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손
개가 짖고 있다. 주인집 개다. 짖을 때마다 쇳소리가 난다. 대문 밖으로 걸어 다니는 인간들을 향해 개는 짖고 또 짖는다. 여간 지겨운 짖음이 아니다. 그게 아이비의 일과다.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날엔 종일 저 소릴 들어야 한다. 방금 일어났다. 당연히 아이비가 짖는 통에 깼다. 어떻게 아이비는 쉴 새 없이 짖을 수 있을까? 숨도 안 차나. 아이비 때문에 만성 수면 부족이다. 짜증난다. 내가 왜 쟤 땜에 잠도 실컷 못 자나. 전생에 원수라도 지었나. 아이비! 주인 남자 목소리다. 아이비가 멈칫한다. 과연? 아이비가 다시 짖는다. 주인은 씹혔다. 주인도 아이비가 짖어대는 소리가 지겹긴 한가 보다. 아이비! 주인 목소리가 아까보다 크다. 행여? 아이비는 멈칫할 뿐 다시 짖어댄다. 주인은 씹혔다. 주인이 야단을 쳐도 아이비는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짖기만 한다. 웃기는 개다. 주인 말도 안 듣는 이상한 개새끼다. 더구나 상당히 정치적인 개다. 남자는 군인이다. 집을 계약할 때 부동산 아저씨에게 듣기론 그냥 군인이 아니라 별 같은 걸 단 꽤 직급 높은 군인이라고 들었다. 아이비는 별을 단 군인 말을 씹는 개다. 군대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씹음이다. 주인은 평일에는 부대에 들어가는지 보이지 않다가 금요일 저녁이 되면 낡은 지프를 몰고 나타난다. 그는 금요일 저녁부터 집에 머물다가 월요일 아침 차를 몰고 나간다. 금요일 집에 들어온 주인은 월요일 아침까지 외출을 하지 않는다. 이 집에서 세를 산 3년간 그가 외출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친구도 없나. 주인은 종일 집과 마당을 오가며 담배를 피고 정원을 가꾸고 하릴없이 앉아 하늘을 보다가 아이비가 짖으면 아이비! 하고 야단을 치다가 개에게 씹히곤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정원을 가꾸고 하늘 쳐다보며 담배 피다가 자정 가까이 하릴없이 앉았다가 아이비가 짖으면 아이비! 하고 야단치다 아이비한테 씹히며 하루를 마감한다. 개가 자기 말을 씹어도 화를 내진 않는다. 그는 항상 준엄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개에게 씹히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나야말로 아이비가 씹지 않는 유일한 존재다. 나는 아이비가 시끄럽게 짖으면 거금을 투자해 사둔 개껌을 던져준다. 천하의 아이비라도 개껌에 의연할 순 없다. 아이비가 미친 듯이 짖어댈 때 내가 아이비! 하고 부르면 아이비는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어서 개껌 주십사 침 흘리며 기다린다. 개껌을 사준다고 내가 아이비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개껌을 받아먹는다고 아이비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비가 짖지 않는다고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주변으론 개 키우는 집이 여럿 된다. 아이비가 짖지 않아도 개소리는 항상 들린다. 개 짖는 소리는 아주 다양하다. 컹컹, 캥캥. 깡깡. 멍멍(이건 너무 전형적이다). 하지만 어느 집에서도 아이비의 셱셱 같은 쉰 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아이비처럼 별을 단 군인을 씹지 않는다. 아이비가 또 짖는다. 아이비! 별을 단 고상한 주인이 아이비를 야단치고 아이비가 개무시하며 다시 짖어대는 상황은 필름을 반복 재생시키듯 이어진다. 짖음과 씹힘의 연속. 셱셱 셱셱, 아이비! 눈을 떴고, 아이비가 짖는 소리에 짜증이 났고, 어디선가 새가 째질 듯 울어대는가 싶더니 머릿속으로 문장 하나가 지나갔다.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화개장터에
이 노래 뭐지? 어제 들었나 불렀나? 아니. 부르거나 들은 적 없어도 가끔 어떤 멜로디라든지 노랫말이 떠오르는 경우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모로 누웠던 몸을 대자로 풀어놓는다. 열어둔 창문으로 볕이 들어와 침대가 뜨겁게 데워져 있다. 침대는 저런 이유로 달아올라선 안 된다. 침대가 통곡할 일이다. 오늘도 어지간히 찜통일 모양이다. 영업사원에게 더위는 공포다. 아이비 때문이 아니라도 오늘은 늦잠을 잘 수 없다. 점심에 동생 결혼식에 가야 한다. 동생은 제수가 될 여자 뱃속에 애를 넣고 식장에 들어간다. 예전에나 숨길 일이지,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한다. 어머니가 느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던진 말이다. 왜 저런 눈빛으로 나를? 어머니는 내가 사고라도 치길 바란다. 마흔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조차 못하니 어머니 보기엔 내가 등신 같아 보일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백화점에서 일한 동생은 스타일 좋고 유머러스해서 계집애들이 줄을 이었는데, 주변머리 없고 심각한 난 연애 경력이 미천하다. 가지 말까? 아버지한테 목침으로 얻어맞을지 모른다. 결혼도 동생 먼저 앞세워 놓고 예식도 안 오는 장남이 아버진 머저리 같아 보일 거다. 가지 말까? 아버지 앞에 땅이 있다. 양복이 너무 구겨졌다. 세탁소에 미리 맡겨뒀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구겨진 양복 보고 분명 한소리 할 거다. 아버지도 마뜩찮다는 듯 눈을 흘기겠지. 토요일 오전을 예식장에서 보내는 건 목욕탕에서 오리털 점퍼 입고 사우나 하는 기분이다. 스키장에서 수영복 입고 스키 타는 기분이다. 수영장에서 등산복 입고 수영하는 기분이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원피스 입고 훈련받는 기분이다. 