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손
여자는 책을 읽고 있다. 밑줄을 긋거나 입술을 웅얼거리기도 한다. 연필을 쥔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얇은 원피스 소매가 벌어지고 쇄골이 따라 오르내린다. 여자의 피부는 창백하리만큼 하얗다. 팔뚝과 목 언저리로 푸른 심줄이 들여다보인다. 관절은 아주 가늘어 움켜쥐면 으스러질 것 같다. 공부에 열중해 먹는 재미를 잃은 걸까, 희귀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장을 했지만 여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다. 납작한 가슴, 앙상한 다리, 여자의 몸은 너무 말라 기형적으로 보인다. 여자가 읽고 있는 종이를 좇는다. 그림과 관련된 내용인 것 같다. 여자가 내 편을 흘겨본다.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전동차는 바깥으로 난 철길을 달리고 있다. 속도가 느려지면서 풍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에스 자로 놓인 도로 위로 퇴근하는 차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간이 낚시터가 보인다. 둥근 저수지를 에워싼 조악한 낚시 의자에 잠바를 입은 몇이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시커먼 물에는 고기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밭이 이어진다. 일렬로 늘어선 낡고 누런 비닐하우스들이 이물스럽다. 전동차가 멈추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빠져나간다. 서 있던 여자가 자리에 앉아 초식동물처럼 예민하게 주위를 훑어본다. 나는 이미 시선을 옮긴 참이다. 여자가 다시 책 읽기에 몰두한다. 다음 정차할 역은 중앙역. 안내방송이 나오자 여자가 책을 덮는다. 여자는 무리에 섞여 내린다. 계단을 내려간다. 나도 여자를 따라 내려간다.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주위가 갑자기 환해진다. 눈을 찡그린 채 하늘을 잠시 본다. 하루의 막바지 햇살이 분말처럼 사방 쏟아지고 있다. 여자가 무리를 따라 걸어간다. 여자의 토닥거리는 구두 소리가 옴팡지다. 신기루라도 좇듯 여자 뒤를 따른다. 햇살이 내리쪼여 인상이 찌푸려진다. 고개가 아래로 꺾인다. 콘크리트 바닥에 누군가 떨어뜨린 시뻘건 하드 주위로 개미떼가 까맣게 모여들고 있다. 사내아이가 쭈그려 앉아 들여다본다. 엄마인 듯한 여자가 아이 손을 잡아 끌며 채근한다. 개미야, 엄마, 개미. 만지지 마, 더러워. 짜증이 밴 목소리다. 나는 여자를 놓칠까 봐 서둘러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간다. 여자가 탈 버스는 금방 도착한다. 여자를 따라 버스에 올라탄 나는 여자 자리에서 세 칸 떨어져 앉는다. 버스 안에서 여자는 책을 읽지 않는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내린다. 여자가 횡단보도를 뛰어간다. 나는 여자보다 뒤처져 걷는다. 대학 정문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여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그 바람에 여자와 나는 마주보게 된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여자를 본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다. 여자가 등을 돌려 다시 걷는다. 잠시 후 여자는 사라진다.
여자가 사라진 뒤 나는 잠시 망설인다. 여자가 대학 건물 안으로 사라질 거라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난감해진다. 수위가 나를 힐끔거리고 있다. 들어가거나 돌아가거나 선택해야 한다. 발길을 돌려 근처 편의점으로 향한다. 정면으로 음료 따위가 든 냉장고가 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소음이 심해진다. 팩소주 두 개를 꺼내고 소리 나게 유리문을 닫는다. 빵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놓인 빨대를 뽑은 다음 지폐를 내민다.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은 채 바코드를 찍고 있는 여자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겨드랑이 사이에 팩소주를 찔러 넣고 정문을 향해 걷는다. 수위가 하품을 하고 있다. 정문을 넘어간다. 지나다니는 학생이 많지 않다. 그 사이 햇살도 누그러졌다. 주위를 둘러본다. 나무와 꽃이 많다. 여기도 꽃, 저기도 꽃, 온통 꽃천지다. 그제야 계절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차림이 무겁다. 점퍼를 벗을까 하다 그냥 둔다. 올해는 꽃이 일찍 피었다. 가지가 휘어질 듯 핀 진달래와 철쭉을 보니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걷는 속도에 비해 금세 숨이 차오른다. 종일 먹은 게 없어서다. 봄볕을 우습게 봤는데 결국 오래 걷지 못하고 나는 구릉 위 벤치에 주저앉는다. 팩에 빨대를 꽂은 다음 깊이 빨아올린다. 목구멍으로 소주가 넘어가면서 알코올 기운이 코끝으로 톡 쏘며 올라온다. 몇 모금 빨지 않았는데 팩 안의 술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여자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다. 벤치에 드러눕는다. 누운 그대로 점퍼 주머니에서 보름달을 꺼내 문다. 허기가 지면 신경질이 난다.
