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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07. 2024

밤의 남자

타인의 손

  첫날

  - 소크라테스는 강직증성 실신 환자였어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면 마치 실신한 듯 그 자리에서 굳어지는 증상이 나타나죠. 어느 날은 초저녁부터 서 있기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그 상태로 있기도 했어요. 이오니아 사람들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는지 보려고 돗자리를 깔아놓고 구경하기도 했다는군요. 그의 친구나 제자들 역시 그의 증상을 잘 알고 있어서 모임이나 약속에 늦으면 하인을 보내곤 했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소크라테스가 길 한가운데 멈춰 실신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대요. 그런 상태가 풀리면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양 쪽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고는 집으로 갔다고 해요.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나 더위를 아주 잘 참았대요. 심지어는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닐 정도였죠. 

  말을 마치자 그는 목이 마른지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호기심이 가득 든 눈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을까요?

  -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럴지도 모르죠. 

  - 참 기이한 병이네요. ‘아이다호’라는 영화에선 기면수면증에 걸린 남자가 나오잖아요. 충격을 받거나 흥분하면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어버리는 병 말예요. 그 영화 보셨어요? 어릴 땐 그런 병에 걸리는 게 낭만적이란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제가 만약 그 병에 걸렸다면 제 몸은 남아나지 않았을 거예요. 길바닥에서 잠이 들 때마다 누군가 끌고 가 강간을 했거나 소지품을 훔쳐갔겠죠. 그런 생각을 하니 오싹하네요.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후 생각에 잠긴 눈으로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 방학 때 집앞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어요. 방 딸린 20평 남짓 되는 가게였죠. 주인 여자가 아이를 낳아 대신할 사람을 뽑은 거였어요. 가게 안에는 티브이가 있었고, 내용별로 빼곡하게 비디오들이 꽂혀 있었어요. 그리고 개가 한 마리 줄에 매 있었어요. 저는 1시부터 7시까지 카운터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어요. 출근하면 먼저 더러운 가게를 쓸고 개가 싸놓은 똥을 치웠어요. 그리고 간밤에 손님이 반납한 비디오들을 자동차 모양의 기계에 넣어서 전부 돌려놓았죠. 그러고 나선 줄곧 영화를 봤어요. 개똥을 치우거나 비디오를 정리하는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 문제는 가게가 너무 추웠다는 거죠. 입김이 나올 정도였어요. 난방을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한참 앉아있다 보면 발이 시리고 온몸이 떨렸어요. 참을 수 없어서 주인 여자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어요. 아무 대꾸가 없길래 문을 열었더니 부부가 섹스를 하고 있더군요. 한쪽에선 아기가 잠을 자고 있었어요. 남자가 야릇한 눈으로 저를 쳐다봤어요. 여자가 눈을 부릅뜨더군요. 가게가 너무 추워서 그러니 난로 좀 틀어달라고 말했더니 대답 대신 여자가 문을 닫아버렸어요. 그러더니 저더러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문도 열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죠. 엎드려 있는 개를 냅다 차고 가게를 나와 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짜증이 나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죠?

  말을 마친 여자는 감싸 쥐고 있던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남자는 한 손을 턱에 고인 채 여자의 얘기를 듣다 피식 웃었다. 

  - 남편이 바람이라도 필까 봐 겁이 났나 보죠.

  여자의 말이 끝났지만 남자는 다른 화젯거리를 꺼내지 않았다. 벽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까치 두세 마리가 동시에 울어댔다. 어두운 하늘은 청명했다. 흡연을 위한 야외 테라스에 놓여진 난로에 여자가 손을 뻗어 불을 쬐었다. 담배를 꺼내 문 남자가 피곤한지 한손으로 눈 주위를 비볐다. 눈가에 건조한 잔주름이 손으로 잡으면 뜯어질 듯 실처럼 그어져 있었다.    