싫다. 내 결혼도 싫은데 남 결혼은 오죽하겠나. 인간들이 왜 결혼을 하나 모르겠다. 좋으면 그냥 살면 되지. 혼인서약이니 혼수품이니, 주례는 누가 하고 음식은 갈비탕? 뷔페? 사돈집에서 얼마를 해줬네, 신혼여행 어딜 가네. 거추장스럽기 짝 없는 돈 낭비, 시간 낭비들을 잘들도 한다. 그러나 하고 싶다는 거. 아이비가 비웃을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비가 미친 듯이 짖어대고 있다. 지나가던 애 하나가 아이비를 향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야, 그만 짖어! 아이비는 애들이 지나가면 만만해선지 더 환장하며 반응한다. 바깥 기척이 있으면 주인도 한결 부드럽고 엄숙한 목소리로 아이비를 야단친다. 셱셱 셱셱 셱셱 셱셱 셱셱. 아이비! 셱셱 셱셱 셱셱 셱셱 아이비! 환상의 콤비가 아닐 수 없다. 아이비와 주인은 남몰래 핑크빛 세네나데를 주고받는지 모른다. 셱셱 셱셱, 아이비! 셱셱 셱셱, 아이비! 지금이라도 세탁소에 양복을 맡길까. 귀찮다. 가지 말까? 아버지 땅!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를 입고 후줄근한 양복을 팔에 꿰어 든 채 현관을 나선다. 계단 내려가는 발소리를 들은 아이비가 쏜살같이 달려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개껌 내놔, 씹새야. 대각선 방향으로 주인이 포진해 있다. 우리는 힐끗 눈이 마주친다. 안녕하세요. 네에. 역시 바리톤. 뭐 하는 인간인고? 하는 눈빛으로 주인이 나를 째려보고 있다. 분명 저 눈은 째려보는 눈이다. 그는 늘 눈은 비웃으면서 입만 웃는다. 주인이 나에게 뭐 하는 인간이냐고 물어도 설명하지 않겠다. 그는 나에게 그런 걸 묻지 않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오래간만이다. 잘 지내지? 언제 봐야 할 텐데, 그치? 이런 내용 아니다. 응. 응. 응? 응. 아이비! 응. 알았어. 응. 응. 아이비가 꼬리를 요동치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나를 쳐다보는 아이비와 주인 남자, 둘 다 눈이 흐리멍덩하다. 닮았다. 대문을 열고 나간다. 개가 있는 옆집을 지나 개가 있는 맞은편 집을 지나 개가 없는 성호마트를 지나 개가 없는 나을약국을 지나가면 개가 없는 맞은편 왕자 비디오점 건너편에 개가 없는 피터팬 세탁소가 있다. 문 안 열었다. 이럴 줄 알았다. 후줄근한 양복을 그대로 들고 개가 없는 성호마트에서 담배 한 갑 사서 꺼내 피고, 개가 없는 맞은편 집과 개가 있는 옆집을 지나 개가 있는 주인집 대문을 열어 계단을 올라가 2층 내 방으로 돌아온다. 열 시가 넘었다. 가지 말까? 호적 파! 아버지에게 이 말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대학 때 친구에게 빌린 긴 머리 가발 쓰고 브이 자 하고 찍은 폰 사진을 아버지에게 전송했을 때다. 아버지, 저는 낮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어요. 만우절이었고 아버지를 웃기고 싶었다. 최근 자식에게 문자 보내는 재미에 맛 들인 아버지에게서 답문이 날아왔다. 머리 안 자르 거면 호적 파. 아버지도 장난? 이 썅썅노무 새끼가? 아니었다. 아버지와는 농담을 하면 안 된다. 웃자고 던지면 죽자고 덤벼든다. 또 한 번은 최근이다. 동생과 동생과 결혼할 여자와 같이 밥 먹는 자리였다. 아버지가 너도 빨리 결혼해라 하기에 한 마디 했다. 남자도 괜찮아요? 가자미 살을 발라먹던 아버지가 젓가락을 든 채 나를 노려보며 나직이 말씀하셨다. 호적 파. 어머니가 분노를 감추며 물었다. 아니지? 하하하. 그럼요. 농담이에요. 하하하. 민망한 동생이 마지못해 따라 웃었다. 하하하. 저런 걸 아주버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제수가 될 여자도 웃었다. 농담 아니다. 난 남자가 좋다. 여자? 무섭다. 어머니 무섭다. 내가 몽정을 언제 했는지, 누구한테 순정을 뺏겼는지 어머니는 전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친구 중에 나를 배신할 놈은 없다는 게 내 신념이다. 동생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발설하는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갈 본인의 어마어마한 죄악을 생각해선 그런 짓 못한다. 어머니는 투시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제수 될 여자도 무서울 것 같다. 눈빛이 장난 아니다. 아버지가 발라 먹고 있는 가자미 눈깔 같다. 대학 때 여자 친구도 무서웠다. 졸업 후 백수 된 지 어언 석 달이 되자 증권사에 취직한 남자로 잽싸게 바꿔 타더니 하는 말, 쿨하게 찢어지자. 뭐 쿨? 그래, 쿨! 왜 헤어지는데? 묻지 마.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니? 사랑하지 않아. 차라리 무능해서 헤어진다고 말해줘. 그 말이 더 비참하다는 거 넌 아니? 그러니까 그냥 쿨하게 헤어지자고. 무섭지 않나. 이 나라 남자들이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덥다. 비라도 왔으면. 해는 비 따위에겐 절대 씹히지 않겠단 기세로 입김을 내뿜고 있다. 대체 그렇게 사는 이유가 뭐냐? 아버지도 이유를 물었지.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 아버지가 이해 못 하는 게 있다.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하고 싶었다. 그래야 경쟁력 있잖아. 아버지, 저는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해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들이 안 한 게 별로 없더라고요. 제가 뭔가를 하고야 말겠다고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섰을 땐 이미 다른 인간이 그걸! 세상은 인간들로 꽉 차 있어서 어느 곳이나 잉여만 넘쳐나요. 