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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07. 2024

타인의 손

 만년 극심하게 눈이 나빠진 드가가 그림 대신 택한 건 조각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드가는 무희에게 관심이 많았다. 조각으로 빚어내고 싶은 것도 발레리나들이었기에, 작품 구상을 위해 드가는 발레교습소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어느 날, 늙은 화가의 눈에 어린 무희 하나가 들어왔다. 이름은 마리 판 후텀. 가난한 벨기에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동생의 손을 잡고 춤을 배우러 왔고, 이곳에서의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고 있었다. 마르고 핏기 없는 몸, 앙상한 손과 다리를 바들거리며 마리는 돈 많은 후원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춤을 추었다. 하지만 볼품없는 몸매에 주눅이 잔뜩 든 마리는 그들의 눈에 좀체 띄지 않았고, 결국 마리의 엄마는 푼돈이라도 벌 양으로 드가의 작업실로 마리를 보냈다. 마리가 두리번거리며 작업실에 들어왔을 때, 드가는 펄떡이며 환호하는 손의 비명을 들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환희에 사로잡힌 드가는 마리라는 몸을 형상화하기 위해 반복 또 반복했다. 결국 그토록 원하던 작품이 완성되었다. 드가가 조각한 마리의 분신은 1881년 파리 어느 전시장에 공개되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의 작품은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혹독한 비평만 얻었다. 당시 유행하던 조각과 전혀 다른 지독한 사실성 때문이었다. 당시 비평가와 감상자들은 아름다움의 향유를 원했다. 때문에 노골적 실재에 가까운 드가에 작품은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드가의 작품을 본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채색된 얼굴에 실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처럼, 머리카락이며 가시관이 모두 실물로 되어 있고 옷은 실제 직물로 만든 뷔르고 성당의 그리스도상처럼, 드가의 무희는 직물로 된 스커트에 실제 리본, 실제 무용복 상의에 실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다. 위로 쳐든 머리는 채색을 하고 입술은 살짝 벌어진데다가 갈색에 회색빛이 도는 병약한 얼굴은 그 일그러진 모습이 마치 애늙은이 같다. 손은 등 뒤로 돌려 깍지를 끼고 있고, 가슴은 밀랍으로 만든 꼭 끼는 흰색 상의에 납작하게 눌려 있으며, 연습으로 단련된 깡마르고 뒤틀린 다리는 힘겹게 균형을 잡고 서 있다. 모슬린 스커트를 깃털처럼 허리에 두르고 뻣뻣한 목둘레를 장식한 황록색 리본과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 등 뒤로 늘어뜨린 모습을 한 이 무희는 우리 눈앞에서 당장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고 좌대에서 사뿐히 내려설 것만 같다.” 당대 여성상과 거리가 먼 이 애늙은이 같은 무희 조각은 이후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드가가 죽기 직전까지 작품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미술 애호가가 작업실 한켠에 놓인 마리 상을 보고 측은한 마음에 구입을 제안했을 때, 드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딸인데 어떻게 팔겠어?”    

  

  기사는 대학로에서 한성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지나치게 빨리 꺾는 바람에 오른쪽 바퀴가 들릴 지경이었다. 갓길로 바짝 붙어 차를 몰아댔으므로 누군가 금 밖으로 발을 뻗고 있었다면 밟혔을 것이다. 병은 손잡이를 잡은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차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문제될 것들을 떠올렸다. 노트북 바탕에 띠워둔 일기와 메모, 정리하지 않은 고지서, 밥을 주곤 하던 도둑고양이 등 사사로운 이유들만 나열되었다. 죽지 못하고 불구가 될 몸이 더 거슬렸다. 기사와 죽음을 동행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죽음은 어디까지나 선택이길 바랐다. 택시가 한성대 방향으로 접어들자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신호가 붉게 바뀌자 차들이 일제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오토바이는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그대로 내달렸다. 흔한 경우였다. 오토바이는 언제나 신호를 지키지 않았다. 질주하던 오토바이는 순식간에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고 있던 남자를 들이받았다. 오토바이의 육중한 엔진음이 퍽, 소리와 함께 절멸했고, 아스팔트 바닥을 할퀴는 금속의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저런. 기사가 탄성을 뱉었다. 고요가 소름처럼 돋았다. 신호가 바뀌자 차들은 차선에 쓰러진 오토바이와 두 사람을 피해 지나갔고, 거리는 다시 차들의 엔진 소리로 덮였다. 병은 길바닥에 널린 오토바이 파편들과 어둠 속에서 다리를 절룩이며 일어나는 오토바이 몰던 사내, 고개가 꺾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보행자를 보았다. 기사는 기세가 누그러졌는지 조금 전보다 속도를 줄이며 중얼거렸다. 

