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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07. 2024

박제가 된

타인의 손

  시체는 부러진 나무 밑동에 니은자 모양으로 앉아있었다. 하체만 흙에 파묻힌 상태였고, 상체는 부엽토로 덮어져 있었다. 추위가 누그러졌다 해도 땅이 얼어붙어 시체를 파묻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찰이 시체를 끌어낸 지점에는 야트막한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주변 나무들을 빙 둘러 노란 줄로 묶어놔 멀리서도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말농장을 찾는 치들을 위해 지어 놓은 원두막이 있었다. 그 옆으로 밭들이 늘어져 있었다. 농장 바로 옆 도로는 밤낮으로 차들이 달렸고 밤에는 일대가 암흑이니 범인이 시체를 처리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겨울에는 밭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다. 농장 맞은편에 사는 영감이 한낮에 어슬렁대긴 했지만, 초저녁잠이 많은 노인이 오밤중에 그곳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란 줄 주변을 걸어 다니며 소주를 마셨다. 왼편에는 도로를 질주하는 차바퀴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오른쪽 밭 사이로 바람이 웅웅거렸다. 시체가 놓였던 자리까지 들어갈까 하다 소주만 부어준 뒤 원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전날 비가 온 탓에 흙이 질척거렸다. 발에 걸치는 대로 신고 온 구두가 진흙투성이가 돼 있었다. 원두막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물자 연기는 시체 파묻은 장소를 알려주듯 그 방향으로 흩어졌다. 바람 때문인지 담배는 금세 타 들어갔다. 한 대 더 붙였다. 역시 몇 모금 빨지 않았는데 하얗게 변해 버렸다. 누군가 뺏어간 듯 서운한 기분으로 갓길로 걸어갔다. 그 밤, 범인은 이곳에 차를 세운 후 시체를 꺼내 저 둔덕까지 끌고 갔을 것이다. 차들이 쏜살같이 달리는 통에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차 속 시선들이 힐끔거렸다. 낮이 아니라면 갓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못 볼 듯했다. 엠뷸런스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질주하고 있었다. 


  일 층 할머니가 현관 앞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앉아 앞집 여자와 수다를 떨고 있다. 드러누웠다 나왔는지 희끗한 펌 머리 뒤쪽이 눌려 있다. 여자 하난 요 앞에 묻었다며? 그랬대요 글쎄. 집값 떨어지겄어. 이참에 다 밀어버리면 후련컸는데. 둘은 계단을 오르는 나를 힐끔 거린다. 한쪽을 잘라냈다며? 안 들어온 지 꽤 됐을걸? 들어오면 뭐 해. 만날 때리고 부수지. 두 여편네 머리채를 잡아 팽개치고 싶지만 피곤하다. 언젠가 주둥이를 찢어 놔야지. 진흙투성이 구두를 끌고 계단을 올라가 열쇠를 밀어 넣는다. 문을 열자 묵혀 둔 냄새가 코끝으로 뭉쳐 들어온다. 노인의 살비듬내, 이불에서 나는 지린내, 오래된 가구에서 풍겨대는 곰팡이 냄새. 처음만 참으면 된다. 안에 들어오면 냄새 따윈 상관없어진다. 모든 게 공기에 섞여 귀찮아진다. 집안은 음산하고 지저분하다. 낮에는 거실로 볕이 스며들어 다행이다. 전기가 끊어졌다. 현관에 시뻘건 독촉장이 붙어 있는 걸 보니 가스도 조만간 끊길 듯하다. 될 대로 되라지. 영감이 돈을 줄 때까지 내버려둘 생각이다. 소주를 꺼냈다. 가게에서 두 병을 샀다. 한 병은 부어버렸다. 유리컵에 소주를 반쯤 부은 다음 거실을 떠다니는 먼지를 쳐다보며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먼지들이 유연하게 공중제비를 돌고 있다. 청소를 한 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도 전 알콜 기운이 끼쳐온다. 빈 속이 불콰해진다. 위에 구멍이 날지 모른다. 라면 먹을까.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눈을 떠도 환하다. 밖이 환한 게 다행이면서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딸애는 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한다. 기집애가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아서 유치원 끝나고 집에 들어와서는 엄마 술 마셨어? 하곤 코를 킁킁거린다. 엄마를 무능하게 보는 건 싫다. 이를 닦아야 한다. 낮잠을 자고 나면 기분이 더 나빠진다.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와 거실까지 기어간다. 집안에는 여전히 먼지와 나뿐이다. 기어 있는 상태의 몸을 풀지 않고 웅크린다. 늘어뜨려 거실 바닥에 한쪽 볼을 붙인 채 엎드린다. 난방을 하지 않아 바닥이 싸하다. 냉기가 스며 오한이 온다. 이불을 끌어올까 하다 만다. 귀를 붙인 채 새우처럼 몸을 말고 양팔로 다리를 껴안는다. 바닥에 귀를 대면 소리가 들려온다. 아래층 누군가가 화장실 물을 크게 틀었다. 바닥을 쿵쾅거리며 걷는 걸 보면 애새낀가 보다. 건물에는 언제나 소음이 거슬린다. 부실 공사라 1층에서 낸 소리가 4층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밤에는 어느 집에서 섹스하며 내는 신음이 들린다. 시계를 본다. 딸이 곧 온다.     