게다가 소수가 가는 길은 아버지 어머니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들뿐. 괜찮다면 저도 이젠 소수의 길을 가면 안 될까요? 가령 구멍가게 CEO의 남편이라든지, 양조장 주인의 남편, 부엌칼을 기가 막히게 담금질해 만드는 대장간 주인의 남편, 낮엔 농사짓고 밤엔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투잡족의 남편, 음… 또 뭐가 있나? 제법 긴 리스트가 있었는데 이젠 기억 안 난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에게 가발 쓴 사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의미 있게 살아보고 싶다고. 하지만 우린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생각이 달랐다. 다른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바빴다. 아니 성격이 나빴다. 말하기 전에 목침이 먼저 날아오니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가지 말까? 호적 파. 예. 그러죠. 이게 왜 안 될까? 땅. 정말 땅 때문이라면 나는 막장이 아닐까. 세수를 하고 구겨진 양복을 털어 입는다. 신랑보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넥타이는 수수한 걸로. 제수가 반하면 곤란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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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올라타도 노랫말이 계속 생각난다. 이 노래 대체 어디서 들었지? 왜 이 노래가 입안에서 맴도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하필이면 화개장터냐. 유행도 한참은 지나 골동품이라 라디오나 티브이에서 틀어주지도 않는다. 조영남이 대형 콘서트홀에서 어르신 모아놓고 디너 쇼 할 때나 부를까. 젊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할 노래다. 조영남 디너 쇼에 간 적 있나? 아니. 조영남 좋아했나? 절대. 다음 가사는 뭐더라? 섬진강줄기따라화개장터에아랫말하동사람윗마을구례사람. 줄줄 나온다. 앞쪽에 서 있는 여자애 치마가 짧다. 고마울 따름. 수컷들의 눈들이 일제히 짧디짧은 치마 속에 감춰진 엉덩이와 미끈하게 빠진 다리로 쏠린다.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 늙은이도 젊은이도 저마다 아닌 척 여자애 치마를 훔쳐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욕정을 따라 흘러간다. 문이 열리자 여자애가 내린다. 아쉽다. 시선들이 재빨리 흩어진다. 익명들은 포기가 빠르다. 일부는 눈 감고 일부는 멍하고 일부는 다른 눈요기를 찾는다. 주말 오전 지하철을 탄 나의 일상은 작년이나 재작년이나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며칠 전 친구 녀석이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이후 녀석에겐 변화가 일어났다. 수술을 받았고 몇 달은 요양해야 한다. 회사도 그만둘 수 없었다. 사원들 앞으로 보험을 들어뒀기 때문이다. 보험 혜택을 받게 된 녀석은 지긋지긋한 회사가 지금쯤 은인으로 여겨질 거다. 심경의 변화도 일어났다. 싸가지 없던 놈이 착한 척하게 됐다. 심지어 내 안부까지 챙긴다. 그럴 필요까지 있나, 생각하던 차에 녀석이 몇 년째 갚지 않던 40만 원을 송금하겠단다. 맘을 바꿨다. 착한 건 좋은 거야. 아픈 녀석한테 돈 받는 건 옹졸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눈 질끈 감으면 40만 원이 생긴다. 어느 게 더 쉽나. 용산역까진 아직 몇 정거장 더 남아있다. 간밤 친척집 신세를 진 부모는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겠지. 아들이 서울에 살고 있건만 부모는 친척집에서 잠을 잔다. 날 보면 복장 터질까 봐 미리 조치를 취해 놓으신 거다. 부모는 눈치도 빠르다. 아버지가 심경의 변화를 가질 때도 친구 녀석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가 아닐까. 아이비가 짖지 않을 때도, 주인 남자가 방황하지 않을 때도 아플 때나 가능할 거다. 아프면 인간이나 개나 약해진다. 이쯤이면 나도 아파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난 아픈 것 같다. 상태가 안 좋다. 아프지 않고서야 일 년째 내놔도 빠지지 않는 이 방에서 넋 놓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작년 봄 방을 내놨을 때만 해도 내가 여기서 겨울을 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진 제법 여러 명이 방을 보러 왔는데 번번이 낭패가 생겼다. 사람들이 방을 둘러보는 사이 아이비가 불쑥 나타나 베란다에 똥을 싸고 가질 않나, 주인집 치매 노파가 인상을 북북 쓰고 마당에 앉아있질 않나. 안방에 벗어둔 팬티를 치우지 않고 사람을 들이질 않나. 나열하기 민망한 일들 때문에 방 보러 온 인간들이 하나같이 딴 집과 계약했다. 계약이 만료됐으니 나가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무작정 방 빠지기만 기다리고 있나. 아이비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왜? 주인은 더 싫은데 내가 왜? 아프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기력할 수 있나. 의욕 충만이던 때도 있었는데,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버썩 마른 논바닥마냥 건조하기 이를 데 없고 어째서 머릿속엔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화개장터만 떠오르나.