여자를 알고 있다. 우리는 국민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 여자는 늘 책상에 반듯이 앉아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곤 했다. 그런 여자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말끔한 상태로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것.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던 이성의 모습인 것만 같았다. 그 애한테 풍기는 냄새도 좋았다. 아카시 향기 같기도 한 산뜻하고 청량한 냄새가 여자의 몸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풍겨왔다. 그 냄새가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의 인위적 향이란 걸 나중에 알았지만, 냄새는 언제나 나를 황홀하게 했다. 내 주변에선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람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여자를 봤을 때 단번에 그애임을 알 수 있었다. 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는 어릴 때와 변한 게 별로 없었다. 창백하고 마른 모습 그대로였다. 여자는 나를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하긴 나는 많이 변했다. 당시 나는 여자보다 한참은 키가 작았다. 국민학교 때는 대개 여자애들이 크기 마련이지만, 개중에 나는 아주 작은 편에 속했다. 나는 작고 비루하고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여느 때보다 학교에 일찍 온 나는 책상에 바싹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여자의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밑에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등교를 한 여자가 편지를 발견했고, 이게 뭐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봉투를 쳐다보는 여자를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렘 같은 감정으로 나는 달아올랐다. 그런데 여자는 봉투를 뜯지 않고 그대로 집어 들더니 교실 뒤로 걸어갔다. 뭐 하려는 거지? 생각하는 사이 여자가 쓰레기통에 그것을 망설임 없이 집어넣었다. 밤새 골몰해서 쓴 내 편지는 단 한 줄도 읽히지 못하고 쓰레기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여자는 손을 턴 다음 교실을 나가버렸다. 잠시 후 물기 묻은 손을 훔치며 여자가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여자는 교과서를 펼쳐놓고 여느 때처럼 밑줄을 그으며 읽기 시작했다. 편지 속에는 내가 처음으로 사용한 아름다운 낱말들이 적혀 있었다. 수업을 마친 여자와 친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자와 친구는 내가 다가가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뛰어가 여자의 책가방 가운데를 발로 찼다. 여자의 고개가 꺾이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옆에 있던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날 때 나는 다시 뜀박질을 해 여자의 배를 찼다. 그제야 여자가 배를 움켜잡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의 울음에 나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내 표현에 반응하는 여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여자의 친구가 나에게 왜 때리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눈에 힘을 바짝 주자 아이들이 주춤거렸다. 나는 우는 여자를 뒤로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등 뒤로 들리는 여자의 우는 소리가 싫지 않았다. 여자도 이제는 내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고 나서 언제나 반응을 살폈다. 어머니가 반응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또 때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기를 무시하기 때문에 때렸다고 말하곤 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고 칠한 지 오래돼 녹이 슨 초록 대문이 달려 있었다. 안채 옆 단칸방엔 젊은 부부가 세를 얻어 살고 있었는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그들은 급히 방을 빼 이사를 가버렸다. 며칠 뒤 심심한 나는 그들이 쓰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누렇게 바랜 벽지 쪼가리와 바닥을 뒹굴던 먼지를 발로 차며 서성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밥 줘. 소름 끼칠 만큼 가늘고 음산한 소리였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에게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나를 꾸짖었다. 다음 날 나는 더듬거리며 마치 무언가에 홀리듯 그 방에 들어갔다. 