린다. 주문한 기저귀와 분유를 가져온 택배 사내다. 갑자기 내린 비에 몸이 젖어 있다. 눌러 쓴 모자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는 언제나처럼 말이 없다. 문을 열어준 나와  잠깐 눈을 마주친 뒤 그는 물건을 내려놓고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 사내가 물건을 내려놓는다. 그가 입은 조끼 등에 택배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물에 젖어 얼룩덜룩해진 그의 초록색 조끼는 평소보다 진한 빛깔이다. 사내가 굽혔던 몸을 일으킨 다음 인사를 꾸벅하고 나가려 한다. 

  저기요.

  현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그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나 싶어 사내의 눈동자가 덩그렇다.  

  아기가… 자요.

  사내의 눈이 더욱 커진다. 그래서요? 하는 눈빛이다.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모자를 눌러 쓴 사내는 생각보다 어리다. 별 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얼굴이다. 그의 몸에서 비릿한 바람내가 풍긴다. 젖 물리기 편하도록 풍덩하게 입은 웃옷 가슴께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왼쪽 유방이 드러난다.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비가 오고 있다. 아기는 자고 있다.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지 평소보다 오래 잔다. 소파 위에 앉아있다. 취했나 보다. 아기가 자는 방을 훑어본 뒤 방문을 닫고 베란다 문을 연다. 아스팔트를 때리는 빗소리가 한층 크게 들린다. 사이로 바람이 들어온다. 비 냄새가 스민다. 좀 전 사내 냄새다. 비가 왔으니 조금 있으면 봄이다. 엄마는 봄이 오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비다. 비를 타고 레인피플이 내려온다.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다. 우비를 입은 그들은 레인피플에 알맞은 체구와 몸짓을 하고 있다. 가뿐히 창문을 타 넘어오는 그들을 보고 놀란다거나 어떻게 비를 탈 수 있지? 왜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거지? 생각하지 않는다. 기다려 왔으니까. 창문을 넘어온 레인피플들이 쇼파 주위로 모여든다. 바닥이 촉촉하게 비에 젖는다. 그들이 묻는다. 소원이 뭐야? 우리가 소원을 들어줄게. 소원? 그래 너의 소원. 우린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내 소원. 내 소원이 뭘까. 조금 전보다 더 많은 레인피플들이 주위로 몰려든다. 소원이 뭐야? 소원을 말해봐. 우리가 들어줄게. 그래 소원을 말해봐. 레인피플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도 그들을 본다.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니 그들은 더 이상 레인피플이 아니다. 레인피플이다. 남편, 시어머니, 팀장의 얼굴을 한 레인피플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뭐가 문젠데? 소원 들어주면 되잖아. 남편과 시어머니와 팀장의 얼굴을 한 레인피플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소원이 뭐야? 말해 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뭐가 문젠데? 소원을 말해봐. 소원 말이야. 기다리다 싫증이 난 그들이 내 몸을 흔든다. 바보야? 멍청이야? 왜 말을 못해? 소원이 뭐야? 얼른 말하란 말야. 비가 그칠지 몰라. 비 그치기 전에 우린 가야 해. 네가 책임질 거야? 말해. 소원을 말해. 어떤 레인피플이 아기 방 문고리에 매달린다. 안 돼. 거긴 열지 마. 왜? 넌 아기를 사랑하지 않잖아. 웃긴다. 웃긴다. 레인피플들이 웃겨 죽겠다는 듯 바닥을 뒹굴고 배를 움켜잡으며 낄낄거린다. 조용히 해. 아기가 깰지도 몰라. 알게 뭐야. 넌 아기를 사랑하지 않잖아. 웃긴다. 웃긴다. 빨리 소원이나 말해. 소원이 뭐야? 우린 바빠. 조금만 시간을 줘. 그제야 잠잠해진다. 베란다로 가 문을 닫는다. 레인피플들이 내 뒤를 따라온다. 주방으로 간다. 레인피플들이 주방으로 따라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가스 불을 켠다. 구멍마다 파란 불꽃이 입김을 내뿜고 있다. 마지막 온기를 입으로 훅 불어버린다. 레인피플이 묻는다. 소원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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