식장 앞에서 삼촌을 만났다. 왔냐? 예. 너도 결혼해야지. 이 말 오늘 몇 번이나 들을까. 예식이 진행되려면 20분은 남아있다. 일찍 왔다. 식장 앞으로 아는 인간들이 널려 있다. 뭐 하러들 일찍 오는지. 지금 식장에 올라가면 한 무리의 친척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계단 오르는 다리가 다 후들거린다. 멀찍이 차려입은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이 보인다. 마술이라도 보여줄 듯 흰 장갑들을 끼고 있다. 예식에서 가장 명당은 부조금 받는 자리다. 돈에 밝지만 빼돌리지 않을 친척을 물색해 앉힌다. 한 무리의 친척이 다가온다. 아버지 쪽 친척들이 대절한 버스 타고 올라온 것이다. 얼굴이 까만 어르신 몇은 이미 취해 있다. 하나같이 낯들은 익은데 늙어서 얼굴이 긴가민가하다. 머잖아 예식장에서 얼굴 못 볼 사람들이다. 대신 장례식장 병풍 뒤에 누워 있겠지. 멀찍이 누군가 다가온다. 사촌형이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도 취해 있다. 친척들 몇이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표정이 일그러진다. 동생도 딱히 좋은 표정 아니다. 모두는 썩소를 나눈다. 사촌형이라지만 ‘형’이라기엔 너무 늙었다. 쪼글쪼글한 이마며 어쩌다 앞니가 다 빠져버렸는지 모르겠다. 그 바람에 양 볼이 쑥 들어가 송장 같다. 딱 비호감이다. 형이 돈 빌려가지 않은 친척 집이 없다. 형 덕분에 다들 한 번씩은 집안에 빨간 딱지를 붙였거나 가압류 당했거나 은행 채무를 대신했다. 형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인생경험 시켜줬다. 사촌형은 베트남전에 갔다가 미쳐서 돌아온 후 교도소에 들락거렸고, 친척 집을 다니며 민폐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형이 집에 오면 어머니는 정색을 하며 피할 구실을 찾았다. 올 때마다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형이 취해서 집에 오면 어머니는 동생만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만 집에 남아 형 수발을 들곤 했다. 어머니가 동생만 데리고 나간 것에 대해 크게 섭섭하지 않았던 것이, 형은 술만 사다주면 어디서 났는지 양손 가득 백 원짜리 동전을 채워주곤 했다. 형이 주는 동전은 대개 시커멓고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것들이었다. 구멍가게나 문방구에 붙어 있는 오락실 기계에서 털어온 동전일 수도 있고, 인간들이 소원 빌며 던져댄 분수 바닥에 잠겨 있다 부식이 진행된 동전일지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형이 주는 동전 세례에 젖어, 심지어 형이 고추를 조물락거려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돈이 최고지. 지금 생각해보면 형은 술주정뱅이에다 변태였다. 형은 그저 고추를 만지기만 했지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내가 자기 취향이 아니었나 보다. 다행스런 일이다. 사촌형은 오늘도 잔뜩 취해 있었다. 형은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다. 동생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동생은 날이 날이니만큼 예의상 웃었지만, 어머니를 따라 손님 맞는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형이 나에게 다가왔다. 형은 나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내 손을 잡고 머리를 굽신거리며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잠시 후 형이 다른 친척들을 향해 사라졌다. 형은 그들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형은 잘 있었느냐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혀를 찼다. 오질 말든지 왜 저러고 다닌다니? 나는 형 덕택에 너도 결혼해야지란 친척들의 질문을 덜 받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고마워요, 형. 미안하다. 뭘요. 그렇게 말한다고 형이 미친놈인 게 달라지겠어요? 친척들이 모이면 어느 집이든 사촌형 같은 사람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나는 친구 아버지 장례식 장지에서 사촌끼리 싸우다 하나가 식칼 들고 산천 누비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시신이 미처 흙에 덮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형은 칼 대신 미안하다는 말로 예식판을 베고 있는 검객이었다. 안내방송이 나왔고, 나는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 식장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땅.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화개장터에