방에서는 또다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고파, 밥 좀 줘. 배고파. 희미하지만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나는 겁에 질려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와 내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에도 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배고파, 밥 좀 줘. 배고파. 어머니는 한쪽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더니 다락방 귀퉁이에 매달린 문고리를 획 열어젖혔다. 문을 여니 다락으로 통하는 가파른 계단이 드러났고, 동시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와 나는 코를 움켜쥐었다. 정말이지 맡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지독한 냄새였다. 밥 달라던 소리는 한층 크게 들렸다. 다락에는 노망난 백발의 노인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노인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그 집을 팔아야 했다. 대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방 하나가 딸린 가게를 얻었다. 그곳에도 다락이 있었다. 다락이라 말하기도 궁색한, 전에 살던 누군가가 나무 기둥 몇 개와 판자로 대충 얹어놓은 공간이었다. 그곳은 무게가 나가는 어른이 다락 바닥을 몇 번 걸어 다니면 폭삭 주저앉아 버릴 듯 위태롭게 들썩거렸다. 다락은 얇은 판자를 경계로 곰팡이 핀 채 둘둘 말린 도배지며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둔 공간과 잠을 자는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 그 다락에 올라갔을 때 맡았던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노인의 다락보다 심하진 않았지만 오래 맡다 보면 기이한 몽환으로 이끄는 냄새였다. 나는 다락에서 꽤 오랫동안 지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첫날 깔아준 요와 이불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해가 지날수록 냄새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락은 끔찍했다. 그곳에는 똥을 싸대고 냄새를 풍기는 쥐들이 들끓었다.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보다 잠잘 때가 되면 어머니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다락으로 올라가라는 신호였다. 나는 어머니의 서늘한 눈빛에 떠밀려 울고 싶은 심정으로 다락에 올라가야 했다. 백열등은 언제나 침침했다. 손바닥만 한 창문도 그나마 한쪽은 판자로 가려 있어 볕이 들지 않았다. 눅눅한 이불을 온몸에 친친 말고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잤다. 언제 쥐들의 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쥐들은 밤새 소리를 내며 분주히 들락거렸다. 나는 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손이나 발로 소리를 냈다. 어느 때는 찌익찍 비명을 내며 죽어가는 쥐들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놓아둔 덫에 걸려들거나 찍찍이에 들러붙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덫에 걸린 쥐는 끓는 물을 부어 죽였고, 찍찍이에 붙은 쥐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죽은 쥐들은 한결같이 고통스럽고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쥐들은 그렇게 죽어갔지만 그 수는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방심한 채 발을 드러내고 자다 엄지발가락을 물린 적도 있었다. 쥐에게 물린 건 발작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쥐가 발가락을 물었을 때 느꼈던 통증과 혐오스러운 이물감은 아주 오랫동안 남았다. 나는 쥐들이 변형이 돼 박쥐가 되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경찰에게 업혀가던 노인의 작고 쭈글거리던 몸이 기억난다. 내복만 입고 있던 노인의 엉덩이 주변에는 말라붙은 똥딱지가 붙어 있었다. 노인은 경찰의 등에 업힌 채 저승꽃이 잔뜩 핀 얼굴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부릅뜬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잠을 청할 때 나는 다락에서 발견된 노망 난 할머니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때는 환청이 들려오기도 했다. 빈 방에서 들었던 노인의 그 흐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아가, 배고파, 밥 좀 줘. 늙은일 굶겨 죽일 셈이냐. 나는 방치되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기에 노인이 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나에 의해 발견된 노파는 밥 달라 소리치는 데 기력을 다 쏟아 부은 탓일까, 어느 보호 시설로 옮겨졌는데 얼마 후 죽었다고 했다.