  이 집은 시아버지 소유다. 영감은 집에서 차로 20분쯤 떨어진 곳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 짐칸으로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게에 죽치고 있다가 새벽에 들어온다. 가게도 집만큼이나 지저분하고 냄새가 난다. 장사는 당연히 안 된다. 기한이 지난 것도 영감은 내놓고 판다. 누군가 기한이 지났다고 항의하면 지랄을 한 뒤 숨겨뒀다가 다시 꺼내 판다. 남편이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더 야박해졌다. 생활비를 안 준다. 세금 낼 생각도 없다. 돈 달라고 하면 네가 벌어서 쓰라고 악악댄다.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영감은 내가 더 못마땅하다. 밥을 먹으면 혐오스런 눈빛으로 노려본다. 며느리 취급도 안 한다. 어쩔 수 없이 시아버지가 가게에 없을 때 돈을 훔친다. 가끔 이유 없이 돈을 줄 때가 있다. 그 돈으로 술을 사거나 딸에게 햄버거를 사준다. 남편은 어떤 년이랑 살림을 차렸다. 지난번에는 몇 달 피다 말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그 집에 들어가서 붙어먹고 있다. 새벽에 남편이 불러서 노래방으로 갔는데, 여자가 앉아있었다. 대가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요상하게 화장을 한 년이었다. 노래를 불렀다. 그년은 넉살도 좋아서 나한테 언니라고 부르면서 아양을 떨어댔다. 분위기가 익자 남편이 그년이랑 엉겨 부르스를 추는 게 아닌가. 머리채를 잡으니까 남편이 뺨을 갈겼다. 그날 이후 남편은 몇 달 간격으로 들어와 옷가지만 챙겨 나간다. 간통으로 처넣을 게 무서워서 양쪽 살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년이 자길 버릴지 몰라 이혼을 안 하는 건지 모른다. 그년이 애를 싫어해서 이혼을 안 하는 건지 모른다.      

  간밤에 돈을 달랬더니 시아버지가 행패를 부렸다. 남편이 집을 나간 건 네가 병신인 탓이고, 집이 망해가는 것도 며느리를 잘못 들여놨기 때문이란다. 그게 왜 내 탓이냐고, 그러는 너도 바람 피다가 화병으로 시어머니가 죽은 거 아니냐고 따지니까 돼지 같이 쉬어빠진 목소리로 나가 뒈지라고 했다. 씨발, 붙어봐 덤비자 썅년, 퍼부으며 의자를 던지는 바람에 딸이 발목을 맞아 울었다. 부어터진 딸의 발목을 보니 부아가 나 냅따 떠밀었다. 얼결에 자빠진 영감이 욕을 해대며 집기를 부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작게 욕했으면 못 들었을 텐데. 이놈은 한쪽 귀가 먹어서 작은 소리는 못 듣는다. 가끔 뒤통수에 대고 개새끼, 씨발놈 퍼붓곤 한다. 욕을 퍼붓고 나면 속이 좀 낫다. 병신 주제에 누구더러 병신이라고 하는지, 웃기는 영감탱이다. 시아버지는 손녀를 안아주거나 다정한 말을 해준 적이 없다. 애가 뛰어다닌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막힌 귀가 뭐 그리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옆집 미선 엄마는 애 두고 나가서 새로 시작하라지만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노인네는 딸을 굶겨 죽일지 모른다.      