아랫말하동사람윗마을구례사람닷새마다어우러져장을펼치네
미치겠다. 아까만 해도 사촌형 때문에 잊고 있던 노랫말이 다시 튀어나오고 있었다. 부르면 부를수록 선명해진다. 심하다. 이러다간 어깨춤이라도 출 것 같다. 지겨운 예식이 끝났고, 친척들은 올 때와 같은 버스에 올라타 한판 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엉덩이를 실룩이며 춤을 춰댈 거고, 남자들은 술 마시다 마지못해 나왔다는 듯 앞자리로 튀어가 트로트 두세 곡 연거푸 불러대다 마이크 뺏길 거다. 흥을 타지 않는 이가 저 버스에 타게 됐을 때 겪을 정신적 패닉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평생 갈 거다. 부모와는 예식장에서 헤어졌다. 친척집에 짐을 뒀기 때문이었다. 헤어지기 전 두 분은 나를 향해 눈 흘기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주말 오후가 반나절이나 지나갔다. 딱히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런 약속이 생긴 적도 없지만, 내가 없는 집에서 아이비와 주인 남자가 심심해하지 않을까? 그들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셱셱 셱셱, 아이비! 셱셱 셱셱, 아이비! 둘 사이를 방해할 생각은 없다. 배도 부르고 해서 한강대교를 잠시 걷기로 했다. 예전에 여자 친구와 자주 걷던 다리였다. 지금쯤 알파 맘으로 고상하게 살고 있을 여친을 기억하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도 누군가를 생각하는 척하고 싶었다. 여친은 무섭고 귀찮다. 암 그렇고말고. 죽고 싶은 자가 절대 기어오를 수 없게 기름칠 해놓은 철책을 지나, 지금쯤 헤어져 딴 사람 부둥켜안고 있을 연인들이 써놓은 낯간지러운 낙서를 구경하며, 새벽 둥둥 떠다니던 시체를 건져내 말끔해진 한강을 멍 때리며 바라봤다. 목이 마르긴 했지만 노량진까지 내처 걸을 생각이었다. 어정쩡하게 서서 일회용 카메라로 한강을 찍고 있는 사내를 지나치던 중 문자가 왔는데,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장례식장은 노량진에 있었다!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화개장터가 아니라 나는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가야 했다. 하나밖에 없는 여름 양복은 어두운 계열의 회색이라 통과다. 예식장에선 민망하지만 장례식에선 후줄근한 양복이 흠이 되지 않는다. 땀을 많이 흘려 몸이 끈적였고 장례식장에 들어가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잠깐 들렀다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조회사 영업사원으로서 장례식이야말로 본격적인 장이 펼쳐지는 일터니까. 죽지 않는 사람 없으니 부지런히 발품 팔면 실적 올릴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부조금도 만만찮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게 상조 보험 얘길 꺼내면 불쾌해한다. 지금 나보고 일찍 뒈지란 거냐? 자식들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 노인네들. 나이 들면 이기적으로 변한다. 상조 보험은 대개 자식들이 드니까 행사란 행사는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나한테 삶이란 예식장 장례식장 오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뷔페라면 지긋지긋하다. 앉아있으면 알아서 챙겨주는 데가 좋다. 장례 음식도 이젠 좀 달라져야 한다. 나 같이 자주 드나드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회라든지 냉면 같은 걸 줄 순 없나. 얼마 전엔 국내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상조회사 사장이 회사 돈을 제 돈처럼 쓰다가 구속되는 바람에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그 돈 빼서 외국에 집 사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하질 않나, 돌대가리 자식 유학은 왜 보내? 그렇잖아도 혜택 적다는 고객 불만이 많아 애먹는 판에 이런 사건까지 터지니, 영업 뛰기엔 사정이 아주 최악이었다. 이 짓도 못해먹으면 난 뭐 해서 먹고사나. 사육신묘를 지나 학원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학원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재수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머릿속이 온통 까맣던 시절.