여자를 때린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이 회초리를 들고 나타났다. 여자의 친구가 담임에게 이른 모양이었다. 담임은 나와 여자 그리고 친구를 불러냈다. 우리는 교단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담임은 나에게 여자애를 때렸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이 왜 때렸느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담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때렸어? 대답하지 않았다. 담임이 여자에게 말했다. 너는 맞고만 있었어? 여자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담임은 친구도 야단쳤다. 넌 친구가 맞는데 가만히 있었어? 담임은 여자와 친구에게 손을 들라고 했다. 나에게는 엎드려뻗쳐를 시킨 후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뿐 아니라 친구의 훌쩍이는 울음도 들려왔다. 우는 소리가 커질 때마다 담임의 매질이 거세졌다. 대나무 회초리는 매섭게 엉덩이살에 들러붙었다. 매가 꽂힐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머리통이 심하게 울렸다. 담임이 소리를 질렀다. 왜 때렸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맞아 죽을지언정 여자를 때린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 이 새끼, 그래도. 담임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손놀림도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매질이 격해질수록 참기 힘든 통증이 느껴졌고 어느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엎어져버렸다. 경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놀란 담임이 내 이름을 불렀고, 누군가가 꺅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격한 울음도 귓전으로 들려왔다.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거품을 물고 눈자위가 하얗게 된 채 사지를 떨고 있는 나를 구경했다. 안 들어가? 담임이 소리를 지르자 아이들은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의 몰려다니는 소리는 파도가 들이쳤다 빠지듯 몽롱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모든 것이 한 움큼 실타래처럼 뭉쳐졌을 때 나는 아득해졌다. 눈을 떴을 땐 양호실이었다. 혼자였다. 몸을 일으켜 창밖 운동장을 바라보니 해 그림자가 한참은 기울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갔는지 주위는 고요했다. 뭔가 묵직한 게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나왔을 때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왔을 때는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아이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 발작에 대한 소문은 곧 전교생이 알게 될 터였다. 여자의 책상을 쳐다봤다. 비어 있었다. 출석부를 들고 담임이 교탁에 섰을 때도 여자는 교실에 들어서지 않았다. 어제 일로 단단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날 무렵 담임이 나를 불러냈다. 담임의 뒤통수를 따라 교무실로 들어갔다. 선생 몇 명이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어제 얘기가 오간 것 같았다. 담임은 먼저 내게 반성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 끝이 올라간 담임이 여자애들을 또 때릴 거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담임이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인간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줘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 여자 때리는 남자라고 했다. 담임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담임은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 테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담임은 여자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사과? 고개를 숙이던 내가 담임을 설핏 쳐다봤을 때 담임은 내 목에 낀 때를 쳐다보고 있었다. 담임의 눈을 때리고 싶었다. 여자는 다음 날에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담임은 여자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고 했다. 여자가 이제야 내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자와 나를 떼어놓은 어른들이 원망스러웠다.
어머니가 초록 대문 시절 얘기를 꺼냈던 적이 있다. 암이 퍼져 자궁을 떼내기 위해 입원했을 때였다. 동생이 군대에 가 있었으므로 내가 어머니 보호자 노릇을 해야 했다. 어머니와 나는 대화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더 삭막해졌다. 우린 서로 입을 굳게 다물고 각자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다툴 때 나는 아버지처럼 손이 올라갔다. 욕을 퍼부우면서도 어머니는 그런 나를 두려워했다. 동생이 군대에서 전화를 했을 때 나는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형, 알았지? 알긴 뭘 알아? 엄마 수술 안 받으면 죽을지도 몰라. 됐어. 네가 알아서 해. 씨팔, 안 가면 형이고 나발이고 없을 줄 알아.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 너머 군인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형, 꼭 가봐. 알았지? 어머니는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수술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이 나를 죽일지도 몰랐다.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병실에 올라온 나는 어머니와 마주했다. 만난 지 꽤 됐지만 어머니와 특별히 할 얘기가 없었다. 말이 잘못 튀어나왔다간 다투기나 할 게 뻔했다.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는 유약해 보였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낯설었다. 다음 날 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지 못한 어머니는 기운이 없는 듯했다. 나 좀 누워야겠다. 멍한 눈으로 티브이를 응시하던 어머니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담배 피러 나가려고 할 때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팔면 안 됐어. 어떤 집인데.
