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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Aug 07. 2024

타인의 손

타인의 손

  

  침대에 누워 있다. 모로 누워 있는 등 뒤로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거칠게 들리는 숨소리는 나를 안고 싶어 하는 그의 욕정을 느끼게 한다. 그가 나를 안을 때, 내가 그에게 안겨 있을 때 그는 대상이 된다. 나를 애무하는 그의 손이나 입의 감촉이 이물스럽게 느껴질 때 내가 대상이 되거나 그를 대상이 되게 하는 식이다. 도무지 성적인 상태에 달아오르지 않을 때 유두를 빨거나 엉덩이를 더듬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몸은 나무라든지 의자, 침대 위 또 하나의 침대와 같은 사물이 되어 버린다. 혹은 나를 애무하는 그의 몸에 대해,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어떤 사물이나 다른 누군가(자고 싶은 누군가)로 이미지를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나처럼 그 역시 그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내 살을 빌려 그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거나, 그의 페니스를 자극하는 성기구와 같은 사물이 되거나, 그의 단골 단란주점의 접대녀라든지 구애를 했으나 실패했던 과거의 그녀 혹은 연예인으로 그의 망상에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내가 하나의 침대에 누워서 온전히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날은 언제였을까. 우리가 만나 어느 새벽 들렀던 모텔에서의 첫 밤이었을까. 몇 번의 섹스와 한 번의 헤어짐 뒤 다시 만나 격앙된 상태에서 했던 섹스였을까. 우리가 온전히 서로를 원하던 때가 있기나 했을까. 가슴을 탐닉하는 그, 젖꼭지를 빠는 그의 입술과 그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내 몸의 반응은 혐오다. 그의 행위와 촉감보다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에서 상처를 받는다. 손을 뻗어 그가 내 몸을 돌리려 하지만 웅크린 몸을 풀지 않는다. 그의 탓만이 아니다. 상처의 기억들은 훨씬 이전의 것들이다. 기억들. 기억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명상을 하는 친구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받았던 고통을 기억해 냈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기억들을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어쩌면 자궁보다 더 이전의 느낌이라고 착각하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의식하지 못하는 어느 지점일 것이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상처로 기인하여 긴장을 풀지 않는 살과 기억의 맞닿음이다.    

   

  유년을 기억하면 쥐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고통사고를 당하고 난 뒤 유일한 재산이던 집을 처분하고 우리 가족은 가게가 딸린 작은 방에 세를 얻었다. 아버지가 퇴원을 한 후부터 두 분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빚을 갚으려면 남은 삶을 바쳐야 할 만큼 액수가 컸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갚기는커녕 빚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엄마는 잔소리를 했다. 두 사람은 술과 빚 때문에 언성을 높여 싸웠다. 방 하나에 식구 전부가 잘 수 없어 엄마는 창고로 쓰던 낡은 다락에 얇은 판자를 세워 반은 짐을 놓고 나머지 반에 요와 이불을 깔았다. 그곳에서 언니와 내가 잠을 자야 했다. 초등학생이던 우리의 작은 키로도 허리를 웅크려야 할 만큼 낮은 다락에는 아래에서 선을 끌어다 삼십 촉 전구를 달아 놓았는데 어두웠다. 전구 옆에 붙어 있던 스위치를 돌리면 등이 침침하게 껌벅이며 들어왔으며 주변은 언제나 희미하게만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금세 몽롱해져 몸이 절로 무너졌다. 낮에도 정리하지 않던 얇은 요와 밍크담요는 이사 가기 전까지 한 번도 빨지 않았고, 방청소를 하지 않았다. 스케치북 크기의 창문이 있긴 했지만 열기 위해서는 몸의 힘이 모두 소진되는 탓에 우리는 갑갑한 공기를 참는 쪽을 택했다. 여름엔 별 수 없이 힘을 쏟으며 약간의 비명과 함께 문을 열어야 했다. ‘날개’의 오가 자던 다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공간에서 우리는 쥐며느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일어났으며, 그런 탓에 몸은 개운하지 않았다. 식구가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은 뒤 숙제를 하거나 티브이를 보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우리를 향해 자러 가라고 명령했다. 언니와 나는 안간힘을 쓰며 방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 애쓰곤 했지만 어김없이 우리는 다락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다락에 올라가면 서로 벽 쪽에서 자려고 다툼을 벌였다. 바깥 편에서 자기 싫어하는 이유는 판자 너머에서 들리는 바스락거림 때문이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면 어김없이 판자 너머에서 요란하게 쥐들이 소리를 냈다. 발을 한 번 쿵 울려주면 소리는 사라지다가 잠시 후 바스락거렸고, 발을 굴러 다시 소리를 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졸음이 오기 시작하며 몸의 긴장이 풀리다가도 쥐들의 바스락거림이 두려워 발을 구르다 결국 기절하듯 잠이 드는 식이었다. 언니는 판자와 내 몸의 이중 울타리가 있었기에 나보다 먼저 잠이 들었다. 판자가 온전히 천정까지 가려주면 좋았으련만. 판자는 벽면을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3분의 2 높이였기에 언제든 쥐들이 우리의 잠자리로 넘어올 수 있었다. 쥐들은 실제로 넘어왔다. 어느 날 다락에 올라가 보니 우리 이부자리 위에 까맣고 작은 쥐똥들이 널려 있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이곳에서 잠을 청해야 했고, 어린아이는 의지보다 잠에 약했다. 한 번은 넘어왔지만 두 번은 넘어오지 않을 거야. 이런 식으로 위로하며 열심히 발을 굴렀다. 어느 날 아버지가 판자 너머에 쥐덫과 찍찍이를 놓았다. 다음 날 쥐들이 걸려들었다. 쥐들의 비명은 소름이 돋을 만큼 괴기스러웠다. 아버지는 그것들을 들고 내려가 바닥에 내려놓은 뒤 뜨거운 물을 부었다. 쥐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아버지는 재활용을 위해 찍찍이에 붙어 늘어져 죽은 쥐를 칼로 떼어냈다. 쥐의 꼬리 일부가 붙어 있었다. 다음 날에도 쥐가 덫에 걸려들었다. 찍찍이에는 쥐가 붙어 있지 않았다. 언니와 나는 다락에서 몇 번의 끔찍한 여름과 겨울을 보내고 난 뒤 그곳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방이 두 개 딸린 반지하 셋집으로 이사를 가면서였다. 이삿날 짐을 정리하고 부모가 가게로 나가고 난 뒤 언니와 나는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나누어 먹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피했다. 언니도 나도 새벽 내 뒤척였다. 볕이 안 들기는 마찬가지인 반지하방이긴 했지만 안전한 곳이었다. 잠을 잘 수 있어야 했다. 그날 밤, 우리의 몸은 다락에서 지내던 때보다 더 다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유순하던 언니가 변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언니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언니는 예전과 달랐다. 농담을 하거나 몸싸움을 하며 장난을 걸던 언니는 사라지고 앞머리를 길게 길러 눈을 가린 채 싸늘하게 주변을 노려보는, 한 마리 쥐로 변해 버렸다.   