  - 소크라테스는 험상궂게 생겼다고 합니다. 키는 작고 대머린데다 배는 불룩 튀어나왔었대요. 알다시피 부인은 지독한 악처였죠. 그런 그가 삶에 의연할 수 있었던 건 윤회를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다른 선지자처럼 인간의 영혼이 윤회한다고 믿었고, 인간이 도덕적일수록 하늘에 가까워져 환생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평생 도덕적으로 올바른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어요. 그래야만 수많은 현자들과 함께 내세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던 거죠. 그가 불경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초연할 수 있었던 건 윤회를 믿었기 때문이에요.

  - 죽는 상황에 자존심을 지킨다는 게 어디 쉬운가요?

  - 타고난 인내심도 도움이 됐었겠죠.

   카페 테라스에 켜 있는 등이 바닥까지 비춰 등의 개수는 마치 두 배로 늘어난 듯 보였다. 등 때문인지 홀은 훨씬 넓어 보였다. 여자는 유리문 너머로 벽시계를 쳐다봤다. 조금 있으면 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가 가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와 담배를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내일도 오실 건가요?

  - 아마도요.

  그는 얇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위에 검은 모자를 뒤집어썼다. 검은 재킷에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구두수선공 같아 보였다. 그가 천천히 카페를 빠져나갔다. 남자가 나가자 여자는 음악 소리만 울리는 텅 빈 카페 간판의 불을 껐다.     

  

  둘째 날

  - 룸보트 커피는 보통 카페에선 잘 팔지 않아요.

  필터에 고인 물이 커피잔으로 서서히 빠져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물기가 빠지 커피 찌꺼기들이 버석하게 필터 주변에 들러붙었다.    

  - 우린 호텔에서 커피를 가져다 주거든요.

  방금 설거지를 마친 여자가 차가운 손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 오늘은 무슨 얘길 해줄 건가요?

  - 피타고라스에 대해서요. 

  -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여자는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잔 들고 와 다시 앉았다.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설탕과 우유가 알맞게 섞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 피타고라스는 보통 수학자로 알려져 있죠.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건 영원하고 정확한 신의 진리를 증명해 보이려는 의지였어요. 수학 공식이 요구하는 답이 언제나 참이듯 신의 세계도 영원불변하다고 주장하는 거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피타고라스교의 교주이기도 했어요.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교리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어요. 콩을 삼가라.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서는 안 된다. 빵을 뜯어먹어서는 안 된다. 높은 길로 다니지 말아라. 불빛 곁에서 거울을 보지 말아라. 흰 수탉을 건드리지 말아라 등이죠. 피타고라스교의 신자들은 이런 교리들을 철저하게 지켜야 했죠. 그는 괴짜 신비주의자였어요. 평생 그런 원칙 속에서 수학을 연구했죠.

  - 결벽증 환자들 같았겠네요. 고대 철학자들은 자기들이 신이라고 생각했나요?

  - 대부분 그랬던 것 같아요. 엠페도클레스라는 철학자는 자신이 신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로 뛰어들기도 했죠. 물론 불에 타죽었어요. 신이 아니었으니까요.

  - 그가 신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실망했겠는데요. 

  - 다른 교의 신자가 됐을지도 모르죠.

  재밌는 표정으로 듣던 여자는 신이 되고자 했던 철학자들을 떠올리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여자가 말할 차례였다. 

  - 저는 활자를 읽고 나면 전부 잊어버려요. 단어나 문장, 문단들이 망막에 잠시 얹혔다가 쏜살같이 흩어져 버려요. 읽고 싶지 않은 글, 쓰레기 같은 글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래요. 남이 쓴 원고를 다듬어주는 일을 오랫동안 했거든요. 모든 상사들이 수술대 위에 메스를 들고 병든 부위를 절개하듯 문장들을 뜯어고치길 원했어요. 그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는다는 건 제가 하는 일에선 무능하다는 걸 뜻해요. 성의가 없다거나 문장을 고칠 만한 능력이 없다고들 생각하죠. ‘나는 양을 기르듯 학생들을 가르치려 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면 그 문장에 살을 입혀서 ‘나는 나의 사랑스러운 양들을 정성껏 길러내듯 후학을 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식으로 고치길 원하죠. 좀더 고상하고 품위 있어 보이도록 고치길 원했어요. 처음 일을 배울 때 선배들이 한결같이 자서전은 맡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알았어요. 욕심을 부리다 보니 어느 순간 글만 읽으면 문장들이 모두 일그러지고 숨이 막혀 왔어요. 책을 아예 읽을 수 없게 돼버린 거죠. 저는 글을 못 읽어요. 이것도 정신병의 일종이겠죠.