어떤 집인데. 감은 어머니의 눈커풀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몸을 팔았어?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침대째 실려갔고, 두어 시간쯤 지나 옷이 벗겨진 채 하얀 이불을 덮고 병실로 돌아왔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6인용 병실은 조용했다. 환자들은 산책을 나가거나 치료를 받으러 갔고, 몇은 잠을 자고 있었다. 간호사가 어머니에게 주사를 놓느라 흩어놓은 이불 사이로 음모가 말끔히 깎인 어머니의 생식기가 드러났다. 이불을 젖혀 어머니의 생식기를 들여다봤다. 어머니의 여성은 붉고 쪼글쪼글했다. 아주 낯선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욕망이 거세된 채 싸늘하게 남은 흉측한 살점에 불과했다. 어머니의 성기에선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것 같았다. 껍질이 벗겨진 채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홍합, 비밀을 감추려 있는 힘껏 앙다문 입술, 불쾌한 단어들만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자궁을 열면 그 속에 마구 엉겨붙은 시뻘건 녹들이 떠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녹이 슬 만큼 슬어 벌겋게 부식된 어머니의 자궁 속에는 악취 나고 쥐가 우글거리는 다락이 들어앉아 있었다. 엉덩이에 똥닦지가 들러붙고 저승꽃이 잔뜩 핀 노파가 섬뜩한 눈초리로 밥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허망함들이 어머니의 자궁 안에 똬리를 튼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을 지키기 위해 집을 팔았지만 어머니의 집은 결국 헐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성기를 바라보는 건 고통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괴롭다는 듯 인상을 썼다.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어머니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나는 어떤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문득 어머니도 그날 일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다락에 가둬놓으려 했을지 몰랐다. 어머니,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어머니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어머니의 목을 누르고 싶었다.
어두워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훈풍이었다. 살갗에 닿는 느낌이 따스했다. 벤치에 누운 상태로 고개만 틀어 여자가 걸어간 캠퍼스 쪽을 바라봤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로 학생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여유 있는 걸음이었다. 시간이라면 나도 많았다. 바쁠 이유가 없었다. 갈 데도 가고 싶은 곳도 반기는 곳도 없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이 없었다. 어두워지니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어둠이 빛을 가릴수록 나는 한층 기운이 났다. 여자가 들어간 지 두어 시간쯤 지난 것 같다. 여자에게 우리가 동창이라는 따위의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여자에게 그날 일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었다. 여자를 보는 순간 바싹 마른 태아가 떠올랐다. 형편없이 말라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 내게 여자는 그렇게 느껴졌다. 여자 역시 나처럼 행복하지 않아 보였다. 살아남기 위해 간신히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강렬한 무엇이란 확신에 사로잡혔다. 여자 역시 자신을 보호해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할지 몰랐다. 우리는 운명일지 몰랐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구체적인 감정이었으므로, 나는 그 방향을 향해 가야만 했다. 여자를 잡고 싶었다.
혼자였다. 뒤편으로 수다를 떨며 걸어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여자는 내가 앉아있는 벤치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가 추운 듯 양팔을 껴안았다. 여자를 보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 그날 일에 대해 정중히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차를 마시자고 해야겠다. 여자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고 여자 얘기도 들어줄 것이다. 우린 서로 이해하게 되고, 대화가 잘 풀리면 동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여자에게 예쁜 집을 사줄 것이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걸어갔다.
- 저기. 나 기억나?
- 누구세요?
- 나야, 기영이.
- …….
- 그러니까, 국민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 …… 모르겠는데요.
- 내가, 운동장에서 널, 때렸잖아.
- 기억 안 나요.
- 미안하다.
- 뭐가요?
- 사과하고 싶어.