  우우우우. 여자의 울음이다. 처음에는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목에서 터져 나온 울음이 아니었다. 여자는 자고 있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거실이 어두워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보다 어리거나 또래일 것 같았다.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의 눈빛은 섬뜩한 슬픔으로 차 있었다. 뭐여?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오밤중에 나타나 곡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어딘가 데려갔는데 어딘지 모르겠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우우우우. 여자의 울음이 귀에 선명히 박혀 있다. 기분 나쁘다. 열 시가 넘었다. 노인네는 나갔는지 기척이 없다. 아이는 밤새 뒹군 듯 거실 한쪽 귀퉁이에 몰려 자고 있다. 차는 이미 떠났다. 퉁퉁 부은 눈으로 애를 깨운다. 차를 놓쳤으니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한다. 아이가 일어나 눈을 비비며 품에 안긴다. 오줌을 쌌는지 엉덩이가 축축하다. 뭐에 물렸는지 성기 주위가 벌겋게 부어 있다. 비누로 씻긴 후 파우더를 발라준다. 원장이라는 여자가 불러 세운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아이가 식탐이 엄청나고 공부 속도가 느려서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학습지를 시키라나 뭐라나. 돈은요? 안 비싸요. 어머니. 돈은요? 네? 돈은요? 원장이 얼버무린다.   


  6개월 안 들어오면 가능도 하겠네요. 동사무소 직원이 심드렁 뱉고는 입을 다문다. 저렇게 불친절한 놈이 국민의 복지를 담당한답시고 앉아있는 게 맘에 안 든다. 애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동사무소에 들른 참이다. 날이 풀리면 딸을 데리고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다. 그런데 돈 나올 구석이 없다. 친정 엄마도 오빠네 얹혀사는 처지니 돈이 있을 리 없다. 방법이 없을까 싶어 동사무소를 찾았다. 이혼을 하지 않아도 남편 실종만 확인되면 살 궁리가 생긴다니 다행이다. 사실이 입증되면 모자보건 지원을 받아 애랑 살 수 있는 방이랑 공공근로 같은 일자리도 제공받을 수 있단다. 남편이 집을 들락거리는 게 문제다. 실종 신고를 하고 주민등록증을 말소시키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남편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오전인데 동사무소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할아버지 하나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노인은 쭈글쭈글한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디민다. 해남리 정산이 고향인디…. 어르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요. 해남리 정산이 고향인디…. 여자가 나타나 노인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님이라 하는 걸 보니 며느리 같다. 여자는 복지관이라 쓰인 차에 노인을 태워 보낸다. 차가 움직이자 여자가 팔짱을 끼고 오종총 걸어간다. 뒤태가 홀가분해 보인다. 시아버지를 저 차에 영원히 태워 보내면 좋을 텐데. 영감을 보내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노인네가 사라지면 가게에서 번 돈으로 애랑 살 텐데. 뭘 처먹고 팔팔한지 모르겠다. 건너편 벤치에서 노인 둘이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     