   

  악몽을 자주 꾸었다. 어떤 손이 끌어다 낯선 공간 속에 집어넣는 꿈이었다. 알몸의 나는 손에 의해 들려져 어느 때는 욕조 안에 어느 때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공간 속에 갇혔다. 그곳은 다락보다 한결 안온한 느낌이었다. 쾌적하였고 나를 만지는 손의 감촉은 따스한 것이었지만 얼굴이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몽정이라도 한 듯 부끄러웠다. 그가 나를 탐한 것인지 내가 그의 손을 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따스한 손을 탐했다는 나의 욕망이 부끄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그런 꿈을 꾸었다. 손은 한사코 나를 어떤 공간 속에 알몸인 채 밀어 넣었고, 나는 저항하지 않은 채 순순히 몸을 맡겼다. 저항과 친숙하지 않았다. 견디는 편이 내게는 마음이 편한 쪽이었다. 어느 때 그곳은 아주 낯선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다가도 어느 때는 아주 친숙한 곳이기도 했다. 반복해서 꿈을 꾸다 보니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 다락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다락에서 나는 옷을 벗고 나를 범할 쥐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매일 밤 나의 존재를 조금씩 갉아먹던 쥐들. 퀴퀴한 냄새와 눅진한 이불 속에서 나를 기다리던 습기 머금은 불안은 어느 사이 꿈속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언제까지 다락에 기어 올라가야만 꿈을 꾸지 않는 것인지, 쥐들의 습격을 받을 것만 같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다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공간 전부가 다락 같았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단상 전광판에는 대형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사진 속 사람은 죽었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분위기는 축제에 가까웠다. 밴드가 나와 열정에 가득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풍선을 든 무리들이 그를 환호하고 있었다. 한때 나도 광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광장에 모여들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두려워진 것이다. 무리 속에서 내가 본 것은 하나 됨의 불가능이었다. 한 가지를 이구동성 외치고 있었지만 각자가 원하는 것은 각자에게 이익이 되는 만큼 달랐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거나 보다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에 가깝지 않았다. 하나가 되자고 애타게 외치는 사회자의 바람처럼 되지 않았다.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를 서로는 어떤 단단한 것에서 억지로 찾으려는 듯했다. 모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것은 의심이 적을 때가 아닌가. 의심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무리에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해지던 자신을 회상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긍정이라는 것이 부정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결국 위선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결여된 것은 꽤나 쓸쓸한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칠 즈음 지인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유리창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들의 열기 띤 울음에 장단을 맞추어줄 나의 광기가 없음을 느끼며 힘없는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창밖의 사람들은 즐거워보였다. 손을 흔드는 친구들 뒤편으로 소년 하나가 피리를 불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쥐들의 행렬이 보였다. 모두 쥐 모양이 그려진 피켓을 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밀려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만두 익는 냄새가 났다. 출출하던 참이었다. 멀리서 친구가 보였고 그의 옆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여자를 친구는 예전부터 내게 소개해주고 싶어 했다. 한때 내가 글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는 글을 쓴다는, 혹은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만나는 자리가 어떤 의미라도 있는 듯 생각하고 있었다. 첫인상부터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숱이 없는 머리카락을 반쯤만 핀으로 꽂은 머리 모양부터 융통성 없는 성격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깡마른 체구에 웃을 때마다 눈가와 입가에 지는 주름, 핏기 없는 얼굴은 그녀의 현재 삶이 위태롭다는 걸 드러내는 것 같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안했다. 우리는 포장을 드러내 재공사가 한창인 울퉁불퉁한 보도를 걸어갔다. 어둠이 드리워진 너머로 잿빛구름이 천천히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올 기세임을 구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금요일 오후라 우리가 택한 술집은 붐볐다. 꽤 넓은 홀에 사람들이 들어차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주문했다. 예전에 내가 시를 배운 적 있는 어느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고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좋아하는 그 시인은 10년 전 세상을 떠난 원로시인이었는데, 나는 시인의 시가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쓴다는 시에 대해서조차 호기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시라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고 잘 쓰지도 못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오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빠른 속도로 맥주를 비웠고 친구는 최근 읽기 시작한 어느 사상가에 대해 말했다. 