구경한번와보세요오시면그냥시골장터지만있어야할건다있구요
없을건없답니다화개장터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 병원에 가야 하나? 뇌에 이상이 생겼을지 모른다. 노래가 멈추지 않으면 언젠간 지구촌리포트에 소개될지 모른다. 아나운서 어깨 오른쪽 화면에 내 얼굴과 ‘노래를 멈출 수 없는 남자’란 타이틀이 뜬다. 말을 할 때마다 턱을 기묘하게 앞으로 치켜 올리는 남자 아나운서가 멘트를 시작한다. 어떤 노랫말이 떠올라 따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시죠? 이 남자는 아주 심각합니다. 노랫말이 멈추지 않아 몇 달째 계속 화개장터만 부르고 있다는군요. 이어지는 영상은 내 일상. 곱상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 아나운서가 설명을 이어간다. 상조 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모 씨는 벌써 몇 달째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개장터를 부르고 다닙니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노래가 멈춰지질 않아서라네요. 화면, 내가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를 매고 있다. 입으로는 화개장터를 웅얼거리며. 출근 후 사무실, 팀장이 회의를 하는데 내가 듣고 있다. 화개장터를 따라 부르며. 짜증이 나 미간이 올라간 팀장, 고객 만나 상품 설명하는 와중에도 입으론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 따라 부른다. 고객은 카메라가 돌아가니 마지못해 표정 관리하고 이어지는 인터뷰. 장례 서비스 설명하면서 노래를 부르니까 사람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신뢰가 안 가기도 하네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구경한번와보세요보기엔그냥시골장터지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멈추질 않아서요. 글쎄, 그렇다니까 이핸 하는데 신뢰가 안 가는 걸 어쩌겠어? 참 힘들겠다. 그러니까 진작 교회 다니지. 그럼 난 이만. 나. 난처한 표정 지으며 고객을 애타게 부르며 있어야할걸다있구요없을건없답니다 고객님. 그래도 보험 하나만, 제발! 이럴 순 없다. 카페로 들어간다. 음악 소리가 크다.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다 보면 노랫말을 잊을지 모른다. 라떼를 시킨다. 샷 추가 해드릴까요? (아랫말하동사람윗마을구례사람) 예? (닷새마다어우러져장을펼치네). 사이즈 톨과 스몰 있는데 어느 걸로 해드릴까요?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 스몰. 대답 좀 빨리 하라는 듯 점원 눈빛이 조급하다. 점원이 동그란 기계를 넘겨준다. 잠시 기다리시면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구경한번와보세요) 예? 고객님? 방금 뭐라셨죠? (보기엔그냥시골장터지만있어야할건) 아니에요. 아 예. 점원은 업무상 웃지만 눈빛은 또라이 볼 때 그 눈이다. 민망한 나는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노랫말 생각 말자. 딴 생각하자. 주말인데 학원가에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내가 학원 다니던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애들이 하도 잘 차려 입어서 공부하러 온 건지 미팅하러 온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요즘 애들 옷 참 잘 입는다. 신발만큼은 이해할 수 없다. 스프리스와 줄무늬 플라스틱 슬리퍼, 종류가 딱 두 가지다. 특히 세 가닥 흰 줄에 남색 플라스틱 슬리퍼, 거기에 흰 양말 신고 활보하는 부류들, 이해할 수 없다. 저런 게 어떻게 멋져 보여? 쓰레빠를 외출 패션으로 승화시킨 파격이 놀랍긴 하지만 여간 난해한 게 아니다. 우리 땐 멋을 알았지. 암 그랬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구닥다리처럼 느껴진다. 노래에 신경을 집중하자. 톡톡 튀는 추파춥스 같은 팝들이 흘러나온다. 피곤해지는 노래다. 아 피곤해. 가지 말까? 실적. 차창 밖으로 오가는 젊은애들의 걸음이 경쾌하다. 교복 입고 스모키라 일컫는 화장을 한 한 무리 여학생들을 보는 순간, 저승사자를 본 듯 눈이 흡떠진다. 쟤들처럼 웃고 떠들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나? 혼자 다닌 지 너무 오래라 기억이 가물하다. 퇴근하고 다음 날 출근 때까지 말 한 마디 안 할 때 많다. 친구 보러, 아니 실적 올리려 장례식장에 간다.
아랫말하동사람윗마을구례사람닷새마다어우러져장을치르네
장?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례를 치르나? 거룩한 장례식장이라. 누가 이런 이름을 장례식장에 붙였을까. 거룩한 장례식장이요? 이름 좋네. 인근 사는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겠다. 아 거기? 여기서 저기로 어쩌구저쩌구 가면 있거든요. 다만 거룩하다는 이미지가 요즘 장례식과 거리가 멀다는 게 ‘거룩한’을 촌스럽게 한다. 거룩하든 거룩하지 않든 누구나 새벽이면 이틀 뒤 밤, 밤이면 이틀 뒤 새벽 관에 실려 흙에 묻힌다. 거룩한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아는 동네 사람이 흔치 않았고, 이름과 달리 낡고 후미진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거룩한과 현실의 차이다. 입구에는 조의금을 계좌로 이체할 수 있는 기계가 설치돼 있었다. 현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손님을 위한 배려, 기계 위쪽에 오늘 죽은 이의 이름과 상주 명의로 개설된 은행 계좌번호를 적어놓는 센스. 음, 역시 거룩해. 친구 아버지는 지하 2층에 모셔져 있었다. 빈소가 마련된 지하는 탁하다 못해 역했다. 이런 곳일수록 환기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하거늘, 거룩하지 않은 관리군. 일렬로 늘어선 빈소들은 전부 망자로 채워져 있어서 건물 안은 시끌벅적했다. 죽은 이들이 너무 많아서 저승사자가 헷갈릴 것 같았다. 친구 아버지 이름이 쓰인 빈소로 찾아가자 친구와 형님 두 분이 서 있었다. 조문을 일찍 온 게 틀림없었다. 테이블에 모여 있는 손님들은 전부 모르는 이들이었다. 소복 입은 며느리들과 친구 어머니가 탁자에 둘러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친구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얼굴이 해맑았다. 몇 시간 전 남편이 죽었는데 저렇게 해맑은 얼굴? 살아생전 남편이 해준 게 없거나 해줄 게 없었던 게 분명하다. 주변을 살펴도 슬퍼 보이는 인간을 발견하지 못했다. 빈소 옆에는 으레 조의금 받는 탁자가 놓여 있기 마련인데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형들과 목례를 나누었다. 