  여자가 한숨을 쉬자 남자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 많이 답답하겠군요. 

  - 첨엔 죽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정돈 아니에요.

  - 치료를 받고 있나요?

  - 포기했어요.

  여자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자는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비웠다. 여자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 커피 좀 더 드릴까요?

  - 부탁해요.

 여자가 남자의 커피잔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옆으로 호수와 주변 풍경을 담은 영상이 사티에의 곡에 맞춰 벽에 투사되고 있었다. 클래식에 걸맞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금발의 남자 아이가 새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지고 있었다. 그의 부모들은 그런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엔 트렌치 코트를 입은 노신사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풍경은 자기와 상관없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잠시 후 여자가 커피잔를 들고 나왔다. 

  - 제가 평소 마시는 커피를 가져와 봤어요. 맛이 어때요?

  - 나쁘지 않네요.

  여자는 남자가 커피 맛에 감동하지 않는 것에 조금 낙담하는 표정을 지었다. 

  - 화면이 무미건조하군요.

  - 신경도 안 써요. 그냥 틀어놓는 거예요. 주인이 고상한 취향을 갖고 있었나 봐요. 예전엔 여기가 클래식 음악감상실이었대요. 그래서 음악은 전부 클래식뿐이에요. 

  - 클래식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나요?

  - 조용하다 갑자기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요.

  여자는 정말 싫어한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다 여자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 당신은 무슨 일을 하세요?

  - 제 얘기가 재미없나요?

  -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졌어요. 

  - 음악 얘길 하다 그런 질문을 하니 좀 당황스럽네요.

  - 규칙 위반인가요? 말하기 싫으심 관두세요.

  - 아니에요. 어려운 얘기도 아닌데요. 저는 서류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밤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하죠. 사무실에 들어가선 먼저 제 자리가 충분히 환할 정도만 불을 켠 다음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셔요. 보통 세 잔은 더 마십니다. 밤새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주로 법률에 관련된 서류를 정리합니다. 여러 사건들을 하룻밤 새 살핀 다음 소견서를 작성하죠. 라스콜리니코프가 쇼냐의 사건을 제대로 판결하지 못해 결국 그녀가 유형지로 끌려가게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을 살피는 건 아니겠지만, 제가 하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긴 해요. 내가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판결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신중하려 애를 쓰긴 합니다. 때론 몸상태가 좋지 않거나 피곤해서 서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할 때도 있어요. 대부분은 사건들을 꼼꼼히 살펴본 다음 법률 소견서를 작성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그날의 제 업무는 끝이 나는 거죠. 일을 마칠 때쯤이면 날이 밝아오죠. 

  - 왜 밤에 일을 하는 거죠?

  -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 그런 일들을 왜 당신에게 맡긴 거죠?

  -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빠서 저를 채용한 거예요. 

  - 하긴 요샌 밤에 일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 예전보다 더 많아졌죠. 졸음을 참고 새벽에 일하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에요.

  - 당신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 같아요. 

  - 법률과 관련된 공부를 해왔지요. 

  - 낮에 일하면 안 되나요?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도 남들처럼 낮에 일하고 싶어요. 이 말은 단순히 낮과 밤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개 안 좋은 일들은 주로 밤에 일어나거든요.

  - 저도 밤이 싫어요. 

  커피를 다 마신 남자가 낡은 서류 가방을 들었다. 여자는 자신이 질문을 많이 해서 남자가 가려고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여자는 다른 날보다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내일도 오실 건가요?

  - 아마도요.

