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손
1
이름이 없다고 했다. 이름이 없을 수는 있어도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이름을 알려달라고 조르자 이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해줬다 치자. 오늘이야 기억하겠지. 며칠쯤 기억할지 모르지. 시간이 지나봐. 네가 내 이름 따위 기억할 것 같니. 쓸모 있을 때나 생각나겠지. 게다가 난 너한테 어떤 영향도 주기 싫다.
그치만 말이죠. 이미 그 말만큼 머릿속에 아저씨가 기억돼 버렸어요. 아저씨랑 이야길 하면 할수록 전 아저씨를 기억할 테고 그땐 정말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을 걸요. 이름이 없어도 아저씬 남아버릴 테니까요. 흔적 같은 거랄까요. 어쩌자고 아저씬 말을 해버린 거예요?
네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이상한 질문만 해댔잖아.
어쩔 수가 없어요.
뭐가 어쩔 수 없단 거냐?
전 이런 말밖에 할 수가 없거든요. 정말 궁금한 걸 물을 때 대체 저는 왜 이런 게 궁금한지를 묻고 싶어요.
그런 건 남한테 묻는 게 아니야.
그렇긴 하죠. 하지만 누군가 진짜 궁금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말예요. 그럴 때 전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 살다 왔니.
여기요.
여기가 네 집이냐?
여기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요.
남들은 구체적으로 대답해. 봉천동에 산다든지 종암동에 산다든지, 어느 학교를 나왔다든지 뭘 배웠다든지 누구랑 살고 있다든지, 형제는 어떻고 저렇고 그런 얘길 한다.
하지만 아저씨가 저한테 먼저 이름이 있냐고 물었어요.
내가 언제 이름이 있냐고 물었냐, 이름이 뭐냐고 물었지.
이름이 뭐냐고 묻는 건 그 전에 이름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잘 모르겠거든요. 물론 제 이름은 있지만, 아저씨한테는 좀더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한테 이름이 있냐고 물은 거냐?
네. 근데 아저씨가 저에게 이름이 없다고 말했잖아요. 하지만 아저씨 이름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있을 수 없으니까, 이름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한 거죠.
네가 이름이 없다고 말하는 거랑 내가 이름이 없다고 말하는 건 다른 거야. 나는 이름이라는 건 물론 있지만 내 이름이 없다는 걸 말하는 거고, 넌 이름은 없을 수도 있지만 내 이름은 있다고 말하는 거고.
그렇잖아요.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모르면서 우린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각자 이름을 부르잖아요.
이름도 없는데 내 이름은 어떻게 있는 거냐?
정확한 이름은 아니겠죠.
너랑 얘기하면 사람들이 머리 아프다고 안 하니?
입 다물라고 해요.
무슨 애가 그렇게 생각이 많냐? 그렇게 살면 고달프지 않아?
가끔 아저씨 같은 사람을 만나니까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냐. 그러다 나처럼 된다.
아저씨가 어때서요?
놀리냐?
대화만 잘 통하는데요.
대화가 통하는 게 바람직한 게 아니야.
왜요?
돈 있니?
그달 벌어 살아요.
집은 어때? 네 이름으로 된 집 있어?
월센데요.
암 것도 없는 녀석이 무슨 배짱으로 잡생각을 하는 거냐. 그냥 보통사람들처럼 말하고 살아. 돈도 없는 주제에 엉뚱한 생각하다간 나처럼 노숙자 되기 십상이야.
아직은 괜찮을 거 같은데요.
문제가 있긴 있다고 생각하냐?
알고는 있어요. 생각 많은 게 사는 데 도움 안 된다는 것쯤은요. 아저씬 제가 바본지 아세요?
바본 줄 안다.
아저씨도 못지않아요.
그러니까 정신 차려.
전 결심을 했어요.
무슨 결심?
월세를 낼 수 있는 동안은 이렇게 살겠다고요.
순식간이야.
아저씨도 평생 노숙자로 살진 않겠죠.
어쩌다 너랑 말을 텄나 모르겠다.
지하철이 끊기는 바람에 제가 여기로 온 게 이유죠.
좀 전에 골로 갈 뻔했어. 여기도 엄연히 구역이란 게 있어서 아무 데나 자리 잡으면 큰일 난다.
첨이니 그런 룰을 알았겠어요? 차차 적응이 되겠죠.