형제들 역시 슬프기보다 귀찮다는 감정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친구 아버지는 10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긴 병에 슬픔 없다. 그래도 그렇지 장례식장에 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건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화개장터 없어진 것마냥 허전한 일. 옆 빈소에서 어느 할머니가 곡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명함 내밀고 스카우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장례식에선 곡이 있어야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무래도 내일 회사 들어가 건의해야겠다. 곡 기가 막히게 잘하는 분 아는데, 알바 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세 형제는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절을 세 번 한 다음 일어나 읍하고 친구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고맙다. 친구가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절을 마치자 다른 손님이 들어왔고, 그도 절을 세 번 하고 읍을 한 뒤 둘째 형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고맙네. 둘째 형도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절을 한 사람도 둘째 형 손님인 듯했다. 그 역시 절을 한 다음 읍을 하고는 둘째 형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고마워. 둘째 형이 봉투를 집어넣자 첫째 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형제는 손님을 분배하여 각자 조의금을 받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형제는 성실했다. 형제가 열심히 손님을 받고 열심히 절을 한 뒤 열심히 손님들의 조의금을 받아 각자 챙기는 모습은 병풍 뒤 누워 있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것이다. 저것들은 참 성실도 해. 아주 잘 키웠어. 친구 녀석과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친구는 미안, 잠깐만 하곤 문상객을 받은 뒤 조의금을 받아들고 돌아왔다. 그가 봉투 다발을 부인에게 디밀자 한참 수다를 떨던 부인은 얼른 받아 손가방에 잽싸게 넣었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친구 몇에게 언제 올 건지 문자를 넣었고, 답문을 기다리는 동안 밖에 나와 담배를 피웠다. 담뱃불을 붙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노랫말이 튀어나왔다. 연기가 노랫말과 버무려진 기분이었다. 노래는 기억 어딘가에 벌레처럼 들러붙어 제 기분에 따라 툭툭 내뱉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이유 없이 들어왔듯 어느 날 사라지려나? 어느 날 이유 없이 그녀를 만났다가 어느 날 이유 확실하게 그녀가 떠났듯. 전라도와경상도를가로지르는섬진강줄기따라 노래나 주구장창 부르다 죽을 팔잔가. 날이 저물었는데도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열대야였다. 가뜩이나 쭈글거리던 양복이 쉰내를 풍기며 축축 늘어져 있었다. 집에 갈까? 친구 녀석들 얼굴을 봐야 한다. 실적. 넌 왜 악착같질 않냐? 악착같이 달겨들어도 살둥말둥인데.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못 찾아서. 아 언제 찾을 건데? 글쎄. 어휴, 저런 걸 장남이라고. 목침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아버지가 달아올랐다. 그래도 울아들 착하잖아. 착한 게 밥 먹여줘? 착한 건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 밥은 아버지가 먹여주니까. 삶이란 예식장과 장례식장 오가는 거다. 부아가 난다. 삶이 고작 예식장 장례식장 오가는 거면 대체 나는 왜 사나? 부아가 난다. 왜 죽지도 않나? 부아가 난다. 부아가 난들 뭐가 달라지나. 아이비는 씹고 주인은 씹히고 사촌형은 미안해하고 동생은 좋은날 다 갔고 어머니는 한숨 쉬고 아버지는 목침 던지고 실적 없는 난 이달에도 월급 쥐꼬리고 잉여들은 방구석에 숨어들고 날 밝으면 누군 결혼하고 누군 죽는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웬일이니? 간도 커. 뭔 일 있나? 친구 아버지 빈소 쪽이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에워싸고 있었다. 상을 뒤엎었는지 바닥에 술잔과 음식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신발을 벗고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게 웬? 사촌형이었다. 형이 어떻게 여길? 친구 녀석의 아버지는 형과 동향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부음을 전해 들은 형은 관광버스를 타지 않고 나처럼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다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아마도 술을 마셨을 것이다. 형은 체격 좋은 남자에게 멱살이 잡혀 있었다. 역시 잔뜩 취한 상태였다. 가랬잖아. 미안하네. 분이 풀리지 않은 남자가 멱살을 잡은 채 형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가라고 이 영감탱이야! 형은 남자가 흔드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 와중에도 형은 평정을 잃지 않았다. 눈을 감고 치려면 쳐봐 하는 식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안 가? 맞을래? 남자가 형을 윽박질렀다. 미안하네. 형은 남자를 향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남자는 자기보다 연배가 높은 형을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다. 한편에는 친구 아내가 울고 있었고, 그 옆으로 삼형제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형은 친구 부인의 가방을 슬쩍 하려다 잡혔다고 했다. 사내가 멱살 잡힌 형을 내동댕이쳤고, 형은 상 쪽으로 풀썩 날아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다른 상에 있던 음식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형은 옷이 더럽혀진 채 엎어졌다. 어머머 웬일이니? 여자들이 탄성을 질러댔다. 형은 다리를 발발 떨면서 느리게 일어나더니 옷에 묻은 음식을 천천히 털어냈다. 