  저거 백 퍼센트 저 사람 과실이야.

  누구요?

  누구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엎어져 있는 사람이지. 잔뜩 취해 한 차선이나 넘어와 택시를 잡고 있었으니. 새벽엔 저런 인간들 천지예요.

  목이 왼쪽으로 꺾이고 양팔을 뒤로 젖힌 채 엎드려 있었어요.

  짧은 새 자세히도 보셨네. 다친 사람만 억울하지. 개값 취급 받아요. 며칠 있으면 현수막 붙겄네. 우린 저런 거 자주 보는데 신고 안 해요. 불려다니고 피곤만 하지. 오늘 일진 영 안 좋네. 아까도 나오자마자 횡단보도에서 노인네 칠 뻔했거든.   

  병을 내려준 택시는 빠르게 차를 몰아 사라졌다. 병은 잔돈을 받으며 저런 식으로 계속 차를 몰다간 조만간 기사가 누군가를 치고 말 거라 생각했다. 차를 몰았을 때 병 역시 적지 않은 사고를 목격했다. 운전자들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들이받고도 별 다른 조치 없이 그냥 지나쳤다. 심지어 어떤 트럭 운전수는 길 건너는 개를 일부러 치기 위해 차선을 바꾸기도 했다. 새벽에 짐승 내장 터지는 소리는 8차선 도로를 덮고 오랜 비명을 남겼다. 매일 누군가가 차를 들이받고 가드레일을 치받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거나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져도 차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새벽에는 차를 빠르게 몰아야 했다. 그게 룰이고 더 안전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빨리 달리고 그와 비례하여 빠른 속도로 미쳐가고 있다고 병은 생각했다. 병도 새벽에 운전을 하다 차에 치여 널린 개의 머리를 밟고 지나갈 뻔했다. 급히 핸들을 틀었지만, 바퀴 아래로 공허하게 풀린 개의 눈과 마주친 기억은 오래 남았다. 개가 이유는 아니었지만, 병은 얼마 후 차를 팔아버렸다. 뭔가를 한 번 치고 나면 다시 들이받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 못할 것 같았다. 병은 도로 바닥에 모로 고개가 꺾인 채 납작하게 누워 있던 육체를 잠시 생각했다. 박제가 된 듯 굳은 육체. 지독한 사실성이 문제였다. 어두운 골목을 가로지르며 병은 제 발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30여 명의 인부들이 분주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병과 가까운 거리에서 청동 주조물을 정으로 쪼고 있던 인부가 아는 체를 했다. 병은 그 인부가 김씨인지 이씨인지 헷갈렸지만 그냥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사무실 쪽에서 군이 나타났다. 군의 찌든 표정에서 오래된 피로가 느껴졌다.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었다. 납기가 임박하면 군은 잠을 자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군이 나오자 작업자들이 하나 둘 용광로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버너 소음이 시끄러워 인부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군이 용광로 주물 방출구 근처에 있는 인부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군의 표정을 살피던 인부들이 제각기 입을 다물었다. 상의가 땀에 젖어 있는 인부가 방출구와 연결된 줄을 손에 잡은 채 예리하게 입구 쪽을 살폈다. 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부가 줄을 잡아당겼고, 방출구가 열리며 내화 벽돌로 제작된 홈을 따라 청동물이 주형 입구로 움직였다. 20초쯤 뒤엔 천 도가 넘는 뜨거운 청동물이 주형 안으로 들어갈 테고, 두 주쯤 지나면 주조물이 완성될 것이다. 작업을 지켜보는 군이 이마의 땀을 소매로 문질렀다. 청동물이 들어가는 걸 보니 작업의 막바지인 모양이었다. 주조 과정은 언제나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군은 청동물이 주형에 온전히 들어간 걸 확인한 뒤 피곤한 눈을 끔벅이며 병에게 다가왔다. 인부들이 수군대며 각자 작업대로 흩어졌다. 