계산을 끝낸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는 낮의 먼지가 쌓여 있는 간판 불을 껐다. 여자는 집에 가서 무얼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카페를 나온 남자는 여느 때처럼 맞은편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셋째 날

  - 오늘은 정말 손님이 없었어요.

  여자가 투덜거리며 남자 맞은편에 앉더니 채근하듯 눈을 반짝거렸다. 남자가 읽던 책을 덮었다. 그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 오르페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실제 있었던 사람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인 건 확실하죠. 이 사람도 피타고라스처럼 종교를 만들었어요. 오르페우스교는 인간이 땅의 요소와 하늘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화된 삶을 살면 하늘의 신에 가까워져서 바쿠스 신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교리는 도덕적으로는 금욕적인 생활을 정신적으로는 쾌락을 강조했죠. 그리고 여성을 매우 존중했어요. 여성들이 자연적으로 훨씬 경건하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거든요. 하지만 오르페우스교의 교리는 매우 광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었어요. 흥분한 광신교들이 오르페우스를 갈기갈기 찢어서 피와 살을 먹었다는 얘기도 전해지니까요. 육체를 섭취함으로써 신과 일체감을 느끼려 한 거죠. 

  - 이해가 안 가요.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죠?

  - 고대인들의 가치관은 극단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죠. 

  - 왜들 그렇게 신이 되고 싶어 한 거죠?

  - 쾌락을 추구하며 영원히 살고 싶어서겠죠.

  - 잔인한 사람들이네요. 신이 되고 싶다고 사람을 죽여서 먹기까지 하다니.

  -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취해진 행동이었을 거예요. 술이나 약초 같은 걸 먹어서 최면에 빠졌을 수도 있겠죠.

  - 맨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순 없었을 거예요.

  -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하긴 동물 중에선 사람이 젤 무섭죠.

  여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등의 조명이 여자의 빰을 비추자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졌다. 테이블 모서리에도 그림자가 절반쯤 걸쳐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훅 끼쳐왔다. 여자가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 전 제가 이런 데서 일하게 될 줄 몰랐어요. 최근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할 수 없게 됐으니 뭐든 딴 일을 시작해야 했어요. 식당 같은 데라도 조건만 좋으면 하기로 작정했었죠.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다 점심을 때우고 이 카페에 들렀어요. 젊은 여자애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어요. 커피를 마시는데 그 애가 불쑥 내 자리로 오더니 대뜸 여기서 일하지 않겠냐고 말하더군요. 자기는 여길 빨리 그만두고 싶은데 일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어요. 이혼할 때 위자료를 한 푼도 못 받았거든요. 생각보다 급여 조건도 나쁘지 않아 흔쾌히 승낙했어요. 웬 서류를 내밀길래 사인을 해줬죠. 여자애는 다음 날부터 안 나왔어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 이제껏 주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거든요. 월급은 통장으로 들어오고 하루에 한 번씩 호텔에서 물건이 배달돼 와요. 그 호텔과 관련된 카페인 것 같아요. 일한 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 지금이라면 한 번쯤은 주인이 가게를 살피러 와야 하지 않았을까요? 

  - 바쁜 사람인가 보죠.

  - 돈이 아주 많은가 봐요. 카페를 이렇게 팽개쳐도 괜찮을 만큼요. 이렇게 장사 안 되는 카펜 정말 처음 봐요. 어떻게 유지를 하는지. 

  - 저 같은 사람은 한산한 카페가 더 좋습니다. 전 사람이 많은 게 싫거든요.

  - 손님 입장에선 그렇겠지요. 하지만 월급 받기가 미안할 정도니까요.

- 그리스인들은 숙명을 믿었어요. 신탁에 의해 자신들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죠. 그들은 언제나 저항했지만 결국은 받아들여야만 했어요. 

  -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 그냥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 흥미롭긴 하지만 동의할 순 없어요. 전 윤회나 숙명 같은 걸 믿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변명으로 내세우는 거 아닌가요?

  - 믿는 건 개인의 자유니까요.