친구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사상도 공허한 것은 아닌지 회의했다. 우리가 택한 술집에서는 그날 밴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생각보다 흥미가 가지 않는 밴드가 공연을 하였으므로, 우리는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바람이 아까보다 세게 불었다. 편의점에 잠깐 앉아 담배를 나누어 폈다. 우리는 가을산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구와 여자가 오래전부터 여행을 함께하는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의 조용한 여행, 권태에 가까울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권태에 가까울 여행은 나 역시 친구들과 종종 하는 여행의 형태인데, 지나고 보면 그 권태에 가까운 여행이 마치 권태롭지 않은 여행처럼 기억되는 것을 기억해 냈다. 기억보다 더 권태로운 여행을 권태롭지 않게 은폐하는 것은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 여행의 기억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지만 사진 속 표정을 보면 풍경과 어우러진 탓인지, 여행의 권태로움을 숨기고 싶은 탓인지 몹시 흐믓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란 그렇게 미화되거나 비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여자가 가방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자신이 쓴 시라고 했다. 나는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여자의 첫인상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짓거리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말없이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었고, 우리는 또 다른 술집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하 카페에서 연주하는 어느 밴드의 공연에 우리는 유쾌해져서 이전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여자는 친구와 나보다 빨리 술을 마신 탓인지 취기가 온 듯했다. 창문이 모두 열린 술집에서 우리는 바람 소리에 섞여 비벼대는 풀잎 소리를 들었고, 나뭇잎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데 수긍했다. 잠시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제법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어서 우리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예정보다 술을 좀 더 마시기로 했다. 이야기 도중 우리는 우연치 않게 여자가 아는 한 사람이 내가 아는 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면서 전보다 친밀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친밀감이라는 것이 실은 그리 친밀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 여자와 내가 동시에 아는 친구의 절친이 내게는 몹시도 안 좋은 기억을 준 친구였다. 또한 여자와 내가 동시에 아는 친구 역시 여자에게 어떤 안 좋은 기억을 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안 좋은 기억을 주었다는 것은 여자와 친구, 나와 그 친구의 친구 사이가 예전에는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했다. 그 돈독함이란, 어찌 보면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고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도 순전히 착각일지 몰랐다. 어쩌면 친구보다 더 가까운 누군가가 절실하였기에 혼자서만 그렇다고 오랜 시간 생각해 온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반갑지 않은 느낌이 이유를 찾은 듯했다. 여자가 묻혀서 가지고 온 바람이 내 잎사귀에 부딪혀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취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간 사이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우리는 비를 맞으며 술집에서 나와 지하철 입구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우리는 택시 안에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후 헤어졌다. 나는 여자에게 잘 들어갔느냐는 문자를 남기고 잠을 잤다. 다음 날 깨어난 나는 가방을 열어 전날 여자가 준 봉투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가방에 넣어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하여 가방을 통째로 흔들어 쏟아냈지만 여자가 준 편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난감한 기분이 들어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마치 시를 읽은 듯 둘러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솔직하게 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은 좋은 방법 같지가 않았다. 여자를 아예 만나지 않는다면 회상을 막는 건데, 막으면 막을수록 기억 바깥으로 잠입해 들어오는 것이 회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며칠 뒤 여자가 그린 것이라며 친구가 그림 한 점을 보내줬다. 하늘과 사막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하늘과 사막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내 친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 친구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내 친구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어쩌면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처럼 그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친구의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에는 언제나 흑백사진만 찍혀 있었다.   