  왔냐

  둘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도 작업실처럼 찜통이긴 마찬가지였다. 군의 책상엔 너저분한 서류들과 수북이 쌓인 재떨이 따위가 널려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로 지은 사무실 열기를 식히기엔 선풍기로는 역부족이었다. 병이 창문을 열자 어디선가 밤벌레들이 날아와 형광등 주변을 어지럽혔다. 병은 밤벌레를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들었다. 먼지인지 산 것인지 헷갈렸다. 군은 졸린 눈으로 마른세수를 거푸 해댔다. 

  얘긴 들었는데.

  뭘?

  운화공원.

  생각 중야.

  생각하고 자시고 뭐 있어.

  좀 전에 오토바이가 사람을 쳤어.

  새벽엔 흔해. 밤참이나 먹으러 가자. 

  병은 책상 모서리에 기댄 채 담배를 피고 있는 군을 쳐다봤다.

  왜? 

  작업 생각 안 나?

  뜬금없이. 

  한때 군도 작품을 내놓던 각가였다. 데뷔는 오히려 군이 먼저 했다. 군은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돼 동맥을 잘랐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매달리던 여자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군은 활동을 접었다. 재능이 없다는 게 이유였지만 여자가 이유일 거라고 병은 생각했다. 활동을 접고 나서 군은 작업실에 주조 공장을 차렸다. 의뢰받은 작품들은 군의 취향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청동 주조는 주문이 많지 않았지만, 군의 작업장은 입소문이 퍼져 일이 끊이지 않았다. 몇 년 사이 그는 공장을 넓혔고, 인부를 충원했다. 전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군의 얼굴은 검게 변하고 몸은 쪼그라들었다. 피부는 불길로 악어가죽마냥 갈라졌다. 군의 아내는 화가였다. 그녀의 그림은 평단에서 좋은 평을 못 받았다. 그림에 힘이 없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결혼 후부터 여자는 평단에 좋은 평을 들었으며, 상도 받았다. 클레멘터적 이미지로 가득한 그녀의 그림은 ‘생명의 여류화가’라는 명성을 얻으며 화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병은 모든 것이 군의 지원 덕이라고 생각했다. 셋은 대학에서 함께 만났다. 기억도 나지 않는 술모임에서였다. 둘이 합류했을 때 여자는 이미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병은 여자를 보며 드가의 무희를 떠올렸다. 여자는 깡마른 몸에 핏기 없는 병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늙은이 같았다. 그날부터 병은 여자를 마리라고 불렀다. 군은 여자를 세이렌이라고 불렀다. 여자를 본 이후부터 군은 세이렌에 홀린 오디세이의 부하라도 된 양 여자에게 헌신을 맹세했다. 병은 여자를 볼 때마다 군이 명을 끊어서라도 차지할 만큼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 속으로 되짚곤 했다.


  공업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시에서는 녹지를 내세웠다. 신도시 곳곳에 공원을 조성하여 전체 녹지 비율을 30퍼센트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이지만, 시는 그동안 끌어 모은 돈을 풀어 도시 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쪽으로 정책을 잡았다. 정부가 지지해 주고 있는 흐름이기도 했다. 녹지가 풍부해지면 신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가 방출한 예산은 빠른 시일에 다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지하철 노선이 인근의 시와 경합을 벌이다 확정되면서 도시 활성화 계획은 활기를 띠었다. 더욱이 공장이 득실거리고 공기가 오염된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시로선 일석삼조인 셈이었다. 공원뿐 아니라 예술성이 가미된 세련된 이미지도 덧붙이고자 시에선 지역 예술가들을 끌어모았다. 넉넉한 후원을 약속하며 작품을 의뢰했고, 병에게도 괜찮은 조건을 걸었다. 병이야말로 시의 사업과 잘 어울리는 조각가였다. 병은 공장이 밀집해 있는 지대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인근 후미진 빌라 지하에 작업실을 얻어 살고 있는 지역 예술가였다. 최근 몇 년째 병은 작업을 하지 않았고, 생활은 언제나 곤궁했다. 이번 작업이 병에겐 괜찮은 재기가 될 거라고 군은 확신하고 있었다.