  - 듣기 거북하셨다면 죄송해요.

  - 괜찮습니다.

  - 마치 이 가게가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요. 

  -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지요. 

  - 이 가게가 저에겐 숙명 같은 거란 말씀이세요?

  -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 여기서 일하는 게 뭐가 그리 거창하다고요.

  - 큰 일은 늘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기 마련이죠.

  -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왠지 불안해져요.

  여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 갑자기 상황이 나빠지는 건 경험한 사람만 그 고통을 알죠. 남편과 이혼했을 때 그런 기분이었어요. 제 인생이 형편없이 추락해 버리는 느낌 말예요. 불행은 어느 순간 갑자기 몰려오는 것 같아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안 좋아질 시기에 글씨도 읽을 수 없었거든요.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고 싶었죠. 결국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만 말예요. 

  - 더 이상 다른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겠어요?

  남자가 경직된 표정으로 잠시 여자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 저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을 겪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죠.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밤에만 활동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저 역시 제가 처한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이 갑자기 쳐들어오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 그래서 저런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건가요?

  - 그럴지도 모릅니다. 

  - 당신 얘긴 이제껏 처음 들었어요. 그럼 이유는 찾으셨나요?

  - 아직 찾고 있는 중이죠. 

  - 우울하네요. 

  - 만약 지금보다 더 불행해진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전 더 이상 불행해질 게 없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거든요. 그리고 뭘 애써 그런 생각을 해보겠어요?

  -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본 거죠. 만약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 생각도 하기 싫어요. 아마 미치거나 죽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겠죠. 

  여자가 우울한 표정을 짓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발 날리는 사이로 바람이 유리에 부딪히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잠잠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갈 차비를 했다. 

  - 내일도 오실 건가요?

  - 아마도요.

  남자가 사라지자 여자는 간판 불을 끄고 남자가 걸어가는 맞은편 건물 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가려는 건물에는 등이 켜 있지 않았다. 여자는 몸을 움추렸다. 한기 때문인지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 때문인지 등 하나 켜 있지 않은 적막한 건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넷째 날

  - 많이 추운가 봐요. 코가 빨갛네요.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쳐다보며 웃었다. 진눈깨비가 날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몸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남자의 몸에선 바람 냄새가 났다. 

  - 바람 때문에 더 춥게 느껴지네요.

  남자는 테라스 자리 대신 실내 한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실내는 따뜻했다. 따뜻한 실내 온도 때문에 유리문에 성에가 하얗게 끼어 사방이 뿌옇게 보였다. 테라스 바닥에는 눈이 떨어지자마자 녹아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무희들이 플라멩코를 추고 있었다. 반복되는 볼레로의 클래이맥스를 따라 무희들은 치마를 흔들며 돌고 또 돌았다. 음악은 저러다 갑자기 뚝 끊어지겠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여러 번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볼레로가 끊어지면 여자가 급히 다른 음악으로 바꿔 틀고는 했다. 라벨은 여자가 습관처럼 듣는 목록의 하나일 뿐이었다. 남자는 볼레로의 반복이 거슬렸다. 음악이 끊어지는 순간에는 으레 다리가 부러지거나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에 얻어맞는 듯 끔직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스크린을 노려봤다. 이윽고 라벨이 끊어졌다. 주방에 있던 여자가 나와 다른 엘피로 바꿔 틀었다. 슈베르트였다. 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 오늘은 홍차 어떠세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거름 주머니에 싼 홍찻잎을 찻잔에 담아 투명 티포트와 함께 들고 왔다. 뜨거운 물을 붓자 투명한 갈색 찻물이 서서히 풀려 나왔다.   

  - 향이 좋네요.

  - 추운 날은 홍차 향이 더 향긋하게 느껴져요.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여자 역시 기분좋게 응수했다. 여자의 기분이 다른 날보다 좋아보였다. 

남자가 담배를 들고 테라스로 나가려 하자 여자가 말했다.

  - 그냥 피세요. 손님도 없는데요 뭘.