차차라니?
며칠 신세 좀 질게요.
집 있다면서?
월세 못 낸 지 실은 몇 달 됐어요.
염병할!
아저씨는 이 상황이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상을 쓰자 오른쪽 눈썹 위 흉터가 일그러졌지만 무섭진 않았다. 흉터라니. 흉터를 본 이상 아저씨를 기억하기에 내 기억 입장에선 유리해진 셈이다. 아저씨는 소주병을 들어 벌컥 들이마셨다. 새우깡을 건넸지만 나를 흘기더니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 나는 진짜 골로 갈 뻔했다. 지하철이 끊겼고, 잘 곳을 찾다가 대합실 구석에 앉았는데 누군가 다짜고짜 정강이를 걷어찼던 것이다. 내가 술에 잔뜩 취해 나를 걷어 찬 노숙자에게 항의하는데 아저씨가 다가와 팔목을 잡아끌더니 옆자리에 앉혔다. 아저씨는 내가 조금만 더 사내의 기분을 건드렸더라면 그의 점퍼 속에서 잭나이프가 나와 내 몸에 생채기를 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나로선 고마운 상황이었다. 월세를 못 내는 달이 이어지면서 어디로 갈지 감을 잡고 있었다. 남대문이었다. 가방을 파는 상점 옆으로 약국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뻥만 잘 치면 소량의 수면제를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었다. 소량의 수면제를 모으면 다량의 수면제가 된다. 수중에 갖고 있는 돈으로는 50알쯤의 수면제를 살 수 있었다. 그 정도 먹으면 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모로 누워 있던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말 모르는 거냐?
뭘요?
이름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민지 몰라?
말 안 해줬잖아요.
쯩이 없단 거야.
쯩요?
민쯩이 없단 말야.
그게 어때서요?
이 나라 거주민이 아니란 거야. 통장을 만들 수도 없고 취직도 못해. 아빠노릇은커녕 사람 구실도 못한다고.
새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게 쉬우면 이 나라에 쯩 없는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겠어? 집 없고 빚 있으면 쯩이 있어도 없애야 되는 게 세상 룰이야. 그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첫차 다니면 집에 가. 절대로 집을 잃어버리면 안 돼. 돈을 모아서 월세를 내라. 책임질 사람 만들지 말고 눈 부릅뜨고 살아. 알아들었니?
아저씨는 내뱉듯 말하곤 다시 누웠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나직이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이름 드릴까요?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2
아저씨에게 이름을 주고 싶었다. 사실 내 이름을 주고 싶었다. 내 이름을 아저씨에게 주면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맘대로 이름을 줘버렸다. 아저씨의 이름은 이름이다. 이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다. 이름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는 아저씨에게 이름을 주는 게 잔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름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저씨의 속마음 같진 않아보였다. 어른들은 대개 이름을 원하니까. 생명의 은인에게 이름 정도는 줘야 하니까. 쯩이 없어도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저씨에겐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름이 나를 구해준 다음 날부터 노숙이 시작되었다. 어둑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대합실로 들어갔다가 아침나절 사람들로 북적이면 밖으로 슬금슬금 나갔다. 하루를 요약하면 대략 이런 식이다. 잘못 걸리면 걷어차이기 때문에 항상 눈치를 보며 다녀야 한다. 노숙에서 나이 어린 건 불리하다. 누구든 만만하게 본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른들보다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대합실 의자 근처를 기웃거리다 소매치기로 오해받아 경찰에게 붙들릴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가을 초입이라 바깥 공기가 견딜 만하지만, 날이 추워지면 노숙이 어려울 것 같다. 얼어죽기 딱 십상이다. 새벽에 신문지를 덮고 자다 추위가 몰려들어 덜덜 떠는 건 정말이지 죽기보다 괴롭다.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들 술을 마신다. 며칠 지내다 보니 노숙인들이 겨울에 죽는 이유가 추위 때문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종일 취해 지내니 간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술을 밥처럼 퍼마신다. 이름은 베드로집 점심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자리가 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싫어서라지만, 노숙인 주제에 배가 부른 게 아니라 먹고 살 의지가 없어 보인다. 술을 밥처럼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안다. 얼굴이 까매지고 임산부처럼 배가 부풀어 오르다가 다리와 얼굴까지 퉁퉁 부은 채 죽는다. 아버지도 그렇게 죽었다. 복수가 가득 찬 배를 움켜쥐고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찾다가 병원에 실려갔다. 아직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술을 마실 때 손을 떠는 이름을 보니 걱정이 된다. 아버지의 경우 손을 떤 지 6개월 후 죽었다.