여자가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 손목을 잡았다. 왜 이래요? 할 얘기가 있어. 이거 놔요. 놀란 여자가 팔을 흔들었고 그 바람에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여자의 머리칼에서 이전에 맡았던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잠깐이면 돼. 바빠서요. 여자가 다시 지나가려 했다. 잠깐만. 나는 여자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왜 이래요? 손 치워요. 여자의 눈빛이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얘기 좀 하자. 이거 놔요. 여자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인상을 쓰고 있는 여자를 보는 것이 기분 좋진 않았지만,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여자가 팔을 흔들었다. 왜 이래요? 나는 여자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얘기 좀 하자고. 여자가 아프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가야 한다잖아요. 놔요! 무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울먹였다. 도와주세요. 이 사람이 제 손을 안 놔요. 남자가 다가왔다. 아저씨, 누구세요? 누군데 남의 손을 잡고 있어요? 이 친구랑 아는 사인데 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저씨. 일단 이 손 놓고 얘기하세요. 상대가 싫다잖아요.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자가 여자와 내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 놓고 말하세요. 얘기 좀 하자고. 나는 여자의 손을 더욱 세게 조여 잡았다. 아저씨, 손 푸세요. 남자가 욱박질렀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가 자신의 손아귀 힘으로 여자와 나를 떼어놓으려 했다. 나는 여자를 잡지 않은 다른 주먹으로 남자의 얼굴을 힘껏 갈겼다. 얼굴을 맞은 남자가 다시 일어나 나를 밀쳤다. 남자의 몸에 떠밀려 나는 뒤로 나뒹굴었고, 내가 여자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도 같이 넘어졌다.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삑. 호루라기 소리였다. 수위가 달려오고 있었다. 여자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나는 여자를 일으키며 함께 일어나려 했다. 여자가 부축해주는 나를 그악스럽게 밀쳐냈다. 다시 여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자가 발악을 하며 내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려 손톱으로 할퀴기 시작했다.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손을 놓지 않았다. 무리들이 여자와 나를 에워쌌다. 수위가 외쳤다. 당신 뭐야? 우린 동창이라고 씨발. 수위가 여자에게 물었다. 이 사람 알아요? 여자가 울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른다고? 너 나 몰라? 그 사이 남자와 수위가 나를 덮쳐서 여자를 잡았던 내 손을 떼어냈다. 여자가 황급히 무리 속으로 뛰어갔다. 날 몰라?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모른다잖아. 너 누군데 여기서 행패야? 수위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들 가세요. 잠깐, 나 기억 안 나? 기영이. 우리 동창이잖아. 운동장에서 내가 널 때렸잖아. 여자는 다른 여자 품에 안겨 울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다들 가세요. 김씨, 경찰 불러. 나 알지? 나 알잖아! 네가 어떻게 날 모를 수가 있어? 여자 하나가 외쳤다. 아저씨, 저 사람 꽉 잡아요.
그 사이 여자와 학생들은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질 수 없었다.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자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잠깐만. 여자 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수위가 나를 힘껏 떠밀었다. 잠깐만, 좀 나와 봐. 여자는 무리와 함께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에이 씨팔. 비켜, 비키라고! 내가 수위를 노려보며 걸음을 떼자 다급해진 수위가 뒷걸음질을 치며 허리춤에서 무언가 끄집어냈다. 거기 가만 있어. 움직이면 가스총 쏠 거야. 수위가 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여자랑 할 말이 있다잖아. 가만 있어. 움직이지 마. 좀 비켜봐. 나는 수위를 제치고 여자를 향해 뛰어가려 했다. 순간 시야가 흐트러졌다. 악. 희멀건 액체가 눈앞에 쏟아졌고 나는 양눈을 틀어잡고 바닥에 엎어졌다. 시린 눈을 부여잡고 발악을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눈을 떠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눈물과 뿌연 액체가 뒤섞여 눈알이 빠개지는 것 같았다. 한참 뒤틀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와 무리 같았다. 가지 마! 나는 남아있는 힘을 다 쓰며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목구멍에서는 어떤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조여왔다. 가지 마. 얼음처럼 차가운 무엇이 가슴을 쑤시고 들어왔다. 싸늘한 덩어리는 쏜살같이 얼굴과 목 아래로 솟구치고 있었다. 가지 마. 떨림, 경직, 떨림, 경직, 이윽고 정적. 이봐, 이 사람 왜 이래? 이봐.
결국 기억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경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얼굴이 퍼래지고 동공이 돌아가고 입에서 거품을 쏟아내고 몸은 돌처럼 딱딱해졌다. 한동안 이 상태일 것이다. 귓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내가 모르는 무엇에 의해 기억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다른 어떤 의지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공포에 질린 어머니의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왔다. 알고 있었다. 다시는 어머니와 눈을 마주칠 수 없으리란 것을. 내가 어머니 목을 눌렀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까? 어머니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 있나? 내가 여자에게 사과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과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나에게 나는 여자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나는 흐려지는 기억 속 이미지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초록 대문이었다. 어머니를 초록 대문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여자와 저런 집에서 아이를 낳고 살 수 있다면,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사과를 받아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