  시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병은 자신을 추천한 이가 군이라 짐작했다. 시가 알아주기에 병은 무명에 가까웠다. 지역예술가협회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 조성에 대한 기사가 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시 공무원이 병에게 전화로 작품 의뢰를 했다는 건 누군가의 추천이 있어야 가능할 일이었다. 병의 동네에 오랫동안 방치된 넓은 공터를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담당자는 설명했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그는 병과 같이 유명한 예술가의 연락처를 자신들이 모를 수 있겠냐며 간사하게 웃었다. 지역민으로서 함께 사는 동네에 작품을 기증한다는 건 꽤나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그는 말했다. 병은 생각해보겠다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꽤나 집요한 공무원은 사례를 톡톡히 할 테니 작품을 꼭 좀 부탁하겠다며 물고 늘어졌다. 전화를 끊은 병은 머릿속으로 공원을 그려보았다. 재미없었다. 나무를 심고 잔디를 조성할 것이고, 산책로 주변에 화단을 꾸밀 것이다. 한편엔 똑같은 페인트로 칠해 영 멋대가리 없는 체육시설을 마련할 것이고 그나마도 비 몇 번 맞으면 녹이 슬 테고, 그런 조악한 공원에 드문드문 작품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러 나온 주민들은 작품 따위에는 그닥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터가 할애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인라인 연습장이라든지 분수 따위가 들어설지 모른다. ‘운화공원’은 조선조 유명한 유학자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라 했다. 어느 동네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공원이었다. 여인의 나체를 형상화한 조각품이 인기를 얻을 테고, 밤사이 누군가가 하도 쓰다듬어서 가슴과 성기 부위가 닳아 반들거리거나 염료가 떨어져나갈 것이다. 일부 조각품은 밤길을 떼로 몰려다니는 청소년들의 가방에서 꺼낸 붉고 푸른 락커에 희생될 것이고, 살림이 궁한 고철 수집가가 새벽에 흙을 파내 작품의 일부를 파손해가며 리어카에 몰래 담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난이 잦아지면 지역 신문 기자가 사설란에 무분별한 작품 훼손의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예술작품을 대하는 지역민의 수준을 향상시키며 아울러 지역문화 개선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자는 당부의 기사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의 증명사진과 함께 게재할 것이다. 한편으로 병은 이 작업이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원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놓일 수 있다는 것. 훼손되는 가운데서도 내밀한 자신의 열망은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어느 곳보다 많은 장소였다. 공원이 조악하면 조악할수록 자신의 작품 역시 무관심 속에서 방해받지 않고 그 자리에 놓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병을 사로잡는 건 은폐에 있었다. 가둘 수 있다는 것. 양손을 펼쳤다. 파르르 떨리는 손. 무엇도 만지지 않은 시간은 병의 손을 녹슬게 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삐걱거리는 금속성 소음이 귀를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군은 병이 왜 작업에서 손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군이 기억하는 병은 병약하고 조용했으며, 행동이 느렸다. 병은 여성스러운 남자였다. 그는 가냘픈 체형과 하얀 피부를 갖고 있어서 한눈에도 예민하고 감각적인 성격이라는 걸 드러내줬다. 그런 이유로 학교 때는 둘의 사이를 의심하는 시선이 많았다. 술을 마시면서 병은 자신의 보드라운 외모 때문에 몇 명의 남성에게 시달린 고충을 군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고 싶어 안달이 난 선임 몇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병은 중고등학교 내내 욕망의 대상이 된 남자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병은 육체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몸에 집착하는 거라고 군은 생각하고 있었다. 군이 해온 작품의 소재는 일관되게 육체였다. 혐오와 관조의 대상이 병의 작품 속에 보이는 육체에 대한 시선이었다. 육체에 대한 병의 관심은 삼촌과의 관계와도 이어졌다. 군이 병의 군대를 찾아가 둘이 술을 마셨을 때, 병은 욕망에 들뜬 고참의 눈빛에서 삼촌을 떠올렸다고 했다. 제대 후 병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 구상에 몰두했고, 원하던 대로 다음 해 공모에 입상해 신진 작가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현대작가전에 초대되기도 했고, 몇 년 전에는 군이 도움을 주긴 했지만 본인 이름의 작업실도 가질 수 있었다. 작가가 된 이후 병의 삶은 여유가 생겼지만, 오히려 활기는 사라졌다. 병은 무명 때보다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군은 병의 보드랍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떠올렸다. 