  엄마와 오빠는 나를 빨리 치우고 싶어 안달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다 만난 남자랑 줄행랑치다 버림받고 돌아온 지 얼마 뒤였다. 오빠가 불러낸 중국집에 지금의 남편과 시아버지가 앉아있었다. 남편은 결혼에 실패한 뒤 오빠가 일하는 공장 근처에 있는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안면을 튼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혼인신고만 하고 그 집에 들어갔다. 돈 들여 식 올릴 이유가 없었다. 식을 올린다 해도 예식을 보러 올 하객도 없었다. 시아버지는 빨래와 청소를 해줄 여자가 필요했다. 남편은 성욕을 해결할 여자가 필요했다. 남편은 하루가 멀다 술을 마시고 취해 강간하듯 섹스를 했다. 살면서 좋았던 기억은 손에 꼽을 수 없다. 엄마처럼 나도 암에 걸려 얼마 전 오른쪽 유방을 도려냈다. 다니던 공장에서 산재 혜택을 받아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면 진작 죽었다. 대신 일자리를 잃었다. 엄마는 양쪽 젖이 전부 없다. 머잖아 나도 왼쪽 유방까지 잘라내야 할지 모른다. 남편이 아예 안 들어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동사무소에 실종 신고를 하고 새 출발할 텐데. 이 집에선 희망이 없다. 간신히 일어나 애 보내고 나면 소주 사러 나간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오늘은 술도 없다. 소주 살 천 원도 없다. 시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자마자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장롱을 열어 점퍼 주머니를 뒤진다. 문갑을 열어 동전이라도 있나 살피지만 없다. 이불 속까지 전부 뒤져도 없다. 구역질나는 영감탱이.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딸애가 쓰는 오래된 책상 위에 저금통이 하나 올려 있다. 작년에 집 근처 교회를 지나가다 주일학교 선생이 딸 손에 쥐어주던 저금통이다. 흔든다.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주방으로 들고 와 칼로 찢어 흔드니 동전이 떨어진다. 천삼백 원이다. 찢어놓고 나니 후회가 된다. 딸이 저금통을 찾으면 뭐라고 말할지 생각한다. 모르겠다.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나선다.      

  딸깍. 남편이다. 인상을 쓴다. 노려본다. 뭐 하러 기어들어와?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미안하거나 무안하다 따위의 표정은 없다. 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듯 들어간다. 소주를 사오니 물소리가 들린다. 거슬린다. 유리잔에 반쯤 부어 단숨에 마셔버린다. 현기증이 난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소리에 귀를 집중시키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집안에 찬다. 곳곳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집안이 물로 가득 찬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우우우. 물소리는 흐느낌으로 바뀐다. 울음은 몸을 타고 내려온다. 꿈속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다. 멈추지 않을 기세다. 돌 것 같다. 죽이고 싶다. 베란다 공구통에 망치가 들어있다. 망치를 꺼내 화장실 문을 연 다음 샤워를 하는 남편의 머리를 내리친다. 머리를 가격당한 남편이 피를 쏟으며 화장실 바닥에 엎어진다. 뒷머리를 몇 차례 내리친다. 벽과 거울 내 얼굴과 몸 여기저기 피가 튄다. 반쯤 눌린 그의 머리에서 끝도 없이 피가 쏟아진다. 몸을 떨다 멎는다. 어쩌면 처음 내리쳤을 때 숨통이 끊어졌는지 모른다. 물소리가 멈춘다. 잠시 조용하다. 문이 열리고 알몸의 남편이 걸어 나와 방으로 들어간다. 잔을 던진다. 그가 도로 나와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주먹으로 몸을 내리친다. 때릴 때마다 그의 성기가 덜렁거린다. 손을 뻗어 성기를 잡으려고 한다. 잡히기만 하면 뽑을 작정이다. 그가 내 등허리를 주먹으로 찍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엎어진다. 죽일 수가 없다. 나보다 힘이 세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편이 구두를 신는다. 들어왔을 때처럼 싸늘하게 문이 닫힌다. 뒈져버려! 소리를 질러 버린다. 다시 들어올까 눈치를 본다. 계단을 내려가 버렸는지 구두 소리가 나지 않는다. 풀썩 꺾인다. 피부가 찢어졌는지 거실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짐승처럼 허물어진다. 통증 때문이다. 웅크린 채 가슴을 느끼려 애써본다. 감촉이 없다.      