아버지보다 이름이 좋다. 이름은 나만 보면 집에 가라 윽박지르지만 눈빛이 명료하고 잘 때만큼은 내쫓지 않고 곁에 둔다. 눈빛이 명료한 건 아직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생각을 한다는 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생각을 많이 하면 이름처럼 노숙자가 될 거 같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버지처럼 눈빛이 뿌옇게 되어 죽을 거 같다. 생각을 반만 하고 눈빛이 반만 뿌옇게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월세를 갚고 집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노숙은 모든 움직임을 느리게 한다. 경계를 늦추면 안 되지만 일단 공간 확보가 되면 남은 시간은 온전히 빈둥거리며 생각으로 때울 수 있다. 베드로집 신부님이 나를 설득해서 보호소로 데려가려 하지만 가고 싶지 않다. 집이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 덕분에 오늘은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배가 고파 죽겠다. 벌써 한 시간째 시계탑 주변에 만민교회 청년부에서 나와 찬양전도집회를 한다며 기타치고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다. 노숙인들은 반기는 분위기다. 먹을 걸 주기 때문이다. 돈은 절대로 안 준다. 술을 사마시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 번째 줄 여자애 예쁘다. 예쁘지만 종교를 가진 애랑은 사귀고 싶지 않다.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하면 난감하다. 심기를 건드리면 앉혀놓고 두 손 움켜쥐고 기도하게 한다. 기도문 외우는 사람 앞에 앉아있으면 비루해진다. 죄인이 된 기분이다. 엄마는 뭔 일만 있으면 나를 앉혀놓고 기도를 했다. 엄마에게는 나도 아버지도 모두 죄인이다. 우리는 죄인이라 죄 지은 죄로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붙이고 얌전히 앉아있어야 했다. 무릎이 저려도 엄마의 기도는 멈출 생각을 않는다. 기도빨이 먹히지 않으니까 엄마는 기도원으로 아예 들어가 버렸다. 죄인 아들을 책임지기 싫어서 엄마는 나를 사탄으로 규정해 버렸다. 엄마는 내가 죄를 사하기 위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무슨 죄를 지었을까.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진작 기도원에 갈 수 있었을 테니. 엄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언짢아진다. 여자애는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취한 노숙인 둘이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리듬이 엇박자다. 노숙인 하나는 오줌을 지려 바지에 검은 줄이 가 있고, 하나는 이가 빠져 합죽이 같다. 노숙인들은 흥이 많아서 어디든 끼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노숙인으로서 그들은 뭘 해도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다. 지나치게 감정에 취해 있다. 많이 웃거나 시비 거는 게 전부다. 좋게 봐주려 해도 볼품없다. 건너편에서 낮술에 벌겋게 취한 이름이 걸어오고 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말을 건다.
안 가냐?
어딜요?
집에 가라고.
안 간다니까요.
여기 있다간 큰일 나.
왜요?
저쪽에서 너 쳐다보는 사람들 안 보이냐?
어디요?
담벼락에 둘 보이지? 쟤들이 널 노리고 있어.
왜요?
다리병신 만들어서 적선 시키려고.
그렇군요.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냐?
죽는 게 나은지 다리병신이 나은지 생각 중예요.
어쩌다 젊은 애가 그렇게 됐냐?
어쩌다 아저씬 노숙자가 됐어요?
말을 말자.
밥 먹었어요?
대답이 없다.
배고파 죽겠어요.
이름이 보름달을 던져준다. 꿀맛이다. 두 입에 해치워버린다.
집에 안 가는 이유가 뭐냐?
월세를 안 냈다니까요.
진짜 이유.
이름처럼 나도 대답하지 않는다.
병신이 돼도 상관없단 거야?
