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돌이 육아일기 사잇길로 빠진 날

by rosa



고장으로 가는 중입니다



뜬금없이 청소가 마려운 날이 있다. 주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받아놓은 날이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오늘 나는 청소가 무지하게 마려웠을 뿐이다.

사실은 네다섯 달 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집 나갔던 아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짐을 끌고 들어와 방안에 미로를 만들어 놓았다. 나갈 때도 통보, 들어올 때도 통보, 의논 없이 일방 적으로 움직이는 아들에게 뾰족하게 한마디 했다.

"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들어오는 것도 처음이니까 딱 한 번은 봐줄게 두 번은 없어. 돌아온 걸 환영해."


다시 나갈 것처럼 들썩이던 아들이 육 개월 남짓 그대로인 것을 보니 당분간 나갈 일은 없겠다. 그러면 '정리 좀 하자.' 그렇게 시작된 아들 방 정리가 대청소가 될 줄 우리 둘 다 몰랐다.



아침 먹고 시작한 청소는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서 겨우 끝났다. 갓난이 데리고 하는 청소라서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정돈하며 내어 놓은 물건들로 공간에 여백이 생겼다.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진작 할걸 뭔 눈치를 그렇게 보고 살았는지.

어느 구석에 묵어있었는지 낯선 혹은 반가운 물건들이 많이 나왔다. 이사한 지 칠 년. 그 시간 동안 사용한 적 없는 물건은 분명 쓸모없는 것 일 텐데 무슨 욕심으로 바리바리 쌓고 사는 건지. 집이 작을 때는 작은 대로 커지면 커진 대로 물건들을 모시고 산다. 편히 쉬며 충전하는 비싼 공간을 쓰지도 않을 물건들에게 점령당하고도 인식하지 못하는 나도 이해불가.


아들이 선풍기 한대를 내 왔다. 이사하며 에어컨을 사용하느라 선풍기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꼬질꼬질 묻어있는 저 세월은 무엇일까? 선풍기 회전 손잡이도 달아나 구멍이 뚫려있다.


"에구 낡았다. 버리자 아들." 말을 다 뱉기 직전 안전망에 묶인 금색 철사끈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끈 조각 하나가 뭉클 내 마음을 만졌다.


"안전망이 헐겁네." 라며 빵봉지 묶던 철사끈으로 망 고정하는 젊은 아버지가 소환됐다.


여름에 태어난 첫 손녀(복돌이 엄마)를 맞이하기 위해 아빠는 생애 처음 에어컨을 장만했다. 재미라고는 1도 없는 근엄한 내 아버지가 방긋 웃는 손녀 배냇짓에 함박웃음을 웃었다. 담뱃갑을 기준자 삼아 아이 크기를 가늠하던 우리 아빠가 외할아버지 된 1989년 여름, 에어컨에 밀려난 선풍기는 오랫동안 구석에서 침묵했었다.

부모님이 둘만의 전원생활을 즐기겠다 선언하고 가출? 출가? 하며 일부 살림이 나에게 왔다. 부모님 손때가 묻은 애장품이라서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필요한 물건들을 공짜로 얻었다는 기쁨이 컸다. 그 안에 선풍기도 있었다. 반달곰 만 한 아들과 선풍기 한대로 복작이던 여름에 우리를 구해줄 지원군이 반가웠다. 철사를 머리핀처럼 달고 한 방향만으로 바람 보내도 선풍기는 귀한 대접받을 만큼 시원했다.

그 선풍기를 잊었다가 오늘 오랜만에 보면서 아버지를 만난 듯 달뜬 나. 무뚝뚝하지만 솜씨 좋고 가끔 촌철살인 유머를 날리던 아버지가 복돌이를 만났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상상만으로 그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묵은 때를 정성 들여 닦고 전원버튼을 눌렀다.

어라, 선풍기에 슬로모션이 걸렸다. 부채질만도 못한 날갯짓이 우스웠다. '세월이 얼마인데 돌아가는 게 이상하지.' 생각하며 포기하려는데 쌩 하고 날갯짓을 시작했다. 모터가 노후해서 저속에서는 움직이지 않던 녀석이 고속에서 힘을 냈다. 맥가이버 같던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내주는 바람 같았다. 비록 덜덜 소리를 내지만 아직은 선풍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시원함이 반갑다.


이번 여름을 넘기지 못한다 해도 나는 아직 선풍기를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낡은 바람, 꼬질 거리는 흔적에서 아버지를 느낀다. 아주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유품으로서 선풍기는 당당하게 공간을 차지할 거라는 생각.


고장으로 가는 중이지만 아직 본분을 잊지 않은 선풍기가 소곤소곤 옛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아서 나의 여름이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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