  현장 검증이 이루어졌다. 수십 대의 방송 차량과 경찰차, 과학수사대들이 타고 온 차들이 갓길에 일렬로 세워졌고, 기자들과 시민들은 범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이어 경찰 두 명과 팔짱을 낀 채 마스크와 모자를 쓴 범인이 차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셔터가 터졌고,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저런 자식은 일가족을 몰살시켜야 한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범인이 살인 과정을 설명하자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는 유가족을 보고 덩달아 눈물을 흘리는 여편네들도 있다. 일층 할망구와 앞집 여자도 끼어 있다. 범인이 태연하게 살인하는 모습을 재현할 때 여기저기 욕설과 고함이 이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범인은 오늘 몫의 노동이라도 하듯 정교한 손놀림으로 마네킹을 움직인다. 검증이 끝나자 경찰들이 다시 안전선을 친다. 수십 대의 차들은 다른 살해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핏대를 세워가며 범인에게 소리를 지르던 주민들도 한 차례 술렁이다 흩어져버렸다. 방송에서는 연일 연쇄살인범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고 있다. 그의 평소의 품행과 가족 관계, 집, 재산 정도, 무슨 일을 했으며 사는 건 어땠는지에 대한 친구들의 증언, “평상시에는 순했지만 키우던 개를 학대하거나 동물을 죽일 때는 눈빛이 달라졌다.” 범인이 자식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며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범죄 전문가의 인터뷰. “그런 감정 역시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형제 찬반 여론조사에서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며칠 뒤 살인자는 뉴스에서 사라졌다. 제주도에서 여교사가 실종된 탓이다.      

  나갈 차비를 한다. 돈이 없다. 가게 일 거드는 척하며 돈을 훔쳐야 한다. 가겟방에서 인부들이 소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인부들은 가게 쪽방에서 고스톱을 친다. 비가 오는 날은 아침나절부터 새벽까지 죽때린다. 시아버지는 개평을 뜯거나 자릿세를 받아 챙기는 재미로 인부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누가 내 엉덩이를 더듬어도 시아버지는 못 본 척한다. 내가 화를 내면 도리어 시끄럽다고 역정을 낸다. 몸살이 오는 모양이다. 머리가 묵직하고 신열이 난다. 우울이 겹치면 몇날이든 자게 된다. 계세요? 잠시 후 벨 소리. 숨을 죽인다. 벨 소리, 계세요? 복도를 울리며 주먹 내리치는 소리. 신문 대금이거나 가스 요금이거나 무언가를 받으러 온 사람임이 분명하다. 벨 소리가 한 번 더,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 씨발. 숨을 규칙적으로 쉬지 못해 침이 꼴깍 삼켜진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가는 구두 소리. 돈도 없는 것들이 신문은 왜 쳐봐?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며 욕설을 퍼붓고 있다. 이윽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쥐새끼처럼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여닫고 계단을 내려간다. 가게에 영감은 없다. 계산대 앞에 앉아있는 건 그년이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생글거린다. 왔어 언니? 언니? 어처구니가 없다. 나한테는 생전 맡기지 않는 계산대를 내준 시아버지가 더 어처구니가 없다. 니년이 왜 여깄어? 오빠가…. 오빠? 누가 니년 오빠냐? 득달같이 달려들어 머리채를 낚아채고 싶다. 여자가 여우 눈깔을 하고 노려본다. 보통이 아닐 성싶다. 쪽방에서 고스톱을 치던 인부들이 힐끔거린다.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화냥년인지 모르겠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한통속이 되어 나를 내쫒을 궁리를 하고 있다. 간통으로 처넣을까. 여자를 획 밀치고 계산대를 연다. 천 원짜리 몇 장이 고작이다. 여자가 등짝을 잡아당긴다. 뺨을 갈기자 여자가 머리채를 낚아 흔든다. 힘이 보통이 아니다. 머리채를 잡힌 상태로 여자의 상체 자락을 잡아 뜯는다. 옷섶이 찢어지며 뻘건 브레지어가 드러난다. 젖통이 기어 올라와 있다. 인부들이 눈요깃감에 키득거린다. 여자가 옷섶을 추스르는 틈을 타 천 원짜리를 빼낸다. 뒤통수로 여자의 욕설이 날아든다. 미친년, 또 오기만 혀봐.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다. 가게는커녕 이젠 집에서 쫒겨날 판이다. 취하고 싶다. 술을 사들고 농장을 향해 걸어간다. 안전선 주변을 걸어 다니며 소주를 마신다. 왼편에는 도로를 질주하는 차바퀴 소리가 끊이질 않고 오른쪽 밭 사이로 바람이 웅웅거린다. 갓길로 나와 집을 향해 걷는다. 차들이 달리는 통에 귀가 먹먹하다. 차 속 시선들이 힐끔거린다. 낮이 아니라면 갓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지 못할 듯하다. 꿈 속 여자가 가리키던 곳이 여긴지 모른다.