이름과 나는 말이 없어진다. 이름이 주머니에서 소주를 꺼내 마신다. 오늘은 나도 소주를 마시고 싶지만 이름에게 술을 달라고 할 순 없다. 밥을 뺏어먹을 순 없다. 밤이 찾아든다. 노래를 하던 청년들이 주변 정리를 하고 있다. 막차가 끊어지기 전까지, 막차가 끊어진 후에도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출퇴근하는 이들과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이 뒤섞이는 혼잡한 곳에서 이름과 나는 인파를 바라보고 있다. 세상이 우리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기 앉아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하나같이 빨리 걷고 혹은 너무 느리게 걷는다. 너무 격앙되어 있거나 어깨가 늘어져 눈에 초점이 없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름이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곁에 머물고 있다. 일주일째 이름은 나와 말도 섞지 않았다. 오늘은 웬일인지 무시하며 다른 데로 가버리지도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이름에게 말을 건다.
기차를 탈까 봐요.
갈 데 있냐?
아뇨.
어디든 가. 젊은 놈이 몸 굴리면 밥 굶겠냐. 정 붙이면 고향 되는 법이다. 발길 닿는 데로 가서 일을 해라. 여기보단 낫겠지.
여긴 생각하기 좋은 곳이에요.
생각의 끝이야. 사람은 팔다리 잘리면 생각하게 돼 있어.
저는 원래 팔다리가 없었나 봐요.
부모는 의지로 만나는 게 아니다.
아저씨도 기차를 타지 그러세요?
나이 들면 반기는 데가 없어.
의지가 없는 건 아니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저랑 기차 타실래요?
가자.
정말요?
3
이름과 나는 이제 떠난다. 이름은 대합실로 들어가더니 쇼핑백을 하나 들고 나왔다. 우리가 먼저 향한 곳은 역 근처 사우나였다. 기차를 타기 전에 노숙자로 보이지 않도록 몸을 씻자는 것일 게다. 입구에서부터 태클이 걸려왔지만 평일이라 다행이었다. 종업원이 인상을 쓰며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들여보내줬다. 이름은 이곳에 여러 번 왔었나 보다. 종업원이 잔소리를 하면서도 이름에게 이것저것 말을 보태는 걸 보니 둘은 안면이 있어 보였다. 옷장에 더러운 옷을 집어넣고 이름보다 먼저 탕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들어오니 마음이 조급해져 대충 샤워를 한 뒤 탕 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노곤한 기분이 몸에 감기며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들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몸이 느끼는 향유를 충분히 즐겼다. 나보다 늦게 들어와 꼼꼼히 비누칠을 한 뒤 샤워기를 틀어 몸을 씻은 이름도 탕 안에 들어왔다. 어 좋다. 이름이 나직이 내뱉으며 몸을 담갔다. 탕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말소리가 길게 울렸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온 기분이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어른에게 아버지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고마운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앞으로 마음이 추우면 목욕탕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도 따뜻한 걸 좋아하겠지. 우리는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탕 밖으로 나와 휴지통에서 때수건을 주워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다. 이름의 등은 몹시 야위었고 생각보다 배가 더 많이 나와 있었다. 앙상한 목덜미와 팔뚝, 등을 밀면서 이름과 기차를 타는 상상을 했다. 이름은 내 등을 밀면서 살점이 너무 없어 때 밀기가 힘들다며 투덜거렸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이름이 쇼핑백에서 깨끗한 셔츠를 꺼내줬다. 이름 역시 낡았지만 깨끗한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더러운 옷은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단정히 머리를 빗은 이름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처음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한때 이름은 잘나갔을 것 같았다. 삭아서 그렇지 이름은 잘생긴 편이었다. 삭아서 그렇지 나도 빠지는 외모는 아니다.