   

  막차에 올라탄 사내는 잔뜩 취해 있었다. 어두운 버스 안에서도 남루함이 눈에 들어왔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탓에 늙은 사내의 뒤통수가 훤히 보였다. 머리카락이 번쩍거렸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염색을 하고 있었다. 사내의 뭉툭한 손은 염색약을 퍼 머리칼에 바른 뒤 약통에 붙어있는 빗으로 쓸어내리는 데 열심이었다. 검은색으로 염색을 하고 있었는데, 약을 많이 바른 탓에 얼굴의 절반가량 약이 묻어 머리칼과 함께 염색되고 있었다.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염색에 몰두해 있었다. 머리칼과 함께 염색된 사내의 절반쯤의 검은 얼굴은 어둠을 뒤집어쓴 듯 보였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와 나머지 반까지도 염색해 버려서 사내의 얼굴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사내가 염색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막차에 탄 사람들은 대개 취해 있거나 피곤해 잠에 곯아떨어지니 이상한 사람의 등장에 관심도 없고 기미를 눈치 채지 못한다. 막판 버스는 대개 취객이 타고 있어 악취가 코를 찌르는 형국이어서 사내의 염색약 역시 그저 악취의 한 종류로 스며들 따름이었다. 한 통의 염색약을 남김없이 머리에 바른 사내는 염색에 사용한 머리빗을 머리카락에 쑤셔 박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렴그렇지그러고말고한오백년사자는데왠성화요. 아무렴그렇지그러고말고한오백년사자는데왠성화요. 염색을 바르는 것만큼이나 사내의 노래는 반복되었다. 그의 반복은 버스에 내릴 때도 끝나지 않았다. 노래는 사내가 내리는 지점에서 사라지거나, 누군가의 강한 저항에 의해 사라지거나, 그가 소멸되기 전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늙은 사내를 염색약 속에 집어넣은 처음의 손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그런 생각은 버스에서 내리고 집으로 바삐 걸어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나 흘깃 떠오르다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손이 엄마의 뺨과 가슴과 배를 내리치고 난 다음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간 적도 없으니. 아버지 역시 어디선가 버스에 올라타서 시커먼 어둠을 쳐 바르고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아무렴그렇지그러고말고한오백년사자는데왠성화요. 아버지의 손이 나에게 들켰을 때 엄마가 말했다. “나가라.” 아버지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간 적도 없으니.    

 

  사장이 한 뭉치 원고를 들고 나온다. 이거. 사장은 워드를 칠 줄 모른다. 원고지에 써온 글들은 다음 달 실릴 비평들이다. 그의 평에 따라 작가들은 희비가 엇갈린다. 괴발개발 원고지에 끼적인 사장의 문장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눌한 글씨체에서 받침은 날아가 있고, 밑줄로 그어진 글들은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기 쉽지 않다. 워드에 친 글을 출력해다가 사장에게 넘겨주면 그는 자기가 쓴 원본과 대조하며 다시 고친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장은 방에서 나와 내 옆에 붙어 서서 컴퓨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틀린 지점을 가리킨다. 틀린 지점을 가리켜야 한다. 사장의 눈은 틀린 지점에 있지 않다. 선풍기가 휘휘 돌아가지만 컴퓨터 열기를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늘어난 사장의 목 주변에 땀이 흥건하다. 사장의 배가 책상을 건드리며 물컹한 살의 흔들림이 느껴진다. 틀린 글자를 고치기를 재촉하는 사장의 목소리와 사장의 눈은 따로 논다. 그의 시선은 셔츠 안 내 가슴 선에 있다. 타자를 칠 때마다 흔들리는 내 목 주변에 있다. 눈을 파고들 것 같이 넘치는 살 속에도 사장의 탐욕스러운 눈매는 타자를 치는 내 가슴께를 더듬는다. 수정된 원고를 읽어나가는 사장의 눈, 가슴을 파고드는 사장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다.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오래된 습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사장은 자주 쓰는 단어를 틀린다고 화를 낸다. 다시 고치라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도 그의 시선은 가슴에 있다. 여럿이리라. 이곳에서 사장의 원고를 치다가 사장의 시선을 눈치 채고 불쾌와 모멸에 치욕스러워하다가 월급이 나오는 즉시 박차고 나갔으리라. 저명한 대학교수이자 비평가인 그를 찾아오는 예술인들은 사장의 원고 뭉치를 두려워한다. 가슴을 향한 사장의 시선을 째려본다. 사장의 멍청한 눈이 그제야 화면으로 돌아간다. 개새끼. 그는 내가 가방끈이 조금만 길었어도 비평가로 키워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가방끈이 조금만 길었어도. 사장은 혼자 점심을 먹는다. 용무가 없거나 약속이 없을 때 그의 점심은 대개 도넛이다. 큼직한 도넛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들고 구석에 틀어박혀 게걸스럽게 먹는 게 사장의 유일할, 즐거움이다. 당뇨에 걸린 그에게 최고의 선물은 도넛이다. 많이 먹어. 먹고 빨리 죽어. 그만둬야지. 그만두면 수가 있나. 카드값은, 월세는, 학자금대출은. 가방끈이 조금만 길었어도 도넛을 잔뜩 사다가 사장에게 안겨주고 비평가로 등장할 텐데. 그러면 그는 먹고 죽을 텐데. 책장 가득 오래된 책들이 쌓여 있다. 롤랑바르트, 수전 손택, 유진 오닐, 베케트의 유령들이 표지에서 웃거나 인상을 구기거나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늘어진 사장의 몸에서 비곗덩어리 냄새가 난다. 시선은 여전히 가슴에 있다. 카드값, 월세, 대출, 씨팔. 안경을 벗어 쓰레기통에 내던진다. 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어안이 벙벙해진 뒤룩뒤룩 살찐 쥐를 바라보며 나는 미친년처럼 배시시 웃으며 타자를 친다.     