  이번에는 여자가 머리맡에 앉아있다. 바라보자 여자도 상체를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온다. 몸에서 어떤 온기도 느낄 수 없다. 꿈같지 않다. 너무 생생하다. 여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내 얼굴 주변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과 맞닿을 즈음 나는 눈을 뜬다.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입가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소름 끼치는 구멍이다. 여자가 앞가슴을 열어젖힌다. 양쪽 유방이 없다. 여자와 눈이 닿을 듯하다.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로 변한다. 악, 눈을 질끈 감는다. 


  사방은 어둡다. 아이가 칭얼대고 있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것 같다. 아이는 거실에서 자고 있다. 희끄므레 거실 저편, 아이 발밑에 물체가 있다. 어딘가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눈을 껌벅이며 그것이 무언지 살핀다. 손인 것 같다. 물체의 것이 분명한 손이 아이의 다리 사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이가 몸을 뒤척이자 물체는 멈칫하다 머리를 숙인다. 이번에는 몸 전체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칭얼대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려 하자 손 하나가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다. 아이가 몸을 흔든다. 잠시 후 그것이 와락 나머지 손으로 바지 가운데를 움켜잡은 채 일어난다. 꿈인가 현실인가. 이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려 애쓴다. 그 사이 덩어리는 바지가 벗겨진 채 천천히 거실을 가로지른다. 달각. 아이가 울음을 토해낸다. 그제야 꿈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나는 그 짓이 계속되는 동안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 못하고 있었다. 몸이 덜덜 떨린다. 아이에게 다가가 안는다.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아이가 서럽게 운다. 등을 토닥이며 아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본다. 밤이나 낮이나 술에 절어 있었다. 아이가 자고 난 뒤 취해 아무데나 널부러져 잤던 것이다. 아이의 성기가 왜 부어 있었는지, 시아버지가 가끔 왜 이유 없이 돈을 줬는지 이제야 알겠다. 딸애는 왜 말하지 않았나. 햄버거 때문에?     