  여자가 재떨이를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담배가 몸에 맞았으면 전 하루에 한 갑도 넘게 피웠을 거예요.

  남자가 뱉은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여자가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우리 외할머니는 혼자 되시고서 담배를 시작하더니 지금은 하루에 두 갑도 넘게 피우세요. 입에서 담배를 떨어뜨리질 않아요. 적적해서 그러시겠지요. 시골에서 혼자 사시거든요. 인적도 드문 곳이라 대부분 혼자 지내세요. 어쩌다 서울에 오셔도 내내 담배를 피우셨어요. 집안에 할머니가 피운 담배 연기가 자욱할 정도였죠. 근데 전 할머니 담배 피는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는커녕 멋져 보였어요. 나도 늙어서 적적하면 저렇게 담배나 피면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도 했어요. 

  - 적적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 그럴까요?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자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남자에게 물었다.

  -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됐죠?

  - 두 달쯤 됐을 겁니다. 그날도 손님이 없었어요. 당신이 내가 읽던 책을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책의 내용을 제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 맞아요. 그런 두꺼운 책은 보통 잘 안 읽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저더러 제 얘길 들려달라고 했죠. 

  -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어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거든요.

  - 전 제가 맘에 들어서 그러신 줄 알았어요.

  남자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 오늘은 유독 피곤해 보여요.

  - 어제 일을 좀 많이 했거든요.

  - 그럼 오늘은 귀찮게 하지 말아야겠어요.

  - 괜찮습니다. 좀 곤란한 서류가 있어서요.

  - 어떤 서륜데요?

  - 궁금하신가요?

  - 네 궁금해요. 

  - 재밌는 얘기가 아닙니다.

  - 뭐 어때요. 어떤 서류였나요?

  - 어떤 여자에 관한 소송건이었어요. 이 근처에서 가게를 하던 여자였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았나봐요. 빚을 많이 졌더군요. 가게를 담보로 대출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돈도 많이 빌렸어요. 이번 소송은 그 여자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준비한 겁니다. 이런 경우 가압류 할 만한 모든 것들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여자는 건질 게 별로 없었어요. 가게는 은행권에서 먼저 가져갈 거고, 통장의 잔고도 텅 비어 있었어요. 돈을 받을 확률은 거의 없어요. 게다가 여자가 잠적해 버렸어요. 주변 사람들보다 불법 사채업자가 무서워서 도망갔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야 법적으로 해결하려 하겠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여자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어리더군요.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여자 집에 쳐들어가서 그 집에 남아있는 서류들을 들고왔는데, 물론 돈을 받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서류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더군요.

  - 무슨 문젠데요?

  - 그 여자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돈을 빌렸어요.

  - 불법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렸단 말씀인가요?

  - 그래요. 꽤 많은 액수의 돈이더군요.

  - 그 사람이 누군가요?

  - 불쌍한 사람이죠. 

  - 그 여자와 친한 사람인가요?

  - 아마 아닐 겁니다.

  - 그럼 그 사람은 그 여자의 빚을 갚아야 하는 건가요?

  - 자필 서명을 했으니까요.

  - 무섭네요.

  - 무서운 일이죠. 법으로도 그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없을 테니까요.

  - 그 여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겁니다.   

  남자가 잠시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 모서리까지 들러붙어 있던 그림자가 어느새 사그라들었다. 하늘은 한층 짙게 어둠 속에 물들어 있었다. 남자가 남은 홍차를 마저 입속에 털은 후 모자를 썼다.

  - 날도 이렇게 궃은데 일하러 가시게요?

  - 가봐야죠.

  - 그러지 말고 오늘은 저랑 술이나 한잔 하실래요?

  남자가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자가 채근하듯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 기분도 별로여서 그래요. 우리 술이나 마셔요.

  - 할 일이 있어요.

  - 너무하시네요. 섭섭해요.

  여자는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존심이 상한 듯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화가 난 사람처럼 묵묵히 검은 재킷을 입은 다음 목도리를 목에 말았다. 