  병의 입선작은 만삭의 배였다. 병은 온갖 쓰레기를 떠서 채워 넣은 거대한 석고 배를 만들었는데, 여인의 불록한 배 군데군데 쓰레기들이 튀어나와 있는 형태를 묘사했다. 병이 뜬 쓰레기에는 개나 고양이의 사체와 먹다 남은 닭의 뼈, 돼지 껍데기와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배에는 남성의 성기를 형상화한 모양이 불쑥 튀어나와 있기도 했다. 작품의 제목은 하나같이 ‘품’이었다. 병은 몇몇 품 시리즈를 만들었고, 각각 다른 형태의 내용물들을 담아놓았다. 때로 책이라든지 사진을 뜬 형상이 배 위로 튀어나와 있기도 했지만, 대개는 잡다한 사물들이었다. 가장 최근 병이 뜬 ‘품’에서 내용물은 나와 있지 않았다.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병만 알고 있었다. 병이 말하지 않아도 평론가가 병의 작품에 다양한 미학적 해석을 달아줬다. 병이 배를 완벽하게 닫아버리자 오히려 더 좋은 평을 들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배의 이미지는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낼 여지가 많았다. 갖다 붙이면 무엇이건 의미가 되는 식이었다. 병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컬렉터도 늘었다. 개중엔 자신이 원하는 내용물을 넣어 주길 바라는 이도 있었다. 잘 활용하면 돈을 만질 수 있는 콘셉트였다. 하지만 이후 병은 더 이상 품 시리즈를 작업하지 않았다. 가끔 자신의 작업실에 들르는 것 외에 병은 외출을 하지 않는 듯했다. 군은 병이 한시라도 빨리 작업에 몰두했으면 했다. 자신의 재능 있는 친구가 그런 식으로 세월을 보내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라도 이번 운화공원 건을 병이 수락했으면 싶었다.      


  진짜 같았다. 그가 묘사한 인체의 손, 발, 가슴, 다리 등은 조각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물체를 움켜쥐는 손가락 관절의 단단한 악력이 감상자에게 전달되었고, 뭔가를 걷어차는 다리 형상의 종아리 근육에서는 핏줄이 돌며 피가 순환하는 듯했다. 그의 작품에는 보는 이의 시선을 강하게 흡입하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쓸쓸한 정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절된 인체의 팔 다리 목 들은 마치 있던 데로 돌아가길 바라는 듯한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각각의 인체 부분들을 연결하면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 될 것 같았다. 이런 이중의 인상으로 그는 평단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세계 유명 미술관들과의 전시 계약이 예정되었으며 각국의 매체들에서 인터뷰를 원했다. 영국 BBC 방송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조각가는 생각보다 젊었고, 자신이 조각한 조각들처럼 매력적인 육체를 갖고 있음이 수트 속에서도 내비쳤다. 그는 날렵한 턱선을 쓰다듬으며 자신은 어려서부터 인체의 움직임과 형상에 관심이 많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혼자 점토 따위로 모양 빚는 걸 즐겼다고 회상했다. 달변이었다. 예민하게 빛나는 눈빛과 감각적인 외모, 논리적인 언변, 연민을 일으키는 눈빛 탓에 그는 곧 유명 회사의 수트 광고 모델이 되었다. 그 달 지큐와 에스콰이어 지 표지 모델은 당연히 그였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도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이데아에 가까운 형상을 빚어내는 미남 조각가. 대중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였다. 전시는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의 전시에는 특히 젊은 여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기에 기획사에서는 인터뷰와 사인회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그의 작품이 프린트된 엽서와 도록은 불티나게 팔렸다. 사인을 받기 위해 하나같이 지갑을 열었다. 가히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조각가는 경찰에게 연행됐다.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은 상태였다. 경찰이 작업실 앞에 잠복해 있다가 새벽, 내린 비로 으스스해진 거리를 빠르게 걷는 조각가의 코트 자락을 낚아챘다. 다음 날 그에 관한 기사가 전 세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살해, 시체 유기 및 훼손 혐의였다. 조각가는 명성을 얻은 10년간 30구가 넘는 시체의 손과 발, 몸통을 절단했고, 잘린 손과 발 등을 뼈대로 해 그 위에 석고를 발랐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석고로 제작되었다. 경찰이 조각가의 작업실을 수색했을 때, 그가 개조해 사용해왔던 내밀한 지하 창고에는 다섯 구의 시신이 일부는 잘리거나 일부는 훼손되지 않은 채 눕혀 있었다.  