형은 친구 아내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네. 친구 아내가 눈을 흘겼다. 큰형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네. 알았으니 그만 가봐요. 둘째 형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네. 둘째 형이 사촌형을 죽일 기세로 째려봤다. 형은 친구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네. 친구는 부인을 슬쩍 쳐다보더니 말했다. 경찰 불렀어? 형은 나에게도 다가왔다. 미안하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빨이 다 빠져 움푹 들어간 형의 볼따구니를 힘껏 내리쳤다. 퍽. 뼈만 남은 앙상한 형의 몸뚱어리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형은 다리를 덜덜 떨면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네. 퍽. 나는 다시 형의 반대편 뺨을 내리쳤다. 바닥에 내리꽂힌 형은 이번엔 바닥을 두어 번 굴렀다. 형은 아까보다 기력 없이 느릿느릿 일어났다. 합죽이 같은 형의 입안에서 시커먼 피가 뚝뚝 떨어졌다. 형이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네. 퍽. 나는 또 형의 얼굴 어딘가를 때렸다. 바닥에 무너진 형은 다리뿐 아니라 온몸을 움찔거렸지만 다시 일어났다. 형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형은 나를 향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안하네. 퍽. 나는 형의 얼굴 어딘가를 또 때렸다. 형의 몸이 겅중 뛰어 바닥에 꽂혔다. 하지만 형은 일어나기를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왔다. 미안하네. 퍽. 미안하네. 퍽. 미안하네. 퍽. 나는 형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때까지 때릴 생각이었다. 내가 왜 형을 때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이 밉다거나 형이 부끄럽다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형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형이 미안하다고 하듯 그냥 때리고 싶었다. 아이비가 짖고 주인이 씹히듯 나는 형을 때리고 싶었다. 미안하네. 퍽. 미안하네. 퍽. 더 이상 형을 때릴 수 없었다. 친구와 친구의 형제들이 내 양팔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경비 둘이 요란한 구두소리를 내며 달려와서 형을 데리고 갔다. 형은 경비들에게 양팔을 결박당한 채 질질 끌려갔다. 빈소에 있던 사람들이 양 벽으로 붙어 그들이 형을 잘 끌고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사람들의 몸은 잽싸게 벽을 탔다. 형은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가면서도 흐물거리는 몸을 쥐어짜며 읊조리고 있었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형이 사라진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주변은 정돈되었다. 깨진 그릇과 엎어진 음식은 말끔히 치워지고 상 위에는 새로운 음식과 술이 올려졌다. 상주들은 빈소를 지켰고,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형제는 각자에게 할당된 손님들에게 부지런히 봉투를 받아 챙겨 넣었다. 밤이 되자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담배를 피우러 건물 바깥에 나왔다. 바람이 선선했다. 상 치워진 자리로 담요가 깔리고 몇 무리로 나뉘어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아침까지 나는 여기서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고 있어야 했다. 내 삶은 예식과 장례식을 오가는 것이니까. 나는 악착같이 예식장과 장례식장을 오가고 있다. 운이 좋으면 친구 녀석이 보험을 들 테고 나는 실적이 올라가고 그러면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담배는 달았다. 연기가 시커먼 허공을 기세 좋게 타고 올라가는 양을 지켜보았다. 나는 몇 모금 더 빨아서 도넛 모양을 만들었다. 연기는 지들끼리 수다를 떨듯 왁자히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한 대만 다오. 고개를 돌리니 잔뜩 부어올라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형이 서 있었다. 경비들 손에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텐데 형은 어느새 고양이처럼 숨어 들어와 있었다. 대단하구나 형은. 저 악착같음으로 여태 죽지 않고 살았겠구나.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형에게 내밀었다. 형은 빠진 앞니 사이로 쇳소리를 내면서 담배를 받았다. 숨이 찬 듯했다. 불을 붙여 주었더니 형은 한 모금 빨고 나서 웃었다. 셱셱 셱셱. 형은 더는 나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았다. 형도 이제는 지쳤는지 그저 웃고만 있는 것이다. 형이 이렇게 사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우리는 말없이 담배를 피며 깜박이는 등을 바라보았다. 눈앞으로 뭔가 지나갔다. 뭐지? 어라 잠자리였다. 자세히 보니 물잠자리였다. 더구나 머리, 몸통, 날개가 전부 까만 것이 위태롭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웬 물잠자리? 물잠자리는 보통 시골 저수지나 개울 같은 데 날아다니지 않나. 한강에서 여기까지 길을 잃고 날아온 모양이었다. 빛 찾아 날아온 물잠자리는 등 주변을 돌고 있었다. 까만 몸통을 팔랑대며 나는 폼이 우아하기도 했다. 거 예쁘네. 형과 나는 물잠자리의 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가 지켜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물잠자리는 계속 등 주위를 돌았다. 돌고돌고돌고. 다시 돌고돌고돌고. 물잠자리를 보고 있자니 시골 강이 보고 싶어졌다. 형과 나는 홀린 듯 담배를 피워가며 물잠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형에게 말했다. 형 이제 집으로 가요. 형이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형이에요.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내 안으로 사라졌다. 앞으로 형을 만날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노랫말이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