  - 내일도 오실 건가요?

  계산을 마친 남자를 바라보며 여자가 체념하듯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표정에서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 아마도요.

  유리문을 열자 바람 소리가 거세게 유리창을 때렸다.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며 눈인사를 건넸다. 여자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인사를 받으려 했지만 눈빛이 떨렸다.  남자가 여자의 눈빛을 외면하듯 진눈깨비 속으로 걸어갔다. 간판 불을 누르고 나자 카페는 더욱 적막해졌다. 여자는 외로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을 일으러뜨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자의 울음은 홀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섯째 날

  -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며칠 안 오셨잖아요. 와인을 마시던 참이었어요. 한잔 하실래요?

  술 때문에 풀어진 기색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 쪽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남자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와 여자 맞은편에 앉았다. 와인 옆에는 누군가를 위해 준비해둔 건지 모를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 한잔 주세요.

  여자가 몽롱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와인을 따랐다. 벌써 몇 잔 마신 듯 얼굴에 취기가 어려 있었다. 남자가 한 모금 들이켰다. 뒷맛이 깔끔한 걸로 봐서 형편없는 와인 같지 않았다.

  - 찾아보니 이 카페엔 안 마신 와인이 많아요.

  -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나요?

  - 어차피 이 시간엔 손님도 없는데요.

  남자가 실내를 살폈다. 홀 절반만 조명을 켜놓은 상태였다. 음악도 꺼져 있어 실내는 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 가게 안이 조용하네요.

  - 음악 듣고 싶으세요? 

  여자는 남자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카운터로 가서 손에 잡히는 엘피를 텐테이블에 집어넣었다. 이번엔 사티에였다. 사티에와 라벨은 음반 하나에 반씩 실려 있어서 사티에가 끝나면 그가 싫어하는 라벨의 볼레로가 흘러나올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스크린 위로 영상이 떠올랐다. 영상 속은 언제나처럼 한적하고 풍요로웠다. 여자가 터덜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 며칠 전부터 호텔에서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아요. 커피도 거의 떨어져가요. 

  - 주인에게 연락을 해보셨나요?

  - 애초부터 연락처를 알려주지도 않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저한테 일을 맡긴 여자애랑 물건을 가져다주는 호텔 직원 핸드폰이 전부예요.

  -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 전화를 받지 않아요. 호텔에 전화를 했더니 그런 직원은 근무하지 않는대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 어떡하실 생각이에요?

  - 모르겠어요. 될 대로 되라죠, 뭐.

  여자가 와인을 홀짝이더니 뭔가 신 나는 일이 생각났다는 듯 그를 향해 눈을 빛냈다.

  - 우리 오늘은 무슨 얘길 할까요?

  -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을 알고 있나요?

  - 대충은요.

  -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탐한다는 신탁을 받고 태어난 아들 오이디푸스를 라이오스가 신하에게 죽이라고 명하지만, 신하는 숲에 그를 버리지요. 그러다 코린트의 양치기 손에 의해 넘겨져 폴리부스 왕의 아들이 되지만 신탁을 피하기 위해 다시 테베 땅으로 오게 돼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그는 테베의 왕이 되지만 후일 자신이 신탁 그대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탐하고 그 어미의 뱃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얻게 된 저주받은 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절망하죠. 테베로 넘어오던 중 갈림길에서 마차를 탄 한 노인과 두 남자와 시비가 붙어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그 노인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였어요.

  -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도려내나요? 그 대목이 떠올랐어요. 

  - 오이디푸스가 왜 불행해졌다고 생각하나요?

  - 제 입에서 팔자니 운명이니 식의 얘기가 듣고 싶으신가요?

  - 예언자는 오이티푸스에게 이런 말을 해요. 당신이 불행해진 것은 성급함 때문이었다고요. 성급하게 사람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요.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때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게 될 상황이었다고 항변합니다. 

  - 운명을 피하려면 저항하지 말았어야 했나요?

  -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을 찾아야 했겠죠.