 

  새벽, 응급실 침대에 드러누운 나를 향해 간호사가 걸어와, 속목에 그은 상처를 보고, 침대 주변에 커튼을 치더니, 의사를 기다리는 짧은 사이, 벌레를 쳐다보듯, 혐오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한다. 미친년아 이 정도로 죽을 것 같냐. 담엔 망설임 없이 확 그어버려! 졸려죽겠는데 씨발. 잠시 뒤 마네킹 같이 딱딱한 몸짓의 레지던트가 와서 팔목의 상처를 힐끗 보고는 다섯 바늘쯤 꿰매어야겠다고 말하더니 차트에 단어 하나를 갈겨쓴다. happening. 그가 묻는다. 이런 경우 정신과 상담을 권유해야 하는데, 하시겠어요? 당연히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의사가 다시 묻는다. 언제든 상담을 받아야 합니다. 강제로 끌려가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나 이성적인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네에.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뻔한다. 병원에서 보호자를 찾는다. 하는 수 없이 헤어진 너에게 전화를 건다. 자다 왔는지 너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차 있다. 너 같은 년이 젤 싫은 거 알아? 구질구질하게. 붕대를 맨 손목을 부여잡고 우리는 여관으로 향한다. 해프닝을 벌이기 위해서.     


   해프닝(happening)

  「명사」

  「1」우연히 일어난 일. 또는 우발적인 사건. ‘우발 사건’, ‘웃음거리’로 순화.

  「2」『예술』미술, 음악, 연극 따위에서 예술의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에 우발적이고 유희적인 행위(일종의 퍼포먼스)를 연출하여 감상자를 예술 활동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표현 방식.     


  퍼포먼스(performance)

  「명사」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의 실험에서 장르 간의 벽을 넘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새로운 형식의 탐구에서 시작된다. 음악, 연주, 무용 같은 공연예술(perfoming art)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정해진 계획이나 대본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으며 즉흥적, 우연적 요소가 개입되기도 하는 행위와 상황 창조의 총체적 형식이다. 미래주의, 다다이즘에서 주로 실험했으며 1950년대 미국에서 ‘해프닝(happening)'이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되어 여러 형태로 변모하면서 지금까지도 실행되는 서구미술의 주요한 형식이다.     


  나는 손목 긋기라는 퍼포먼스를 현실이 아닌 무대, 혹은 어떤 공간에서 시도하고자 했으나 그것은 섹스라는 해프닝으로 끝나버린다. 손목을 긋기는 했으나 그것이 나였는지 단정할 수 없다. 그었을 때의 나와 그었다고 기억하는 나와의 단절만큼이나 차트 속 해프닝을 행위한 나는 지금의 나와 같지 않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나와 섹스를 한 네가 누군지 모른다. 당신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만들었으니까.      


  대부분의 불행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시작된다. 어째서 그들은 당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좋아해 놓고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미워하는가.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을 때마다 불안은 어김없이 온다. 좋아한다. 집착한다. 반응이 없다. 거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좋아한다고 착각한다. 반응이 없다. 화를 낸다. 미워한다. 괴롭힌다. 저주한다. 거절을 하지 못한 상대를 향해 주변의 비난이 쏟아진다. 내가 좋아하니까 얼른 내려와. 어디로? 내가 원하는 이 자리로. 싫다면? 싫다고? 불안하다. 불안하다. 좋아한다는 착각으로 이러한 서클은 돌고 돈다. 손은 폭력적이다. 우리의 손은 타인을 끌어다가 자기가 갖고 보고 만지다가 버리기 좋은 장소에 놓는다. 상대를 안아주거나 보듬어줄 때조차도 손은 이후의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 여념이 없어 보인다. 멈춤 없이. 사랑 없이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민지 알아? 엄마가 그랬다.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취한 목소리로 사랑 없이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고. 언니가 술에 취해 울부짖었다. 넌 우리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어. 넌 너만 사랑했어. 언니는 쇼핑 중이다. 이 상점 저 상점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쇼핑을 위해 돈을 벌고, 쇼핑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집에 돌아오는 언니의 가방 안에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다. 쇼핑을 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결핍이 없다. 사야 할 무언가만 있다면 엄마라도 팔리라. 그녀의 결핍은 돈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만 같다. 상점이 없는 도시를 벗어나는 것을 그녀는 상상할 수 없다. 그녀의 집은 그녀가 상점에서 매일 사가지고 온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물건들의 대부분은 다시 구매 취소가 될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홈쇼핑을 살피며 구매할 물건을 고른다.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그것’과 같다. 그녀가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택배기사가 어김없이 물건을 배달해온다. 배달된 물건 역시 대부분 반송한다. 쇼핑을 하러 나가는 언니의 손에는 교환과 환불을 원하는 물건이 들려 있다. 물건을 주문하고 취소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언니가 쇼핑할 곳은 점점 줄어든다. 홈쇼핑과 백화점에서 작성한 블랙리스트에는 언니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기록되어 있다. 언니는 내 이름과 카드를 도용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신용불량자가 된 지 오래다. 엄마가 내 명의를 훔쳐다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카드사에서는 막달에 어김없이 독촉 전화를 건다.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의미가 없다. 언니는 이제 쇼핑을 하러 멀리 간다. 쇼핑을 위해 돈을 벌다가 일자리가 없어진 언니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아저씨를 사귄다. 밤마다 남자의 차가 집 앞에 언니를 내려준다. 날렵하게 빠진 쥐색 외제차. 운전석에 탄 쥐가 언니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린다. 자기 물건이라는 표시인가 보다. 계단을 오르는 언니의 손에 쇼핑백이 들려 있다. 늙은 쥐는 돈이 아주 많은가 보다. 늙은 쥐가 사준 옷들을 언니 몰래 훔쳐 입는다. 