    

  로댕의 ‘청동시대’도 실제 인물의 원형을 떴다는 의혹을 샀던 작품이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인체에 가까웠기에 오해를 받은 것이다. 애인의 영감을 낚아챌지언정 로댕은 살인자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로댕은 자신의 손과 영감, 청동의 재료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로댕이나 살인자나 조각가로서의 열망은 같을 거라고 병은 생각했다. 감방 안에서 조각가가 꿈꾸고 있는 형상은 무엇일까. 비누나 작은 나무토막 따위를 깎으며 곤잘레스와 같이 허공의 삼차원 공간에 자신의 선을 드로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지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육중한 중량감과 흐물거리는 질감을 가진 오직 육체뿐일 거라고 병은 생각했다. 죽어 펄떡거리는 생명으로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고 싶은 열망에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떨리는 살인자의 손. 그의 손을 상상하는 병의 손이 가렵다. 병은 양손을 굵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시 담당자였다. 생각을 좀 해봤느냐 묻고 나서 그는 공원 조성 공사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덧붙였다. 공사는 넉 달 정도 진행될 예정이므로 선생은 그 안에만 작품을 완성하면 된다고 했다. 그에겐 공원을 짓는 데 필요한 잡다한 업무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병이 시간을 끌수록 그의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을 테니 한시라도 빨리 병이 승낙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병은 그와의 약속을 잡은 뒤 재킷을 걸쳤다. 종일 굶고 있었던 위가 쓰렸다. 병은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천천히 걸었다.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병은 현관문을 잠그고 난 뒤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은 뭔가를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왜?

  수화기 너머로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에선 구리, 주석, 아연, 납 등을 도가니에 집어넣고 엄청난 열을 가해 녹여대고 있을 것이고, 한쪽에선 정으로 주조물을 다듬고 있을 것이고, 한쪽에선 용접을 하고 있겠지. 군은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바삐 오갈 것이다.

  작업 하려고.

  잘 생각했다. 

  군과 통화를 한 뒤 병은 작업실에서 나왔다. 공사가 진행 중인 운화공원 터를 지나갈 때는 한참 지켜보기도 했다. 카페 문을 열었다. 여자가 웃었다. 병도 여자를 보며 웃어줬다. 며칠 전 여자는 최근에 스케치한 작품 몇 개를 병에게 보여줬다. 손과 목, 얼굴 주변을 둘러싼 무수한 잔뿌리들이었다. 여자의 그림에서는 생명력이 꿈틀거렸다. 병은 죽어버린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릿속에 이미지가 그려졌다. 병은 여자가 무엇 때문에 군과 자기 사이를 오가는지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안정과 동시에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군이 가져다주는 아버지 같은 편안함과 경제적 안정 위에서 자기와 위태로운 감각의 유희를 즐기고 싶은 것이 여자의 목적이라는 생각을 병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허공에 떠오르는 방법은 가면을 쓰는 것밖에 없음을 여자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병은 여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따스한 시선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위선인지 궁금했다. 자기는 도무지 그려낼 수 없는 줄기의 가늘고 생생한 뿌리들을 볼 때마다 병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의 병약한 몸을 바라보며 손이 움틀거리던 드가의 희미한 시선, 그 탐욕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 온기. 온기가 문제였다. 위선일지언정 병은 여자가 드러내는 미칠 듯한 온기에 감염이라도 된 것 같았다. 병은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갖고 싶었다.     

