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sa Jul 18. 2024

배냇머리를 자르던 날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에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사십 년도 더 지난 노래가 새삼스럽게 나를 둘러싼 가족들 입에서 BGM으로 흘러나왔다.


윙 소리 내며 기계가 움직였다.

기계 지나간 자리에 파르라니 하얀 뒤통수, 정수리에 숫구멍이 팔딱팔딱 뛰놀았다.

잘린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받아냈다.


옛날 국민학교 체육대회에 온 가족이 응원가듯 할머니, 엄마, 아빠에 삼촌까지 가족이 총 출동하여 복돌이를 응원했다. 낯선 환경에 아이가 놀랄까봐 긴장하던 어른들 무색하게 아이는 방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떨궜다.

복돌이 배냇머리를 자르던 날 미용실 풍경이다.


배냇머리를 자르는 풍습은 백일잔치의 하이라이트이다. (https://brunch.co.kr/@yijaien/498)

아이가 무사히 백일을 맞는 일이 어려웠던 옛날에 백일은 특별한 잔치였다. 소박하게 준비하지만 성대하게 축하하는 아이의 첫 번째 축일에 조상들은 잔치의례 중 하나로 배냇머리를 잘라 보관했다. 배냇머리는 아직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태, 아직 절단면이 없는 자연상태 머리카락이다. 이를 잘라 소중히 보관했다가 성인식에 아이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이는 이것을 통해 육신을 세상에 내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효도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현대에 배냇머리는 머리숱이 많이 나게 한다는 의미가 대세다. 비교해보니 우리 조상님들의 감성이 한층 낭만적이고 인문학적 매력이 넘친다.


말이 이십 년이지 그 세월을 보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아이 둘의 배냇저고리와 떨어진 배꼽을 퍽 오랫동안 보관했었다.  수없이 많았던 이사 탓에 어느 결에 사라졌다. 언제까지 어떤 이유로 보관한다는 명확한 결정이 있었다면 더 깊이 잘 간직했을지도 모르는데 남아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딸 내외는 배꼽이나 머리카락으로 만드는 상품들이 많지만 복돌이로부터 나온 것을 부모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생각해 보겠다며 복돌이 성년의 날까지 보관하는 일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복돌이를 위한 작은 상자를 준비했다.

엄마로부터 독립한 기념품으로 배꼽과 배냇머리를 보관할 수 있게 만든 유리병과 나무상자가 제품으로 나와있는 것을 보니 우리 생각이 그리 신박한 아이디어는 아닌듯했다.


머리카락을 자른 날 거울을 들여다본 복돌이가 놀랐는지 밤새 칭얼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단다. 아가 그렇게 조금씩 커가는 거란다.' 복돌이를 다독이며 앞으로 아이가 겪게 될 많은 일들을 미리 보는 듯 내 눈앞에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아플 때도 있을 것이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고 어쩌면 영영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도,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들이 생길지 혹 생기지 않을지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할미가 숨 쉬는 동안은 항상 너를 사랑할 것이고 따뜻하게 지켜보며 응원할 것이라는 약속.


"복돌아, 내 강아지. 할미가 사랑해."


╰(*°▽°*)╯




이전 14화 "이유식으로 가는  세 가지 조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