  자고 있다. 코를 골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이를 앙다물고 손아귀에 힘을 바짝 조인다. 진작 이래야 했다. 애초에 막아야 했다. 시아버지의 몸만큼 다리를 벌려 주저앉은 다음 솜이불을 잡아당겨 머리까지 씌운 뒤 누른다. 신음이 흘러나온다. 팽팽해진 이불로 덮은 얼굴의 구멍에서 뜨거운 열이 뿜어 나온다. 양 손으로 조여 잡은 이불이 좌우로 흔들린다. 이를 악물며 더 세게 누른다. 가슴 부위를 엉덩이로 깔고 앉았지만 손이 빠져나오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좌우로 뒤틀며 버티는 힘이 세서 자칫 힘을 잃고 나동그라질 것 같다. 힘을 빼야 한다. 상체를 숙여 중심을 잡은 다음 가슴팍에 넣어온 망치를 쳐들어 정수리 쪽을 향해 몇 번 내리친다. 효과가 있다. 버티는 힘이 아까보다 격렬하지 않다. 얼굴 주변 이불을 다시 팽팽하게 덮어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코와 입 주변의 이불이 씰룩거리며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쇡, 쇡, 숨은 차츰 쇳소리로 변해간다. 망치로 다시 내리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숨소리가 잦아들더니 늘어진다. 머리 부위로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나온다. 망치로 얻어맞을 때 터진 모양이다. 이불 밖으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다. 피를 처리해야 한다. 김장용 비닐로 머리와 다리를 둘둘 만 다음 노끈으로 묶는다. 시어머니는 시집올 때 이불을 두 채 해가지고 왔다. 두 겹 솜이불로 시체를 말고 노끈으로 친친 동여맨다. 점퍼를 챙겨 입는다. 안방 방문을 조용히 닫은 뒤 아이를 살핀다. 아이는 기절하듯 자고 있다. 면장갑을 끼고 발에 걸리는 신발을 꿰어 신은 채 계단을 내려간다. 오토바이는 집 앞에 세워 있다. 평소 같으면 집 건너 벽돌공장 앞에 세워 두었을 텐데, 술을 처먹어서 오늘은 집 앞에 세워놓았다. 다행이다. 집으로 들어와 영감 점퍼 주머니에서 오토바이 열쇠를 찾아낸다. 다리부터 끌기 시작한다. 노인이라도 축 쳐진 시체는 들 수 없다. 무조건 끌어야 한다. 일 층 할망구가 잠에 빠져 있어야 할 텐데. 소리 나지 않게 끌고 가야 한다. 아이가 깰까 봐 조바심치며 현관 앞까지 시체를 끌어내린다. 얼마 끌지 않았는데 온몸이 땀에 젖는다. 새벽은 길지 않다. 이 악물고 열두 개쯤 계단까지 끌고 내려가 대각선으로 시체를 몬 다음 슬슬 민다. 가파를수록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마지막 계단에서 머리통이 바닥에 부딪친다. 할망구 집 현관문을 주시한다. 잠잠하다. 망치로 친 머리 부분을 특히 주의해서 이불로 말아 놓았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끌리면서 피라도 묻을까 걱정이다. 리어카에 덮인 비닐을 걷어내고 시체를 끌어올린 다음 비닐로 은폐한 뒤 고무줄로 튕겨나가지 않게 묶는다. 땀에 젖은 몸에서 열이 나고 현기증이 인다. 숨을 고른 다음 시동을 걸다. 엔진 소리가 귀청이 찢어질 듯 터져 나온다. 주변을 살핀다. 오토바이를 몰아 벽돌 공장을 천천히 빠져나간다. 밤공기가 땀에 젖은 몸을 씻겨내자 얼음이 들러붙듯 몸이 싸해진다.      

간간이 차들이 지나가고 있지만 낮보다 속도가 빨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갓길에 밀착해 오토바이를 몬다. 걸어왔을 때 얼마 되지 않던 길이 멀게 느껴진다. 심장이 고동을 친다. 농장으로 통하는 진입로가 나타난다.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몬 다음 시동을 끈다. 수레를 덮었던 비닐을 연다. 시체를 매장했던 지점에는 여전히 파간 그대로 구덩이가 파여 있다. 신음을 뱉으며 시체를 끈다. 얼굴에 땀이 흥건하고 입술을 깨물어 피가 배어나왔는지 찝찔하다. 노끈을 풀어 이불을 거둬낸다. 검은 비닐 속 머리가 깨진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시체는 추위 때문인지 박제가 된 듯, 굳어 있다. 구덩이 쪽으로 하체를 밀어 넣는다. 부러진 채 밑둥만 남은 나무에 상체를 기대게 한다. 추위에 땅이 녹지 않아 바닥은 단단히 굳어 있다. 시체를 파묻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범인과 같은 방식으로 시아버지를 처리하고 싶다. 흙을 그러모아 하체를 묻고 상체는 부엽토로 가린다. 둘둘 말은 이불을 한쪽 손에 들고 원두막 쪽으로 걸어간다. 엉덩이에 흙이 묻든 말든 그대로 주저앉는다. 다행히 주머니에 담배가 있다. 불을 붙인다. 입으로 빨기도 전에 바람이 담배를 금세 타들어가게 한다. 이를 부딪치며 담배를 핀다.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뒤틀린다. 담배에 또 불을 붙인다. 처음보다 턱의 경련이 심하지 않다. 집 쪽으로 걸어간다. 몸이 가볍다. 꿈인지 현실인지. 상관없다. 내일 눈을 떴을 때 방에서 기어 나오면 다시 죽일 것이다. 모레 다시 기어 나오면 다시 죽일 것이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기어 나오면 계속해서 죽일 것이다. 죽이면 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집에는 내가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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