목욕탕을 나온 우리는 말쑥해 누가 봐도 노숙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름은 어디서 돈이 났는지 설렁탕까지 한 그릇 사줬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든든히 밥을 비우고 가게를 나왔다. 이름은 기차역이 아니라 역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8차선 도로 양편으로 각종 철제 기계와 공구를 파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이름을 따라 걸으며 가게에 적힌 이름을 중얼거렸다. 금속 철제 철강 절단 절곡 타공 알곤 용접 레이저 스텐레스 파이프. 온갖 종류의 금속이 이곳에서 용접되거나 절단되거나 절곡된다. 생소한 단어처럼 이곳은 거칠고 둔탁한 쇳조각이 몸을 떠다니는 이물감이 들었다. 낮에는 공구상가지만 밤엔 달랐다. 밤이 되면 종일 기름 묻은 손으로 쇳조각을 녹이고 자르고 용접하던 인부들은 사라지고 건물 사이에 의자를 놓고 나이든 여자들이 앉아 있거나 젊은 여자가 쭈그려 않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버스를 타지 않은 채 이곳에 직접 와보긴 처음이라 나는 이름 뒤를 어색하게 따라갔다. 어디 가냐고 물어도 이름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이름은 몇 명의 여자를 지나 어느 건물 앞에 앉아있는 늙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이름과 나를 살피더니 골목으로 이끌었다. 골목 안은 핑크 조명의 상점들로 가득했고, 상점 안에는 여자들이 두엇씩 서 있었다. 하나같이 위아래 짧은 흰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여자들이 불러댔다. 이곳 여자들도 우리가 노숙자라는 걸 안다면 반갑게 부르는 일 따위는 없을 텐데. 노숙인을 반기는 노숙인 아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름이 늙은 여자와 똑같이 생긴 상점 중 한 곳에 들어갔고 나도 어색해하며 따라 들어갔다. 역시 위아래 짧은 흰 옷을 입은 두 여자가 핑크빛 조명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 여자가 일어나 반가운 표정으로 이름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다른 여자는 이름과 나를 건성으로 쳐다봤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표정이었다. 이름이 늙은 여자에게 돈을 건네자 늙은 여자가 돈을 받은 뒤 가게를 나갔다. 이름이 건성으로 우리를 쳐다본 여자를 따라 들어가라고 말한 뒤 다른 여자와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팔짱을 끼며 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은 친해 보였다. 여자와 둘만 있는 가게 안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담배를 피던 여자가 들어가자고 재촉했고 마지못해 여자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맨정신에 와보긴 처음이라 어색하다고 나는 여자에게 거짓말을 했다. 여자가 다 아니까 웃기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기가 더 죽어 불안해졌다. 여자가 맥주를 따서 건넸고 나는 받아서 조금 마셨다. 방안에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혀 현기증이 났다. 여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자 여자는 술이나 마시라고 했다. 옷을 벗은 여자가 침대에 누웠지만 나는 여자에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자의 벗은 모습에 주눅이 들어버린 탓이었다. 왜? 베개에 몸을 기대 가슴이 평평해진 여자가 나를 빼꼼히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니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에게 사과를 하고 가게로 먼저 나와 이름을 기다렸다. 잠시 후 옷을 입은 여자가 나오더니 가게 밖에 나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등이 고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 성욕보다 앞선 게 스스로도 민망했다. 가게로 들어온 여자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여자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멀뚱히 서서 이름을 기다렸다. 고개를 쑤셔 박고 핸드폰을 두드리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재섭써. 한 시간쯤 뒤 이름이 여자와 같이 나왔다. 둘은 다정하게 오빠 동생 하며 손을 잡았다. 내 앞에서 키스까지 나누었다. 여자가 가게 밖까지 나와 이름과 나를 마중했다. 이름도 아쉬운지 여자에게 다시 오겠다며 어깨에 힘을 줬다. 오던 길을 돌아 나와 건물 사이에 앉아있던 늙은 여자가 있는 곳으로 왔을 때, 여자는 다른 남자와 흥정을 하고 있었다. 이름과 나는 허름한 건물들을 지나 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걸어가면서 나는 이름을 불렀다.
이름.
이름.
내가 왜 이름이냐?
거긴 왜 간 거예요?
안 좋았어?
돈 아껴야죠.
뭐가 궁금한 거냐?
왜 간 거예요?
점.
점이요?
버스를 탔는데 내릴 데가 없어. 그럼 어떡할 거냐?
아무 데서나 내리든지 종점까지 가겠죠.
그거야. 점. 나한테도 점 하나는 있는 거다. 점 하나 찍어놓고 버스를 탄다 이 말씀이다.
여자랑 무슨 사이에요?
그냥 점이라니까.
기차는요?
이름은 대답이 없다.
가기로 했잖아요. 어디든 점 찍고 살면 되잖아요.
너나 가.
이름은 그냥 술만 마셔. 돈은 내가 벌게요.
가족 안 만든다.
너무하세요.
뭐가 너무해? 돈 아깝게 뭐 하는 거냐? 그 돈이면 소주가 몇 병인 줄 알아? 넌 대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냐? 한심한 놈. 기차를 타든 버스를 타든 꺼져버려.