 

  마리가 작업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드가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마리가 있어야만 했다. 허둥지둥 발레교습소로 찾아간 드가는 마리가 교습소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잦은 결석이 이유였다. 마리의 집을 찾아간 드가는 그녀가 절도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마리의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그녀를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에 보내 춤을 추게 했다. 마리는 춤을 추다가 발레교습소에서 만난 돈 많은 후원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이 오른 후원자는 카바레 불빛에 놓인 마리가 꽤 아리땁게 여겨져 오늘 밤 그녀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후원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마리는 테이블에 놓인 지갑에 눈이 멀어 지폐 몇 장을 슬쩍 하게 된다. 멀찍이서 돈을 훔치는 마리를 본 남자는 마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경찰소로 간다. 몇 달 뒤 감옥에서 나온 마리에게 더 이상 발레교습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결국 세탁부 일을 하게 되지만, 세탁 바구니에 널린 하얀 천들은 마리의 머릿속에서 튀튀로 변한다. 마리는 세탁물을 부여잡고 춤을 추다가 감독관에게 매를 맞는다. 마리의 엄마는 드가에게 더 이상 그녀의 거취를 알려주지 않는다. 세탁물과 춤을 추는 일이 잦아지던 마리는 영원히 환각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에서 춤추는 마리. 드디어 마리는 영원히 그토록 원하던 춤을 추게 되었다. 


  병의 작품은 미술품만을 취급하는 특급우편물 차량에 의해 군의 작업실로 보내졌다. 군은 병이 보내온 작품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병은 기존 품 시리즈에서 쓰이지 않던 배를 감싸는 구조물의 청동 주조를 군에게 부탁했다. 병이 제작한 품이 군이 주조한 청동 판에 얹히는 식이었다. 병의 배는 철을 재료로 했으며, 철 조각들을 꼼꼼하게 용접하여 바느질로 꿰맨 듯한 인상이었다. 철로 감싸인 병의 품은 한층 단단하고 완강해보였다. 병은 군에게 작품을 보내겠다는 전화를 하면서 몇 년간 외국에 나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얘기해주지 않았기에 여느 때처럼 군은 짧게 응답했다. 이번에 제작된 병의 작품은 운화 공원의 개장을 알리는 공식 행사 때 특별히 설치될 예정이었다. 그 자리에는 다큐멘터티 팀이 합류해 일련의 과정을 찍기로 했다. 병의 작품이 청동으로 주조되는 과정은 다큐멘터리로 방영될 예정이었다. 장인과 예술가의 긴밀한 관계,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배의 이미지들이 병의 작품에 어떻게 녹여 있는지를 구성작가의 자극적인 글발을 통해 시청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화면의 마무리는 물론 운화공원의 한적한 터에 자리한 병의 품이었다. 

  병의 작품은 제1광장 축구장 옆 잔디에 놓일 예정이었다. 축구는 병이 가장 싫어하는 운동이었다. 병의 작품이 살아있는 유기체라면 평생 좋아하지도 않는 아마추어 운동선수들의 축구 경기를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도로 맞은편으로 전기를 낭비하며 물길을 내뿜고 있는 인공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공원 개장식이 시작되면 시의 유명인사들이 한 줄로 서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테이프를 끊을 것이다. 모두는 행사가 빨리 끝나길 고대하며 억지웃음으로 다 같이 공원을 둘러볼 것이다. 이윽고 병과 군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청동 주조물이 모두에게 공개된다. 다음 사회를 맡은 이가 작가로서의 병의 이력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병의 품 시리즈에 담긴 의미를 감정을 실어 전한다. 

  생명을 잉태한 따스하고 평화로운 배 이미지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와 같습니다. 작가의 ‘품’ 안에는 인류를 품어줄 희망적인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줄 운화공원의 이미지를 이 작품은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품’을 비롯하여 공원에 기증된 모든 작품들은 공원의 시작과 함께 영원히 이곳에 새겨질 것입니다.