  -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대는데 이성적일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 운명이 오이디푸스를 그렇게 몰고간 거죠.

  - 오늘은 꼭 제 얘기 같아 듣기가 괴롭네요.

  여자는 병에 남은 와인을 잔에 모두 부었다. 남자는 여자가 따라준 한 잔을 반쯤 비운 상태였다. 여자가 테라스 쪽으로 다가가더니 밖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냉기가 문 사이를 끼고 안으로 끼쳐왔다. 테라스 위로 보이는 잿빛 하늘에 짐승들이 무리를 짓고 지나가듯 구름 무리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유난히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다. 이윽고 구름 사이로 달이 드러났다가 구름 사이로 곧 가려졌다. 남자는 테라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술에 취한 여자는 반쯤 감긴 눈으로 우울하게 하늘을 쳐다봤다.

  - 호텔에서 물건을 계속 가져다주지 않으면 어떻하죠?

  - 이곳을 그만둬야겠죠.

  - 월급이 들어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나요. 

  -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

  - 그럼 당신을 또 볼 수 있을까요? 요즘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요.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들어요.  

  남자는 말없이 담배를 비벼 껐다. 라벨의 볼레로가 시작되고 있었다. 남자는 스크린 쪽을 향해 습관처럼 인상을 썼다. 여자가 한쪽 팔에 기댄 머리를 갸우뚱하게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서 절망의 기운이 느껴졌다.

  - 저도 불행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걸까요? 저한테 또 어떤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모르겠어요.

  - 많이 마신 것 같군요.

  - 이럴 때 술이라도 마셔야 되지 않겠어요?

  - 집에 가려면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 아무도 없는 집엔 들어가기도 싫어요.

  여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가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버튼을 눌러 음악을 멈춘 다음 황급히 라벨의 음반을 꺼냈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음반 하나를 집어넣었다. 슈베르트였다. 여자는 몸을 돌려 남자 쪽을 잠시 바라보다 와인잔을 들어 남은 술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여자는 애원하듯 남자를 쳐다봤다.  

  - 당신은 불안하지 않나요?

  - 저도 불안해요.

  - 그럴 땐 어떻게 하죠?

  남자도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여자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여자가 지난 밤을 떠올리듯 남자를 체념했다.

  - 불안해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이제껏 그랬어요. 이런 느낌,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어요. 

  남자는 여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이 전보다 더 굳어졌다.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 오늘은 절 두고 가지 마세요. 

  - 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 지금은 누구든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 미안해요.

  - 오늘은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우리 집에 가요. 

  - 일을 해야 돼요.

  - 하루쯤 안 해도 되잖아요. 

  - 그럴 순 없어요. 

  - 왜요? 제가 싫으세요? 부담스럽나요?

  - 그렇지 않아요. 

  - 그런데 하루쯤 저를 위해 일을 안 하시면 안 되나요? 

  - 원칙을 깨뜨릴 순 없어요.

  - 무슨 원칙이요?

  - 제가 밤에 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 꼭 일해야 하나요?

  - 오늘 지키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릴지 모릅니다.

  - 그래서요. 이런 절 두고 그냥 가시겠다고요? 

  - 가야 해요.

  - 외로워요.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아요! 오이디푸스처럼 눈알이라도 파내버리고 싶어요.

  여자가 탁자에 앉아 부들거리며 흐느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심각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그러다 이내 체념한 듯 가방과 모자를 집어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손을 뻗어 안았다.

  - 제발 가지 마세요.

  남자를 안은 여자의 몸이 떨렸다. .

  - 미안해요.

  여자는 그제서야 체념한 듯 남자를 풀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울던 여자가 남자를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며 말했다. 

  - 이젠 여기 안 오실 거죠?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고는 나지막하게 뱉었다.

  -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남자는 우는 여자를 뒤로 한 채 카페 밖으로 나갔다.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는 불이 켜 있지 않은 맞은편 건물을 노려봤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는 듯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밤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걷혀졌다. 날이 밝았지만 남자는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밤의 남자는 낮의 악몽으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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