나는 볼멘소리로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름.
이름.
아 왜?
여자도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수십 개는 될 거다. 이름이 너무 많아 탈이지.
이름이 그렇게 많으면 어떻게 기억해요?
기억할 필요가 없지. 기억 따위가 밥 먹여줘? 걔네들은 얼굴이 없어.
얼굴이 없어요?
얼굴이 없어.
몸은요?
얼굴이 없는데 몸이 어딨어.
어째서요?
얼굴을 쳐다보면 얼굴이 없어진다. 몸을 만지면 몸도 없어지는 거야.
얼굴도 없고 몸도 없는데 이름은 왜 그렇게 많아요?
이름이 없든 많든 무슨 상관이겠어.
뭐가 중요한데요?
점이라니까.
모르겠어요.
날 밝으면 기차를 타거라.
아저씬요?
이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은 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깨끗한 옷을 벗고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쇼핑백을 다시 보관함에 넣었다. 그러곤 다시 노숙자로 돌아가 우리가 잘 때 차지하는 바닥에 얇은 이불을 덮고 드러누웠다. 아무리 내가 기차를 타자고 졸라도 이름은 대꾸는커녕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이름 옆에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4
꿈을 꾸었다. 집이 나왔다. 꿈속에서 나는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내 방이었다. 내 방 외에 나머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방이라는 걸 물건들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래전 경품으로 받은 미니오디오와 하나 둘 사서 모은 음반들, 앉은뱅이 나무 책상 위에 꽂힌 몇 권의 시집, 사전, 교과서, 전화번호부, 한때 기차를 치던 아버지의 기타 교본. 벽에 걸린 액자에는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 옆에 내가 그린 또 한 점의 그림. 피리 부는 수호신이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행어에 걸린 셔츠와 바지 몇 벌. 학교 다닐 때 멨던 가방과 옷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메달들. 익숙한 옷가지와 소지품들은 의심할 필요 없이 내 것이었다. 덮고 있던 이불이 10년 전 것이었으므로 이불만 봐도 내 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방에 있는 물건들은 너무도 익숙하고 항상 제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방의 일부이면서 그 방에 그런 물건들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그 물건들은 그러니까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내 것을 떠나 스스로 각자 자리를 정해 버려서 내 마음대로 버리거나 바꿀 수 없었다. 꿈속의 방에서는 그런 생각이 훨씬 구체적으로 들었다. 물건들은 저마다 살아있는 것 같았고,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건들은 완강하게 방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물건이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물건들을 바라보는 나는 그저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에 구멍이 나서 나는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곳은 다시 바닥이 되어 방이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바닥에 구멍이 나서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곳은 또 바닥이 되어 내 방이 되었다. 그러다 바닥에 구멍이 나서 나는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는 내 방이 되고, 구멍이 나서 나는 다시 떨어지고, 떨어진 그 자리는 내 방이 되고, 나는 떨어지고 그곳은 내 방이 되고, 떨어지고 그곳은 이내 내 방이 되고, 떨어지고 어김없이 내 방이 되고. 그런 식으로 나는 끝없이 내 방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언제까지 떨어지는 걸까. 꿈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만 떨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떨어지고 있다는 순간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떨어질 때마다 내 몸은 조금씩 전율했다. 떨어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떨림이 왔고 떨림을 생각하는 순간 또 떨어졌다. 꿈속에서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려 하면 이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 없이 끝없이 떨어졌다.
5
눈을 떠보니 날은 훤히 밝아 있었다. 이름은 옆에 없었다. 대신 나는 진짜 방에 누워 있었다. 상복을 입은 채였다. 아버지를 화장하고 돌아와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기도원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부음을 전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목사님이 어머니는 다시는 세상 밖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너도 이제 컸으니 이해하리라 믿는다고 그는 말했다.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방안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옷가지들과 책들을 들고 나가 마당에서 태웠다. 생전 아버지가 좋아하던 내가 그린 그림들도 액자에서 빼서 함께 태웠다. 바람이 불어 얼마 되지 않은 물건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타올랐다. 재가 되어가는 아버지의 유품들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렸다. 이름은 이름을 알까? 나는 꿈속의 여자애를 생각하며 그림을 한 점 그렸다. 여자애에게 얼굴을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