  여자의 손은 먼저 어깻죽지와 양 허리를 교차해 누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손 가득 오일을 묻힌 뒤 등 전체에 골고루 묻힌 다음 두툼한 두 손으로 등 전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이어서 갈비뼈를 중심으로 등을 이등분 한 뒤 어깨 등 가운데 부분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를 차례로 마사지한다. 한 손을 꺾어 등에 올린 뒤 어깨에 골고루 붙어 있는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다른 부위도 같은 방식으로 풀어준 뒤 목을 꼼꼼하게 주물러준다. 마지막에는 양손으로 등 전체를 부드럽지만 강하게 손바닥을 이용해 쓰다듬는다. 안마가 끝나면 뜨거운 타월로 등을 덮은 뒤 오일을 꼼꼼하게 닦아준다. 돌아눕게 한 다음 여자는 뜨거운 타월로 얼굴을 감싸준 뒤 피지를 짜주고, 솜털을 기계로 제거해주고, 에센스를 바른 다음, 상체를 덮은 이불을 거둬낸다. 따듯하고 기름기가 덜한 물기 가득한 오일로 여자는 먼저 쇄골과 어깨를 만지고, 양쪽 유방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이어서 팔뚝과 겨드랑이 부분을 풀어주고 가슴선을 눌러 긴장을 풀게 한 다음, 유방을 다시 한 번 마사지한다. 이어서 머리를 좌로 돌려 목선과 목 뒤를 매만지고 우로 돌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목을 풀어준다. 목을 푼 다음 여자는 주먹을 쥔 손으로 등에 손을 넣어 반복적으로 어깨를 눌러주며 어깨의 근육과 뭉친 긴장을 풀어준다. 다시금 쇄골과 어깨 가슴을 마사지한 뒤 뜨거운 타월로 몸통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팔을 들어 올려 물기를 닦아낸 다음 이불을 덮어준다. 다음 작업은 얼굴. 여자의 손은 이마와 팔자주름의 주름을 완화시켜주기 위해 반복적으로 눌러주고, 양 볼을 빠르고 민첩한 손가락 놀림으로 얼굴 피부에 탄력이 생기도록 반복적으로 마사지한다. 얼굴 마사지가 끝나면 여자는 손님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주고 반죽을 해서 얼굴 전체에 팩을 올린 다음 이불을 걷어낸다. 다음은 복부다. 여자는 주먹을 쥔 손등으로 배의 위 아래를 눌러가며 밀어준 다음 원을 그리며 오일로 유연해진 피부를 둥글게 밀며 쓰다듬어준다. 배를 주무르는 가운데에도 여자의 손은 음모에 닿거나 가슴을 건드리기도 하지만, 그래서 손님을 묘한 황홀감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여자의 손놀림, 노동의 일부다. 여자의 작업은 언제나 같은 방식, 같은 시간 안에 이루어질 만큼 숙련이 되어 있으며, 손님의 등, 가슴, 복부, 다리를 매만지는 손의 놀림, 누르는 강도, 마사지하는 방식은 각자의 피부 상태, 체형 등에 따라 조절이 가능한 듯하다. 여자의 손은 손님이 원하기만 하면 몸 전체를 마사지해줄 수 있다. 여자는 언제나 여자만 마사지해주는 듯하다. 그 마사지 숍에는 남자 손님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여자만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마사지 숍에 남자를 들이면 퇴폐 업소로 적발이 되어 영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 침대에 누우면 누구나 대상이 된다. 여자의 손에 의해 주물러지고 매만져지는 살덩어리가 된다. 여자는 그곳에 누운 누구에게도 애정을 갖지 않는다. 여자의 정성은 손님이 불평을 하지 않기 위해서만 세팅되어 있으며, 딱 그 정도로만 온기를 담는다. 온기 역시 여자의 손바닥과 대상의 피부 마찰로 인해 생긴 생리적 현상이다. 간혹 말이 많은 여자들이 드러누운 상태로 끊임없이 자신의 신변잡기에 대해 늘어놓거나 자랑질을 하지만, 여자는 친절한 말투로 대답을 할지언정 관심 따위는 없다. 여자가 손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대개 정해져 있다. 일을 계속하기 위해, 손님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자가 취하는 최소한의 친절. 대화의 문장은 서너 마디 정도. 손님의 몸을 관리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내어주는 여자는 손을 제외한 나머지에, 손조차도 그다지 손질을 하지 않는 듯하다. 여자의 얼굴과 손바닥에는 잔주름과 굳은살이 잡혀 있다. 여자는 휴무일인 단 하루를 제외하고 하루에 많게는 열다섯 명, 적게는 열 명 정도 여자들의 몸을 만져야 한다. 탱탱한 유방, 말라비틀어진 유방, 살이 늘어진 허벅지, 튀어나온 뱃살, 실핏줄이 드러난 마른 다리, 누를 때마다 비어져 나오는 허연 피지, 여드름. 먹고살기 위해 그 여자의 손은 만짐을 택한다. 단 하나의 은밀한 몸을 위해 여자는 나머지의 만짐을 손에 내어준다. 아주 가끔 여자의 손길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물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순간이 있다. 오래 방문한 횟수에 비례하여 그 착각의 순간은 몇 번 느껴진다. 하지만 언제나 흘러나오는 같은 곡의 명상곡처럼 여자의 손은 물리적으로 흘러간다. 일련의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그 찌릿함 역시 테크닉의 하나일 뿐. 대부분 착각의 순간은 회원의 마지막 남은 액수, 그러니까 다시 카드를 내밀어 새로 마사지 값을 치러야 할 즈음이다. 손님을 마무리하고 난 뒤 여자는 세면대로 가서 손을 빡빡, 가죽이 벗겨질까 봐 걱정스러울 만큼 거칠고 신경질적으로 씻는다. 여자가 말한다. 해봐.      