  군은 여느 때처럼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다음 인부들을 불러 모았다. 먼저 구리와 주석 등을 녹이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한편에서는 거푸집을 제작할 것이고, 세밀하게 측량된 온도와 타이밍에 맞추어 병의 석고본은 청동을 입고 탈바꿈될 것이다. 군은 병의 작품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병의 새로운 품은 이전 것보다 한층 강한 느낌이 들었다. 만삭의 거대한 배의 조화로운 선감은 어느 때보다 생명이 느껴졌다. 군은 어느 때보다 병의 작품에 강한 애착을 느꼈다. 작품 자체가 병인 것만 같았다.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병의 작품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러면서 군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내를 생각했다. 병은 이번 다큐멘터리 촬영 인터뷰에 응했다. 미리 녹화된 병의 인터뷰는 행사 때 스크린을 통해 모두에게 공개될 예정이었다. 병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품을 통해 영원을 만지고 싶은 조각가의 결벽에 대해 자신감에 찬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병은 화면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조각가의 살인 행각은 여타 장르에서도 매력적인 소재가 되고 있었다. 할리우드 감독의 최신작에서는 조각가의 행위를 모방하는 소재가 이야기를 이루었다. 주인공의 직업은 조각가였는데 그는 날마다 여자를 유혹해 작업실에 데리고 간다. 잘생긴 외모와 매혹적인 말솜씨에 홀린 여자들은 대부분 그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멜랑콜리한 음악과 향기 좋은 와인에 취한 여자들은 남자의 손에 이끌려 작업실로 들어간다. 조각가의 작업실은 꽤나 외진 산길에 있는 네모난 잿빛 석조 건물이었는데, 어디선가 부엉이가 음습하게 울어대며 이곳에서 일어날 좋지 않은 사건을 예고하고 있었다. 조각가가 차를 몰고 산길을 올라가 건물 앞에 여자를 내려놓으면, 술에 취한 여자는 깔깔거리며 그의 작업실이 매우 판타스틱하다고 소리를 질러댄다. 남자는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자의 손을 잡아 이끈다. 이윽고 묵직한 문을 열고 조각가의 작업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어두운 작업실에 희끄므레한 달빛이 들어오면서 두 사람의 실루엣에 먼지 가루가 흩날리며 분위기는 더욱 긴장된다. 남자는 어두운 조도에서 여자를 향해 다가가고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의 키스에 취해 만족스런 표정으로 눈을 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남김없이 벗겨 어둠 속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나체가 드러난다. 이윽고 여자는 작업실 바닥에 누워 있고 두 사람은 황홀에 가까운 정사를 즐기게 된다. 장면이 바뀌면 나른해진 여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순간 머리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갑작스럽게 내려오는 정체 모를 액체는 여자의 살을 녹아내리게 하고, 여자는 괴기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다. 뜨거운 액체는 계속 흘러내리고 여자의 절규가 담긴 육체는 조각가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한낮의 전시실, 조각가는 그의 작품을 구경하러 온 많은 인파들에 둘러싸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 곳곳에 전시된 인체를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에는 각각의 제목이 지어져 있는데, 머리를 움켜쥐고 공포에 미쳐가고 있는 여인의 조각품에는 ‘공포’라는 작품명이 붙어 있었다. 날카로운 킬 힐을 신은 여자의 뒷모습이 조각품 앞에 멈춰 서 있고, 여자는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각가에게 다가간다. 여자의 뒷모습이 조각가에게서 멈췄을 때 카메라는 줌을 끌어당겨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먹잇감이 손아귀에 들어온 조각가의 야비한 미소가 남김없이 화면에 잡힌다. 행하는 자, 바라보는 자, 모두가 탐욕스러운 시선이었다.      


  축구장을 끼고 달리던 한 사내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조명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난 어떤 조각품에서 낯선 기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호기심이 생긴 사내는 작품 가까이 다가갔고,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쇠로 된 구의 틈새에서 무수한 뿌리들이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군은 공원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병의 작품에서 기이한 뿌리들이 돋아났다는 내용이었다. 

  뿌리요?

  그렇다니까요. 

  그럴 리가요. 청동에서 어떻게 뿌리가 나옵니까?

  그러니 기막힐 노릇이죠.

  군은 밀린 작업을 제쳐두고 공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뿌리라니. 도대체 쇠에서 어떻게 뿌리가 날 수 있단 말인지 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단히 봉인된 구에서 뿌리가 돋아났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은 병의 작품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군은 지금 어디쯤 날아가 있을까. 지금과 같은 상황을 군은 예감하고 있었을까. 군의 석고본을 청동으로 직접 뜬 사람이 자기인 만큼 누구보다 이런 상황은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병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병의 작품에서 뿌리들이 돋아났다는 말을 전화로 전해 듣는 순간 군은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분명 무언가로부터 놓여난 듯한 가벼운 기분이었다. 대체 이 기분은 또 뭔가. 그러면서 군은 아내가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서 열이 났다. 손가락이 가렵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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