  엄마의 불행은 언니를 낳으면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언니의 불행은 엄마의 딸로 태어나면서부터인지 모른다. 아빠의 불행은 자기가 지금 무슨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르면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빚쟁이들의 멱살잡이를 피해 아빠가 사라진 이후, 엄마와 언니는 노골적으로 원망을 드러내며 싸우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있는 엄마의 등 뒤로 술에 취한 언니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다투기 시작한다. 두 사람에게 풍기는 술 냄새의 종류가 다르다. 엄마는 라면을 하나 끓여 안주 삼은 채 소주를 마시고 있고, 언니는 쥐새끼가 사준 맥주와 양주를 섞어 잔뜩 마시고 등장했다. 언니의 술 냄새가 더 역하다. 향수 냄새와 뒤섞여 얽히고설킨 복합적인 냄새를 풍겨댄다. 매장에 종일 서 있는 언니의 스타킹 신은 발에서 나는 냄새도 역함을 더한다. 엄마는 언니의 압도적인 등장에 화가 더 치솟는다. 난 네가 싫어. 너 땜에 네 아빠랑 못 헤어졌어. 그게 왜 내 탓이야.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 결혼이 뭔지 알아? 왜 알아야 하는데? 주기적으로 몸을 주는 거야. 네 년들을 키우려면 내 몸을 줘야 하는 거야. 알아? 하기 싫어도 몸뚱아리를 내어줘야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다고. 내가 네 아빨 벌레 보듯 하니까 그 새끼가 너한테 집착하더라. 그런 게 부성이란 거다. 부성이 그런 거야. 이년아. 알기나 하냐? 그런 얘길 왜 하는데? 그게 내 잘못이야? 아빠가 그런 거 알게 뭐야. 엄마 노릇 좀 제대로 해. 딸한테 그게 할 소리야? 넌 왜 그렇게 살았는데? 싫으면 도망을 가든지 이혼을 하든지 할 것이지 왜 그렇게 살았냐고? 네 인생을 왜 그렇게 막 굴렸는데? 언제까지 신세타령만 할 거야. 네가 너 자신을 돌봤어야지. 우리가 이렇게 된 건 엄마 네년 책임이 커, 알아? 이년이, 그게 이제껏 키운 애미한테 할 소리야? 그럼 술을 처먹지 마. 그러는 네년은 왜 만날 술인데? 어서 조폭 같은 새끼랑 돌아다니고 술만 처먹고 며칠 들어오지도 않고. 쥐새끼 같은 새끼보단 낫잖아. 넌 만날 아빠한테 쥐새끼라고 했잖아. 조폭 같은 새끼가 어때서? 내가 얼마나 도망가고 싶었는지 알아? 그래도 네년들 땜에 꾹 참고 살았다고.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새끼들 키워 뭐 해. 네가 이러니까 내가 더 집구석에 들어오기 싫은 거야. 이년아 좁아 죽겠는데 만날 물건이나 쌓아놓고 지겨워 죽겠어. 다 싸들고 나가버려. 안 그래도 나갈 거야. 지겨운 집구석. 지겨운 집구석. 지겨운 집구석. 엄마가 마시던 소주잔을 언니를 향해 던지면 언니는 맹렬하고 표독스러운 쥐의 눈빛으로 변해 노려보고는 방문을 닫는다. 방문이 소리 나게 닫히면 엄마가 술을 아까보다 더 급하게 마신 다음 취해 울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서로 만지고 싶어 하는 걸까.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을까. 어딘가 서로 닮은 느낌이 들었을 때였을까. 너를 만지면 남루하고 외로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아서일까. 뭔가를 주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받고 싶어서일까. 어느 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술을 마셨고, 조금 즐거워졌다가 이내 우울해지기도 했다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문득 키스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입술이 닿다가 잠시 뒤에는 혀가 너무도 깊숙이 들어가서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우물 같은, 끝나지 않아 시간을 놓아버린 듯 긴 키스를 우리는 나누었다. 나는 너의 손을 잘라 나를 탐하고자 하는 너의 욕망을 내 몸에서, 나의 감은 눈으로 대신했다. 이제 나를 만지지 못하는 너의 손을 대신해 너의 몸을 만진다. 너의 머리카락, 이마, 코, 입술, 턱, 턱에 난 수염, 귀, 귓불, 목, 쇠골, 가슴, 팔, 조금은 튀어나온 배, 허벅지, 딱딱하게 서지 못한 페니스, 털이 수북한 종아리, 울퉁불퉁한 발가락. 내가 너를 만질 때마다 너의 페니스는 한없이 작아졌고, 너의 몸은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자른 너의 손을 너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내 손을 잘라 너에게 준 뒤, 마주하지 못하는 너를 위해, 그러한 착각으로 눈을 감고 배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너의 손이 아니야. 안심하고 이제 나를 만져봐. 너는 몸을 떨지만 여전히 나를 만지지 못한다. 잠시 후 너는 담배가 피고 싶다며 그만 나가자고 한다. 우리는 뒤를 돌아서서 옷을 입는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유리문을 연다. 몇 걸음 걸은 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산 뒤 한 대씩 나누어 피고는 가로등이 일렬로 서 있는 길을 걷는다. 가로등 옆으로 가로등보다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가로등 수보다 더 많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가로등 때문에 반쯤 윤곽이 드러나는 나무를 지나쳐 그림자로만 드러나는 먼 나무를 바라보며 걷는다. 나무는 어둠을 먹고 한 뼘씩 자라는 것 같다. 어둠이 빚어낸 나무를 바라보며 걸어간다. 지나가는 이가 아무도 없는 거리는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날은 선선하고 조도가 희미한데다 가로등보다 키가 큰 나무가 늘어선 길, 그 옆으로는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오랜 세월의 상처를 덧대고 있는 담이 있다. 나무와 불빛과 돌의 기운이 우리를 조금 진정시킨다. 서늘한 새벽 공기 덕에 우리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릴 수 있고, 약간 쑥스러운 기분과 함께 조금 ‘나아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의 무게를 느끼며 얼굴에 드리운 그늘과 새벽을 지새우느라 피로에 눌린 표정을 흘낏 훔쳐본다. 손의 감촉, 지워지지 않는 감촉, 상처. 상처를 나눈 우리는 언제 헤어져야 할지 모른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다. 내가 먼저 가는 게 나을 거야. 내일은 만나지 말자. 내일 너는 나를 원망할지 몰라.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을지도 몰라.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한때 서로의 손을 염려해주던 우리가 지금은 서로의 손을 도구로 하고 있다는 것이. 탐욕스럽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유희를 위해 상대의 살을 찢고 발가벗기고 흐물거리고 꿈을 방해하고 저주하고 미워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나의 불행의 모든 원인이 너의 손 때문이라는 듯이 그 손을 밀어내고 혐오스러워하고, 할 수만 있다면 잘라서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리고 싶다는 것이. 결국 우리가 만진 건 살의 온기가 아니라 발기, 섹스라는 딱딱하고 차가운 물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너의 손은 나에게 불안이 되어버리고, 나의 손은 너에게 불안이 되어버리고. 말테가 어릴 때 본 벽에서 나온 비쩍 마른 손, 어두운 책상 밑에 손을 내밀어 더듬어 연필을 찾다가 닿은 촉감에 소스라치게 놀라 평생 잊히지 않은 불안으로 스며든 그 손처럼. 너의 손은 나의 상처를 불러와. 나의 손은 너의 상처를 불러와. 이제 알겠지. 이제 우리는 서로 만질 수가 없다는 것이. 이것만은 모욕하지 말아줘. 다른 건 아무려나 좋아.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만나지 않을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어차피 우린 만난 적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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